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버둥을 쳐도 (3)>
다시 대검, 김영준 총장의 사무실.
그 앞에는 장지혁 검사가 서 있었다.
김영준 총장이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고 장지혁 검사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다.
“나가.”
김영준 총장의 차가운 목소리에 장지혁 검사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유배를 보내신다면, 달게 가겠습니다. 하지만 범죄자 하나는 반드시 잡고 가겠습니다.”
김영준 총장의 주먹에 심줄이 불거졌다.
“헛소리하지 말고 나가.”
“그럼…….”
장지혁 검사는 몸을 틀어 총장실을 벗어났다.
닫히는 문을 보며 김영준 총장이 입술을 씹었다.
장지혁 검사를 불러 김윤환 사건을 덮으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장지혁 검사는 그 말을 듣지 않았고 상황은 극단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김영준 총장이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찾는 전화번호는 중앙지검 검사장.
하지만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장지혁 검사는 앞뒤 가리지 않고 날뛰는 망아지다.
김윤환의 사건을 다른 곳으로 넘기란 말을 들으면 어디로 튈지 모른다.
어쩌면 통제할 수 없는 곳으로 튈 수도 있다.
‘하…….’
김영준 총장이 휴대폰을 내려 뒀다.
그리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급할수록 차분해야 한다.
감성적으로 움직이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 * *
“무슨 일이야? 김윤환이 체포됐다니!”
그날 밤, 이소희가 서진을 찾았다.
김윤환이 체포되었다는 얘기를 전화로 듣기는 했지만 그것으로는 모자랐다.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싶었다.
그래서 퇴근 후 곧장 서울로 이동해 서진과 마주한 거다.
장소는 한 횟집, 룸으로 되어 있으며 상다리가 휘어지다 못해 부러질 정도로 기본 반찬이 많은 곳.
“볼래?”
서진이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이소희에게 건넸다.
이은하 기자에게 주려고 찍어 둔 사진과 동영상.
커피숍에 앉은 이소희는 몇 번이고 김윤환의 마지막을 지켜봤다.
장지혁 검사가 김윤환에게 서류를 집어 던지는 모습.
억센 팔에 잡혀 질질 끌려가는 장면.
서진은 김윤환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천천히 설명했고 이소희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나 그동안 밥을 잘 못 먹었거든. 그런데, 이제 배고파.”
“파혼한 기분이 어때?”
“약혼자가 구치소에 있으니 기분이 메롱이야. 검찰총장 집안에 시집가서 내조도 잘하려고 했는데, 아쉬워.”
이소희의 장난스러운 표정에 서진이 웃었다.
“나도 아쉬워. 너한테 형수라고 부를 뻔했는데, 못하게 돼서.”
“지금이라도 형수라고 불러.”
이소희는 정말 기분 좋아 보였다.
계속해서 혼사가 이어졌다면 머리 깎고 비구니가 될 생각도 했다고 한다.
한참 동안 ‘이럴 줄 알았으면 진짜 가방이라도 받을 걸 그랬나?’, ‘내 인생은 똥인 줄 알았는데, 금가루도 떨어지네.’ 중얼거리던 이소희가 고개를 들어 서진을 바라봤다.
지금껏 밝은 면만 보고 있었기에 어두운 그림자를 신경 쓰지 못한 거다.
그런데, 문뜩 떠오른 어둠은 생각 이상으로 심각했다.
“……김영준 총장이 가만히 있어?”
서진이 슬쩍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HH 엔터테인먼트 움직여서 여론부터 잡으려고 하던데.”
“어?”
“여배우 동영상을 공개할 생각인 것 같아.”
이소희의 얼굴에 수심이 차올랐다.
김영준 총장의 계획은 가장 기본적이며 완벽한 전술이다.
여론을 묻어 버리고 조용할 때를 틈타 흐지부지 만드는 것.
그럼, 김윤환은 또 좀비처럼 되살아날 거다.
일전에도 그랬다.
사건을 조작해 놓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외국으로 튀었다.
그 전에도 그랬을 거다.
김윤환은 계속해서 사고를 쳤을 테고 김영준 총장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그 뒷수습을 해 줬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이소희는 이번에도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동남군에 있을 때, 바람이 좀 불던 날이었어. 바다에 앉아서 파도를 보는데, 그 파도가 꼭 백기호 같더라. 그래서 아무리 돌멩이를 던져도 바다에는 흔적도 남지 않더라.”
이소희의 특징 중 하나다.
백기호라는 거물의 곁에서 살아와서 그런지 자신감이 떨어진다.
고아로 자라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아온 서진과 대비된다.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큰일을 앞두고 부정적인 말을 하면 안 돼. 그리고 김윤환은 파도가 아니야, 잔챙이지. 잔챙이 한 마리 잡는 것은 일도 아니야.”
“쏘리.”
술잔을 만지작대던 이소희가 빠르게 사과했다.
그리고 서진이 술잔을 입에 댄 뒤 다시 이소희를 향해 시선을 틀었다.
“그리고 여론 전, 걱정할 필요 없어. HH 엔터테인먼트 대표와 내일 만나기로 했으니까.”
“어?”
이소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HH 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정재계에 인맥이 많은 사람이다.
일개 검사는 눈에 밟히지도 않을 거다.
“……어떻게?”
“그런 게 있어.”
서준경이었던 시절 모아 둔 것, 그곳에 HH 엔터테인먼트 대표의 심장을 쑤실 자료.
서진은 그걸 HH 엔터테인먼트 대표를 향해 집어 던질 생각이다.
놈은 서진과 김영준 총장의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절망과 공포에 잠기게 될 거다.
서진이 자신의 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심각한 이야기 몇 개만 해도 될까?”
“어, 뭐든.”
“백기호와 김영준, 두 사람은 대권을 위해 손을 잡았어.”
김윤환이 나락에 떨어졌다 해서 그 손을 놓치는 않을 거다.
백기호 의원에게는 김영준 총장이 필요하고 김영준 총장에게는 백기호 의원이 필요하다.
“다른 제물을 찾겠지.”
“…….”
“너와 나를 혼인시키려 할지도 몰라.”
이소희가 마시던 술을 내뱉을 뻔했다. 그리고 놀란 얼굴로 서진을 바라봤다.
“김윤환과 혼사가 오갔는데, 이번엔 너라고? 그게 무슨…….”
말 그대로 개판이며 콩가루.
자신의 자식과 결혼할 뻔한 사람을 조카에게 넘기는 동물의 왕국.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기는 한데, 대권을 앞에 두고 다른 게 눈에 보일까?”
“설마…….”
“김영준이 우리 집에 와서는 김윤환의 결혼 이야기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우리 아버지가 친형인데도 불구하고, 날짜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어.”
혹시 모를 변수를 생각한 거다.
서진의 작은어머니가 계속해서 극단적으로 반대했을 경우.
생각하지 못한 일로 문제가 생겼을 여러 상황.
“내가 물건이네, 물건이야.”
이소희도 인정했다.
백기호 의원의 권력욕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소희는 권력 앞에 자식 없다는 말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그러다가 슬쩍 서진을 바라봤다.
“……너랑 결혼한다고?”
“혼사가 오갈지 모른다고.”
“뭐, 너라면 생각해 볼게.”
“잉?”
“농담이야, 농담.”
이소희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술을 몇 잔 마셔서 그런지 볼이 발그레하다.
서진의 목소리가 다음으로 이어졌다.
“어쨌든, 그래서 백기호 잡으려고.”
“……!”
이소희의 눈이 커졌다.
백기호는 대한당의 대권 주자.
대쪽 판사라는 이미지와 함께 지지율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중.
그 휘하에 있는 국회의원만 해도 엄청나다.
“……잡는다고?”
아무리 서진이 대단하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방금 이소희가 말했던 것처럼 백기호를 거대한 바다라고 생각하면 서진은 작은 모래알이다.
모래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김윤환과 달라…….”
“다르지. 그래서 한민당을 이용할 거야.”
“……!”
한민당은 지금의 여당.
얼마 전, 김영준 총장이 서진을 불러 지시했다.
한민당 출신의 전 국회의원 공대출을 쑤시라고.
“공대출이 은퇴했지만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잖아.”
공대출 전 의원은 한민당의 원로급 의원.
조용히 등산이나 하고 살지만 그 입김은 아직 거세다.
공대출 전 의원과 손을 잡으면 한민당은 온 힘을 다해 백기호 의원을 갈기갈기 찢으려 할 거다.
“게다가 대선 시즌이야.”
서로 할퀴고 상처 내고 음해하는 난장판.
어떤 정보가 어디서 흘러왔는지 찾아낼 수 없는 혼란.
서진은 그 혼란을 틈타 백기호 의원과 김영준 총장을 공격하려 한다.
“그렇게 낙선을 하면, 그다음에 잡아야지.”
거대 권력자를 비리 몇 개로 잡을 수는 없다.
권력자가 비리로 쓰러지는 경우는 그 권력이 약해졌을 때.
대권에서 패배한 뒤 고배의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서진은 그때를 노리고 있었다.
“네 도움이 필요해.”
이소희는 백기호 의원의 딸이다.
즉, 의심 없이 그 곁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 중 하나.
이소희가 움직이면 백기호 의원이 정말 숨기고 싶어 하는 치부를 드러낼 수도 있다.
“나한테 시집오기 싫으면 도와줘.”
“뭐래니…….”
이소희가 한숨을 내뱉으며 술잔을 손에 쥐었다.
* * *
세상이 시끄러웠다.
김윤환에 대한 기사는 김영준 총장의 압박으로 오르내리지 않고 있지만 연예인의 스캔들로 실검이 채워지고 있었다.
누구누구가 몰래 데이트를 했느니, 어떤 연예인이 휴대폰을 분실했다느니 하는 시답잖은 이야기들.
신기한 것은 마약에 대한 이야기가 쏙 들어갔다는 거다.
마약왕은 물론이고 장지혁 검사의 활약도 잊힌 것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서진은 초조해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이뤄지는 중이다.
* * *
그리고 며칠 후 주말.
서진은 관악산을 오르고 있었다.
서준경이었을 때는 가볍게 오르던 산인데, 지금은 숨이 차다.
‘몸뚱이는 젊어졌는데…….’
서진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산을 오르는 이유는 하나, 공대출 전 의원을 만나기 위해서다.
며칠 전, 서진은 공대출 전 의원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한번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하자…….
-그럼, 토요일 12시쯤 관악산 정상에서 봅시다. 하하하.
산을 정말 좋아해서 그러는지, 아니면 자신을 고생시키고 싶어서 그러는지 몰라도 약속 장소는 산 정상이었다.
그리고 정상에 오른 서진이 겨우 공대출 전 의원을 찾았지만…….
“정상에서 보는 세상이 어때요?”
“좋네요.”
“그럼, 내려갑시다.”
“네?”
공대출 전 의원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산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서진은 자신을 두고 공대출 의원이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였다.
잠시 후, 관악산 아래의 파전집.
그곳에 서진과 공대출 의원이 마주 앉았고 막걸리를 따르며 공대출 의원이 입을 열었다.
“뒷방 늙은이 찾아서 얻을 게 없을 텐데…… 젊은 검사, 그것도 김서진 검사가 날 왜 찾고 있을까 생각했어요. 그리고 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잡으러 왔겠죠, 나도 소싯적이 해 먹은 게 좀 있으니까. 그래서 약속 장소를 산 정상으로 잡았습니다.”
서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싯적에 해 먹은 게 있으니, 약속 장소가 정상? 공대출 의원이 한 말은 두서가 없다.
공대출 의원이 막걸리를 마시며 낄낄 웃었다.
“다시 물어봅시다. 정상이 어땠습니까?”
“좋았습니다.”
“산 아래는?”
서진이 시선을 틀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계곡이 보인다.
“여기도 좋네요.”
“내 보기에 김서진 검사는 높이 올라갈 사람이에요. 어쩌면 정상에 설지도 모르지. 그런데, 명심하세요. 올라가면 내려와야 하는 법이에요. 언제까지 정상에 머물고 있을 수는 없어요. 올라갈 때, 좋은 길로 올라가야 내려올 때도 편한 법입니다.”
공대출 의원이 막걸리를 채우며 계속 말했다.
“잡혀가기 전에 그걸 말해 주고 싶었어요. 취조실에서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잖아요?”
서진이 슬쩍 웃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죄로 잡혀가는 겁니까?”
이번에는 공대출 의원이 오해하고 있다.
그는 분명 죄를 저질렀던 전적이 존재한다.
은행장과 손을 잡고 제로 금리로 대출을 받았던 것.
하지만 빼돌렸던 돈은 이자까지 계산해 채워 넣었다.
지금은 잘못을 반성하며 계속해서 봉사를 이어 가는 중이다.
물론 김영준 총장은 그 일을 트집 잡아 공대출 의원을 몰락시키려 한다.
하지만 서진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다르다.
서진이 보기에 공대출 의원은 잡범.
잡범을 미끼로 대어를 낚는다.
“먼저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서진의 이어진 말에 공대출 의원의 눈이 부릅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