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몰려오면 (5)>
비서실장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며 시선을 틀었다. 앞에 서진이 보인다. 비서실장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겠어요?”
트럭에 가득한 자료는 재정건설에 대한 것. 저것을 공개하면 서진의 아버지 김준만도 다칠 수 있다.
“김영준 총장이 혼자 저지른 짓이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겁니다.”
-대표가 저걸 몰랐다고? 헛소리지.
-지금까지 김영준이 비리를 막아 준 대가 아니냐?
-둘 다 흙수저였다며? 그런데 저렇게 성공할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다.
-동생이 막아 주고 형이 돈 챙기고. 더럽다. 카악! 퉤!
그 목소리가 벌써부터 들려오는 것 같다.
하지만 서진의 눈동자는 담담했다. 비서실장에게 트럭의 키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는 안 될 겁니다. 그러니까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이 서류를 정치적 도구로 이용 안 하셨으면 좋겠네요.”
이 트럭에 있는 자료를 사용하면 김영준 총장의 목을 움켜쥘 수 있다. 김영준 총장과의 거래를 통해 백기호 의원을 끌어내릴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서진의 아버지 김준만은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된다.
김영준 총장은 김준만에게 보복성 총구를 들이밀 거다.
서진의 목소리에 살기가 채워졌다.
“만약, 그런 행동을 한다면 후회할 겁니다.”
서진의 눈빛은 살벌했다. 그 눈빛에 비서실장이 슬며시 미소를 그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그렇고…….”
비서실장이 담배를 입에 물며 말을 이었다.
“특검이 시작될 겁니다. 추천해 줄 만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이두진 변호사 그리고 장지혁 검사. 이 두 사람이면, 잘할 겁니다.”
서진은 그 말을 남기고 걸음을 옮겼다. 트럭의 뒤를 쫓아온 도광현의 차가 보인다.
서진이 차에 오르자 도광현이 시동을 걸며 말했다.
“어디로 갈까요?”
“강남.”
청와대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 레임덕에 빠진 대통령.
국민은 지금의 대통령보다 김영준 총장을 더 지지하고 있다.
자료가 터져도 김영준 총장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다. 오히려 발버둥을 칠 수 있다.
“이제 김영준의 팔다리를 잘라야지.”
어차피 세상사는 인간이 만들어 가는 것.
김영준 총장의 주변을 쳐 내고 철저히 고립되게 만들면 그 목을 벨 수 있다.
강남에는 계획의 시작이 기다리는 중이다.
* * *
김영준 총장은 한참 동안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귓가에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귀를 스치는 중이었다.
-이거…… 문제가 생겨서요. 해명을 또 하셔야 할 것 같은데……. 가득하네요.
김영준 총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문제?’
순간 형 김준만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내일 아침이면, 저 트럭에 있는 모든 자료가 청와대로 향할 거야.”
김영준 총장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몸을 틀었다. 긴 테이블에 앉은 검사들이 보인다. 그들을 향해 김영준 총장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같은 뗏목을 탔어. 목적지는 같아. 그리고 이번 목적지는 바람이 거셀 거야. 파도가 몰아치겠지. 하지만 파도를 이겨 내고 도착한 곳에 낙원이 있을 거다.”
“……!”
“첫 번째 타깃이다. 비서실장 최서우. 그놈이 입은 팬티의 색깔까지 털어 와. 기간은 하루. 우리는 오늘 최서우를 법 앞에 세운다.”
“……!”
“죽여.”
그 한마디에 검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일제히 김영준 총장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네!”
“나가!”
김영준 총장의 외침에 그들이 빠르게 공간을 벗어났다. 텅 빈 그곳에 홀로 서 있던 김영준 총장이 다시 끌끌 웃었다. 그리고 텅 빈 공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형…… 정말 미쳤구나?”
김영준 총장이 고개를 저었다.
“형…… 미안한데, 난 안 죽어. 지금부터 권력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려 줄게.”
그 눈빛이 서슬 퍼렇게 빛나기 시작했다.
* * *
대검의 반부패강력부장과 각 검사장들이 흡연실에 모였다. 그들은 담배를 입에 물며 청사진을 그리는 중이다.
검사장들이 반부패강력부장을 보며 낄낄 웃었다.
“좋겠다? 국회의원 되겠네?”
“아이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총장님 표정 보니까, 뭔 일 난 것 같던데……. 김칫국 마시기 전에 비서실장부터 잡아야지.”
한 검사장이 담뱃재를 툭툭 털며 반부패강력부장을 바라봤다.
“비서실장은 네가 털 수 있지?”
“대통령이 뒷방 늙은이가 됐는데, 그 집을 털어 내는 게 뭐 어려울까요? 가볍게 팔목을 비틀어 잡아 오겠습니다.”
그들이 낄낄 웃어 댔다.
이미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눈빛이다.
* * *
서진은 장석민을 만나 한 오피스텔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이곳에 김영준 총장을 고립시킬 첫 번째 계획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반부패강력부장의 아들이다.
“여기 맞지?”
“네. 며칠 전부터 감시했는데, 패턴이 똑같아요. 여자 끌고 와서 자고, 오후 늦게 일어나서 술 처먹고.”
서진은 초인종을 눌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안에서 잠이 덜 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열어.”
“누군데?”
“열지 않으면 부수고 들어간다.”
서진의 냉랭한 목소리에 문이 빼꼼 열렸다. 속옷만 입은 20대 초반의 남자가 고개를 내민 채 서진을 보며 물었다.
“누구냐고.”
시건방진 목소리, 서진은 대답하지 않고 문을 확 열어젖혔다. 속옷만 입은 남자는 당황했다.
“뭐, 뭐야!”
서진은 남자를 신경 쓰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장석민이 쫓았다.
“뭐냐고!”
남자의 외침에 장석민이 슬쩍 웃었다. 그리고 남자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다정하게 말했다.
“저승사자.”
“……뭐?”
“너 이제 좆 됐어.”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미친 새끼들이, 내가 누군지 알……!”
“알아. 네 아빠가 대검 반부패강력부장이잖아?”
“어?”
남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갑자기 들어온 서진과 장석민은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뭔가 있다는 거다.
그리고 남자는 이제야 떠올렸다.
먼저 들어왔던 서진의 얼굴.
“……김서진 검사?”
남자가 입술을 씹었다.
“씨발…….”
그사이 서진은 이미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한 여자가 이불로 몸을 가린 채 누워 있다. 겁에 질린 얼굴로 서진을 바라보고 있다.
서진이 방을 휘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쪽은 민망하니까, 계속 이불로 가리고 있어. 일어나지 말고 숨도 쉬지 마. 지금은 기분 나쁘겠지만 조금 있으면 나한테 감사할 거야.”
여자는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이 천천히 몸을 틀었다. 그리고 벽에 걸린 액자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동시에 남자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 영장 있어?”
서진이 황당한 표정으로 시선을 틀어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가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외치고 있다.
“영장 있냐고!”
서진이 낄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팬티만 입은 채 발악하는 남자의 모습이 웃기기만 했다.
“없어.”
“지, 지금 이거 무단 침입이야.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안다고 했지? 당장 전화할 거야. 그런데 그냥 돌아가면…… 내가 참을…….”
“참아?”
“그, 그래.”
“네가?”
서진이 한심하다는 듯 웃었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어설픈 협박.
저런 것에 머뭇거릴 서진이 아니다. 거침없이 액자를 뜯어냈다.
“아, 안 돼!”
남자가 뛰어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액자에 치렁치렁 선이 늘어져 있는 게 보였다. 몰래카메라다.
서진이 액자를 바닥에 툭 던지며 말했다.
“할 말 있으면 해 봐.”
남자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당당했던 모습은 사라졌다. 이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선다. 그 입에서 공포에 질린 신음 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아…….”
서진이 액자를 짓밟으며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유리가 깨지며 바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앞에 선 서진이 그 손에 쥐인 휴대폰을 빼앗아 들며 물었다.
“비밀번호 패턴이 뭐야?”
“모, 몰라요.”
순간, 동영상이 촬영되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시선이 다급히 틀어졌다. 장석민이 남자의 모습과 주변의 모든 것을 찍으며 씩 웃었다.
“기자님께 보낼까요? 대검 반부패강력부장의 아들이 리벤지 포르노의 전문가라는 게 알려지면, 재밌을 것 같은데요.”
리벤지 포르노라는 말에 침대에 앉아 있던 여자가 분노했다.
갑작스레 나타난 서진과 몰래카메라에 혼이 빠져 있었지만 장석민의 목소리에 정신 차린 거다.
“이 변태 같은 새끼가!”
상황은 개판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자에게 여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 해결해야 할 것은 서진이다. 남자가 울 것은 얼굴로 파리처럼 손바닥을 비볐다.
“제, 제발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정말요.”
남자는 팬티만 입은 채 무릎까지 꿇었다. 정말 간절히 빌었다.
“그러니까 제발…….”
“됐고. 패턴이나 말해. 기자에게 던지기 전에 어서.”
하지만 서진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눈빛은 건조했다. 그 어떤 행동을 해도 봐주지 않는다.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패턴은 N이에요.”
서진은 휴대폰에 패턴을 입력하고 갤러리를 확인했다. 난리다. 수많은 여성들의 헐벗은 영상이 가득하다.
서진이 그 영상을 반부패강력부장에게 보냈다.
곧바로 휴대폰이 울린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뭘 하고 돌아다니…….
“김서진입니다.”
-……!
반부패강력부장은 말이 없었다.
난데없이 들려온 서진의 목소리에 입을 닫았다.
“주변에 사람들 있으면 옆으로 피하시죠. 아드님께 심각한 일이 벌어졌거든요.”
뇌물이나 마약이 아닌, 몰카.
이게 세상에 공개되면 아들의 인생은 끝이다.
신상 공개가 되어 영원히 고개를 숙이고 살아야 한다.
“확신할 수 없는 미래의 청사진과 지금 당장 벌어질 아들의 현실. 선택하셔야겠네요.”
반부패강력부장은 김영준 총장의 손과 발이 되어 타깃을 사냥하는 사냥개다.
오랜 시간 함께했고 김영준 총장은 반부패강력부장에게 국회의원 공천이라는 꿈마저 심어 줬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서진에 의해 그 연은 끊어졌다.
* * *
그 시각, 사무실에 들어온 김영준 총장은 책상 서랍을 열었다. 보이는 것은 USB.
얼마 전, 엄시영이 가져왔던 것.
김영준 총장이 잔인하게 웃으며 휴대폰을 귀에 댔다.
“진 대표, 특종 하나 보낼게. 재정건설. 그래…… 우리 형의 회사야. 그동안 탈세와 횡령…… 어쩔 수 있나? 죄가 있으면 형이라 해도 심판을 받아야지.”
-알겠습니다.
“오후에 브리핑할 테니까, 동시에 터뜨려.”
휴대폰을 내려 둔 김영준 총장의 시선이 다시 USB로 향했다. 그리고 USB를 손에 들어 올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건에는 유통기한이라는 게 있어. 먼저 터뜨리는 놈이 신선한 것이고 결백한 거야.”
김영준 총장은 결심했다.
청와대가 자료를 조사하고 파악할 시간에 USB에 있는 내용을 터뜨리기로.
“아들을 잡아넣고 아내를 구속시키고 이제 형까지 집어넣으려는 검찰총장…….”
계획대로 된다면 세상은 김영준 총장을 청렴결백의 상징으로 여기게 될 거다.
법 앞에 엄격한 사람으로서 이 대한민국을 깨끗하게 만들어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을 게 분명하다.
“대통령은 나 같은 사람이 되는 거야.”
김영준 총장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 입에서 스산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문이 쾅, 열리고 반부패강력부장이 들어왔다.
반부패강력부장의 표정이 심각하다.
“왜? 무슨 일이야?”
김영준 총장의 미간이 찌푸려질 때, 반부패강력부장이 말없이 리모컨을 들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텔레비전이 켜진다.
화면에 단상이 보였고 굵은 글씨의 자막이 보인다.
-재정건설 김준만 대표, 횡령 및 탈세에 대한 대국민 사과
김영준 총장의 얼굴이 뻣뻣하게 변해 갔다. 입이 파르르 떨린다.
“저, 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