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과거는 (1)>
***
서진은 서류를 들고 총장실에서 나와 다시 복도를 걸었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나는 가운데, 서진의 눈이 차갑게 변했다.
머릿속에는 김영준 총장의 목소리가 스치고 있었다.
-정계를 떠난 사람이라 해도 여당에 입김이 있는 양반이야. 조심히 움직여야 할 거야. 기한은 한 달, 그 안에 구속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와.
김영준 총장은 정치적인 목적에 따라 권력을 사용하는 정치 검사.
지금까지 권력의 입맛에 맞는 수사를 진행해 왔다.
정권의 지시를 따라 야권의 목을 벴고 시위하는 단체를 짓밟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잘 보이기 위해,
위로 올라가기 위해.
하지만 지금의 지시는 예전과 다르다.
타인에게 잘 보이려 하는 게 아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 수사를 지시하고 있다.
‘백기호 의원과 확실히 손을 잡았나?’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본격적인 레이스가 시작되기 전, 여당 유력 인사의 목을 베어 국민 앞에 내놓는 것은 의미가 크다.
사건이 터지는 즉시 여론 역시 폭발할 거다.
-여당! 각종 비리와 부정, 도덕적 해이가 만연!
-공대출 전 의원의 비리, 사태 심각성을 외면한 여당의 탓!
-공대출 사태로 박무혁 정부의 실상 드러나... 역겨운 내로남불.
갖가지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 포털 사이트를 도배할 테고 여당의 지지율은 급락할 게 분명하다.
반사 이득을 얻는 것은 당연히 백기호 의원.
백기호 의원은 대선 레이스에서 우위를 차지한 후 대권까지 직행할 야망을 갖고 있다.
‘그 다음은...’
만약 백기호 의원이 대권을 움켜쥔다면, 그래서 백기호 의원이 청와대의 주인이 된다면, 김영준 총장은 더 이상 시한부 총장이 아니게 된다.
예상하건데, 모든 임기를 무사히 마치게 될 거다.
‘그리고.’
총장을 마친 후 법무부 장관, 이어서 국회의원 마지막으로 백기호 의원에게 바통을 넘겨받으며 대권 도전.
쓰레기 같은 두 인물이 대한민국을 제 세상으로 만들려 한다.
복도를 걷던 서진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완벽히 걸음을 멈춰선 서진이 고개를 틀어 복도의 끝, 총장실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진의 눈빛이 시퍼렇게 빛났다.
‘재밌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영준 총장과 백기호 의원은 파벌을 가른 채 권력 싸움을 이어가던 원수와 같았다.
김영준 총장이 서진의 아버지를 찾아와 백기호 의원을 치겠다며 도움을 요청한 게 얼마 전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하하호호 웃으며 미래를 약속하고 있다.
‘정말 재밌어.’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곳이 정치판이다.
서진은 김영준 총장과 백기호 의원에게 알려 줄 거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될 수도 있다고.
서진은 그렇게 만들 자신이 있었고 이미 복안도 세워 뒀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믿을 수 있게 된 이유는 바로 김윤환과 이소희의 혼인.
그 정도는 얼마든지 빠그라뜨릴 수 있다.
서진이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열린 창문에서 습한 바람이 불어와 서진의 머리카락을 흔들 때였다.
휴대폰이 드르륵 진동을 울렸다.
작은어머니다.
김윤환과 이소희의 혼인을 훼방하고 싶은 또 하나의 인물.
서진이 슬쩍 웃었다.
작은어머니는 적이지만 지금은 공동의 목표를 가진 친구.
정치판이나 세상이나 더러운 것은 다를 게 없다.
“네, 작은어머니.”
-바쁘지?
“아뇨, 괜찮아요.”
-시간이 있으면 집에 들를래?
이유는 듣지 않아도 뻔하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거다.
엄선주의 담당 검사가 서진, 작은어머니는 엄선주가 서진에게 어떤 헛소리를 내뱉지는 않았는지 우려하고 있다.
“그럼, 저녁에 인사드릴게요.”
서진은 시원하게 답하며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끌끌끌 웃었다.
‘좋네.’
서진은 김영준 총장의 집에 가는 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김영준 총장이나 김윤환이 없을 때, 그곳에서 확인하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다.
친자 감별을 위한 것.
유전자 검사는 모근으로만 하는 게 아니다.
혈액과 타액이 묻은 면봉 또는 칫솔, 그리고 손톱과 발톱 등등.
할 수 있는 것은 많다.
김영준 총장의 머리카락을 뽑을 수 없다면, 다른 것을 손에 얻으면 되는 거다.
게다가 김영준 총장은 저녁 약속이 잡혀 있다. 그리고 김윤환의 약속은 서진이 잡아주면 된다.
서진이 휴대폰을 들고 장석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저녁에 김윤환이랑 술 한잔 해.
***
남들은 퇴근을 할 시간.
서진은 저녁을 먹을 겸 김영준 총장의 집에 들렀다.
“들어와.”
작은어머니가 평소와 다른 반가운 미소로 서진을 맞이했다.
예상대로 김영준 총장은 집에 오지 않았다.
김윤환도 마찬가지, 지금쯤 장석민과 만나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거다.
‘집에는...’
작은어머니와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 그리고 김윤환의 동생인 김유미만 있었다.
김유미는 레지던트, 오랜만에 휴일을 얻어 방에서 자고 있다.
쉬는 날에는 1분이라도 더 자야 한다는 게 김유미의 지론이라고 한다.
‘유미는 나오지 않을 테고...’
서진은 적당히 작은어머니의 장단을 맞춰주다가 욕실로 이동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김영준 총장의 칫솔을 손에 얻을 계획을 세웠다.
이 집안은 칫솔 조차도 스스로 바꾸지 않는다.
모든 것은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가 관리하고 있다.
아주머니를 적당히 속이면 칫솔을 얻는 것은 일도 아니다.
“밥 먹어야지?”
서진은 작은어머니의 친절한 목소리를 들으며 식탁에 앉았다.
갖가지 음식이 보인다.
된장찌개부터 갈비까지.
“지난 번 일도 있고 해서, 밥을 해 주고 싶었거든.”
물론, 이 모든 음식 중 작은어머니의 손이 닿은 것은 없을 거다.
모두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의 솜씨.
하지만 서진은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잘 먹겠습니다.”
서진이 기분 좋게 답한 후 수저를 쥘 때, 작은어머니가 와인을 손에 들었다.
“한잔 할래?”
“아뇨. 들어가서 또 일해야 해요.”
서진은 이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단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입가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작은어머니의 눈빛 때문이다.
작은어머니는 서진을 관찰하고 있다.
서진이 짓는 작은 표정의 변화까지 눈에 담으려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작은어머니는 서진이 음식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가 툭 묻는다.
“...선주, 어때?”
엄선주에 대한 질문이 들어올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서진은 태연히 대답했다.
“힘들어하죠.”
“별 다른 말은 없고?”
작은어머니가 궁금해 하는 것은 하나다.
엄선주가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는지 아닌지.
서진을 죽이라고 지시했던 것.
그 외에 저질렀던 참혹한 행동.
서진은 엄선주에게 꽤 많은 정보를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별 다른 말이요? 없었어요.”
“없어?”
“히스테리를 부리기는 하는데요.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쥔다고 하잖아요? 그 상황에 몰리면 다 그래요. 화를 내다가 변명을 하고 자포자기하죠. 그 외에는 잘 지내고 있으니까, 크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작은어머니의 동생인데, 최대한 예의 바르게 하고 있으니까요.”
“...그래?”
“네.”
작은어머니는 원하는 대답을 들으며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잠시다.
곧바로 또 다른 궁금증을 찔렀다.
“이소희라는 애. 그때 물어 보려고 했는데, 어떤 애야?”
“소희요?”
“그래.”
“그런데, 소희를 어떻게 아세요?”
작은어머니는 눈을 반짝였지만 서진은 모른 척했다.
김윤환과 이소희의 혼사는 아직 서진의 집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
서진의 질문에 작은어머니가 난처한 표정을 짓는 순간이었다.
“결혼할지도 모른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작은어머니의 입이 아니었다.
거실에서부터 걸어오는 김유미, 김윤환의 동생.
‘이거...’
서진이 이 집에 들른 목적은 두 가지.
이소희를 통한 분탕질.
그리고 김영준 총장의 칫솔을 확보하는 것.
사람이 많을수록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김유미의 등장은 달갑지 않았다.
서진의 사정을 모르는 김유미가 냉장고를 열어 음료를 꺼내 마신 후 좀비처럼 식탁에 앉았다.
병원 일이 고된지 얼굴에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서진은 계속해서 표정을 관리하며 김유미를 향해 물었다.
“결혼? 이소희랑?”
“그렇다는데?”
“아, 그래서 물어 보셨구나.”
서진이 대답하며 작은어머니를 바라봤다.
작은어머니의 눈빛이 바뀌어 있다. 지금껏 서진을 향해 다정스레 보여 주던 눈빛은 증발했다.
다시 아들 사랑으로 미쳐버린 광적인 모성애가 가득하다.
서진은 조용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희 괜찮은 애에요. 성격도 좋고 일도 열심히 하고요.”
“집안은?”
작은어머니가 궁금했던 것, 그리고 서진이 기다리던 질문.
서진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가정사까지는 모르지만 어머니만 계신 것으로 알거든요? 자주 전화도 드리고 꽤...”
“잠깐, 어머니만 계시다고?”
“그런 것으로 알고 있어요.”
엄선주의 말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작은어머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식탁을 두 손으로 짚고 몸을 일으키더니 휴대폰을 들고 주방을 빠져 나갔다.
김영준 총장에게 전화를 하려는 것일 거다.
‘작은어머니가 이소희의 집안 사정을 들으면 미쳐 버릴 것은 알고 있었고...’
서진은 이 시점에 욕실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앞에는 김유미가 앉아 있다.
김유미의 시선을 피해 자연스레 욕실로 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작은어머니가 돌아오기 전에.
‘...어떻게?’
서진은 김유미와 서먹서먹하다.
이 몸에 들어온 후 김유미의 얼굴을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
게다가 대화를 나눈 것은 거의 없을 거다.
적막한 공간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김유미였다.
“우리 엄마 성격 알지? 이해해 줘.”
“그런데, 밥은 안 먹어?”
“밥 먹을 시간에 잠을 자는 게 남는 거야.”
“이제 고참 급이라 편하지 않아? 드라마 보면...”
김유미가 배를 잡고 웃었다.
“드라마 보면, 검사는 범인 안 잡고 연애하더라. 싸움도 잘하고, 추리도 잘하고, 예쁘고.”
김유미는 한참동안 드라마와 현실의 차이점을 이야기했다.
그 사이 서진은 식사를 마쳤고 김유미가 커피를 타와 서진의 앞에 내려 뒀다.
“그럼, 들어가서 자. 나도 이만 일어나 볼 테니까.”
서진이 말하자 김유미가 손에 든 음료를 올려 보인다.
다 마신 후, 올라가겠다는 뜻이다.
‘욕실은 2층, 김유미의 방도 2층. 작은어머니가 들어오기 전에 해결하려면...’
화잘실에 다녀온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집의 구조는 욕실과 화장실이 분리되어 있다.
서진의 머릿속에서는 여러 계획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중에 의심을 받지 않고 칫솔을 얻을 완벽한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남의 집에 들어와 칫솔을 훔쳐갈까.
그 과정이 걸리는 순간, 서진의 목적이 명확히 드러날 게 뻔하다.
‘방법은 하나.’
서진이 입술을 쓸었다.
그리고 천천히 커피 잔을 식탁 끝으로 옮긴 후 작은어머니의 미친 성격이 튀어나오길 기다렸다.
그때였다.
“미쳤냐고! 정말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작은어머니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주방까지 흘러왔다.
동시에 서진은 깜짝 놀란 척 커피 잔을 툭 건드렸다.
찰나의 순간에 커피잔이 식탁 아래로 떨어졌고 김유미가 ‘어?’ 할 때, 서진의 바지를 적셨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잔이 깨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괜찮아? 안 다쳤어?”
김유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서진은 민망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다행히 식었네. 다치지는 않았는데, 미안.”
어색한 연기였지만, 욕실로 향할 명분은 세웠다.
서진이 티슈로 바지를 닦으며 입을 열었다.
“오후에 일정이 있는데, 윤환이 형 바지 좀 빌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