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을 베다. (2)>
“네, 약속할게요.”
하지만 엄시영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한 눈빛으로 서진을 바라본다. 그녀의 눈빛은 말하고 있다.
-입으로 한 약속은 믿지 못한다. 믿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내놓아라.
서진이 조용히 웃었다.
“작은어머니…… 제가 내민 동아줄이 멀쩡한 것인지, 썩은 것인지 생각할 시간은 없어요. 일단 잡으세요. 썩은 동아줄이라 해도 상관없잖아요? 떨어질 밑바닥은 더 없으니까요.”
“……!”
“하지만 작은아버지가 움직이면, 이야기는 달라져요. 바닥 밑에 지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실 거예요.”
엄시영의 입술이 씹혔다.
김영준 총장은 김윤환이 자기 자식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이 성공하기 위해 김윤환을 지옥으로 밀어 넣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놈은 언제나처럼 말할 거다.
-제 가족이기 때문에 더 가혹한 엄벌을 받아야 합니다. 언젠가 제 아들이 죗값을 치르고 나왔을 때, 저는 교도소 앞으로 찾아가 따듯하게 안아 줄 겁니다. 그때를 기다리겠습니다.
평생 자신을 속여 온 김윤환에게 가혹한 벌을 내리고 국민에게는 칭송을 받을 수 있는 기회. 김영준 총장은 놓치지 않을 거다.
엄시영이 지켜본 김영준 총장은 자신이 살기 위해,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혹한 자였다.
그런 끔찍한 미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 서진의 손을 잡아야 한다.
“맞아. 그이야.”
“……!”
“네 작은아비가 널 죽이려 했어.”
엄시영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서진의 표정 역시 담담했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인간의 탈을 쓴 추악한 짐승이 어디까지 썩어 있는지, 그 뱃속이 얼마나 시커멓게 문드러져 있을지, 그게 궁금할 뿐이다.
하지만 꽉 쥔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어쩔 수는 없었다.
“……이유는요?”
“이유?”
“조카입니다. 자기 형의 아들이죠. 그런데도 죽이려고 했을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죠.”
서진은 생각했다. 김영준 총장이 서진을 죽이려 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다. 원래의 서진이 놈의 역린을 쥐고 흔들었을 게 분명하다.
‘그게 무엇인지 알면…….’
확실히 김영준 총장의 목을 벨 수 있다.
그리고 엄시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옛 생각을 하는지 눈동자를 기울이던 그녀가 잠시 후, 고개를 저었다.
“몰라. 너를 죽이려 했다는 것은 나도 지나가며 들은 이야기야.”
“…….”
서진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진실을 알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고 김윤환이라는 놈을 거래 대상으로 삼았지만, 받아 든 진실은 미적지근하다.
‘시간…….’
시간이 충분하다면, 지금 얻은 것만으로도 만족했을 거다.
하지만 대선이 가까워지고 있다. 백기호 의원의 지지율은 계속해서 치솟는 중이다. 이대로 청와대로 직행한다면, 서진이 계획했던 모든 일을 엎어지고 만다.
김영준 총장을 잡는 그 순간을 5년, 어쩌면 10년 뒤로 미뤄야 할 최악의 상황이 다가오는 거다.
“감사합니다.”
서진이 엄시영에게 꾸벅 인사하고 몸을 일으킬 때였다. 엄시영이 입을 열었다.
“하나…… 기억나는 게 있어. 이게 단서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말씀해 주세요, 뭐든.”
“그때…… 그러니까 그 사고가 있기 전에…… 넌 원주에 간다고 했었어.”
“원주요?”
“그래, 아버지의 고향을 둘러보겠다나? 어쨌든, 그렇게 여행을 간다고 했던 애가 서울 아파트에서 떨어졌다고 연락이 왔었어.”
원주는 김준만, 김영준의 고향이다. 시골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두 사람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토지 보상금을 받아 서울로 입성했다.
김준만은 때때로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의 묘소를 벌초하지만 김영준 총장은 십수 년의 시간 동안 그곳을 찾지 않았다.
‘단 한 번도…….’
* * *
“작은아버지는 왜 고향에 안 내려갈까요?”
집에 들어간 서진은 아버지 김준만을 찾아 물었다. 응접실에 앉아 한강을 바라보던 김준만이 시선을 틀어 서진을 향했다.
“어?”
“추석이 다가오는데, 그냥 궁금해서요.”
김준만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바쁘니까 못 갔지. 너도 집에 잘 못 들어오잖아? 예전에는 더 심했어. 새벽 4, 5시까지 일하고 주말도 못 쉬고. 매일 파김치가 되어서 들어오는데, 그런 애를 앞에 두고 어떻게 벌초하러 가자고 말할까?”
서진이 김준만의 앞에 마주 앉으며 계속 질문을 이어 갔다.
“할아버지, 할머니 돌아가시고 토지 보상을 받아서 서울에 올라오셨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때도 토지 보상 문제로 시위 같은 것을 하고 그랬나요?”
“갑자기 그런 것은 왜 물어?”
“궁금해서요. 기억이 조금 돌아왔는데…….”
기억이 돌아온다는 말에 김준만의 행동이 덜컥 멎었다. 반가운 표정으로 서진을 바라봤다.
“어떤 기억? 말해 봐. 어떤 거?”
“제가 떨어지기 전에 원주에 간다고 했었잖아요. 거기까지만 기억나요. 그래서, 궁금해졌고요.”
김준만이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토지 보상……. 그래, 시위했지. 농민들에게는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는데, 그곳에 골프장을 조성한다 하고 아파트를 짓는다 하고.”
문제는 소유자의 60% 이상이 외지인이었다.
그들은 정치인이었고 재력가였다.
헐값에 땅을 사서 건설이란 이름으로 땅값을 부풀렸다.
그들은 국가 산업에 찬성했고, 나머지 40%의 농민이 흘린 피와 땀은 ‘몇 푼이나 된다고?’라는 말과 함께 무시당했다.
“업무방해죄로 고소당했고, 그게 법이었어.”
긴 싸움에 지친 농민은 땅을 팔고 떠났다. 그렇게 외지인이 소유한 땅은 80%를 넘어섰다. 남은 20%의 농민, 그들의 목소리는 작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끝까지 버텼지. 앞장을 섰고 터전을 지키려 하셨어.”
그러다 살해당했다고 한다. 분명 살해당했는데, 범인은 찾을 수 없었고 그 사건은 사고사로 기록되었다.
법은 그들을 지켜 주지 않았다.
“그래서 영준이가 법 공부를 한다고 한 거야. 법은 약자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하면서.”
김준만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김영준 총장의 순수했던 옛 모습을 떠올린 거다.
“약자를 위한다던 놈이…….”
김준만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랬던 김영준 총장이 탐욕스러운 괴물이 되어 세상을 집어삼키는 게 씁쓸하기만 했다.
하지만 서진은 조금 더 질문을 이어 갔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보상을 받은 건가요?”
“그래…….”
“얼마나요?”
김준만은 다시 물끄러미 서진의 얼굴을 바라봤다. 왜 그런 것을 물어보고 있을까 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숨기지 않고 이야기했다.
“3천만 원.”
서울 강남의 아파트가 평당 80만 원 정도 할 때다. 당시에는 적지 않은 돈, 아니 매우 큰 돈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목숨값에 대한 위로금을 합친 거지. 부끄럽지만 우리는 그 돈을 받았어.”
서울로 올라온 두 형제는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며 예금을 넣었고 달방을 전전했다. 김준만은 그 시기에 경험을 쌓았고 김영준은 공부를 해 검사가 되었다.
여기까지 보면, 어떤 문제도 없다.
하지만 서진은 걸리는 게 두 가지 있었다.
우선 첫 번째.
-김영준 총장은 왜 고향에 내려가지 않을까?
원주는 먼 곳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다.
서진이 춘천에 있을 때, 김영준 총장은 잠시 짬을 내어 내려온 적이 있다.
원주나 춘천이나 서울에서 본다면 비슷한 거리.
그리고 두 번째 의문.
-원래의 서진은 그곳에 왜 가려 했고 김영준 총장은 무슨 이유로 서진을 죽이려 했을까?
서진의 입가에 헛웃음이 흘렀다.
설마설마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불쾌하고 상상하기도 싫은 시나리오가 계속해서 솟구친다.
예상이 맞는다면, 김영준은 말 그대로 인간쓰레기다.
하지만 아직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직접 움직여 봐야 한다.
서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 * *
“백기호 의원하고 긴밀한 약속을 한 것 같아. 남은 시간 동안 총장님의 이미지를 만들고…….”
며칠 후, 한정식집. 서진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조우재 부장검사를 만나고 있었다.
조우재 부장검사는 김영준 총장의 옆에 붙어 재정건설을 수사하는 척, 그 몸짓을 지켜보는 중이다.
아무리 김영준 총장이라 해도 부장검사급이 서진의 앞에서 절절맨다는 것은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김영준 총장은 조우재 부장검사를 하찮게 생각한다. 여당의 무리가 조우재 부장검사는 거들떠보지 않을 거라 여기고 있다.
그래서 김영준 총장은 조우재 부장검사를 이용하려 한다. 조우재 부장검사의 목줄이 서진의 손에 감겨 있는 것을 전혀 모른 채.
서진이 젓가락을 움직이며 말했다.
“총장한테 슬쩍 흘려 줄 말이 있어요.”
“어떤?”
“장지혁 검사가 원주에 간다는 말을 전해 주세요.”
“……원주? 그것만 달랑 말해?”
“네, 스쳐 가는 말처럼 던지면 될 거예요. 제 생각이 맞는다면, 총장은 그 말을 놓치지 않을 테니까요.”
조우재 부장검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서진을 바라봤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더 묻지 않는다. 조우재 부장검사는 김영준 총장의 아래에 있으며 배워 온 게 있다. 시키는 것은 묻지 말고 하면 되는 거다.
* * *
조우재 부장검사는 서진과 헤어진 후 곧바로 김영준 총장을 찾았다.
서진에게 얻은 자료를 통해 재정건설에 대한 이런저런 보고를 한 후, 찻잔을 입에 대던 조우재 부장검사가 적막한 분위기를 전환하듯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아…… 장지혁이 원주에 간다고 하네요? 강원도로 유배 갈 거니까, 미리 구경하겠다나? 그럴 거면, 동남군에 가야지, 왜 원주? 그놈, 참 이상하죠?”
조우재 부장검사는 농담처럼 말을 던지며 김영준 총장의 표정을 힐끗 살폈다.
서진의 말에 따르면 어떤 반응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김영준 총장의 포정은 건조하다. 관심 없는 듯 조우재 부장검사의 말을 한 귀로 흘리는 것 같다. 그저 무심히 대답한다.
“그래?”
“네.”
조우재 부장검사는 찻잔을 내려 두며 눈을 살짝 찡그렸다.
‘뭐야? 별것 없는데?’
조우재 부장검사는 한 번 더 떠볼까 하다가 말았다.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언제?”
“네?”
“장지혁, 그놈. 언제 원주에 간다고 하지?”
조우재 부장검사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뭔지는 모르지만, 김영준 총장이 이렇게 나왔다는 것은 분명 뭔가 일이 벌어질 거라는 뜻이다.
* * *
그리고 그 시각.
서진은 장지혁 검사의 방으로 들어갔다.
“또 뭘 시키려고?”
장지혁 검사는 서진을 보자마자 경계했다. 서진은 어깨를 으쓱거린 후 책상에 쪽지를 내려 뒀다. 거기에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동안 바쁘셨는데, 하루 정도 여행 좀 다녀오세요.”
장지혁 검사는 서진이 이유 없이 여행을 보낼 성격이 아니란 것을 잘 안다.
“원주? 갑자기 원주는 왜? 여행 같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본론이나 말해.”
“글쎄요. 저도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말씀드리기는 어려워요. 그런데…… 위험할 것은 분명해요.”
“액티비티한 여행이겠네.”
“땅에 파묻히는 경험을 할 수도 있죠.”
서진이 생각한 게 맞는다면, 김영준 총장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장지혁 검사를 죽이려 할 거다.
김영준 총장은 조카인 서진까지 죽이려 했던 사람, 장지혁 검사를 죽이는 데 망설임이 있을 리 없다.
장지혁 검사가 끌끌 웃었다.
“이것도 김 총장이랑 관련 있는 거지? 한 스무 명 붙여 줘라. 산속에 파묻혀 죽기는 싫으니까.”
서진은 위험의 경고를 들었어도 느긋하게 행동하는 장지혁 검사를 보며 슬쩍 웃었다.
나쁜 놈 때려잡기 위해 검사가 되었다는 사람, 쪽팔린 짓은 하고 싶지 않다는 사람, 이런 사람이 검사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이런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절대 안 죽을 겁니다.”
서진의 말에 장지혁 검사가 쪽지를 흔들며 물었다.
“됐고. 그래서, 언제 가면 되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