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1권 제15장 천겁현오밀경(天劫玄奧密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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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우헌의 한 정실에 혁련소천과 감천곡, 공손무외 등 세 사람이
넓은 탁자를 중심으로 둘러 앉아 있었다.
이 순간 혁련소천을 바라보는 감천곡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영호공자, 그 동안 생각해 보았는가?"
혁련소천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정도 내렸는가?"
"그렇습니다."
"어떤...... 결정인가?"
그렇게 묻는 감천곡의 두 눈엔 어떤 절망이 어리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노인장을 따라 만마전으로 가겠습니다."
나직하지만 확고한 결심이 서린 음성이었다.
감천곡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고...... 고맙네! 영호공자!"
그는 하나뿐인 손으로 혁련소천의 손을 힘있게 움켜쥐었다.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었다.
"고맙다는 말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감천곡은 기쁨에 찬 표정으로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영호공자, 노부는 백이십 평생을 험난한 강호에서 살아왔네. 그 동안 죽을 고비만도 수십
번을 넘겼고...... 온갖 음모를 타개하며 오늘의 위치를 굳혀 왔다네."
그는 두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말을 이었다.
"이제 나 감천곡에게 남은 것은 사람을 볼 줄 아는 이목밖에 없다
네."
"......."
"자네의 눈은 살아 있어. 겉으로는 차분해 보이지만 그 두 눈 깊
숙한 곳에서 번뜩이는 그 눈빛은 분명히 무섭게 살아 있어!"
"......."
"확신하네. 자네는 절대 노부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란 걸!"
쇠를 자르듯 단호하고도 신념에 찬 음성이었다.
이때 잠자코 있던 공손무외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암, 암! 그것은 노부도 장담하네. 영호공자는 너무 미남이기 때
문에 타인보다 최소한 한 수는 이기고 들어가는 셈이니까."
그는 입에 침을 튀기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미남계(美男計)! 장차 만마전의 계집들은 공자의 눈길 앞에서 그
저 추풍낙엽처럼 와스스 무너질 것이네."
그는 두 손을 부르르 떨며 괴상한 몸짓까지 연출해 보였다.
혁련소천과 감천곡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다음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입에선 상쾌한 대소성이 터져 나왔다.
허나 누가 알았겠는가?
그 웃음은 곧 또 하나의 음모(陰謀) 그 자체라는 것을......!
문득 감천곡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영호공자, 노부가 왜 자네를 군마천의 구대천주로 삼으려 하면서
도 제자로는 인정치 않으려는지 아는가?"
"저의 우매한 머리로는......."
"그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네."
"......?"
"첫째로는 자네에게 배분으로 인한 제약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고,
둘째는 노부에게 그러한 자격이 없기 때문이네."
그 말을 하는 순간 감천곡의 두 눈이 횃불처럼 무섭게 불타올랐다.
혁련소천은 그 눈빛에 약간 섬뜩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감천곡...... 어쩌면 이 사람도 예상보다 훨씬 무서운 인물일지 모른다......!'
감천곡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노부의 무공은 천하에서 단 한 명을 제외하곤 가장 강하다고 자부하네."
혁련소천은 그 말에 퍼뜩 생각난 듯 반문했다.
"구천십지제일신마?"
"바로 그렇네."
감천곡은 진지한 표정으로 혁련소천을 응시했다.
"영호공자,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듣도록 하게."
"......?"
"지난 팔백 년 동안 구천십지만마전의 주인은 백 년을 주기로 여덟 번 바뀌었네."
혁련소천은 궁금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감천곡은 얘기를 계속했다.
"만마전의 첫번째 규율...... 그것은 바로 만마전의 주인은 반드
시 제일신마의 직계 후손이라야 한다는 것이네. 허나...... 만에
하나 제일신마의 후손이 없다면 중원의 누구라도 제일신마가 될 수 있다네."
"......."
"현 제일신마 단우비 전주의 나이가 올해로 백여덟, 만마전주로
즉위한 지 꼭 구십 년이 되었지."
감천곡은 문득 두 눈을 기이하게 빛내며 말을 이었다.
"허나...... 그에게는 아직 후손이 없다네."
혁련소천은 그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구십 년 동안이나 단 한 명의 후손도 얻지 못했단 말입니까?"
"아니지. 한 명의 아들이 있긴 있었네."
"그렇다면......?"
"허나 그 아들은 오십 년 전 장강(長江)에서 돌연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네."
"......!"
"또한 그 아들이 남긴 혈육...... 즉 단우비 전주의 손자 역시 십
육 년 전에 병사(病死)했다네."
"병사......?"
혁련소천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감천곡의 얼굴에 은은히 긴장된 기색이 떠올랐다.
"만마전에서는 그 두 가지 사건이 모종의 음모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으나 아직 아무런 단서나 증거도 찾아내지 못했다네."
이것은 실로 거대한 음모가 아닐 수 없었다.
혁련소천은 눈을 지혜롭게 반짝이며 말했다.
"어쩌면...... 만마전 자체 내의 분쟁일 수도 있겠군요?"
"음! 불행한 일이지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감천곡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덧붙였다.
"지금 단우비 전주에게는 손자가 남긴 다섯 명의 증손녀가 있다
네. 허나 그들은 모두 여인인지라 제일신마가 될 자격이 없지."
감천곡은 문득 야릇한 눈으로 혁련소천을 응시했다.
"영호공자, 이제 노부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겠나?"
혁련소천은 잠시 생각하더니 침착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구천십지제일신마의 보좌......?"
감천곡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맞추었네!"
혁련소천의 눈빛이 어둡게 그늘졌다.
"어쩐지...... 어려울 것 같군요."
"그렇네. 노부는 천하에서 두 번째 고수라고 자부하지만...... 만
마전 내에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최소한 십팔 명(十八名)은 더 있으니까."
"구천마제와 십지마황으로 불린다는......?"
"바로 그들이네. 구천마제와 십지마황은 팔백 년 전부터 만마전에
서 내려오는 직위이며 그것 역시 거의 백 년을 주기로 후계자를 즉위시킨다네."
감천곡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열아홉 단체의 주인들은 자신들의 후예들이 가장 특출하기를 바란다네. 그렇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상상도 못할 고련(苦鍊)을 혹독하고 무자비하게 시키지."
"......."
"지난 팔백 년 동안 전(全) 무림의 마도 고수들은 누구 여하를 막
론하고 구천십지만마전에 참배했고 또 그들의 마공절기(魔功絶技)를 바쳐 왔다네."
감천곡은 목이 마르는지 침을 삼키며 말을 계속했다.
"허나 오직 구천(九天)과 십지(十地)의 주인들은 거기에 해당되지 않았네. 지난 팔백 년
동안...... 구천과 십지의 주인들은 수많은 무공을 창안했고 지금에 와서는 제일신마조차도 그
들의 무공 수위를 측정할 수 없을 지경이라네."
"......!"
"또한 그들 열아홉 단체의 힘은 가히 미증유(未曾有)의 것으로 성
장해 있다네. 그들 중 하나의 단체만 총력으로 움직이면 중원십삼
성(中原十三省) 중의 하나 정도는 단 한 달 사이에 모조리 초토화
시킬 수 있을 정도이니까......."
혁련소천은 내심 적잖게 놀랐다.
'구천마제와 십지마황의 힘(力)이 그 정도까지 커졌단 말인가......?'
감천곡은 침중하게 말했다.
"만약 앞으로 십 년 이내에 단우비 전주의 후계자가 결정되지 않
으면...... 제일신마의 보좌로 인해 전 무림은 피의 폭풍에 휩쓸리고 마네."
"......!"
"그것은 만마전의 첫번째 규율인 만큼 제일신마도 간섭할 수 없다네."
그랬다.
지금 감천곡은 앞으로 십 년 후에 불어닥칠 엄청난 피의 폭풍(暴
風)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그는 기이한 눈빛을 쏟아내며 혁련소천을 정시했다.
"비록 영호공자가 노부의 무공을 모두 익힌다 해도...... 자네는
나머지 열여덟 단체의 후계자들의 실력밖에 안 되네."
"......!"
"다시 말해서 현 구천마제와 십지마황과는 결코 상대가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지."
혁련소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이란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아직도 십 년 세월이 남았으니......."
"그 십 년 사이에 자네는 영문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어."
혁련소천은 움찔했다.
"그럼...... 어떻게......?"
"편법을 써야 하네."
"편법?"
감천곡의 눈에 일순 기광이 솟았다.
"그럼으로써 자네의 무공을 일 년 만에 노부와 동수로 만들어 놓을 것이네."
혁련소천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 단 일 년 사이에 철장마제 감천곡과 동수......!
"편법...... 그것은 모두 세 가지라네."
"......?"
"첫번째는 황궁무고 즉 천추무상별부(千秋武相別府)의 무학을 얻는 것이네."
― 천추무상별부의 무공을 얻는다!
"노부가 알기로는 천추무상별부에는 천하무학의 삼분지 일 정도가 비장되어 있다네."
"......!"
"모두 천고기학(千古奇學)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 중에서
는 노부의 무학과 비슷하거나 약간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셋을 넘지 못한다네."
실로 엄청난 자존심(自尊心)이 아닐 수 없었다.
신비의 금역(禁域)인 황궁무고에 비장된 무학 중 자신의 그것을
능가하는 무학이 고작 셋도 안 된다니......!
감천곡은 진중하게 말했다.
"황궁무고에서 노부가 필요로 하는 무공은 단 한 가지."
"......?"
"천이백 년 전(千二百年前)...... 천축의 북방에 위치한 서하국에
서는 대대로 국왕(國王)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하나의 경전(經典)이 있었네."
이때 공손무외가 불쑥 끼어들었다.
"천겁현오밀경(天劫玄奧密經)......?"
감천곡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것이네."
천겁현오밀경―!
그 말을 듣는 순간 혁련소천은 천기개천 사사무에게서 들었던 말을 퍼뜩 상기했다.
― 혹자는 천축무학의 근원을 대뢰음사(大雷音寺)와 소뢰음사(小雷音寺)에서 찾고, 혹자는
홍황이교(紅黃二敎)가 천축무림의 양대 산맥이라고 떠들어대지만 말짱 개수작이다.
― 실상 천축무학의 최고 정수는 서하국의 비전경전(秘傳經典)인
천겁현오밀경에서 찾아야 한다.
― 허나 서하국의 돌대가리 국왕 놈들은 그 무공을 심신단련에만
사용했으니 돼지에게 진주 목걸이를 걸어 준 격이 아니겠는가?
자신이 모르는 것은 하늘조차 모른다고 떠들어댔던 천하만사무불
통지 천기개천 사사무의 그 말!
"천겁현오밀경에 어떤 무공이 실려 있는지는 노부도 모르네. 허
나, 그 무공이 가공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
"......!"
"이백 년 전 서하국의 멸망과 함께 천겁현오밀경은 황궁무고로 흘
러 들어갔지. 이 비밀은 천하에 오직 노부만이 알고 있을 것이네."
"......!"
"바로 그 천겁현오밀경을 자네가 얻어야 하는 것이 편법의 첫번째라네."
혁련소천은 어쩐지 가슴이 섬뜩해짐을 금치 못했다.
― 천겁현오밀경을 취하라!
허나 그것이 비장되어 있는 곳은 바로 황궁무고가 아닌가!
혁련소천은 불안한 기색을 떠올리며 물었다.
"헌데 제가 무슨 재주로 황궁무고에......."
"걱정 말게."
감천곡은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황자에게 어린 공주가 한 명 있네. 바로 자하공주(紫霞公主)라고 하지."
"......!"
"그녀를 이용하면 되네. 그리고...... 그에 따른 모든 준비는 노
부의 친구인 홍포구마성(紅佈九魔聖)이 모두 해 놓았을 것이네."
"아......!"
혁련소천은 절로 탄성을 발했다.
'설마하니 공주까지 이용할 계획을 꾸몄다니.......'
그는 실로 감천곡이란 인물을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천곡은 느긋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러다 문득 감천곡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순간 그의 신형이 앉은 자세 그대로 창문을 향해 폭사되었다.
아니, 폭사되었다고 느낀 순간 그는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번개(閃)를 무색케 하는 실로 눈부신 빠름이 아닐 수 없었다.
헌데 지금 감천곡의 손아귀에는 한 마리의 야조(夜鳥)가 쥐어져 있었다.
감천곡의 두 눈이 일순 무섭게 빛났다.
야조의 발목에 붉은 고리 하나가 채워져 있는 것을 본 것이다.
"훈련된 새다......!"
"뭣이?"
공손무외는 흠칫 놀라며 야조의 몸뚱이를 재빠르게 훑어보았다.
순간 공손무외의 눈빛이 깊숙이 가라앉았다.
"그렇구나...... 이 새는 분명 보통 새와 눈빛이 다르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감천곡을 응시했다.
"그렇다면......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단 말인가?"
감천곡은 눈에 이채를 담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음...... 동물을 이용하는 수법은 전설로 내려오는 전진(全眞)의
비기(秘技)인데...... 설마......?"
감천곡의 얼굴에 문득 살기가 떠올랐다.
"죽여야겠군!"
이어 막 손아귀에 힘을 주려는 순간, 혁련소천이 불쑥 제지했다.
"잠깐만......!"
감천곡은 의아한 눈으로 혁련소천을 쳐다보았다.
혁련소천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 새를 죽이면...... 새의 주인이 의심을 품게 됩니다."
감천곡은 미간을 찌푸리며 난색을 띠었다.
"그럼...... 어떡해야 되겠나?"
이때 공손무외가 나직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그렇군. 이 새를 아예 바보 새로 만들어야 되겠어."
이어 그는 가볍게 활줄을 퉁겼다.
순간 야조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뒤이어 야조의 눈빛이 돌연 안개가 서린 듯 뿌옇게 흐려지는 게 아닌가!
"흐흐...... 됐어. 저 새는 절대 우리를 보지 못했고 아무말도 듣지 않았던 것이야."
공손무외의 말에 감천곡은 빙긋 웃었다.
이어 그는 야조를 창 밖으로 훌쩍 내던졌다.
자유를 되찾은 야조는 어둠을 가르며 힘차게 야천으로 솟구쳐 날아갔다.
감천곡과 공손무외는 서로를 마주보며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허나 혁련소천의 눈에는 어쩐지 음울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영호수아, 그녀가 설마......?'
영호수아, 귀엽고 깜찍하기 이를데 없는 천진난만한 소녀......
잠시 잊고 있던 천우신기 제갈천뇌의 말이 뇌리에 떠오른 것도 바로 이때였다.
― 영호수아...... 모든 동물과 의사 소통이 가능한 신비한 능력
을 가진 소녀입니다. 조심하십시오.
마치 은싸라기같은 달빛이 소나기처럼 퍼부어 내리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