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1권 제17장 귀신같은 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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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공주는 선방에 들어서자마자 쪼르르 달려와 운학대사의 등에 매달렸다.
"백부선사님, 안녕!"
운학대사는 짐짓 눈살을 찌푸리며 나직이 혀를 찼다.
"쯧쯧...... 다 큰 녀석이! 손님 앞에서......."
자하공주는 그제야 혁련소천을 발견한 듯 급히 운학대사의 등에서 떨어졌다.
다음 순간 그녀는 큰 눈을 깜박거리며 혁련소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그렇게 귀엽고 깜찍할 수가 없었다.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군!'
혁련소천은 담담히 미소하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러자 자하공주 역시 생긋 웃어 보이더니 운학대사의 등을 쿡쿡 찌르며 물었다.
"백부선사님, 저 잘생긴 오빠는 누구야?"
운학대사는 껄껄 웃었다.
"허허허...... 녀석 말버릇하고는. 백부선사님은 또 뭐냐? 백부면 백부고 선사면 선사지......."
이어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사드려라. 이 분은 장군부의 영호삼공자이시다."
자하공주는 깜짝 놀랐다.
"어머! 그럼 옥언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외치다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옥언니......? 옥산랑을 말하려 했던 모양이군!'
혁련소천은 대뜸 눈치챘으나 내색치는 않았다.
자하공주는 어떤 호기심에 찬 눈으로 혁련소천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저 공자가 바로 옥산랑 언니의 약혼자였구나......! 어쩐지 옥언
니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더니만.......'
문득 자하공주는 마음이 야릇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때 운학대사가 웃으며 말했다.
"허허...... 이 아이는 빈승의 조카 소연(少娟)이오. 아직 철이
없어 제멋대로이니 영호시주께서 이해하시오."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으며 정중히 포권했다.
"영호풍이라 하오, 소낭자."
자하공주는 문득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킥! 저는 소씨가 아니에요. 그리고 무슨 인사를 그렇게 엄숙하게 해요?"
이어 그녀는 혁련소천의 행동을 흉내내며 괴상한 목소리를 흘려냈다.
"나는 영호풍이오, 소낭자."
그러더니 배를 움켜쥐며 까르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 아이 재미있어. 나는 영호풍이오, 소낭자. 까르르르......."
이때 운학대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꾸짖듯 말했다.
"이 녀석! 백부의 손님에게 이렇듯 버릇 없이 굴다니......!"
그러자 자하공주는 웃음을 뚝 그쳤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불안한 표정으로 혁련소천을 쳐다보았다.
"영호오빠, 제가 버릇없이 굴어 화났어요?"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오. 조금도 화나지 않았소."
그 말에 자하공주의 안색이 활짝 밝아졌다.
그녀는 운학대사를 향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것 봐요. 영호오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데 백부님은 괜히 야단이셔?"
"쯧쯧......."
운학대사는 질렸다는 듯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이때 문득 자하공주는 바둑판을 응시하며 손뼉을 탁 쳤다.
"어머! 이제 보니 바둑을 두고 계셨군요?"
운학대사는 짐짓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너 때문에 더 이상 두지 못하겠다."
"피! 제 핑계를 대는 걸 보니 백부님이 지셨군요?"
일순 운학대사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험! 험! 글쎄 그게......."
"호호호...... 말씀 안 해도 알겠어요. 백부님이 지셨던 거예요. 그렇죠?"
운학대사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그래 백부가 졌다. 이제 속이 시원하느냐?"
자하공주는 감탄한 표정으로 혁련소천을 바라보았다.
"어쩜......! 백부님의 바둑 솜씨는 천하가 인정하는 것인데......."
"허허...... 허나 이 백부는 미처 손도 써 보지 못하고 대패(大
敗)했다. 영호공자의 기예는 이미 신(神)의 경지에 도달해 있단다."
"그렇군요......!"
자하공주는 연신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자하공주는 두 눈을 야릇하게 빛내며 말했다.
"영호오빠, 그럼 저하고 한 번 둬 볼래요?"
운학대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만둬라. 이 녀석, 또 궁지에 몰리면 이번에는 영호공자께 떼거지를 쓸 작정이냐?"
자하공주는 곱게 눈을 흘겼다.
"치! 백부님은 소연이의 바둑 실력이 옛날하고 똑같은 줄 아시나 봐?"
"똑같지 않고 백 배가 늘었어도 영호공자께는 안돼."
자하공주는 야멸차게 내저었다.
"저는 영호공자님의 실력이 그렇게까지 뛰어나다고는 믿을 수 없어요."
혁련소천은 그녀의 그런 모습에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후후...... 격장지계까지......? 제법 영리한 공주님이시군!'
그렇게 생각한 뒤 그는 짐짓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핫핫...... 좋소. 내 소연 아가씨의 실력을 한 번 견식해 보겠소."
순식간에 자하공주의 얼굴에 활짝 웃음이 피어났다.
그녀는 양 손을 허리에 턱 걸치며 자못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봐요, 백부 스님. 영호오빠는 소연과 한 판 겨뤄 보겠다고 하잖아요."
운학대사는 짐짓 눈을 부라렸다.
"이 녀석! 백부 스님은 또 뭐냐?"
"킥킥...... 제 실력을 무시한 대가예요."
자하공주는 혓바닥을 낼름 내밀더니 바둑판 앞에 쪼르르 다가와 앉았다.
운학대사는 씁쓸한 고소를 지으며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자하공주, 그녀의 기예는 절대 석대선생이나 운학대사의 아래가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난해하고 장대한 포석(布石)과 행마술(行馬術)을 펼쳐 공세를 퍼부었다.
뿐인가? 그녀는 혁련소천조차도 금세 읽어 낼 수 없는 수를 네 번이나 놓았다.
'대단하군! 운학대사의 기예가 웅혼하고 장중하다면 이 공주는 칼
날처럼 날카롭고 집요하다!'
그럭저럭 접전을 벌인 지 한 시진이 지나고 드디어 승패가 결정났다.
결과는 혁련소천의 패(敗)로써 두 집 반의 아주 근소한 차이였다.
"야! 소연이 이겼다!"
자하공주는 기쁨에 겨워 선방 안을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운학대사는 그런 모습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혁련소천이 그녀에게 고의로 져 주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자하공주는 운학대사의 바로 앞에 폴짝 내려앉았다.
"이제 백부님도 내 아래야. 그렇죠? 영호오빠......."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봐! 영호오빠도 인정하잖아요. 호호호......."
자하공주는 생각할수록 즐거운 듯 연신 짤랑짤랑한 교소를 터뜨렸다.
운학대사는 문득 탄식같은 불호를 읊조렸다.
"아미타불...... 부처님이 웃으시도다."
자하공주는 교소를 그치고 붉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피! 부처님이야 언제나 웃는데 뭐?"
"허허허......."
운학대사는 어이가 없어 껄껄 웃기만 했다.
이때 혁련소천의 조용한 음성이 자하공주의 귓전을 울렸다.
"소연 아가씨는 무척 예쁜 팔찌를 차고 있군."
자하공주는 생긋 웃으며 오른손을 쳐들었다.
"이거 말인가요?"
그녀의 팔목엔 금광(金光)이 휘황하게 번쩍이는 금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팔찌의 겉면에는 한 쌍의 봉황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고 두 봉황
사이의 표면은 마치 열쇠 모양으로 양각되어 있었다.
혁련소천의 눈에 언뜻 감탄의 빛이 어렸다.
"무척 귀한 것 같군요."
자하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버님이 제게 선물한 거예요."
"소연의 아버님은 무척 부자이신 모양이지?"
"응, 굉장히 부자예요."
이어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한 번 구경해 볼래요?"
"아니야. 그 귀한 것을 함부로 만질 수는 없지."
"피! 걱정 마세요. 아버님은 이걸 잘 간수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소
연이 보기엔 별로 대단한 물건같지도 않아요."
그러면서 그녀는 대뜸 팔찌를 벗어 혁련소천에게 내던졌다.
"음! 정말 아름답군......!"
혁련소천은 팔찌를 받아 이리저리 살펴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그때였다.
혁련소천은 갑자기 뼈를 깎는 듯한 날카로운 예기(銳氣)가 등뒤로 쏘아 오는 것을 느꼈다.
'자하공주를 뒤따른다는 오 인의 비밀 고수......!'
"잘 구경했소."
그는 태연하게 팔찌를 자하공주에게 돌려주었다.
그 순간 등 뒤를 찔러 오던 예기 또한 말끔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
다. 자하공주는 팔찌를 다시 손목에 차며 자랑스런 표정으로 재잘거렸다.
"우리 집에는 이런 게 많이 있어요."
혁련소천은 낮게 웃었다.
"후후...... 그렇다면 언제 한 번 소연 아가씨의 집에나 놀러 가볼까?"
"네?"
"왜 곤란하오?"
"그...... 그건......."
자하공주는 당황한 기색으로 일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허나 곧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나......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초청할께요."
알아듣기 힘들 만큼 기어 들어가는 듯한 음성이었다.
허나 혁련소천은 똑똑히 들었다.
'후후...... 황궁으로의 초청이라...... 그것도 괜찮겠군!'
혁련소천이 대광사를 나선 것은 날이 거의 저물어 갈 무렵이었다.
그는 천천히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후의 하늘은 타는 듯한 노을을 받아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때 한 줄기 가느다란 전음성이 그의 귓전으로 들려 왔다.
(한단지마입니다, 대종사.)
(음.)
(어찌 되었습니까?)
(성공이오.)
(흐흐...... 역시 대종사이십니다. 축하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한단지마의 전음은 더 이상 들려 오지 않았다.
혁련소천은 문득 왼손을 슬그머니 펼쳤다.
그의 손바닥에는 네모진 쇳덩어리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생고무보다 부드럽고 무엇이든 달기만 하면 그 자국이 뚜렷이 남
는 이 은형사철(銀型死鐵).......'
혁련소천의 얼굴에 문득 만족스런 미소가 어렸다.
'후후후...... 여기엔 봉화금시의 모양이 뚜렷하게 찍혀 있다......!'
네모진 쇳덩이, 은형사철의 한 단면을 보라!
거기에는 자하공주의 금빛 팔찌에 새겨져 있는 것과 똑같은 문양
이 선명하게 찍혀 있지 않는가!
대체 어느 순간에 이런 수작(?)을 부렸단 말인가?
알 수도 또한 알 필요도 없다.
봉황금시!
어찌됐든 이 땅에 또 하나의 봉황금시가 괴물의 귀신같은 솜씨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될 뿐이다.
유난히 붉게 타오르는 오늘의 석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