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몰려오면 (1)>
* * *
사이코메트리에서 나타난 것은 김영준 총장의 사무실이다.
엄시영이 그곳에 나타나 김영준 총장의 테이블에 USB 하나를 툭 던졌다.
그리고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 그동안 재정건설에 사람 심어 놓고 많이도 해먹었더라? 윤환이 꺼내지 않으면 당신이 해 먹은 모든 것을 당신 형의 잘못으로 넘길 거야.”
엄시영은 김영준 총장을 협박하고 있었다. 김윤환을 꺼내지 않으면 서진의 아버지를 교도소로 보내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김영준 총장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엄시영을 노려봤지만 그녀는 끝을 모른 채 계속 말했다.
“당신도 당신 형을 거위로 생각했잖아? 언젠가 잡아먹을 생각 아니었어?”
김영준 총장은 고개를 저었다.
“난 형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하지만 두 사람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질 수 없었다. 김영준 총장의 휴대폰이 진동했고 엄시영이 살인을 저질렀던 양평 땅, 그곳에서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휴대폰을 내려 둔 김영준 총장이 엄시영을 보며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손에 USB를 쥐며 낮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변사체가 발견됐다.
-난 움직일 수 없다. 내가 움직이면, 여당의 귀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잘난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도움을 요청해라.
엄시영은 끝까지 부정하려 했다.
“사, 살았다고 했잖아. 그때 안 죽었다고 했잖아. 다른 나라로 보냈다고…….”
하지만 김영준 총장은 엄시영의 어리광을 받아 주지 않았다.
“나가!”
엄시영은 입술을 씹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김영준 총장은 밖으로 빠져나가는 엄시영을 보며 손에 쥔 USB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미친…….”
김영준 총장은 쓰레기통을 향해 손을 뻗었다. USB를 쓰레기통에 버리려 하는 거다. 그런데 그 손이 멈칫거린다.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하…….”
김영준 총장이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서랍을 열고 그 안에 USB를 툭 던져 넣으며 중얼거렸다.
“난 아니야.”
* * *
세상이 다시 색을 찾았다.
서진은 멍한 눈으로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최지범의 메시지.
-최 실장 : 재정건설에 대한 것, 회장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서진이 눈을 꾹 감았다.
사이코메트리를 통해 단편적인 것을 본 게 전부지만, 그림이 그려진다.
‘김영준은 재정건설에서 돈을 빼다 썼어. 그리고 엄시영이 전해 준 USB를 버리지 않았어.’
김영준 총장은 최악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엄 회장마저 부서졌을 때, 그 돈을 손에 넣지 못했을 때, 재정건설을 뒤흔들어 주머니를 채울 생각이다.
‘미친 새끼…….’
서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껏 예상은 하고 있었다. 김영준 총장은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 형제와 자식의 목조차 칼로 베어 제물로 바칠 인간.
하지만 예상을 했던 것과 그 실체를 마주했을 때의 느낌은 다르다.
인간의 탈을 쓴 악마, 그 역겨움에 헛구역질마저 나오고 있다.
서진이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아버지 김준만을 향한 김영준 총장의 칼을 부러뜨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김영준 총장이 가진 그 USB가 어떤 무기로 사용될지 모른다.
서진은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광현아, 잠깐 보자.”
* * *
그날 밤, 고깃집.
아직 메뉴는 시키지 않았다. 그저 소주 한 병과 반찬이 올라와 있을 뿐이다.
재정건설을 향한 김영준 총장의 탐욕을 전해 들은 도광현이 젓가락을 빙빙 돌리며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제 주특기가 나오겠네요.”
도광현은 전과 1범, 금융 사기와 돈 세탁의 설계자. 이런 일에는 빠삭하다.
“건설 회사는 슈킹에 최적화된 곳이에요. 가볍게는 함바집 밥값에서 수천만 원, 공사 물량 부풀려서 수십억, 공사 기간 늘리고, 자재 빼돌리고 일용직 인건비 넣었다 뺐다 하면서 수백 억.”
“알고 있으니까, 다음.”
건설 회사의 온상은 서진도 잘 아는 일이다. 그걸 전부 듣고 있을 시간은 없다.
도광현이 고개를 끄덕인 후 계속해서 말했다.
“재정건설의 요직에 김영준 총장의 손과 발이 되어 준 사람이 있을 거예요. 아버님의 눈을 가려 줄 감사 팀을 시작으로 실무자까지. 그게 몇 명인지는 아직 감이 안 잡히네요.”
“…….”
“어쨌든, 그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아버님 몰래 수억 빼돌리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예요. 아버님이 매일 장부를 확인할 수는 없잖아요. 일용직으로 뽑아 대는 인부가 몇 명인데, 그걸 일일이 셀 수 없고요.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벽돌이 몇 장 들어왔고 그 무게가 얼마인지 세고 앉아 있을 수도 없죠.”
도광현이 서진의 잔에 술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문제는요, 그런 비리가 터지면 다치는 것은…….”
“우리 아버지라는 거지?”
서진의 표정을 조심스레 바라보던 도광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비리가 터지면 포토 라인에 서야 할 사람이 필요하죠.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감옥에 들어갈 사람, 대중의 분노를 잠재워 줄 사람…….”
“…….”
“제가 설계했다면, 그 돈을 아버님의 어깨에 올렸을 거예요. 아버님이 총알받이가 되면 나머지는 조용해질 거니까요.”
서진이 다리를 외로 꼬았다. 문제는 알았다. 이제 답을 찾아야 한다.
“됐고. 풀이 방법이나 읊어 봐.”
“재정건설의 서류 한번 들춰 보게 해 주세요. 제가 이쪽 분야의 예술가들을 끌고 가서 싹 훑어볼게요. 3시간만 주시면 10원짜리 삥땅도 찾아낼 자신이 있어요.”
“오케이. 먹고 싶은 거 골라.”
서진이 도광현의 앞으로 메뉴판을 내밀었다.
도광현이 메뉴판을 손에 들며 슬쩍 서진의 표정을 살핀다. 서진의 얼굴에 심각함은 사라졌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도광현을 믿는다는 뜻. 도광현이 기분 좋게 입을 열었다.
“삼겹살에 된장찌개 그리고 계란찜요.”
“시켜.”
도광현이 벨을 누르며 점원을 불렀다.
잠시 후, 삼겹살이 나오고 지글지글 익어 갔다. 도광현이 삼겹살을 뒤집으며 말했다.
“조금 있으면 수조 원을 손에 쥘 수도 있는데, 삼겹살에 기뻐하는 거 보면…… 남들이 뭐라 그럴까요?”
* * *
며칠 후, 강남의 한 한정식집.
김영준 총장은 백기호 의원과 마주 앉아 있었다.
“내 몸에 달라붙어 있던 먼지는 쓸려 내려갔어요. 이제 슬슬 제대로 된 거래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김영준 총장이 백기호 의원의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백기호 의원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죠.”
위기를 극복한 김영준 총장의 지지율은 반등했다. 대선에 나간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는데, 순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김영준 총장이 백기호 의원의 손을 들어 준다면, 백기호 의원의 청와대 입성은 기정사실이 되는 거다.
백기호 의원이 시선을 들며 입을 열었다.
“이 나라 사람들 참 웃기지 않습니까?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나를 지지할까요?”
백기호 의원은 국회의원이 된 후 특별한 업적이 없다. 그저 언론에 자주 얼굴을 비치고 쓴소리를 몇 번 한 게 전부다.
하지만 사람들은 백기호 의원을 지지하고 있다.
“난 이미지를 만드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어요. 내 손을 잡아 주면 김 총장에게도 그 재주를 전해 드리죠. 청와대의 집무실, 깨끗하게 사용한 후 그 자리를 김 총장에게 전해 주겠습니다.”
김영준 총장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지는 제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대선 기간 동안 여당의 쟁쟁한 인물은 전부 소환하죠. 여당을 비리 덩어리로 만들고 의원님은 청렴결백한 인물로 그려 드리죠.”
“…….”
“그러니까, 말씀하셨던 것을 주세요. 혼사를 치르면 전해 주겠다고 했던 혼수품, 의원님의 치부. 그걸 주시면 적극적으로 밀어드리겠습니다.”
백기호 의원이 껄껄 웃었다.
“그건 혼수품이에요. 김서진과 소희를 결혼시키세요. 그럼 얼마든 드릴 수 있어요. 파트너보다 가족을 신뢰할 수 있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저희 집안 꼴이 좋지 않아서요. 지금 혼사는 무리인 것 같습니다. 결혼은 차차 시키고 혼수부터 전해 주시죠.”
김영준 총장이 술잔을 내려 두며 입을 열었다.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지금 갑의 위치에 있는 것은 의원님이 아니에요. 내가 덜컥 출마를 결심하면? 또는 여당의 손을 잡고 의원님과 이소희의 이야기를 저잣거리에 뿌리면? 그러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
“의원님의 지지율은 떨어질 겁니다. 아니, 폭락하겠죠. 비난의 대상이 될 테고 대선의 꿈은 사라질 겁니다.”
백기호 의원의 눈빛에 분노가 서렸다. 하지만 김영준 총장은 입을 멈추지 않았다.
“저는 김윤환이 제 아들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계속 보듬어 준 남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의원님은…… 버려뒀죠.”
“김 총장…….”
“전 확고한 서류가 필요하고 의원님은 제가 필요하죠.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 같은데요.”
“김 총장!”
“그리고 공증 하나 받았으면 좋겠네요. 의원님이 대통령이 된 후 손에 쥘 인사권, 그중에 법무부 장관과 검찰 총장 그리고 대법원장은 제가 선택하겠습니다.”
김영준 총장은 법을 손에 쥐고 있으려 한다. 그것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손에 쥐고 있으면, 앞으로 어떤 위기가 다가와도 헤쳐 나갈 수 있다.
“의원님은 선택권이 없습니다.”
백기호 의원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스산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래서 김 총장을 안 좋아했어요.”
“좋고 나쁨을 왜 생각합니까? 죽느냐, 사느냐의 판떼기에서 이기는 게 우선이죠. 히틀러가 말했습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악마와도 손잡아야 한다고.”
백기호 의원이 손을 내밀었다.
“잡읍시다, 손.”
두 사람의 손이 악수했다.
백기호 의원이 말을 이었다.
“이번 주에 시간 비워 두세요. 내 치부를 건네며 내 사람들도 소개하죠. 안면이나 익히세요.”
김영준 총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사람들도 데리고 가겠습니다. 의원님께 큰 힘이 될 겁니다.”
* * *
식사가 끝났다.
김영준 총장이 밖으로 나오며 어두운 하늘을 바라봤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토지 보상금을 받아 서울로 입성했던 날이 떠올랐다.
어린 나이에 어른들에게 치였다. 돈이 없다며 도둑놈 취급을 받은 적도 있다. 저들보다 위에 서고 싶다고 생각했고 검사가 된 후에도 끝을 모르는 권력을 탐했다.
그리고 이제 그 권력이 가까워졌다. 꿈꿔 왔던 모든 게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다가왔다.
김영준 총장이 중얼거렸다.
“다행이야.”
백기호 의원과 손을 잡았다. 이제 서진을 통해 엄 회장의 돈을 빼앗기만 하면 된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이뤄지고 있다.
그때 김영준 총장은 휴대폰의 진동을 느끼고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 눈이 살짝 찌푸려진다.
‘왜?’
재정건설에 심어 둔 감사 팀장이었다.
“말해.”
-기, 김준만 대표님이 내일 외부감사가 있을 거라고 전했습니다.
“……외부감사?”
김영준 총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갑자기?”
외부감사라니, 물론 감사를 한다고 해서 뭔가 나올 일은 없다. 그만큼 잘 숨겨 뒀고 속여 왔다.
하지만 김영준 총장은 오랜 시간 비리와 음모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계획이 삐걱거리는 것을 느꼈다.
“주체가 어디야?”
방금까지 김영준 총장은 재정건설을 건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또 아니다. 자신이 먹어야 할 재정건설에 남의 손때가 묻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체가 어디냐고 물었어.”
* * *
그 시각, 재정건설의 감사 팀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그건 모르겠습니다.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 팀장이 통화를 종료하며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그 앞에 서진이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