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과거는 (4)>
유전자 검사를 위해 가져온 것은 김윤환의 모근과 그 집안 식구들의 칫솔.
‘그중에 파란 칫솔이 김윤환의 것.’
그런데 단 하나의 칫솔, 그 유전자가 김윤환과 다르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김윤환은 김영준 총장의 아들이 아니었어.’
서진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볼 수 없던 과거를 마주했을 때의 더러운 기분.
하지만 생각은 과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건 현실이며 앞으로 어떻게 활용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서진은 서류를 봉투에 쑤셔 넣으며 다리를 외로 꼬았다.
‘우선…….’
계속해서 고민했던 ‘김영준 총장이 알고 있을까?’에 대한 것.
김영준 총장이 가진 의심병을 생각하면 알고 있을 가능성은 크다.
‘하지만…….’
유전자 검사가 도입된 것은 92년도.
활발하게 진행된 시기는 그 뒤다.
그렇기 때문에 모르고 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답 없는 생각을 이어 가던 서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것은 김영준 총장의 머릿속이 아니야.’
김영준 총장이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은 상관없는 일.
서진이 그 앞에서 ‘김윤환은 친아들이 아니었어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 후폭풍, 김영준 총장은 자신의 뒤를 캐고 다닌 서진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김영준에게 의심받지 않고 알릴 수 있는 방법.’
서진은 생각했다.
가진 강점과 약점, 장점과 단점,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 그 모든 것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김윤환의 얼굴이 스쳤다.
‘김윤환?’
김윤환은 김영준 총장이 자신의 친아버지라고 확신하고 있다.
만약 친부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 표정을 감추지 못했을 거다.
게다가 그 성격을 생각하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관찰하기에 딱 좋은 놈.
서진은 서류 봉투를 손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릿속에 계획은 섰다.
물론 김윤환에게도 직접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서진이 움직인 것을 알지 못하게 우회해야 한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
며칠 후, 순댓국집.
서진은 장석민을 만나 국밥에 소주를 나누고 있었다.
“좋은 곳으로 모실 수도 있는데…….”
“왜? 국밥 싫어해?”
서진은 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어 이곳을 약속 장소로 잡았다.
밥도 제대로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에 국밥 한 그릇은 말 그대로 행복.
하지만 장석민은 난처한 표정이다.
이유는 하나, 서진이 장석민에게 했던 말이 있어서다.
“넌 1년 정도로 하자.”
형량에 대한 말이다.
김현봉이 잡혀갔고 이제 장석민의 차례.
서진의 결정에 따라 언제든 교도소의 문턱에 서야 한다.
당연하지만 교도소에 가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래서 최대한 좋은 것을 대접하며 서진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다.
“그럼 제가 식사 후에 좋은 곳에 가서…….”
“됐으니까 밥이나 먹어.”
장석민은 몇 번이나 권했지만 서진은 단호히 거부했다.
결국 장석민은 식사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말없이 이어지는 식사, 간간이 술을 마실 뿐 어색함은 커져 갔다.
장석민이 힐끗 서진을 바라보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이럴 거면 왜 부른 거야?’라고 생각할 때였다.
“남은 애들이 몇 명이야?”
“네?”
“네 아래로 남은 애들이 몇 명이냐고.”
김현봉과 함께 끌려간 놈이 수십 명.
이제 남은 놈은 열댓 명.
“왜, 왜 그러십니까?”
장석민은 심장이 쫄깃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서진은 검사, 남은 세력을 물어본 이유는 뻔하다.
일망타진. 잡범들까지 잡아들여 뿌리를 뽑으려 하는 것.
“저, 저기 검사님…….”
장석민은 서진을 말리고 싶었다.
그 애들은 죄가 크지 않으니, 한 번만 봐 달라고 말하려 했다.
“정식으로 들어온 것도 아니고 잡일만 하던 애들입니다. 제가 1년이 아니라 더 있을…….”
“뭐 먹고 살아?”
“네?”
“너랑 그 애들, 요즘 무슨 돈으로 밥 먹고 있어?”
장석민은 멍하니 서진을 바라보다가 솔직히 답했다.
“불법적인 일은 손도 안 대고 있습니다. 지금 하는 일은 노래방 몇 개……. 아, 정말 평범한 노래방이에요. 고등학생들도 와서 놀다 가요. 의심스러우시면 와서 보시고…….”
장석민은 정말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열심히 살고 있다.
-이제 나쁜 짓 하지 않는다.
그런데 서진이 손을 휘휘 저었다.
“돈은 충분해?”
“……모자라죠. 애들 용돈으로 100만 원도 못 주고 있습니다.”
장석민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럼, 다 접고 사업 하나 해.”
“네?”
“덩치 크고 싸움 잘하는 놈은 경호, 눈치 빠르고 머리 좀 돌아가는 놈은 흥신소.”
뜬금없는 이야기에 장석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이유는 차차 알게 될 테고 투자할 사람은 구해 뒀으니까, 필요한 돈은 알아서 의논해. 왜? 싫어? 네 밑에 있는 애들, 굶길 거야? 노래방으로 그 많은 사람 먹여 살리기 힘들다며?”
투자자까지 소개한다는 데 거부하는 게 웃긴 것.
그것도 자신의 목줄을 잡고 있는 서진의 지시.
잠시 고민하던 장석민이 술잔을 들어 입에 댔다.
그리고 벌떡 일어서더니 서진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장석민의 표정은 진지했지만 서진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김현봉도 배신한 놈이 무슨 충성?”
“김현봉의 사업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검사님이 아니어도 언젠가 한번 엎으려고 했습니다.”
“김윤환은?”
“…….”
장석민은 어느새 배신의 아이콘이 됐다는 것을 느꼈는지 멋쩍게 웃었다.
“윤환이는 친구이기는 하지만 저를 아랫사람 다루듯이 하거든요. 그게 한 번씩은 고깝기도 했고, 어쨌든…… 적어도 검사님은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배신해도 돼. 그런데 나 죽으면 너도 끝인 거 알지?”
“네!”
농담처럼 이어진 말, 하지만 장석민은 진심으로 서진을 따르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서진이 사업에 대한 제안을 한 이유.
서진은 자신의 앞날을 예상하고 있었다.
평탄하지 않은 삶.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하루.
사방이 적.
특히 엄선주를 잃은 사채시장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하기 어렵다.
지금까지는 엄선주라는 구심점이 있었지만 이제 그들은 각개로 행동할 거다.
돈이 목숨보다 중요한 그들에게 서진은 죽여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추가로 경호를 배치하려 한다.
평범한 경호원들이 아닌 거칠게 살아온 놈들로.
이전에 있던 경호원들 역시 서진이 만들 회사로 옮기겠다고 약속받은 뒤다.
‘그리고…….’
서진은 잠시 며칠 전 만났던 황윤성 의원의 보좌관을 떠올렸다.
보좌관은 말했었다.
“검찰은 살아 있는 권력을 잡을 수 없어요.”
권력자는 뻔뻔하다.
웬만한 치부가 드러나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 정도 치부는 가진 힘으로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깡패도 아니면서 대신 옥살이할 사람을 지정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김영준 총장이나 백기호 의원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권력자.
그들을 부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뒤를 밟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흥신소 역시 필요하다.
하나의 비리가 통하지 않는다면, 그 뒤를 쫓아 찾아낸 비리를 폭격처럼 쏟아 낼 생각이다.
서진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장석민을 바라봤다.
그동안 음지에서 행동할 사람이 필요했다.
법을 무시하는 놈, 법 위에 사는 놈들을 상대로 법은 통하지 않는다.
칼을 든 상대를 만나면 총을 꺼내는 게 승리의 방법.
그래서 서진은 장석민을 선택했다.
“마셔.”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갔다.
서진이 잔을 내려 두며 다시 입을 열었다.
“흥신소와 경호라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훈련을 받아야 할 테고. 알아봐 줄 테니까, 제대로 받고 와. 사람도 더 충원하고.”
“감사합니다.”
“힘들다고 도망치는 놈 있으면…….”
“그럴 놈은 없을 겁니다.”
“아니, 빠지라고 해. 그 정도 의지도 없는 놈은 필요 없으니까.”
장석민은 서진의 단호한 목소리에서 살기를 느끼며 맡게 될 사업이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을 예상했다.
잠시,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장석민이 결심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업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나머지는 장석민과 도광현이 알아서 할 일이다.
지금 해야 할 이야기는.
“김윤환이 날 엮으려 한다고 했지?”
“네.”
“그거…….”
***
“별것도 아닌 일을 왜 이렇게 끄는 거야?”
다음 날, 장석민을 앞에 둔 김윤환의 목소리는 격양되어 있었다.
서진을 공격하기 위한 설계를 장석민이 이런저런 핑계로 질질 끌자 화가 난 거다.
“씨발, 여자 몇 명 준비하는 게 어려워? 내가 데려올까? 어?”
“내 사정 좀 생각해 줘라. 우리 대빵이 검사랑 면담 중이야. 키우던 여자애들도 조사받는 중이고. 이거 잘못하다가는 내 목도 날아가.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완벽한 애들로 준비할게.”
장석민이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김윤환은 인상을 찡그리며 술잔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독한 양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오래 끌지 마라.”
“믿어. 내 실력 몰라? 그런데 마약은 어떻게 공급받는 거야?”
“그건 왜?”
“나도 좀 먹고살아야지.”
김윤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석민은 깡패, 마약 따위야 원한다면 언제든 얻을 수 있다.
“왜 그래? 마음만 먹으면 거래할 수 있잖아?”
“요즘 애들 입맛이 높아져서 싸구려 안 좋아하더라. 네가 가져온 거 보니까, 순도가 높던데?”
“미안한데, 넌 못 구해.”
“왜?”
“그거 있는 집 자식들끼리 돌리는 거야. 깡패 끼면 질 떨어진다고 애초에 선 그었고.”
“루트를 알려 주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알려 줘도 못하니까 신경 꺼라.”
김윤환이 거만한 자세로 낄낄 웃었다.
그리고 글라스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이렇게 마시는 것도 오늘이 끝이야.”
“왜?”
“말했잖아? 이제 휴가는 끝. 모레부터 재정건설에 출근한다고.”
김윤환이 재정건설에서 맡을 보직은 법무 팀 과장.
하지만 김윤환은 조만간 대표 자리에 앉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큰아버지도 슬슬 은퇴할 시기야. 문제만 없으면 대표는 내 자리가 될 게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우리 아버지도 날 인정해 줄 거야. 아버지가 말씀은 안 하셔도 재정건설을 갖고 싶어 하거든.”
“어?”
장석민은 정말 깜짝 놀랐다.
김영준 총장과 재정건설의 사장이 형제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일.
그런데 형의 회사를 노리고 있다니.
“재정건설이 건설사 톱 10에는 못 들어도 도급 한도액이 조 단위야. 그걸 손에 얻어 봐. 아버지 꿈이 정치인데, 자금 걱정은 안 해도 되잖아? 지금은 큰아버지 눈치를 보고 계시지만 내가 대표가 되면 그럴 일이 없는 거지. 내가 아버지를 밀어주는 거야.”
장석민이 술잔을 들었다.
“미리 축하할 테니까, 나중에 성공해서 나 모른 척하지 마라. 일단 한 잔 마셔.”
장석민은 술잔을 입에 대며 정말 밝게 웃었다.
저 가족이 어떤 막장인지는 몰라도 서진에게 해 줄 이야기가 많은 것 같아 뿌듯했다.
***
-……그렇다고 합니다.
“그래서 루트는 모른다고?”
-네.
사무실에 있던 서진은 장석민의 전화를 받는 중이었다.
“그래, 고생했어.”
장석민은 집착처럼 마약의 루트를 물었지만 김윤환은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알아낸 것은 ‘있는 집 자식들’이란 단서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서진의 곁에도 ‘있는 집 자식들’은 널리고 널렸다.
‘그리고…….’
김윤환의 노골적인 생각을 알게 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재정건설을 꿀꺽해서 김영준을 밀어주겠다고?’
자신의 아버지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김윤환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제사를 올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 그게 친척 형에 대한 예의다.
‘난 참 착한 사람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