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1권 제9장 천우신기(天羽神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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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이미 삼라만상을 짙은 어둠의 장막으로 뒤덮은 지 오래였다.
화려하진 않지만 단아한 분위기의 객실 안이 황촛불에 의해 조용
히 밝혀지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탁자에 앉은 채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며칠 후면 장군부에 들어가게 된다.......'
불빛을 받은 소천의 얼굴이 윤기있게 빛났다.
'장군부...... 당금 황실에서 가장 신임하고 있는 천위대장군(天
衛大將軍) 영호대인이 가주(家主)로 있는 곳. 그의 말 한 마디면
수백의 맹장(猛將)과 백만(百萬)의 군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문득 그의 두 눈이 신비로운 광채에 휩싸여 갔다.
'후후...... 나 혁련소천이 신분을 위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굳이
장군부를 택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
위대한 야망(野望)의 성취를 위한 첫번째 포석(布石)!
허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오직 혁련소천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대종사님!"
천장 어느 구석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 나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혁련소천은 미동 없이 여전히 찻잔만을 응시한 채 말했다.
"내려오시오, 제갈천뇌!"
순간 천장 한 귀퉁이의 미세한 틈이 스르르 갈라지더니 귀신처럼
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길게 자란 은빛 눈썹이 유난히 돋보이는 은의(銀衣) 중년인...그
는 바로 천우신기 제갈천뇌였다.
그는 내려서자마자 혁련소천을 향해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대종사님을 뵙습니다."
혁련소천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내밀어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이리 와 앉으시오."
"감사합니다."
제갈천뇌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혁련소천과 마주 앉았다.
혁련소천은 조용히 물었다.
"어찌 되었소?"
제갈천뇌는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며 공손히 대답했다.
"모든 일은 완벽합니다. 굳이 흠이 있다면 너무 철저하게 완벽한 것이 흠입니다."
"흠......!"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천천히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천뇌, 이제 내가 주의해야 할 점을 말해 주시오."
"대종사님께서 주의하실 점은 없습니다. 단지 장군부의 몇몇 인물
에 대해선 확실히 알고 계셔야 할 필요가 있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장군부의 인물에 대해서라면 영호대인 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 정도로는 안 됩니다."
혁련소천은 흠칫한 표정으로 제갈천뇌를 바라보았다. .
"그렇다면...... 무엇인가가 또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혁련소천은 검미를 약간 찌푸리며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제갈천뇌의 진중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먼저 영호대인의 출신 내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음......!"
"면밀히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영호대인은 열두 살 때 당시
황궁의 대법사(大法師)로 있던 천축(天竺)의 기인 천룡대법사(天
龍大法師)의 천거를 받아 황궁무고(皇宮武庫)에 들어갔던 자로 밝
혀졌습니다."
찻잔을 들어가던 소천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황궁무고......?"
"그렇습니다."
"음......!"
혁련소천은 자신도 모르게 묵직한 침음성을 흘렸다.
황궁무고(皇宮武庫)!
감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일명 천추무상별부(千秋武相別府)라고도 불리는 그곳에는 천하의
무학이란 무학은 모조리 비장(秘藏)되어 있다고 한다.
허나 어떤 무학이 얼마만큼이나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천하무학 전체의 최소한 삼분지 일은 황궁무
고에 쌓여 있는 것이라고 하나 그 또한 확인된 바 없다.
황궁무고는 그저 신비(神秘) 그 자체가 되어 갖가지 소문과 전설
만 풍성하게 전해져 내려올 뿐이었다.
'황궁무고가 만들어진 것은 이백 년 전이고 그 동안 그곳에 들어
갔다 나온 사람은 단 세 명뿐이라고 했다. 헌데 그 중 한 명이 바
로 영호대인이었다니......!'
혁련소천은 지금까지 생각해 온 영호대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번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갈천뇌는 계속해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뜻밖인 것은 영호대인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를 아는 사람이 아
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무공을 사용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혁련소천은 묵묵히 식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일 년 전, 딱 한 번 그를 보았을 때 저는 그의 심기나 재질 등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갈천뇌는 눈을 번쩍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또 한 가지...... 영호대인이 자신과 황궁의 안전을 위해 극비리
에 세 가지 조직을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순간 찻잔이 소리를 내며 탁자 위로 내려졌다.
혁련소천은 눈썹을 힐끗 들어올리며 제갈천뇌를 바라보았다.
"조직을 만들어 놓았다고?"
"그 중 두 가지는 아직 미확인 중이오나 한 가지는 알아냈습니다."
혁련소천은 의혹을 느꼈다.
"어떤 조직이오?"
"조직의 명칭은 '도감책'이라고 합니다."
"도감책?"
"그 조직의 주임무는 황실에 대한 모반(謀反)이나 역모(逆謀)를
감시하는 것이며 모두 열두 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도
감책의 수령(首領)은 영호대인의 첫째 아들인 영호환도(令狐煥道)
가 맡고 있습니다."
낮은 신음을 흘리며 혁련소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호환도는 영호대인이 가장 아끼는 아들입니다. 그는 겉보기엔
강직하고 성품이 대쪽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머리가 지극히 비상
하고 무공 또한 대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삼 년 전 호북성에서 일어난 취옥성
반란 때 당시 거사의 주모자였던 장비탁탑(長臂濁塔) 요월성(妖月
星)이 영호환도의 삼 초(三招) 공격에 목이 날아갔다고 합니다."
혁련소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요월성은 흑월교(黑月敎)의 일맥(一脈)으로 그 무공 수위가 능히
일문의 종사 격이지......."
"그렇습니다."
"헌데 이상하지 않소?"
혁련소천의 불쑥 내뱉는 질문에 제갈천뇌는 의혹 어린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혁련소천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영호대인의 능력이 그 정도라면 어째서 셋째 아들인 영호풍을 구
태여 천계선사에게 맡겼단 말이오?"
제갈천뇌는 빙그레 웃었다.
"천하에서 벌어지는 일을 어찌 무공으로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영호대인이 천계선사를 택한 이유는 천계가 아미파의 의승(醫僧)
으로 무공보다는 의술에 더욱 정통함을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음......!"
제갈천뇌는 정색하며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대종사께서 장군부의 일을 완벽하고 무사하게
끝내시려면 다음 두 명에게 각별한 주의를 하셔야만 합니다."
혁련소천은 흠칫했다.
"영호대인과 영호환도 외에 또 있단 말이오?"
제갈천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중 한 명은 영호대인의 딸인 영호수아(令狐秀雅)입니다."
"......!"
"그녀는 무공의 무자(武子)도 모르는 전형적인 명문세족의 딸입니
다. 허나 그녀에겐 남에게 없는 특이한 능력이 있습니다."
혁련소천의 두 눈에 순간적으로 기광이 스쳐 갔다.
"능력이라면......?"
"영호수아 그녀는 천하의 어떤 짐승과도 대화가 통할 뿐 아니라
그것들에게 명령을 내리기까지 합니다."
"......!"
혁련소천은 또다시 흠칫 했다.
그는 가볍게 검미를 찌푸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믿기 어렵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놀라운 일이군."
"......."
"또 한 명은 누구요?"
순간 제갈천뇌의 낯빛이 신중하게 굳어졌다.
"석대선생(石大先生), 그는 영호수아의 글선생으로 이름은 알아내
지 못했습니다."
"하면 어째서 그를 주의하란 말이오?"
그 말에 제갈천뇌는 씁쓸한 고소를 떠올렸다.
"모르겠습니다."
"응?"
"어떻게 생각하면 좀 우스운 일이나 석대선생은 마치 안개와도 같
은 사람입니다. 출신 내력은 고사하고 이름조차도 신비에 싸여 있으니까요......."
혁련소천은 눈살을 가늘게 찌푸렸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인물을 주의하라니...... 마치 뜬 구름을
잡으라는 이야기 같군."
제갈천뇌는 잠시 침묵하더니 두 눈을 기이하게 빛내며 말했다.
"직감입니다. 석대선생을 처음 보았을 때 제가 받은 느낌은 차라
리 공포스러울 정도였습니다."
"......!"
"지나친 상상일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생각하기에 석대선생은 어떤
면에서도 결코 영호대인의 아래가 아닐 것입니다."
혁련소천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허나 그는 곧 평정을 회복하며 무겁게 입을 떼었다.
"천뇌, 그대의 느낌이 그러하다면 믿겠소. 내 반드시 그를 염두에
두리다."
제갈천뇌는 혁련소천을 응시하며 소리없이 웃어 보였다.
"아마...... 이번 일은 매우 잘될 것입니다."
"......?"
"왜냐하면 이번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대종사이기 때문입니다.
대종사께서는 장군부의 그 누구보다도 신비스럽고 무서운 분이시
니까요!"
그는 두 번의 대종사라는 말에 특히 힘을 주었다.
혁련소천은 나직이 웃었다.
"후후...... 천뇌는 나를 너무 높이 평가하였소."
제갈천뇌는 그의 말에 눈빛을 기이하게 빛냈다.
"결코 과찬이 아닙니다. 나 제갈천뇌가 비록 혈뇌사야 혁련후 어
른의 기명 제자에 불과하지만 결코 그 분의 아래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제갈천뇌는 강하게 눈빛을 발하며 혁련소천에게 말했다.
"사 년 전 대종사님을 처음 뵈었을 때, 만약 저보다 밑이라 여겼
다면 아무리 혁련어른의 지엄한 분부가 있었다 해도 결코 대종사
를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갈천뇌는 문득 푸르스름한 안광을 쏟아 내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대종사님을 해치고 저 스스로의 야망을 위해 일했
을지도 모릅니다."
혁련소천은 담담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저 듣기만 했다.
"대종사님, 명검(名劍)은 언제나 광채를 발하나 신검(神劍)은 때
가 이르러서야만이 그 빛을 발합니다."
제갈천뇌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대종사님의 기(氣)는 어느 정도 겉으로 드러나 있어 다른 사람의
눈길을 끌 염려가 있습니다. 비록 영호대인이 영호풍의 얼굴은 잘
모르고 있다 하나 타고난 기(氣)만은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갈천뇌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종사께서는 영호풍의 기와 맞추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혁련소천은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소."
순간 제갈천뇌의 얼굴에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때에 따라 적당히 굽힐 줄도 휘어질 줄도 아는 사람...... 과연
인물은 인물이구나......!'
두 사람의 시선이 깊은 신뢰와 감탄을 담은 채 일순간 부드럽게
마주쳤다.
이윽고 제갈천뇌는 혁련소천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갈천뇌의 신형은 연기처럼 흐려지더니 순
식간에 방 안에서 그 모습을 감췄다.
다시 혼자가 된 혁련소천은 천천히 찻잔을 들어가며 흡족한 미소
를 머금었다.
"제갈천뇌...... 십만고수(十萬高手)와도 바꿀 수 없는 사람! 내
가 그를 얻은 것은 확실히 행운이다!"
그는 찻잔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만약 그가 나의 적이었다면...... 나는 행동을 함에 있어 지금보
다 백 배는 더 신중을 기해야 했을 것이다."
이미 식어 버린 차를 마시는 혁련소천의 입가엔 여전히 흡족한 미
소가 흐르고 있었다.
<장군부(將軍府).>
이 하늘 아래 살면서 이곳을 모르는 자가 있다면 아예 그는 사람
이 아니다.
최고(最高)의 부(富)와, 왕족(王族) 이상의 권세(權勢)와 영화를
자랑하는 대명(大明) 최고의 명문(名門)!
금릉(金陵)에서 천궁산(天弓山)을 뒤에 두고 수백 채의 고루거각
(高褸巨閣)이 육십만 평의 대지 위에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있는 그곳이 바로 장군부인 것이다.
땅거미가 짙어지는 유월(六月) 스무여드렛 날의 석양 무렵, 순금
색 팔두마차를 위시로 십 기의 기마대가 장군부의 육중한 대문 안
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마차의 창문을 통해 담담히 장군부의 내부를 감상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마차 밖을 응시하던 혁련소천은 천천히 창에서 눈을 떼
며 의자 깊숙이 상체를 파묻었다.
그 순간 뜻밖에도 그의 얼굴에 한 줄기 신비스런 미소가 은은히
피어올랐다.
'후후후...... 드디어 장군부에 거센 회오리가 휘몰아치겠
군......!'
장군부의 회오리!
이것이 장차 전 무림에 파급될 일대 폭풍의 서곡(序曲)임을 그 누
구도 알지 못했으니.......
혁련소천을 태운 채로 십여 기의 기마대는 힘차게 장군 부안을 치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