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였다 (1)>
엄 회장이 뒷짐을 지고 일어섰다. 그리고 서진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내가 왜 자네에게 왜 전화를 했는지, 이제 알겠는가?”
“…….”
“김영준은 욕심이 많아. 다 집어삼킬 놈이지. 가만히 놔두면 주변 모든 것을 씹어 먹을 게야. 나도 자네도 그리고 자네의 부친까지.”
서진이 엄 회장의 전화를 받은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엄 회장은 분란의 씨앗을 던지기 위해 서진을 이곳에 불렀다.
엄 회장이 계속 말했다.
“저놈은 날 경계하고 있어. 그래서 내 모든 행동을 일일이 감시하고 있지. 내 운전기사, 우리 집 가정부, 모두 김영준의 손을 잡고 있을지 몰라. 자네 부친의 회사도 마찬가지야. 각 요직의 인물이 모두 김영준의 사람이야.”
“…….”
“나와 손잡고 김영준의 탐욕을 막을 생각이 없는가? 자네라면, 김영준이 의심하지 않을 게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 둘 거야.”
서진이 천천히 시선을 틀어 엄 회장을 바라봤다. 눈을 마주치자 엄 회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야, 나도 살고 자네 부친도 살아.”
엄 회장은 서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서진의 입에서 나온 것은 질문이다.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하게.”
“몇 년 전, 제가 괴한들에게 당해 다친 적이 있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누군가 밀었고 떨어졌죠.”
“……!”
순간, 엄 회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눈동자는 금세 자리를 잡았지만 서진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계속해서 엄 회장의 표정을 눈에 담으며 질문을 이어 갔다.
“그 사건에도 작은아버지가 연관 있습니까?”
대놓고 던진 의혹.
엄 회장의 주름진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글쎄…… 나도 그 이야기를 듣기는 했어. 그런데 방에 앉아 장기나 두는 늙은이가 그런 것을 어찌 알겠나?”
모른다는 말, 거짓이다.
엄 회장은 평생 남을 짓밟고 살아온 자, 말 그대로 이무기와 같다.
‘김영준과 엄 회장…… 고약한 노인네고 지독한 놈이야.’
서진은 방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엄 회장이 서진을 옆방에 앉혀 둔 채 김영준 총장과 대화를 나눴던 그 일.
두 사람의 대화 내용에 장지혁 검사에 대한 살인 청부는 없었다.
김영준 총장이 앉자마자 엄 회장이 곧바로 “이제 그다음 이야기를 해야지?”라는 말을 전하며 대화를 틀었기 때문이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어떤 손해도 보지 않으려 한다. 서로 전면에서 발을 쑥 뺀 채 서진을 이용해 간만 보고 있다.
서진을 이용해 이득만 취하려 하는 거다.
‘이용당해 주지.’
서진은 놈들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양쪽을 오가며 서로의 손에 놓인 패를 확인할 생각이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서진의 대답과 동시에 엄 회장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어렵지 않아. 내가 다시 연락하겠네. 김영준을 한 번에 보낼 수 있는 것을 곧 찾을 수 있을 게야.”
“그럼 제가 할 일은…….”
“그걸 가지고 오는 게지.”
“어렵지 않네요.”
“고맙네.”
서진이 손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엄 회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말씀 끝났으면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랏일하기도 바쁜 사람, 이렇게 잡아 둬서 미안해.”
서진이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몸을 틀어 그 방을 벗어났다.
서진이 떠난 곳, 엄 회장이 끌끌 웃으며 뒷짐을 지었다. 그리고 터벅터벅 다시 음식이 쌓인 곳으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나물을 짚던 엄 회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저 아이가 김영준의 뭘 알고 있었던 걸까?”
***
서진은 주차장으로 나와 차량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틀어 방금 나온 한정식집을 바라봤다.
기와가 멋들어진 곳, 하지만 서진은 기와를 보지 않았다. 저 안에 있을 엄 회장을 떠올리고 있었다.
‘모른다고?’
서진을 테러한 게 김영준 총장이냐는 질문에 엄 회장은 모른다 했다.
‘하지만 거짓이야.’
김영준 총장이 청부했다면, 그것을 실행한 사람이 엄 회장 자신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이어 가던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가설이야.’
서진은 확신하지 않았다.
생각이 좁혀지면 행동은 반드시 오류를 낳고 만다. 지금은 모든 사고를 폭넓게 열어 둘 때다.
***
그날 밤.
장지혁 검사는 한 상가 앞에 차량을 세웠다.
차에서 내려 건물을 살피던 장지혁 검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이런 곳으로 부르고 있어?”
건설이 멈춘 상가, 붉은 글씨로 ‘유치권 행사 중’이라는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다. 보기에 따라 을씨년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장지혁 검사가 휴대폰을 꺼내 서진의 연락처를 찾은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비 찍고 오기는 했는데…… 여기 맞아?”
-그렇게 물어보시니까 맞는 것 같은데요? 옥상으로 올라오세요. 엘리베이터는 가동되지 않으니까 계단 이용하세요.
서진의 목소리를 들으며 장지혁 검사가 눈동자를 굴렸다.
폐자재가 굴러다니고 바람에 찢어진 천 쪼가리가 흔들린다. 그 그림자가 무섭게 보였다.
“야! 내가 깡패 이런 것은 괜찮은데, 이런 곳은 좀 무섭거든? 흉가 체험하는 것도 아니고……. 네가 내려오면 안 돼?”
-야경 예쁘니까 어서 오세요.
장지혁 검사가 신경질적으로 통화를 종료한 후 “이 새끼는 선배 알기를 개똥으로 알아.”라고 중얼거리며 상가의 안으로 들어갔다.
“에이!”
이곳은 신마그룹 신지연이 사 둔 상가다.
언덕에 있어 올라오는 차량을 확인할 수 있고 주변의 CCTV가 모두 꺼져 있기 때문에 보안이 확실한 곳.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장지혁 검사에게는 그저 어두침침한 공간일 뿐이었다.
장지혁 검사는 계단을 오르면서도 계속해서 구시렁거렸다. 이따금 거미줄이 얼굴에 묻을 때는 기겁하며 비명까지 질렀다. 그렇게 장지혁 검사가 옥상에 올랐다.
“야…… 다음부터는 좀 평범한 곳에서 보자. 내가 이런 곳은 진짜 질색이야. 끔찍해.”
장지혁 검사가 몸에 묻은 거미줄을 손으로 쳐 내며 시선을 들었다. 그런데 서진만 있는 게 아니다.
서진을 포함해 다섯 명의 사람이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장지혁 검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누구?”
“아는 얼굴도 있겠지만 다시 한번 소개할게요. 이쪽은 제 동기 이소희. 이분은 이은하 기자님, 이분은 지라시 업체의 성두준 대표님. 마지막으로 제 일을 도와주는 친구들, 도광현과 장석민입니다.”
서진은 이들과 점조직처럼 활동하려 했다.
누군가 잡혀도 다른 이들은 걸리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김영준 총장이 장지혁 검사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다.
이은하 기자는 서진의 부탁에 따라 위험한 기사를 서슴없이 써 내려가는 중이다.
이소희는 백기호 의원의 비리를 조금씩 캐내고 있다.
누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장 사장?”
서진의 말에 장석민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모두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후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이어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검사님들 앞에 서면 심장이 쪼그라져서요. 얼마 전까지는 깡패였지만…… 지금은 개과천선해서 경호 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장석민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서진이 받았다.
“이 친구의 사업체에서 여기 계신 분들을 경호할 거예요.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이겠지만, 때로는 불편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참아 주세요.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만.”
장지혁 검사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난 괜찮아.”
서진이 픽 웃으며 장지혁 검사에게 캔 맥주를 던지며 말했다.
“검사님이 제일 위험해요. 무조건 받으세요.”
장지혁 검사는 더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김영준 총장을 직접 대면했고 그 눈빛을 마주한 사람이다. 자신에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이미 느끼고 있었다.
장지혁 검사가 캔 맥주를 뜯어 입에 댈 때, 서진이 입을 열었다.
“김영준 총장과 백기호 의원. 그 두 사람이 타깃입니다.”
“…….”
“상황이 종료되면 장지혁 검사님은 유배를 갈 테고 저는 옷을 벗을지도 모릅니다. 이소희 검사도…….”
이소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도 옷을 벗게 될 거야.”
검사는 죄 지은 자에게 법의 단죄를 내리기 위해 존재하는 직업이다.
그런데 김영준 총장과 백기호 의원이라는 짐승을 잡기 위해 세 명의 검사가 옷 벗을 각오를 하고 있다. 이유는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거다.
칭찬을 받아야 하는데 옷을 벗어야 할 상황, 서진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계속 우울하게 있을 수는 없다. 서진이 손뼉을 짝 치며 성두준 대표에게 시선을 틀었다.
“앞으로 이소희 검사와 장지혁 검사님, 그리고 제가 알게 된 정보, 그중에서 상대를 흔들 수 있는 게 있다면 성두준 대표님에게 전할 겁니다.”
성두준 대표가 정보를 받아 지라시로 만들어 뿌릴 테고 각 온라인 커뮤니티를 뒤흔들 거다.
메이저 언론은 권력자의 손에 놀아날 수 있어도 지라시와 1인 방송은 다르다. 짓밟힐수록 진실처럼 사람들에게 다가선다. 권력자가 무엇을 숨긴다는 냄새를 잔뜩 풍길 수 있다. 서진은 그 심리를 이용할 생각이다.
서진의 시선이 이은하 기자에게 옮겨졌다.
“이은하 기자님은 그중에서 메이저 언론에 실을 수 있는 것을 찾아 주시고 여론이 타오를 수 있게 계속해서 불을 지펴주세요.”
“네.”
이은하 기자의 대답을 들으며 서진이 몸을 틀어 도광현을 향했다.
“자금이 필요하면 도 사장에게 연락하세요. 얼마든 쏘아 줄 겁니다.”
도광현이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도광현입니다.”
***
모든 사람이 떠났다.
옥상에는 서진과 도광현만 남아 있었다.
도광현이 아래로 펼쳐진 야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야경 죽이네요. 이런 곳은 언제 발견하셨어요?”
“약속했었지? 없애 주겠다고.”
“네?”
“사모펀드 포이블.”
도광현이 눈을 부릅떴다. 눈동자만 움직여 서진을 향했다.
그러자 서진이 캔 맥주를 입에 대며 말을 이었다.
“그 약속…… 이제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약속이요?”
도광현이 서진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당시 서진은 말했었다.
“알고 있어. 네 부모님이 돌아가신 원인. 돈을 벌기 위해 똥통에서 뒹군 이유. 기업 구조 조정 전문 투자 기업, 사모펀드 포이블. 나도 그놈들이 마음에 안 들어. 없애고 싶고. 그런데 놈들과 싸우려면 돈이 필요해. 그걸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서진은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서진이 몸을 틀어 도광현을 향했다. 그리고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김영준에게 받은 거야.”
“……!”
종이를 손에 들고 살피던 도광현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 이건…….”
“사모펀드 포이블…… 각 기업을 집어삼키는 사냥꾼. 그 뒤에 엄 회장과 일본 자본이 있지. 포이블은 몸뚱이야. 엄 회장과 일본 자본을 밟으면 머리를 없애는 거야. 몸뚱이는 다시 움직일 수 없겠지. 그리고…….”
도광현이 서진의 목소리를 들으며 시선을 틀었다. 그리고 서진과 눈을 마주치며 조용히 웃었다.
“…….그 돈을 우리가 먹자는 거죠?”
서진이 슬쩍 웃으며 건배하듯 캔 맥주를 내밀었다.
“그래야 복수지. 그 돈이 국가에 귀속되면…… 국회의원이 꿀꺽하잖아? 그 돈으로 밥 먹고 술 먹고. 그렇게 쓰이면 안 돼. 내가 불우 이웃이야.”
도광현이 낄낄 웃으며 서진과 건배했다. 그리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마련된 쓰레기통에 툭 버리며 말했다.
“성공하면 수조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