소설리스트

제1권 제18장 (18/112)

■ 구천십지제일신마제1권제18장 귀검사랑(鬼劍邪狼) 잔혹한 살수(殺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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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마저 구름에 가려진 이 밤, 먹물같은 어둠이 삼라만상을 파도처럼 뒤덮고 있었다.

  아름드리 거목(巨木)들이 빽빽하게 들어  찬 수림 속을 한 흑의인이 걷고 있었다.

  전체가 어둠보다  짙은 먹빛 일색의  흑의인, 치렁치렁한 흑발(黑

  髮)을 허리까지 늘어뜨렸고 숯덩이와 같은 묵검(墨劍)이 옆구리에

  비스듬히 꽂혀 있는...... 그는 바로 혁련소천이 대광사에서 보았

  던 흑의인이었다.

  흑의인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일정한 보폭의 걸음걸이로 걷고 있었다.

  허나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사위로 퍼져 나가는 저 차갑고 무

  정(無情)한 기운은 가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흑의인은 깊고 짙은 어둠 속으로 자꾸만 걸어가고 있었다.

  흑의인이 어느 한 거목을 지나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람 한 점 분 적이 없거늘 돌연 한 무더기의 낙엽들이 전방에 어

  지럽게 휘날리며 떨어져 내렸다.

  흑의인은 조용히 걸음을 멈추었다.

  전면, 낙엽이 사람으로 변했는가?

  어느새 세 줄기의 흐릿한 그림자(影)가 소리없이 나타나 있었다.

  죽립을 깊숙이 눌러 쓴 삼 인(三人)의 혈포인(血布人), 그들의 전

  신에선 피를 말릴 것 같은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겨 나왔다.

  흑의인은 무심한 시선으로 그들을 한  차례 쓸어 본 뒤 다시 걸음

  을 떼 놓았다.

  이때 한 죽립객의 입에서 살벌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서라, 귀검사랑(鬼劍邪狼)!"

  흑의인은 걸음을 멈추고 방금 말한 죽립객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나를 알고 있군."

  더없이 짧고 무심한 한 마디의 음성이 흑의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그것은 듣는 이에게 섬칫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허나 예의 죽립객은 태연하고도 메마른 괴소를 발했다.

  "흐흐흣...... 천하의 귀검사랑을 모른대서야 말이 안 되지."

  귀검사랑이라 불린 흑의인은 무표정하게 입술을 떼었다.

  "용건은......?"

  "간단히 말해서...... 혈궁천(血穹天)의 일에서 손을 떼라."

  혈궁천!

  바로 구천십지만마전 휘하의 열아홉 단체 중 하나를 칭함이었다.

  귀검사랑은 조용히 말했다.

  "쓸데없는 말을 하러 왔군."

  "황금 일만 관을 대가로 지불하겠다."

  황금 일만 관이라면  웬만한 성(城) 두 개를  사고도 남을 막대한 금액이 아닌가!

  문득 귀검사랑의 눈가에 짧은 섬광이 스쳐갔다.

  "누구냐? 너희들은......."

  "승낙 여부만 대답해라."

  "만약...... 거절한다면?"

  순간 세 죽립객의 눈에서  소름끼치도록 시퍼런 안광이 뻗쳐 나왔다.

  뒤이어 예의 앞에 말한 죽립객이 살기 진득한 음성을 내뱉었다.

  "죽인다. 너와 네가 거느린 백 마리의 늑대까지 모조리......!"

  돌연 귀검사랑의 입가에 한 가닥 비릿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후후후...... 나의 사랑대(邪狼隊)는 피를 두려워하지 않지."

  "결정한 것인가?"

  "바보구나. 너는 똑같은 대답을 두 번 들으려 하다니."

  "죽여라!"

  순간 냉혹한 일갈과 함께 세 죽립객의 신형이 허공으로 번쩍 솟구쳤다.

  아니, 솟구쳤다 싶은 순간 이미 그들의 소매 속에서는 끝이 세 갈

  래로 갈라진 기형도(奇形刀)가  빠져 나왔고, 빠져 나왔다고 느낀

  순간 그것들은 이미 귀검사랑의  몸을 품자(品字) 형으로 쑤셔 가고 있었다.

  지독한 빠름이었다.

  순간 위급함에도  아랑곳없이 귀검사랑은 흰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그러나 귀검사랑의 그 웃음은 너무나 서럽도록 창백하여 가슴이 찡할 정도였다.

  츄아아아앗......!

  찰나, 세 줄기  묵광이 귀검사랑의 옆구리를 떠나 유성(流星)처럼

  공간을 내찢었다.

  까까깡...... 깡......!

  동시에 치떨리는 금속성과 함께  시퍼런 불꽃이 허공을 가득 뒤덮었다.

  "억!"

  "이런......!"

  세 죽립객들은 졸지에 자신들의 기형도가 두동강으로 끊어진 것을 보았다.

  헌데 바로 그 순간 세 죽립객은 또 보았다.

  묵섬(墨閃)!

  시꺼먼  번갯불이  자신들의   몸을  환상처럼  뒤덮어  오는  것을......!

  미처 어찌 해볼 생각도 하기 전에 그들은 허공 중에 떠 있는 자신

  들의 몸이 무척 가벼워졌다고 느꼈다.

  어지럽게 떠오르는 여섯 개의 팔과 여섯 개의 다리!

  어둠 속을 수놓은 선렬한 피보라!

  "악!"

  "으― 아!"

  폐부를 도려내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찰나, 비명을 내지르던  죽립객들의 머리통조차 몸뚱이를 떠나 일

  제히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때를 같이 해서 귀검사랑이 옆구리의 장검에서 손을 떼는 것이 보였다.

  언제 그가 검을 뽑았던가?

  쾌(快)!

  대체 이런 빠름을 무슨 말로 형용해야 되는 것인가?

  팔과 다리, 몸뚱이와 머리통이 그제야 순서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숨막힐 듯한 정적이 그 자리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귀검사랑은 극히 무정한 눈길로 아래를 쳐다보았다.

  눈을 허옇게 까뒤집은  머리통 하나가 그의 발  밑을 구르고 있었다.

  순간 귀검사랑의 입에서 무감동한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생사천(生死天)의 밥버러지들이었군......."

  그러면서 그는 머리통을 지그시 발로 밟았다.

  산산이 으깨어지는 소리는 참으로 끔찍했다.

  허나 정작 그 일을 하고 있는 귀검사랑의 얼굴은 무서우리만큼 무

  표정했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발을 떼며 고개를 바로했다.

  다음 순간 귀검사랑의  몸이 갑자기 우측의 한  거목을 향해 전광

  (電光)처럼 날아갔다.

  동시에 그의 묵검이  형용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검집을 벗어났다.

  번개빛과 함께 묵광은 거목을 풀잎처럼 가르며 곧장 뻗쳐 나갔다.

  허나 묵광은 거목의 뒤쪽에서 한  자를 더 뻗어 나가지 못하고 우뚝 정지했다.

  한 절색의 홍의 소녀가 나무 뒤에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소녀는 바로  연지마를 타고 대광사로 미친  듯이 질주해 갔던 소녀였다.

  귀검사랑의 묵검은 그녀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두려움인가? 아니면 또 다른 격정 때문인가......?

  그녀의 전신은 눈에 뜨일 만큼 거센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귀검사랑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며 한 마디 내뱉었다.

  "이제 보니...... 너였군."

  홍의 소녀는 그를 똑바로 쏘아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잔인한...... 사람!"

  귀검사랑은 예의 무심냉막한 표정을 되찾으며 조용히 말했다.

  "나는...... 피를 사랑한다."

  "무서운 사람!"

  "나는 죽음을 사랑한다."

  홍의 소녀는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깨물었다.

  "당신...... 언젠가는 비참한 말로에 처할 날이 있을 거예요!"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아마 내게 그런 날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순간 홍의 소녀의 눈빛이 시퍼렇게 불타 올랐다.

  "당신...... 언니를 왜 죽였나요?"

  "그녀가 먼저 나를 공격했어."

  "언니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나는 사랑을 증오한다."

  "악마......!"

  새하얗게 질린 그녀의 뺨에 구슬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명심해라, 홍연(紅燕). 또다시 내 비위를 거스르면 너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말에 홍의 소녀 홍연의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겼다.

  그녀는 전신을 부르르 떨며 미친 듯이 악을 썼다.

  "죽여라! 죽여! 이 악마......."

  허나 그녀는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목덜미에 닿아 있던 묵검이 그녀의 왼쪽 뺨으로 옮겨지면서 긴 검

  흔(劍痕)을 그렸기 때문이다.

  홍연은 사색이 되어 황급히 왼쪽 뺨을 만졌다.

  순간 따뜻하고 진득한 핏물이 손바닥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귀검사랑은 묵검을 거두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날 밤...... 한 차례의 인연 때문에 이 정도로 그친다."

  귀검사랑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홍연의 얼굴은 일순 처절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애처러울 만큼 전신을  부들부들 떨더니 돌연 발악적인 흉소를 터뜨렸다.

  "오호호호홋...... 호호호홋......!"

  피를 토하는가?

  하늘을 울릴 듯 한(恨) 서린 흉소가 어둠 속으로 미친 듯이 퍼져 나갔다.

  그녀는 흉소를 멎고 귀검사랑의 등 뒤를 쏘아보며 절규하듯 말했다.

  "기억해라! 나 홍연...... 이 순간부터 너를 증오하리라!"

  새파란 독기를 뿜어내는 홍연의 그 눈빛!

  "죽이리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리라! 너를  죽일 수 있다

  면...... 네놈을 지옥검화 속에  처넣을 수만 있다면...... 내 영

  혼이 갈가리 찢어져도 그렇게 할 것이다!"

  죽음을 노리는 여인의 저주!

  허나 귀검사랑은 아무런 대꾸 없이 묵묵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것을 쏘아보는 홍연의  눈에서는 무서운 광기(狂氣)가 이글거렸다.

  한순간 그녀는 전신을 흔들며 미친 듯한 흉소를 터뜨렸다.

  "오호호호홋...... 죽이리라! 내  너를 죽이지 못한다면 하늘마저

  거역하리라! 호호호홋......."

  통곡보다 더 서러운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는 어둠 속을 미친 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둠은 이내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을 삼켜 버렸다.

  서럽도록 처절한 그 한(恨)마저도......

  여인이 한(恨)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찬서리가 내린다고 했다.

  허나, 모르리라!

  이 한 여인의 한(恨)!  이것이 훗날 얼마나 큰 비극(悲劇)을 잉태시킬 것인가를!

  홍연(紅燕), 기억해야 될 이름이다.

  이때 홍연이 서 있던 그  자리에 한 인영이 흡사 유령처럼 나타났다.

  바로 혁련소천이었다.

  그는 귀검사랑이 사라져 간  방향을 한동안 또렷이 응시하더니 문

  득 눈 앞의 거목을 슬쩍 떼밀었다.

  그러자 아름드리 거목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앞으로 베어져 넘어갔다.

  거목은 귀검사랑의 묵검이 스쳐 갔을 때 이미 베어져 있었던 것이다.

  "틀림없구나. 저 자의 검법...... 이백 년 전 무림의 공적으로 몰

  려 죽은 지옥도(地獄島)의 도주(島主) 지옥마제(地獄魔帝)의 지옥사검(地獄死劍)이다!"

  베어져 나간 거목의 단면을 응시하던 혁련소천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만마전 구천(九天) 중의  혈궁천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생사천의

  고수들을 살해한 저 사나이......."

  그는 가늘게 눈살을 찌푸렸다.

  "한단지마는 저 자가 운학대사와 대화하는 것을 언뜻 보았다고 했

  다. 그렇다면 운학대사와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란 말인데......?"

  득도한 고승 운학대사와 무정한 검수(劍手) 귀검사랑!

  혁련소천은 그 두 사람을 묶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추측해 보았다.

  허나 그가 얻어낼 수 있는 결론은 아무 것도 없었다.

  "왠지 심상치가 않다."

  막연히 그렇게만 느낄 뿐이었다.

  문득 그는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며 씁쓸한 고소를 지었다.

  "이 괴물의 머리도 점점 돌(石)을 닮아 가는 모양이군."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마치 공기가 흩어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기다렸다는 듯 피비린내를 실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베어 넘어

  간 거목 주위를 공허하게 맴돌았다.

  심상치 않은 밤(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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