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몰려오면 (4)>
서진의 날카로운 눈빛에 엄 회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차를 마실 뿐이다. 그렇게 적막한 시간이 지나고 엄 회장이 입술을 움직였다.
“……조금만 시간을 주게.”
엄 회장은 속단하지 않았다. 마주한 서진은 어리다. 서진의 생각만 듣고 구렁이와 같은 김영준 총장과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서진은 엄 회장의 생각을 읽었다. 하지만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엄 회장 역시 의심으로 가득한 인생을 살아왔다. 불신의 씨앗을 뿌려 둔 이상 김영준 총장과 결코 함께할 수 없다.
서진이 찻잔을 손에 쥐며 말했다.
“하루 드리겠습니다.”
서진의 건방진 목소리에 엄 회장의 눈빛이 불편해졌다.
“하루?”
“네.”
엄 회장의 입술이 뒤틀렸다. 지금껏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모든 사람은 엄 회장의 대답을 한없이 기다려야 한다. 엄 회장이 대답해 주지 않으면 몇 달이고 기다리는 게 세상의 룰이었다.
하지만 서진은 달랐다. 그 기한을 정하고 있다.
“아실 겁니다. 김영준 총장은 생각한 것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죠. 그래서 회장님의 결단을 기다려 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내가 자네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박쥐처럼 김영준 총장에게 붙을 겁니다.”
“뭐라?”
엄 회장의 눈에 의문이 가득 채워졌다. 서진은 김영준 총장을 잡겠다며 이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 옆에 붙겠다니.
“자네 부친과 김영준이 갈라섰다고 했잖나? 그런데 김영준의 옆에 있겠다고? 김영준이 받아들일 것 같나?”
“김영준 총장은 앙숙이었던 백기호 의원과도 손잡았습니다.”
김영준 총장은 이득이 된다면 상대가 누구든 함께하는 사람이다.
엄 회장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회장님의 선택이 미적지근하다면 제 선택은 어쩔 수 없습니다. 언젠가 회장님의 힘이 김영준 총장에게 기운다면, 그건 참…… 벅찰 것 같거든요.”
자라날 싹을 미리 잘라 버리겠다는 뜻.
찻잔을 쥔 엄 회장의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엄 회장에게 서진은 애송이다. 기껏해야 평검사다. 하지만 스타라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서진의 입에서 나온 말에는 힘이 있다. 저런 놈이 김영준 총장의 편에 선다면 성가실 일이 많아질 거다.
엄 회장이 화를 꾹 참으며 서진을 말리려 했다.
“알지 않나? 김영준은 언젠가 또 뒤통수를 칠 게야.”
서진이 끌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 지금 회장님 앞에 앉아서 건방을 떨고 있는 중입니다. 미래를 생각했다면, 이런 짓은 못하겠죠.”
“그래서…… 김영준과 손잡고 날 치겠다고?”
“몇 번을 물어보시는 겁니까? 제가 겁이 나면, 계산기 그만 두들기시고 손잡으시죠.”
“자네…….”
엄 회장의 목소리는 이어질 수 없었다. 서진이 그 말을 끊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이 건방졌지만 엄 회장은 입을 열지 않았다.
입술을 꾹 닫은 채 서진을 노려볼 뿐이다.
서진은 엄 회장을 향해 고개를 숙인 후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주변을 채운 사내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만약에…… 지금 이 자리에서 나온 말이 김영준 총장의 귀에 들어간다면, 이 중에 한 사람이겠네요.”
자신들을 의심하는 목소리에 사내들이 살벌한 눈으로 서진을 쏘아봤다. 하지만 상대는 서진이다. 깡패들의 시선에 주눅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눈빛을 가소롭다는 듯 마주하며 조용히 말했다.
“그런 일 없었으면 좋겠네. 뼈까지 씹어 먹을 테니까.”
그 말을 엄 회장이 받았다.
“그건 걱정하지 마. 그런 일이 있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죽일 테니까.”
“그건, 무혐의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서진이 사내들을 스치며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엄 회장이 나가라는 신호도 보내지 않았는데, 멋대로 행동하는 거다.
한 사내가 서진을 막으려 했다.
“회장님 말씀이 아직 끝나지…….”
“비켜.”
사내는 서진의 눈빛에 움찔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서진은 그렇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엄 회장은 계속해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바위처럼 굳은 자세로 허공만 응시하고 있다.
엄 회장은 김영준 총장과 김서진, 어느 쪽이 덜 손해인지 계산하는 중이다.
김영준 총장을 살려 두면, 모든 유산이 그놈의 손에 들어갈 확률이 있다.
‘하지만…….’
김영준 총장은 지금 한창 뜨는 해다. 많은 권력자가 그 앞에 몸을 조아리고 있다. 섣불리 건들기 어렵다.
지금은 김영준 총장의 손을 들어 주고 가진 모든 재산을 뒤로 빼돌리는 게 우선이다.
‘그런데…….’
엄 회장은 망설이고 있었다.
오랜 세월 지옥에서 살아온 그 감이 외치고 있다.
서진의 말을 따르라고.
그게 조금이라도 더 숨 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엄 회장은 서진이 두려웠다. 그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본능이었다.
‘대체 뭐냐…….’
그때 엄 회장의 곁으로 비서가 다시 다가섰다.
“김영준 총장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지금껏 망설이던 엄 회장의 눈빛에 힘이 들어갔다. 결심의 시간은 하루도 길었다.
“잔다고 해.”
* * *
엄 회장의 집에서 나온 서진은 집으로 향했다.
응접실의 불이 환히 켜져 있다.
응접실을 살짝 살폈더니 아버지가 홀로 앉아 창밖을 보고 있다.
응접실의 테이블에는 소주 한 병이 놓여 있을 뿐이다.
지금은 어떤 위로도 전할 수 없다.
서진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였다.
“아들.”
아버지의 목소리에 서진의 걸음이 뚝 멎었다.
“한잔해.”
서진이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 마주 앉았다.
아버지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소주잔을 꺼내 쪼르르 채운 후 서진의 앞에 내려 두는 게 전부였다.
서진은 거부하지 않고 잔을 받아 입에 댔다.
그러자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죽을 때까지…… 진영이하고 지금처럼 지내야 한다.”
“네.”
서진이 술병을 들어 아버지의 잔을 채웠다.
아버지가 술잔을 입에 댄 후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외부감사를 계획한 것은 서진이었고 오늘 그 창고로 데려간 것도 서진이었다.
서진은 아버지의 앞에서 김영준 총장의 껍데기를 벗겼다.
아버지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질문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할 수는 없다.
서진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검찰에 떠도는 소문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냥 확인해 봤던 거예요.”
“그래…….”
아버지는 몇 잔 더 술을 마셨다. 그동안 어떤 말도 없었다. 그리고 잔을 탁 내려 두며 입을 열었다.
“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는 항상 말씀하셨어, 동생과 잘 지내라고. 유일한 피붙이가 될 거라고. 그리고 동생이 잘못된 길로 향하면 매를 들어서라도 말리라고.”
“…….”
“서진아…… 미안하다. 이 아비가 네 작은아버지한테 매를 들어야겠다.”
아버지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가 기억하던 순수했던 동생 김영준은 이제 없다. 탐욕을 위해 가족조차 씹어 먹는 괴물만 보일 뿐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괴물을 되돌려 놓기 위해 회초리를 들려 한다.
서진은 말없이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가 김영준 총장과 싸우면, 말 그대로 자폭이 될 수 있다.
김영준 총장이 저지른 죄목이 아버지의 어깨 위에 올라갈 수도 있는 일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가만히 있으면…… 너희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 있어.”
“…….”
“잠시 힘들어질 거야. 그래도 이 아비를 믿고 견뎌 줬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예상하고 있었다. 자신 다음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 것은 서진이 될 거라고.
서진은 김영준 총장과 똑같은 일을 한다.
그 좁은 바닥에서 서진의 작은아버지가 김영준 총장이란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따가운 눈초리를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진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은 자신이 받을 피해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받을 피해를 해결할 방법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해결해야 한다.
고름을 짜는 게 아프다고 내버려두면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올 것은 분명한 일이다.
지금 짜야 한다.
“저는 괜찮아요. 그렇게 하세요.”
“고맙다, 이해해 줘서.”
서진은 천천히 시선을 틀어 창밖을 바라봤다.
어두운 창에 서진의 얼굴이 비친다.
* * *
다음 날.
대검의 회의실.
그 넓은 공간에 대검의 주요 직책에 앉은 검사들, 그리고 각 지역의 검사장이 자리했다.
공간은 적막하다. 그 모든 사람이 김영준 총장만 바라보고 있지만, 상석에 앉은 김영준 총장은 어떤 말도 내뱉지 않고 손에 쥔 서류만 천천히 넘기고 있었다.
그리고 김영준 총장이 지나가는 말처럼 입을 열었다.
“내가 약속 안 지키는 거 본 적 있나?”
뜬금없는 말에 서로는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김영준 총장이 다시 물었다.
“내가 약속 안 지킨 것 있나?”
“없습니다!”
검사들이 한목소리를 내뱉었다.
원하던 대답을 들은 김영준 총장이 테이블을 짚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모인 모두의 얼굴을 살펴보며 무거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대구에서, 부산 그리고 수원과 전주…… 우리는 각지에서 만났어. 나쁜 놈 잡겠다고 밤새 일하고 그 기쁨에 새벽까지 술을 마셨어. 가끔 그때가 그리워.”
김영준 총장이 손으로 테이블을 탁탁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이제 그 추억을 뒤로하고 난 새로운 길을 가려 한다. 그래서 슬슬 이 자리를 정리하는 중이야.”
“……!”
“이 자리, 너희 한 사람에게 넘길 거야. 그다음도, 그리고 그다음도 너희들 중에 이 자리의 주인이 만들어질 거야. 물론, 모든 사람이 다 앉을 수는 없어. 하지만 앉지 못하는 사람도 걱정하지 마. 섭섭하게 대할 생각은 없으니까.”
검사들이 눈을 가늘게 떴다.
김영준 총장의 말이 꼭 은퇴 선언을 하는 것처럼 여겨져서다.
그리고 김영준 총장의 목소리가 ‘쿵!’ 소리가 나는 것처럼 들려왔다.
“난 백기호를 지지하고 있다.”
“……!”
“백기호가 대통령이 되면, 난 법무부 장관을 거쳤다가 국회로 이동할 거야. 잠시 너희와 떨어져 있겠지. 하지만 그다음 목적지는…… 너희와 함께하고 싶다.”
그다음 목적지는 뻔하다. 국회에서 이동할 곳은 당연히 청와대다.
모든 사람이 긴장된 숨을 내뱉었다.
김영준 총장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멎었다.
“지환아, 국회의원이 되고 싶다고 했지?”
“네?”
“내가 널 공천에 넣어 주마.”
이름 불린 검사가 다급히 몸을 일으킨 후 허리를 굽혔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해하지 마. 좋은 자리는 못 주니까.”
“그, 그래도 감사합니다!”
메이저 야당의 공천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검사는 고개를 조아렸고 김영준 총장의 시선이 틀어졌다.
“형욱아, 검찰총장은 한 번만 양보해. 순욱이가 너보다 기수가 높잖아.”
형욱이라 불린 검사가 멋쩍은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하.”
김영준 총장이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눈동자를 옮겼다.
“진수야, S로펌에 연락해 뒀어. 대선이 끝난 후 사표 던지고 떠나. 대법관급의 몸값을 받을 수 있을 거야.”
“가, 감사합니다!”
김영준 총장이 뒷짐을 진 채 창가로 걸어갔다.
“이 모든 것은 백기호가 대통령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야. 그래서 난 너희를 위해 백기호를 대통령으로 만들 생각이다.”
“……!”
여당을 타깃으로 잡고 움직이겠다는 뜻이다.
“앞으로 몇 개월, 여당은 우리를 탄압할 테고 언론은 우리에게 칼을 쑤실 거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힘들 거야. 하지만 우리…… 몇 개월만 더 고생하자.”
“…….”
“그리고 그때, 다시 함께 모여 밤새 술을 마시자!”
김영준 총장의 힘찬 목소리에 검사들이 다시 일제히 외쳤다.
“예!”
김영준 총장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제 준비는 마쳤다.
황금 알을 낳은 거위, 재정건설이 마음에 걸리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거다.
그런데 그때였다.
품에 놓인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 번호를 확인한 김영준 총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와대?’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김영준 총장이 휴대폰을 귀에 댔다.
“말씀하세요.”
-이거…… 문제가 생겨서요.
“문제요?”
-해명을 또 하셔야 할 것 같은데…….
* * *
같은 시각,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이 휴대폰을 귀에 대고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서실장의 앞으로 트럭 세 대가 들어오는 중이다.
그 트럭이 비서실장의 앞에 멈췄고 조수석에서 서진이 내렸다.
비서실장을 향해 허리를 굽힌 서진이 트럭의 화물칸으로 이동해 닫힌 문을 활짝 열었다.
가득한 서류가 드러났다.
지켜보던 비서실장이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가득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