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1권 제13장 두 거인(巨人)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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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룡무후전의 구 층(九層).
영호대인은 태사의에 몸을 파묻은 채 담담한 눈길로 전면을 응시
하고 있었다.
이때 문이 열리며 신태비범한 한 황의노인이 들어섰다.
왼쪽 소매가 헐렁한 것으로 보아 외팔이인 듯 했으나 그의 전신에
서 풍겨 나오는 위엄이나 냉오한 기도는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철장마제 감천곡, 바로 그였다.
일순 영호대인과 감천곡의 시선이 허공에서 조용히 뒤엉켰다.
두 사람의 눈빛은 그저 물처럼 고요할 뿐 아무런 빛이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잠시 기이한 침묵이 흐른 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감천곡이었다.
"본인은 감천곡이오. 한 가지 일로 영호대인을 찾아 뵈었소이다."
우뚝 버티고 선 채 내뱉는 형식적인 인사말...... 그것은 상대가
천하의 천위대장군임을 조금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듯한 감천
곡의 태도였다.
영호대인은 의자에 깊숙이 앉은 채 조용히 말했다.
"감천주의 명성은 익히 들어 왔소. 어서 오시오."
감천곡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영호대인의 맞은편에 준비된
의자에 가서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마련된 탁자 위에는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두
개의 찻잔이 놓여 있었다.
영호대인은 감천곡을 똑바로 보며 입을 떼었다.
"감천주께서 이 장군부를 찾아오신 이유는......?"
감천곡은 담담히 말했다.
"감모는 영호대인의 슬하에 세 명의 호자(虎子)가 있음을 알고 있소."
"......."
"본인은 그 중 한 명을 후계자로 삼고자 이곳을 찾았소이다."
영호대인은 짐작대로라는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기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감천주는 잘못 찾아오신 것 같소."
"......?"
"장군부는 천하의 어떤 무가(武家)보다 뛰어난 가문이오. 그리
고...... 장군부의 자식은 결코 남의 아래에 서지 않소. 내가 용납치 않기 때문이오."
"......!"
"또 한 가지...... 외람된 말씀이나 나는 감천주의 무공이 장군부
의 그것을 능가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소."
감천곡의 눈썹 끝이 미세한 움직임을 보였다.
허나 그는 곧 평정을 되찾고 태연하게 말했다.
"본인은 영식을 제자로 맞이하려는 것이 아니오. 당당한 군마천의
구대천주(九代天主)로 삼고자 하는 것이오."
영호대인의 입가에 일순 기이한 미소가 번졌다.
"군마천주라...... 정말 엄청난 지위구료. 구천십지만마전에서 두
번째로 강한 조직이니까."
"첫번째가 될 것이오."
감천곡은 두 눈을 빛내며 단언하듯 말했다.
영호대인은 미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과신은 금물이오."
"확신이오."
그 순간 영호대인은 감천곡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 강렬한 신념의
불꽃이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영호대인은 문득 낮게 물었다.
"감천주...... 세 아들 중 어떤 녀석을 원하시오.?"
감천곡은 서슴없이 말했다.
"셋째 영호풍이오."
순간 영호대인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나 그는 곧 웃음을 그치고 기이한 표정으로 물었다.
"감천주, 내가 왜 웃었는지 아시오?"
감천곡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또한 알고 싶지도 않소.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대인의
승낙 여부일 뿐이오."
영호대인의 입언저리에 일순 엷은 미소가 감돌았다.
"만약...... 내가 거절한다면 어떡하시겠소?"
그 말에 감천곡은 기광을 번득이며 되물었다.
"설마하니...... 대인은 이 감모가 대인께 무릎이라도 꿇기를 원하는 것이오?"
영호대인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감천곡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영호대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감천주!"
"......."
"그대는 생각보다 무서운 인물이구료."
영호대인은 문득 탁자 위의 찻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차가 식고 있소."
"......!"
"드시오. 월명국(月明國) 특산품이라 맛이 괜찮을 것이오."
순간 감천곡의 얼굴에 한 줄기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말씀......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여도 괜찮겠소?"
영호대인은 담담히 미소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언(無言)의 승낙이 아니고 무엇이랴?
감천곡은 싱긋이 웃었다.
"고맙소."
이어 그는 손뼉을 탁탁 쳤다.
그러자 묘한 기음이 일며 곧이어 천장에서 세 명의 금의인이 떨어
져 내렸다.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의 삼십대 가량의 중년인들로서 가슴에는
각기<비(匕)>, 엽<(葉)>, <추(鎚)> 등의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들은 내려서자마자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부르셨습니까, 천주님?"
감천곡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 물건들을 내려놓아라."
세 금의인은 각기 하나의 금갑을 등에 메고 있었다.
그들은 즉시 금갑을 벗어 바닥에 내려 놓았다.
이때 영호대인의 나직하고도 담담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뜻밖이군. 검천주 이외에 세 명씩이나 승룡무후전에 들어 와 있
었다니......."
말은 그렇게 했으나 의외롭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감천곡은 문득 나직한 웃음을 발했다.
"허허허...... 이해하시오. 본인의 몸이 약간 불편하기 때문에 이
들은 늘 본인의 곁에 따라 다니는지라......."
이어 그는 비(匕)자가 수놓아진 금의인에게 눈길을 던졌다.
"열어라."
"알겠습니다."
비자(匕子) 금의인은 즉시 금갑의 뚜껑을 열었다.
순간 갖가지 화려한 광채가 금갑 속에서 뻗쳐 나왔다.
금갑 속엔 오색찬란한 기광을 뿜어내는 주먹만한 보석들이 가득
차 있었다.
영호대인은 금갑을 쳐다보며 담담히 중얼거렸다.
"신강(新疆)의 묘안석(猫眼石)이로군."
"모두 백 개, 황금 십만 냥의 가치가 있소. 영호대인께 드리는 첫
번째 미비한 선물이오."
감천곡은 그렇게 말하며 엽자(葉字)가 새겨진 금의인을 향해 가볍
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두 번째 금갑의 뚜껑이 열렸다.
거기에는 전체가 은빛을 띤 하나의 소검(小劍)이 담겨져 있었다.
영호대인의 눈빛이 소검을 향하며 일순 미미하게 흔들렸다.
감천곡은 담담히 말했다.
"고금신기백병(古今神器百兵)...... 고금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일백병기 중 서열 여섯번째에 올라 있는 은형마인(銀形魔人)이외다."
"......!"
"영식에 대한 선물이오."
그 말과 함께 감천곡은 마지막 금갑에 시선을 던졌다.
세 번째 금의인은 그 즉시 뚜껑을 열었다.
순간 영호대인의 안색이 눈에 띄게 변했다.
놀랍게도 마지막 금갑 속에는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인두 하
나가 들어 있지 않은가?
영호대인은 대뜸 그 인두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오승창......!"
"그렇소. 몇 년 전 모반을 일으켰던 취옥성주 오승창이오."
"이 자를 어떻게......?"
"장군부에서 이 자를 줄곧 찾아다닌다고 들었소."
영호대인은 문득 감천곡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감천곡도 때마침 영호대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금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으며 일순 야릇한 눈빛이 오고갔다.
이윽고 영호대인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감천곡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태사의 깊숙이 상체를 묻으며 조용히 입을 떼었다.
"피요궁."
"부르셨습니까?"
극히 무감동한 음성과 함께 한 인영이 영호대인의 뒤에 그림자처
럼 나타났다.
영호대인은 전면을 응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감천주의 선물을 모두 접수토록 하라."
"알겠습니다."
"피요궁."
"말씀하십시오."
"장군부에 들어온 군마천의 고수가 모두 몇 명이나 되는가?"
피요궁은 지체없이 대답했다.
"승룡무후전에 저들 사 인(四人)을 포함해서 아홉 명(九命), 밖의
이백구십삼 명을 합쳐 모두 삼백두 명입니다."
"사도총단에 알려 그들 각자에게 황금 일천 냥씩을 전달토록 하라."
황금 일천 냥!
언뜻 계산해서 십만 냥이 넘는, 그것은 감천곡이 가져온 묘안석
백 개의 가치보다 훨씬 웃도는 막대한 액수가 아닌가?
피요궁은 즉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영호대인은 여전히 전면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피요궁!"
"말씀하십시오."
"지금부터 네 죄를 묻겠다."
피요궁은 그 자리에서 즉각 무릎을 꿇었다.
"죄가 있다면 달게 책벌을 받을 것입니다."
영호대인은 문득 차갑게 말했다.
"너는 어째서 승룡무후전에 감천주 이외의 인물이 침입했어도 눈
치채지 못했는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허나 아는 것만으로 될 것 같아 그냥 있
었습니다. 그것이 죄라면 책벌하여 주십시오."
영호대인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번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위엄 있게 말했다.
"좋아...... 물러가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피요궁은 무릎 꿇은 그 자리에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순간 바닥으로 스며들었는가?
피요궁의 모습은 꺼지듯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영호대인은 천천히 감천곡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감천곡은 시종 담담한 미소를 머금은 채 조금도 동요됨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의 앞에 부복해 있던 세 명의 금의인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감천곡은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영식을 만나고 싶소이다."
"안내해 드리겠소."
영호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느릿하게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켰다.
노웅(老雄), 늙었기에 더 무서운 두 거인(巨人)의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