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을 베다. (3)>
“조만간이요.”
장지혁 검사가 원주로 향하는 정확한 날짜는 아직 정할 수 없다. 지금 원주행을 알려 준 것은 김영준 총장이 장지혁 검사를 불러 질문을 던졌을 때를 대비한 것.
장지혁 검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서진이 전해 준 쪽지의 주소를 입력했다.
“아파트 단지네?”
농지였던 그곳은 지금 아파트 단지가 되어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정부는 그곳에 주공 아파트를 지었고 시공사는 신마건설이었다.
* * *
그날 밤.
김영준 총장은 불 꺼진 사무실에 홀로 서 있었다. 그 시선은 창밖을 향하고 있다.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 있는 김영준 총장의 눈빛이 깊었다.
‘조금만 더 버디면…….’
김영준 총장은 생각했다. 대통령이 된 백기호 의원을 등에 업고 세상을 호령할 수 있다고. 이후에는 김영준 총장이 청와대에 앉을 거라고.
그때는 지금 같은 보잘것없는 권력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거다.
하지만 쉽지 않다. 형 김준만이 들고 온 거센 바람이 끝나지 않았는데, 원주라는 파도가 몰려오고 있다.
김영준 총장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오래전의 일이 떠오른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험하고 가파른 비탈길에 굴러떨어진 어머니와 아버지. 그곳으로 달려간 자신.
‘그땐 어렸어.’
김영준 총장이 고개를 저으며 떠오른 상황을 지우려 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창밖으로 펼쳐진 세상을 보며 중얼거렸다.
“돌아가시는 부모님을 보며 약속했다, 그 누구보다 위에 서겠다고…….”
적막한 공간이었다. 김영준 총장이 혼자 내뱉는 목소리가 그곳을 채우고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상에 설 거라고, 그렇게 약속했다.”
김영준 총장이 창가를 향해 한 발 다가섰다. 그 눈이 소름 끼칠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넌 누구냐?”
김영준 총장은 장지혁 검사가 원주로 가게 된 원흉이 누구인지 생각했다. 그놈은 장지혁 검사의 뒤에 선 그림자일 게 분명하다.
‘김서진?’
먼저 서진이 의심됐다.
사고 전, 자신의 뒤를 샅샅이 캐고 다니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검사에 관심이 없던 놈.’
사고 전, 서진은 검사라는 직업에 큰 관심이 없었다. 학력이 낮은 김준만의 부탁에 따라 명예를 위해 검사를 선택했다는 느낌이 컸다.
‘당시의 놈은…….’
언젠가 검사를 그만둔 후, 재정건설에 들어가 김준만의 자리를 이어받으려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재정건설에 대한 김영준 총장의 차명 계좌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소리 없이, 그 누구도 모르게 김영준 총장의 뒤를 밟았었다.
‘기억이 돌아왔는가?’
김영준 총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지난 몇 년 간 지켜본 서진의 모습은 재정건설에 관심이 없었다. 오직 검사로 살아갈 놈이었다.
일단 서진의 기억이 돌아왔는지 확인할 시간이 필요하다.
‘다음은…….’
서진의 얼굴이 사라지고 엄 회장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엄 회장은 엄시영과 엄선주가 구치소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리고…….’
김영준 총장은 최근 엄 회장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미팅 약속도 외면한다. 그 모든 상황을 생각하던 김영준 총장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엄 회장…….’
엄 회장은 힘이 있고 김영준 총장의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장지혁을 이용해 김영준 총장과 거래하려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게다가…….’
장지혁 검사를 죽여 달라 말한 게 언제인데,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고 있다.
‘늙은 여우.’
엄 회장은 평생 돈 장사를 하며 살아왔다. 그 누구보다 치졸할 정도로 계산기를 두들긴다. 그런, 사람이 김영준 총장과 등을 돌렸다는 것은…….
‘나를 상대할 자신이 있다는 거지. 그럴 무엇인가를 찾았다는 거야.’
김영준 총장이 창문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기며 중얼거렸다.
“엄 회장, 당신이었구나?”
김영준 총장의 눈빛이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 * *
다음 날.
이소희는 서진의 부탁을 받고 원주 지검의 기록물 관리실에 있었다.
“알지? 없을 가능성이 커.”
-혹시나 싶어서 부탁하는 거야.
이소희는 휴대폰을 뺨과 어깨에 댄 채 서진과 통화하며 기록물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뭐야?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유를 알고 싶은 거야?”
-두 분의 사망 원인은 비탈길에서 실족했다는 거야. 그런데 두 분이 동시에 떨어졌다? 뭔가 말이 안 되지 않아?
“말은 안 되는데, 30년이 넘은 사건이거든? 이미 폐기되었거나 사라졌을 가능성이 커.”
-부탁할게.
30년이 넘은 사건, 이미 폐기되었거나 누군가의 손에 없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소희는 서진의 부탁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소희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서진의 목소리에 문서를 하나씩 손에 들며 빠르게 훑었다.
“그런데…… 백기호는 어떻게 할 거야? 이대로 가면 당선될 것 같은데. 난 그 사람이 대통령 되는 거 싫어.”
-총장과 같이 무너질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 어…… 있다.”
-있어?
서진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이소희가 기록물을 넘기며 조용히 대답했다.
“그런데 정말 허술해…….”
* * *
서진은 이소희로부터 기록물의 사진을 전송받았다.
이소희의 말대로 정말 허술하다. 그저 실족사다. 증인도 증거도 없다. 두 부부가 산길을 걷다가 떨어졌다는 게 전부다. 그 비 오는 날, 그 밤중에 산길을 왜 걸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하지만 서진에게는 이 자체가 단서였다.
‘부실 수사…….’
명백한 부실 수사다. 그렇다는 것은 수사기관을 움직여 상황을 조작할 만큼의 권력을 가진 자가 뒤에 있었다는 거다.
서진의 머릿속에 두 가지 상황을 빠르게 떠올렸다.
우선 하나.
‘김영준 총장이 살해 현장을 목격했을 수 있어.’
당시의 김영준 총장은 갑작스레 밤중에 나가는 부모님의 뒤를 밟았을 수 있다.
그리고 그 현장을 목격.
‘범인이 다가와 협박했을 거야.’
하지만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둘이나 죽인 놈이다.
‘그런 놈이 협박으로 입을 막으려 했을까?’
그들은 목격자를 살려 두지 않는다.
게다가 30년 전, 그것도 비가 오는 밤이다.
목격자만 없다면 완벽하게 사건을 은폐할 수 있던 시기.
‘그럼?’
서진이 계속해서 생각하던 최악의 상황, 머릿속은 김영준 총장이 부모를 살해했을 수도 있다는 끔찍한 생각으로 이어지고 있다.
평범한 사람의 생각으로 그런 사이코패스 같은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범죄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파악된 사건 중 애인이나 동거 친족에 의한 살인은 28%를 넘어선다.
‘게다가 상대는 김영준 총장이야.’
서진은 곧 고개를 저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둔 채 진실에 접근해야 한다. 확신은 오류를 낳고 잘못된 판단은 죽음으로 다가설 수 있다.
지금은 김영준이라는 인간이 처음부터 괴물이었는지, 시간이 지나며 괴물이 되었는지, 그것을 확인해야 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권력을 가진 자와 김영준 총장의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그리고 원래의 서진은 그 사실을 캐냈었다는 거다.
서진이 휴대폰을 품에 넣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김서진…… 대체 어떤 것을 알아낸 거냐?’
앞에 뿌연 안개로 가득한 것처럼 머릿속에 의문이 가득했지만 서진은 조급하지 않았다.
원래의 서진이 무엇인가를 밝혀냈다는 것, 지금의 서진 역시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 김영준 총장의 발버둥을 즐겁게 지켜볼 수 있다.
그때 서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조우재 부장검사다.
-김영준 총장님이 엄 회장의 자택을 기습적으로 압수 수색한다고 하는데?
“갑자기요?”
-어.
서진이 통화를 종료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곧 끌끌 웃었다.
‘오해했구나.’
김영준 총장은 원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엄 회장을 치려 한다.
그 사실을 엄 회장이 지시했다고 여긴 거다.
‘재밌네, 재밌어.’
서진이 천천히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김영준 총장의 발악을 지켜볼 상황, 그 첫 번째가 시작될 시간이다.
“광현아, 뭐 하고 있어?”
-라면 먹고 있어요.
“슬슬 일해야지?”
도광현은 서진의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서진은 상황을 설명한 후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이번엔 엄 회장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엄 회장님, 서진입니다.”
* * *
“곧 회장님의 자택을 압수 수색할 겁니다.”
며칠 후, 엄 회장은 자신의 앞에 앉은 김영준 총장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를 잡겠다는 것인가?”
“살날도 얼마 안 남으셨는데, 지은 죗값은 치르고 가야죠.”
엄 회장이 껄껄 웃었다.
“이 사람아, 협박을 하려면 제대로 해. 내가 잡히면 자네가 먹을 떡고물이 없어지는데, 자네가 그런 짓을 한다고? 갑자기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시원찮아.”
“떡 먹으려고 기다렸는데, 칼을 들고 계시니 어쩔 수 없죠.”
엄 회장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노인의 눈빛이 김영준 총장을 살폈다.
“내가 칼을 들고 있다?”
“장지혁…… 그만 멈추게 하세요. 그놈, 나와 반대편에 서 있지만 꽤 괜찮은 검사입니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장지혁?”
엄 회장은 장지혁이 누구인가 떠올려 봤다. 언젠가, 김영준 총장이 죽여 달라 말했던 인물이다. 그 이름을 기억한 엄 회장이 낄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영준아…… 내가 왜 아무것도 없는 너를 사윗감으로 골랐는지 알고 있나?”
“지금은 옛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 하는 모든 일을 멈추지 않으면…….”
“네가 살모사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 지켜봤어.”
살모사의 이름은 죽일 사, 어미 모, 뱀 사로 구성되어 있다. 즉, 부모를 죽인 뱀이라는 거다.
그 말과 동시에 김영준 총장의 눈빛이 살기로 채워졌다. 그는 장지혁 검사의 뒤에 엄 회장이 있을 거란 것을 완벽할 정도로 확신했다.
김영준 총장의 살벌한 눈빛에 엄 회장이 손을 저었다.
“증거도 없고 그때 사람들도 다 죽었는데, 뭘 그리 겁을 내고 있누? 게다가 자네, 검찰총장이잖나? 밑의 애들이 등을 돌렸다 해도 그런 사실을 은폐하는 것은 갓난애를 집어 던지는 것보다 쉽지 않나?”
“회장님!”
엄 회장은 김영준 총장의 표정을 보며 즐기듯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난 그런 놈이 능력까지 있다는 것에 감탄했고 너 같은 놈이 위에 선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내 사업을 물려받기에 충분하다고 여겼지. 이 바닥은 돈을 못 받으면 부모, 형제라도 쥐어짜야 하는 곳이니까.”
“……!”
“그런데 지금 보니까 자네도 변했어. 능력은 사라지고 독기만 남았어.”
김영준 총장이 찻잔을 꽉 쥐며 말했다.
“계속 그렇게 나오신다면, 저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
“멈출 걸세.”
“회장님이 이뤄 낸 모든 것이 사라질 겁니다.”
“난 그것보다 더 지켜보고 싶은 게 있어. 뭔 줄 아나? 자네의 몰락. 그게 자네에게 시영이를 시집보낸, 내 죗값을 터는 거라고 생각하네.”
“다 뺏길 겁니다.”
“자네가 가져갈 것도 없겠지.”
엄 회장이 크게 웃었다. 김영준 총장은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입에 댔던 찻잔을 탁, 내려 뒀다.
“검찰에서 뵙겠습니다. 깨끗한 취조실을 준비해 둘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오십시오.”
“신경 써 줘서 고맙네. 역시 총장 사위가 있으니 좋아.”
대화는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다. 더 할 이야기는 없다. 김영준 총장이 몸을 일으킨 후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홀로 남아 있던 엄 회장이 입을 열었다.
“내 재산, 확실히 넘겨 뒀지?”
비서가 엄 회장의 옆에 서서 대답했다.
“네, 검찰이 수사한다 해도 회장님이 아니라 일본 측 자산이라 생각할 겁니다. 아니, 찾는다 해도 건들 수 없습니다.”
“이 집으로 대출도 받아 뒀고?”
“네, 그 돈도 함께 숨겨 뒀습니다.”
엄 회장이 끌끌 웃었다.
“빈집 털어서 뭐 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어. 영준이 그놈 표정이 궁금하구먼. 아, 김서진에게 연락해. 내가 밥이라도 한번 사야지.”
* * *
-검찰이 국내 사채업자의 대부라 알려진 엄 모씨의 집을 압수 수색했습니다. 엄 모 씨는 통장에 있는 12만 원이 자신의 전 재산이라며 검찰이 무리한 수사를…….
꽝! 꽝! 꽝!
김영준 총장이 손바닥을 들어 세차게 테이블을 두들겼다. 그 시뻘건 눈동자가 분노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