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였다 (2)>
“실패하면…… 죽을 수도 있어.”
“그건 좀 무섭네요.”
도광현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서진이 캔 맥주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한 잔 더?”
“아뇨. 지금부터 바빠질 것 같은데, 그만 마셔야겠네요. 오늘 못 마신 술은 섬 하나 빌려서 종류별로 쫙 깔아 놓고 한 잔씩 마실래요.”
서진이 슬쩍 웃었다.
“복수 끝나면…… 부모님 찾아가.”
“……!”
지금껏 도광현은 부모님의 묘소를 찾지 않았다. 복수도 못한 채 범죄자가 되어 버린 자신의 삶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계획이 성공하면 그 앞에 설 수 있다. 참아 왔던 눈물을 터뜨릴 수 있다.
도광현이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서진이 도광현의 등을 쓸어 만졌다.
“그럼, 내려가.”
“검사님은요?”
“난 아직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도광현이 서진에게 고개를 숙인 후 옥상을 벗어났다. 서진은 그 자리에 서서 다시 캔 맥주를 입에 댔다.
펼쳐진 야경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만 있으면 저 모든 것을 손에 쥘 수 있을 거다.
서진에게는 돈이 있다.
꼭두각시처럼 움직일 수 있는 국회의원도 존재한다.
전동국 차장검사를 검찰총장에 올리면, 공권력도 손에 얻을 수 있다.
김영준 총장과 백기호 의원 그리고 엄 회장을 치우고 그 뒤에 있는 모든 것도 움켜 쥘 생각이다.
그때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들리며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마? 벌써 한잔하고 있었네?”
서진이 천천히 시선을 틀었다.
신마그룹의 장녀 신지연이 캔 맥주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신지연이 걸친 옷가지는 수천만 원이 넘는다. 그런 그녀가 비닐봉지를 든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서진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한 잔 더 하고 싶었어요.”
“잘됐네.”
신지연이 캔 맥주를 꺼내 서진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 옆에 서서 입을 열었다.
“우리 동생, 이 자리에서 누구를 만나 어떤 비밀 이야기를 했을까? 워낙, 비밀이 많은 동생이라 궁금하네?”
간이로 만들어 둔 쓰레기통에 캔 맥주가 가득했다. 신지연은 그것을 보고 서진이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진은 그에 대한 답은 전하지 않았다.
“엄 회장을 칠 겁니다.”
“……!”
신지연의 눈이 커졌다.
“엄 회장? 내가 알고 있는 그 늙은이?”
“네.”
신지연의 입술이 휘어졌다.
“우리 동생, 겁이 없네? 그 노인네, 무서운 사람이야. 딸 둘이 잡혀갔다고 해서 지금껏 뿌려 둔 돈이 증발하는 게 아니야.”
“…….”
“그리고 이건 정말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옛말에 상처 입은 짐승은 건드는 게 아니라고 했어. 지금은 놔둬. 어차피 조금 있으면 세상을 떠날 테니까.”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은 사채업자. 기업의 등에 붙어 살아가는 기생충. 저는 엄 회장이 편안한 노후를 보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요. 지금껏 죄를 짓고 살아왔는데, 벌은 받고 가야죠. 그러니까, 잡을 겁니다. 사람들 앞에 치욕을 받게 할 겁니다. 괴로워하다 죽게 만들 생각입니다.”
서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신지연은 더 말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날 부른 이유는? 미리 말하지만 엄 회장을 치는 데 도움 줄 생각은 없어.”
신지연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하지만 서진은 그런 태도를 예측하고 있었다.
신지연에게 ‘정의감’을 기대할 생각은 없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득에 의해 행동하는 기업가다.
서진이 입을 열었다.
“엄 회장이 궁지에 몰리면 신마그룹을 찾아가겠죠. 영향력을 펼쳐 달라고 부탁할 겁니다. 자신이 가진 신마그룹의 지분을 흔들면서요.”
정계와 법조계에서 신마그룹이 끼치는 영향력은 대단하다. 엄 회장과 손잡으면 앞으로의 상황이 암흑으로 뒤덮이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물론 신무학 회장님은 거들떠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누님의 오빠, 신명진 부회장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죠. 그룹을 완벽히 장악하는 데, 엄 회장의 제안은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니까요.”
서진이 몸을 틀어 신지연을 향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누님은 영원한 2인자에 머무르고 말 겁니다.”
신지연의 입가에 소름 끼치는 미소가 피어났다. 그녀가 천천히 서진을 향해 시선을 틀었다.
“옛말에 노인을 공경하라고 했는데…… 교도소 밥은 따듯하지?”
“걱정하지 마세요. 밖에서보다 더 건강하게 지내실 겁니다.”
“적적하실 텐데, 책을 많이 넣어 드려야겠네. 면회도 가끔 가고.”
“아, 소개해 줄 사람이 둘 있습니다.”
“소개?”
서진은 신지연에게 신마그룹의 뒤를 캐고 있는 진유경 형사와 이두진 변호사를 소개할 생각이다.
그 두 사람의 정보와 신지연의 힘이 있다면 그녀의 오빠 신명진을 무너뜨릴 수 있다.
* * *
서울시 강남구.
주택가의 한 골목에 경찰이 가득했고 폴리스 라인 밖에 선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한 자동차의 트렁크가 열려 있고 그 안에 30대 초반의 남자가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있다.
“살벌하게 찔렀어.”
진유경 형사가 시신의 상처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서진과 이두진 변호사를 도와 신마그룹의 뒤를 캐고 있는 사람.
진유경 형사가 눈동자를 움직였다. 날카로운 송곳이 여러 번 찌르고 들어간 상처가 목과 복부에 보인다.
“신원 확인은?”
“의정부에 사는 정대민이라는 사람이에요. 서른여섯 살이고…….”
“결혼은?”
“4년 전에 했어요. 자식은 없고요.”
진유경 형사가 계속해서 시신을 살피며 물었다.
“의정부에 사는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직장이 근방에 있어요.”
“CCTV는?”
“차주는 이 남성인데, 며칠 전부터 이곳에 주차되어 있었대요. CCTV 기록을 보면…….”
CCTV에 어떤 흔적도 없다는 거다.
“그동안 회사는 잘 나갔고?”
“네.”
“집에서는 뭐래?”
“평소에도 야근 때문에 잘 안 들어왔다고…….”
진유경 형사가 입술을 씹었다.
차량이 오랫동안 주차되어 있었는데, 얼마 되지 않은 시신이 트렁크에서 발견되었다. 그것도 시신을 자랑하듯 대놓고 열려 있었다.
진유경 형사가 주차 라인을 확인했다. 이곳은 주택가, 각 집의 돌담을 두고 라인이 길게 형성되어 있다.
“담벼락과 자동차 사이로 이동하며 시신을 옮겼을 거야. 블랙박스 상시 작동되는 차량 있는지 확인하고 있으면 차주한테 연락해.”
“네.”
“그리고…… 바닥에 혈흔이 있는지 확인해 봐.”
진유경 형사의 시선이 바닥을 살폈다.
시신은 피범벅이다.
이 시신을 옮기면 어딘가에 혈흔이 발견될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혈흔은 이동 경로를 알려 준다.
그때였다.
폴리스 라인 밖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끔찍한 시신의 현장을 봤기 때문이 아니다.
마치 연예인을 본 것 같은 목소리.
현장과 어울리지 않는 환호성.
“맞지?”
“진짜 잘생겼어.”
“사진 한번 찍어 주시면 안 돼요?”
지금껏 현장에 집중하던 진유경 형사의 시선이 틀어졌다.
누군가 했다. 그런데, 익숙한 얼굴이다.
‘어? 김서진 검사?’
뜬금없이 서진이 나타났다.
난처한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막힌 채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다.
“김서진 검사님 맞죠?”
“범인 잡으려고 온 거예요?”
서진은 미제 전문 검사로 알려져 있다. 살인 사건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사람들의 오해는 당연하다. 사람들이 휴대폰을 들고 서진을 찍어 댔다.
서진은 진유경 형사를 향해 도와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진유경 형사가 손을 툭툭 털며 사람들을 향해 다가갔다.
“죄송하지만, 살인 사건 현장입니다. 사망자가 있으니, 조용히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공무 중인데, 김 검사님 좀 놓아 주실래요?”
공무 중이라는 말에 사람들의 눈이 더 반짝이기 시작했다.
미제 전문 검사, 온라인상에서 떠들어 대던 신화 같은 이야기. 그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인 거다.
사람들이 몸을 틀었고 서진이 멋쩍은 표정으로 진유경 형사 앞에 섰다.
“전화를 드렸는데, 받지 않으셔서 서에 물어봤더니 여기 계신 다네요.”
“전화요? 아…… 차에 두고 와서 몰랐어요. 그런데 무슨 일로?”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서요.”
“소개?”
서진이 진유경 형사에게 속삭였다.
“신마그룹 신지연 사장이요.”
“……!”
진유경 형사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진유경 형사의 아들과 남편, 그들은 신마그룹 신무학 회장의 셋째 아들, 놈의 음주 운전으로 사망했다.
그 이후 진유경 형사의 시간은 멎어 있었다. 오로지 신마그룹에 대한 복수로 가득했다.
“신지연 사장이 그 복수를 돕겠다고 했습니다. 점심 같이하기로 했는데, 시간 괜찮으세요?”
서진의 말과 동시에 멎어 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진유경 형사가 낮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 알았어요.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뭘요?”
“사람들이 저렇게 기대하고 있는데.”
서진의 시선이 진유경 형사의 눈동자를 따라 움직였다.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 팍팍한 삶 속에 영화 속 히어로를 보는 것 같은 눈빛. 그들의 눈빛에 담긴 염원이 그대로 느껴진다.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번 볼까요?”
“네?”
진유경 형사는 농담처럼 건넨 말이다. 아무리 서진이라 해도 한 번에 사건을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서진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설명해 주세요.”
공대출 전 의원은 서진에게 정치를 권유했다. 꼭 정치가 아니더라도 거대 권력자와 싸울 때, 사람들의 지지는 필요한 법이다.
입으로만 떠들어 대는 권력자들과 다른 모습, 직접 그 능력을 보이는 것.
서진이 진유경 형사에게 사건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트렁크 앞에 도착했다.
“오랫동안 주차가 되어 있었고…… CCTV에는 잡히지 않았다는 거죠?”
“네, 저는 시신을 옮길 때, 담벼락과 차량의 사이를 이동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진유경 형사의 예측은 틀렸다.
다가온 경찰이 태블릿 PC를 건네며 말했다.
“어제 밤부터 세워 둔 차량의 블랙박스 영상인데요. 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있어도 이동한 사람은 없어요.”
진유경 형사가 눈을 찌푸렸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 유령도 아니고 흔적이 없다.
그런데 서진이 갑자기 몸을 틀었다. 뚜벅뚜벅 옆에 있는 낡은 빌라로 들어갔다.
“검사님?”
진유경 형사가 눈을 깜빡이며 서진의 뒤를 쫓았다. 101호라 적힌 집 앞에 선 서진이 문고리를 잡았다. 역시 잠겨 있다.
서진은 다시 다급히 움직였다. 밖으로 나와 창문이 있는 곳을 바라본다.
방범창이 달려 있다.
“빠루나 해머, 창문을 부술 수 있는 것은 아무거나 가져다주세요.”
“네?”
“어서요! 책임은 제가 집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지켜보던 사람들도 목을 빼며 서진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확인하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서진에게 해머가 건네졌고 서진은 거침없이 휘둘렀다.
꽝! 꽝! 꽝!
방법창이 휘어졌다.
“미, 미쳤어요!”
진유경 형사가 서진을 말리려 했다.
해머를 가져다줬을 때, 이런 상황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행동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콰지지직!
하지만 늦었다. 방법창이 덜렁거렸고 그 안에 있던 유리창이 박살 났다.
서진이 해머를 집어 던진 후 안으로 들어가 커튼을 젖혔다.
동시에 진유경 형사의 부릅뜬 눈 속에서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려왔다.
드러난 내부.
피 칠갑이 된 집.
거실에는 한 여성이 입과 손발이 구속된 채 쓰러져 있었다.
여성의 상태도 좋지 않다. 송곳에 찔린 복부에서 피가 질질 흐르고 있다.
경찰들이 재빨리 구급차를 불렀고 집으로 들어와 여성을 응급처치 했다.
서진이 입을 열었다.
“피해자는 저 여성분과 바람을 피웠어요. 공교롭게도 저 여성분은 피해자의 아내와 친한 친구죠.”
“……!”
“범인은 피해자의 아내. 남편을 잔인하게 죽인 후, 친구는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이려 했네요.”
“……!”
“시신을 이동한 흔적이 보이지 않은 것은 당연해요. 차를 집 앞에 세워 뒀고 시신은 이불에 싸서 이동했으니까요.”
진유경 형사가 멍한 눈으로 서진을 바라봤다.
“어, 어떻게…….”
서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밖으로 나왔다.
진유경 형사뿐만 아니라 지켜보던 사람들도 조용했다. 그들의 눈동자가 모두 서진에게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적막했던 공간이 다시 떠들썩해진 것은 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대박.”
SNS에는 서진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나 오늘 김서진 봤다. 해머로 창문 부수더라.
└나도 거기 있었어. 난 남자인데, 설레더라.
└나도 직접 봄. 김서진이 나서면 프로파일러들 모두 거지 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