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권 제16장 (16/112)

■ 구천십지제일신마제1권제16장자하공주紫霞公主)와 봉황금시(鳳凰禁 )

━━━━━━━━━━━━━━━━━━━━━━━━━━━━━━━━━━━

  대광사(大廣寺).

  금릉성 외곽에 위치한 방대한  규모의 대찰(大刹)로써 근 일천 년

  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곳은 향화(香火)하러 오는 참배객들이 항상

  줄을 잇고 있었다.

  대광사로 이어진 곱게 뻗은  관도엔 따사로운 햇살이 눈부실 정도로 내리비치고 있었다.

  오가는 행인과 대광사로 향하는  참배객들의 몸은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혁련소천 역시 참배객들의 틈에 섞여 대광사로 향하고 있었다.

  일신에는 산뜻한  백의, 머리에는 같은 색의  문사 건을 단아하게

  둘러맨 채 섭선을 유유히 흔들며  걷고 있는 그 모습이 그렇게 멋

  지고 귀풍(貴風)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를 한 번  본 사람은 예외 없이 입을  딱 벌리고 걸음을 멈추었다.

  모두 넋을 잃은 것이다.

  개중에 꽃다운 나이의 처녀들은 꿈을 꾸듯 눈빛이 몽롱해졌고, 남

  편과 같이 가던 중년 여인들은 아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기까지 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아니, 이 여편네가 미쳤나?"

  이런 때아닌 난리가 도처에서 발생했다.

  허나 정작 혁련소천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휘적휘적 걸음을 떼어놓고 있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영락없이 무공을 모르는 일개 서생의 걸음걸이였다.

  뒤쪽으로부터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아이쿠......!"

  "저, 저런 망할 년......!"

  동시에 여기저기서 갖가지 다급성과 욕설이 줄지어 터져 나왔다.

  혁련소천은 흠칫 걸음을 멈추고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야에 한 필의 연지마( 脂馬)가 관도 상을 무서운 속도로 치달려 오는 것이 보였다.

  '허...... 사람이 많은 이곳으로 저렇게 빨리 달려오다니.......'

  혁련소천의 눈썹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돌연 그의 눈에 언뜻 이채가 솟구쳤다.

  '여자......?'

  이제 십칠팔 세나 되었을까?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절색(絶色)의  소녀가 마상(馬上)에 올라 있는 것이었다.

  그 소녀의  일신에는 몸이 꽉 끼는  홍의(紅衣)가 걸쳐져 있었고,

  가슴에는 금빛 제비 한 마리가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머리에

  는 가운데가 뚫린 둥근 테모양의 모자, 어깨에는 백색 피풍(皮風)

  을 걸치고 있었다.

  헌데 지금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 눈은 전면을 향해 잔뜩 부릅

  뜬 채 말의 복부를 미친 듯이 걷어차고 있었다.

  그녀를 태운 연지마는 순식간에 혁련소천의 옆을 지나쳐 갔다.

  뿌옇게 피어오르는 황진 속에서 다시 행인들의 욕지거리가 줄지어

  터져 나왔다.

  "미친 년!"

  "그래가지고 시집가기는 다 틀렸다!"

  "빌어먹을...... 쿨룩! 쿨룩! 아이고, 이놈의 먼지......."

  혁련소천은 홍의 소녀를 태운 말이 곧장 대광사 안으로 질주해 가

  는 것을 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금빛  제비를 보아하니  금연방(金燕幇)  소속의  여자인 듯 한데.......'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울고 있었어. 무엇 때문일까?'

  그는 스쳐 지나가던 홍의소녀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고여 있

  는 것을 언뜻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혁련소천은 곧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떨쳐 내 버렸다.

  '이러다간 운학대사(雲鶴大師)와의 약속 시간에 늦겠구나!'

  그는 대광사를 향해 다시 빠른 걸음을 떼 놓기 시작했다.

  운학대사.

  불력(佛力) 깊기로 유명한  대광사 주지의 법호(法號), 오늘 혁련

  소천이 만나러 온 사람이기도 했다.

  온갖 기화이초가 흐드러지게  만발해 있는 대광사의 후원(後園)은

  그윽하고도 신선한 꽃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혁련소천은 이곳에 이르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뒷짐을 지며 느긋한 눈길로 유유히 주위를 살펴보았다.

  마치 꽃밭을 감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지극히 한가롭고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가까이 있는  꽃 한 송이를 꺾었다.

  얼굴에 가져다 대고 깊히  숨을 들이쉬자 싱그럽고 청초한 꽃내음

  이 순식간에 콧속 깊숙이 스며 들어왔다.

  '좋구나.......'

  그는 마치 꽃향기에 도취라도 된 듯 스르르 눈을 감았다.

  "대종사님, 무척 한가로와 보이십니다."

  이때 땅 속 어디선가 한 줄기 가느다란 음성이 스며 나왔다.

  '한단지마......!'

  혁련소천은 여전히 꽃향기를 음미하여 미미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알아낸 것이 있소?)

  (있습니다.)

  땅 속에서의 전음이 빠르게 이어져 나왔다.

  (감천곡이 자하공주를 점찍은 것은 정말 잘한 것입니다.)

  (이유는?)

  (조사해 본 즉, 황제는 수많은 공주들 중 유난히 자하공주를 총애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

니다. 자하공주가 잠시라도 안 보이면 황제가 안절부절을 금치 못한다고 하니까요.)

  (흠.......)

  (석달 전 자하공주는 황제가 갖고 있는 봉황금시(鳳凰禁 )를 달

  라고 떼를 쓴 적이 있었습니다.)

  순간 혁련소천의 눈썹이 찡긋 움직였다.

  (봉화금시라면...... 천추무상별부를  열 수  있다는 열쇠가 아니오?)

  (그렇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처음엔 어이가 없었으나 자하공주가 막무가내로 떼를 쓰

  고 우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봉황금시를 건네주었답니다.)

  혁련소천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수중에 있던 꽃송이를 내던지며  또 한 송이의 꽃을 꺾어 들었다.

  (대체 자하공주는 올해 몇 살이오?)

  (십이 세입니다.)

  '어쩐지.......'

  혁련소천은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문득 한단지마의 전음이 조심스런 어조로 이어져 나왔다.

  (대종사님, 일곱 째의 말에 의하면  우리 칠 형제는 이번 일에 끼

  어들 필요가 없는 듯합니다.)

  (제갈천뇌가 무슨 말을 했기에......?)

  (그는 감천곡의 계략이 대단히 출중하고 치밀하다고 감탄했습니

  다. 아울러 대종사께서도 더욱 주의하시라는 말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음.)

  (그럼.......)

  혁련소천은 또 다시 한 송이의 꽃을 꺾으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한단지마, 그대는 꽃을 무척 좋아하는 것으로 아는데...... 어떻

  소? 대광사의 꽃은 무척 아름다운데.......)

  (흐흐흐...... 나중에 시간 나면 이곳의 꽃을 몽땅 뽑아 갈 생각입니다.)

  끝말은 먼 곳으로부터 희미하게 들려 왔다.

  '갔군!'

  혁련소천은 쥐고 있던 꽃을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그의 발 밑엔 세 송이의 꽃이 버려져 있었다.

  '후후...... 이 금작약(金芍藥)은 운학대사가 무척 아끼는 꽃이거

  늘...... 이걸 보면 얼굴 꽤나 일그러지겠군!'

  혁련소천은 내심 고소를 흘리며 천천히 걸음을 떼 놓았다.

  그러나 미처 두 걸음을 떼 놓기도 전에 돌연 그의 안색은 크게 변했다.

  막 후원의 문으로 들어서는 한 인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몹시 준수하고 차가운 얼굴의 중년인...... 분명히 혁련소천에게는 낯익은 얼굴이 아니었다.

  또한 혁련소천이 다른 사람에게서 이토록 강렬한 인상을 받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제 나이는 서른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칠흑같은 머리칼은 묶지도 않은 채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렸고, 이

  마에는 검은  끈은 질끈 동여맨 모습,  일신에는 먹물같은 흑포에

  옆구리에는 넉자 가량의 검은 장검을 비스듬히 꽂고 있다.

  신발 또한 검은 가죽신으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먹빛  일색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

의 안색은 더욱 희고 창백해 보였다. 실같이 가느다란 눈에  코는 날카롭게 우뚝 솟아 있었

고 입술은 얄팍했다. 특히 가느다란 눈에서 간간이 번뜩이는  그의 눈빛은 소름끼치는 전율

이 일 정도로 차가웠다.

  '늑대의 눈빛이다!'

  혁련소천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의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어 감을 느꼈다.

  흑의인은 겨울의 삭풍처럼 차갑고 잔혹한 기운을 뿜어내며 서서히

  혁련소천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흑의인의 유연하게 뻗어 내린  몸매, 내딛는 걸음 하나 하나가 그

  렇게 여유 있고 가벼워보일 수가 없었다.

  '어떤 고도의 특수 훈련이 아니고는 저런 몸가짐이나 분위기를 풍길 수 없다!'

  혁련소천은 더 이상 긴장하지 않았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흑의인에게서 자신에  대한 적의가 없음을  직감으로 간파한 것이다.

  '이쪽을 긴장시켜 공연히 상대의 주위를 끌 필요는 없으니까.......'

  이윽고 흑의인은 혁련소천의 바로 앞에까지 다가왔다.

  흑의인은 혁련소천을 힐끗 응시했다.

  순간 흑의인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갑게 번뜩였다.

  허나 그것은 극히 찰나였을  뿐, 그는 곧 혁련소천의 옆을 그대로 지나쳐 갔다.

  '이 자...... 한 번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 적이 있음직한 인물이다!'

  지나치는 순간 혁련소천은 또 한 번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도전!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무서운지 혁련소천은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혁련소천은 흑의인이 후원 밖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하늘도 모르고 땅도 몰랐다.

  오늘의 이 짧은 만남!

  이것이야말로 장차 무림의 운명을 크게 뒤바뀌게 하는 숙명(宿命)의 만남이었음을!

  혁련소천은 후원에서 벗어나 내당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미 흑의인에 대한 생각을 접어  둔 그는 어느새 또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운학대사...... 아무도 모르고 있다. 그가 현 황제의 사촌형인 문성왕(文聖王)임을.......'

  '그가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출가하여 소림에서 무공을 수

  련...... 대광사의 주지를 맡은 것이 어언 사십 년 전!'

  문득 그의 입가에 신비스런 미소가 흘렀다.

  '자하공주는 백부인 운학대사를 무척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

  는 한 달에 한두 번은 황제도 모르게 이 대광사를 찾는다!'

  그는 한 채의 불전을 돌아가며 생각을 이었다.

  '문제는 자하공주가 갖고 있을 봉황금시인데......!'

  그의 눈에 언뜻 기광이 스쳤다.

  '황제는 마지못해 그것을 주었지만...... 분실을 염려, 공주 주위

  에 다섯 명의 비밀 고수를 붙여 놓았다!'

  '제갈천뇌의 추측에 의하면 그들 오 인(五人)은 영호대인이 조직

  한 삼대 극비세력 중 도감책을 제외한 나머지 두 세력에 속해 있을 것이라 했다!'

  그의 입가에 문득 득의의 미소가 번졌다.

  '허나...... 후후...... 그렇다고 이번 계획을 벗어날 수는 없지.

  봉황금시는 이미 내 손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 없다!'

  멀쩡한 대낮에 개꿈을 꾼다고 비웃을 텐가?

  허나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괴물이라 불리는 혁련소천이었다.

  청향이 감도는 선방(禪房) 안에 눈썹이 희고 안색이 불그레한 팔

  순 가량의 노승이 바둑판을 사이에 둔 채 혁련소천과 대좌해 있었다.

  노승은 바로 운학대사였다.

  운학대사는 득도한 고승다운 품위와 타고난 듯한 위엄이 전신에 배어 있는 모습이었다.

  혁련소천은 감천곡과 상의한  이후 의도적으로 그에게 접근하였고

  어느새 이번이 다섯번째의 만남이었다.

  운학대사는 득도한 고승답지 않게 바둑에 광적(狂的)인 취미를 갖고 있었다.

  누구의 입에서 흘러 나왔는지 모르겠으나, 장군부의 셋째 공자가

  국수 급인 석대선생을 바둑으로 눌렀다는 말이 운학대사에게도 전해졌다.

  운학대사는 강한 호기심과 함께 꼭 한 번 셋째 공자와 만날 수 있

  게 되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혁련소천이 불쑥 대광사를 찾아왔던 것이다.

  만나서 약간의 얘기를 해본 결과 운학대사는 혁련소천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금기서화(琴碁書畵)...... 도대체 무엇을 물어도 막힘이 없었던 것이다.

  장군부의 자제답지 않게 온화하고 겸손한 셋째 공자의 인품은 순

  식간에 운학대사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야 말았다.

  운학대사는 지금 아예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혁련소천의 우상변(右上邊) 대마(大馬)를 기웃거리다 보니 수비세

  로 굳혀 놓았던 우하변을 반 이상 뺏겨 버리고, 반격으로 나선 좌

  상변의 대접전에서는 아예 디딜 곳을 잃고 말았다.

  대참패! 더 이상 두고 볼 것도 없었다.

  운학대사는 마침내 백돌을 내던지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허! 이것 참......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구려. 석대선생이 두

  손 든 이유를 알고도 남겠소."

  혁련소천은 가볍게 미소지었다.

  "과찬이십니다. 대사님의 기예는 웅혼하고 정통한 반면 소생은 극

  히 변칙적인 것이라 견줄 바가 아닌 줄 압니다."

  운학대사는 너털웃음을 쳤다.

  "허허허...... 그런 말씀 마시오. 변칙은 무엇이고 정통은 또 무엇이오? 만약 빈승의 기예가

진정 정통의 정수라면 결코 시주에게 패하지 않았을 것이오."

  혁련소천은 담담히 웃으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했다.

  그때 문 밖에서 소사미의 음성이 들려왔다

  "주지님, 작은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순간 혁련소천은 흠칫했다.

  '작은아가씨! 자하공주다......!'

  원래 대광사에서 자하공주의 신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운학대사와 친척이라고만 알고 있었기에 작은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이다.

  운학대사는 반색의 기색을 떠올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철부지 아가씨께서 또 오셨구먼......."

  이때 선방의 문이 열리며 한 소녀가 모습을 나타냈다.

  열두셋 가량의 나이에 아름답고 귀엽기가 마치 천상옥녀(天上玉

  女)와도 같은 깜찍한 모습의 미소녀였다.

  발그레한 뺨과 크고 서글서글한 두 눈이 유난히 돋보이는 그 어린

  소녀가 바로 자하공주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