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만남 (6)>
“……뭐? 모근?”
서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소희의 얼굴은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뜬금없이 모근이 남아 있는 머리카락을 얻어 달라니.
무슨 미친 소리인가 싶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소희의 머릿속에 머리카락이 필요한 상황이 그려졌다.
바로 친자 감별.
이소희의 가뜩이나 큰 눈이 더 커졌다.
“……서, 설마?”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확실한 것은 어떤 것도 없으니까 예상하지 말고. 이유도 묻지 말고.”
“어? 어. 알았어.”
이소희는 목이 타는지 커피를 입에 댔다. 그리고 천천히 서진을 바라봤다.
서진은 어떤 근거도 없이 이런 부탁을 할 사람이 아니다.
분명 뭔가 있다는 뜻.
이소희는 그 배경이 궁금했지만 서진의 부탁대로 묻지 않았다.
이소희는 복잡한 가정사를 지니고 있기에 그걸 캐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런데…… 머리카락을 어떻게 얻어?”
그게 문제다.
모근이 남아 있는 머리카락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얻기 위해서는 머리카락을 뽑아야 한다.
며칠 전, 호텔에서 김윤환과 술을 마실 때도 그렇게 기회를 노렸지만 실패했던 일.
서진이 심각하게 고민하자 이소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까 침 뱉고 욕하겠다고 했잖아? 그다음에는 머리채라도 잡고 싸울까?”
“어?”
“막 이렇게.”
“그것도 좋겠네. 그런데 싸워도 김윤환의 얼굴은 건들지 마.”
“왜? 얼굴을 때려야 한다고 배웠는데?”
이소희가 작은 주먹을 쥐고 김윤환의 얼굴을 때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작은어머니가 유별나거든. 아들 얼굴에 상처 하나 나는 순간…… 너 죽어.”
“그 정도야?”
“내가 너하고 김윤환의 결혼을 반대하는 이유가 뭘 것 같아? 작은어머니 때문이야. 진정한 시집살이가 뭔지 느끼게 될걸. 일요일에도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문안 인사드릴래?”
“늦잠 자고 싶어서라도 침 뱉어야겠네.”
서진과 이소희는 작은어머니를 대상으로 가벼운 농담을 이어 갔다.
김윤환의 머리카락을 얻는 법을 생각하기 위해 잠시 머리를 비우는 과정이다.
하지만 여전히 답이 없다.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 가던 그때, 이소희가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김윤환의 어머니가 그 정도면 너희 어머니는 어때?”
“우리 어머니?”
“응.”
서진은 자신의 어머니를 갑자기 왜 묻나 싶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농담을 이어 갔다.
“뭐…… 작은어머니에 비하면 천사? 그런데 우리 집은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가 문제야.”
서진은 자신의 기사가 가득 쌓인 박스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소희는 배를 잡고 웃었다.
“그게 뭐야?”
“아, 동생도 문제다. 그놈은 악마거든. 지난번에 너한테 전화 왔을 때…….”
이소희는 서진의 가족 이야기를 들으며 부러움을 느꼈다.
자식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서로 도움이 되며 의지가 되는 그런 가정.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한 이소희에게는 서진의 가족이 이상적으로 여겨졌다.
‘부럽네.’
그렇게 김윤환의 이소희의 약속 시간이 다 되었다.
이소희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머리카락은 알아서 해 볼게.”
“무리하지는 말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소희의 목소리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녀가 서진을 향해 빙긋이 미소를 그린 후 커피숍을 벗어났다.
그리고 서진 역시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화장실로 향했다.
이소희만 보낼 수는 없다.
어떤 식으로 머리카락을 얻는지 지켜봐야 한다.
만약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기면 말려야 하고.
화장실에 들어간 서진은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를 눌러썼다.
평소에 입지 않는 스타일.
청바지에 가벼운 티셔츠.
여기에 선글라스를 낀 채 조금 떨어져 앉는다면 알아보기 힘들 거다.
서진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정리하며 김영준 총장과 김윤환의 얼굴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닮지 않았다.
심지어 성격마저 다르다.
‘분명…….’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는 듯하다.
작은어머니의 과거, 김영준 총장의 행동.
서진은 그 진실을 알고 싶었다.
***
“김윤환이라고 합니다.”
“이소희예요.”
김윤환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이소희의 얼굴이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더 예뻐서다.
놈이 당당하게 말한다.
“저도 검사였습니다. 제가 선배였어요.”
“아, 들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위에 계시니까 부담스럽더라고요. 그래서 옷을 벗어야 했죠.”
이소희는 김윤환이 사고 칠 당시에 강원지검에 있었다. 심지어 서진을 도와 김윤환을 끌어내린 사람 중 하나다.
이소희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이소희는 별말을 하지 않았는데, 김윤환은 그런 모습조차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대화를 주도해 나갔다.
“아버지가 뉴욕 증권가에 계시다고 들었는데요. 그럼 어머니는 소희 씨와 한국에 계신가요?”
“네.”
김윤환은 거짓으로 만들어진 이소희의 정보를 나열했다.
조용히 김윤환의 이야기를 듣던 이소희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절 잘 아시는 듯이 말씀하시네요?”
“그랬나요? 죄송합니다. 얼굴도 못 본 상태에서 결혼이야기가 나왔잖아요. 그래서 나름 세세하게 확인해 봤거든요.”
“그래서 어땠어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속물처럼 보이겠지만, 꽤 괜찮은 스펙이라고 생각했어요. 가족도 직업도 그리고 얼굴도.”
김윤환은 마지막에 “얼굴도.”라는 말을 전하며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흉내를 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김윤환을 지켜보던 서진은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미친 새끼.’
서진은 계속해서 두 사람의 분위기를 살폈다.
이소희가 어떤 식으로 김윤환의 머리카락을 얻어 낼지 궁금했다.
지금 두 사람의 분위기는 꽤 괜찮다.
물론 김윤환 혼자 일방적으로 떠들고 있지만 이소희가 간간이 미소를 지어 주며 놈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있다.
하지만 머리카락을 뜯어낼 타이밍은 보이지 않는다.
‘정말 머리채라도 잡을 생각인가?’
그게 아니면 방법이 안 보인다.
갑자기 어린 시절로 돌아가 ‘머리카락 싸움할래?’ 같은 유치한 말이 통할 리도 없고.
서진은 이소희가 무리하지 않기를 바랐다.
김윤환은 한국에 있을 테고 앞으로도 기회는 많을 거다.
마침내 김윤환과 이소희가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켰다.
차를 마셨으니 식사를 할 타이밍.
서진이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작성했다.
혹시라도 일이 있으면 상관 말고 전화하라는 내용.
그런데 그때였다.
앞서 나가는 김윤환의 뒤로 이소희가 섰다.
그리고 김윤환의 뒤통수를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더니 거침없이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냈다.
따끔함을 느낀 김윤환이 고개를 틀어 이소희를 바라봤다.
그러자 이소희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그렸다.
“아…… 죄송해요. 뭐가 묻은 줄 알았어요.”
“그래요? 괜찮아요. 오히려 신경 써 주신 것 같아 감사하네요. 하하하.”
김윤환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호탕하게 웃었다.
서진은 정말 심각할 정도로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지만, 예쁜 여자가 남자의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계획을 세웠던 게 어이없고 민망할 정도로.
“화장실 좀.”
“네, 다녀오세요.”
이소희는 김윤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몸을 틀었다.
그리고 서진이 앉은 테이블을 스치며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와.”
***
커피숍이 있는 건물의 화장실.
이소희가 서진에게 뽑아낸 머리카락을 건넸다.
“내가 말했지, 할 수 있다고?”
“땡큐.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뭘?”
“나.”
서진은 모자에 선글라스까지 착용하며 완벽하게 얼굴을 가렸다.
게다가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기까지 했다.
부모님도 알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소희는 서진의 질문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왜? 누가 봐도 너잖아. 김윤환이 네 쪽을 볼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그래? 앞으로는 마스크도 착용해야겠네. 뭐, 어쨌든 땡큐.”
중요한 것은 모근이 확실히 남아 있는 머리카락을 얻었다는 거다.
김영준 총장의 것만 얻으면 진실을 볼 수 있다.
***
그날 오후.
집에 돌아간 김윤환은 자신의 어머니를 앞에 두고 오늘 있었던 일을 쫑알쫑알 내뱉었다.
결혼해도 괜찮을 것 같다느니, 이소희도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 같다느니.
모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던 김영준 총장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
며칠 후.
서진은 김윤환의 친구 장석민을 만나고 있었다.
김윤환에 대한 일 때문에 만난 것은 아니다.
놈이 답답한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전 빼 주시는 거 맞죠?”
“봐서.”
마주한 장소는 붉은색이 인상적으로 장식된 차이나 레스토랑이었다.
장석민이 한숨을 내뱉은 후 술병을 손에 들었다.
서진이 손을 저었다.
“근무 중이야. 술은 됐어.”
“아, 네.”
“점심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빨리 말하고.”
서진은 배를 채우기 위해 젓가락을 손에 들었다.
장석민은 술병을 거둬 자신의 잔을 채운 후 독한 술을 목으로 넘겼다.
하지만 모자라나 보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몇 번이나 더 술잔을 입에 털어 낸다.
그리고 얼굴이 벌게졌을 때,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조직의 쩐주 중 한 명이 의뢰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뭘?”
“……검사님을 어떻게 해 달라고요.”
장석민은 눈치를 봤지만 서진은 표정에 동요는 없었다.
그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 둔 후 다리를 외로 꼬며 계속 이야기하라는 눈빛을 보낼 뿐이다.
장석민이 마른침을 삼킨 후 말을 이었다.
“물론 상대가 검사님이라 직접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다른 쪽에 청부하겠죠. 안산 쪽에 다양한 국가의 외국인 새끼들이 있는데, 우리 조직원 중 하나가 그쪽 출신이거든요.”
장석민이 정보를 전하는 이유는 하나.
서진이 호텔에서 가져갔던 녹음기, 거기에 녹음된 장석민의 음성이 공개되기 때문이다.
그럼 장석민은 죽는다.
깡패들이 아니라 김영준 총장의 손에.
차라리 칼에 맞은 후 저수지 같은 곳에 던져지는 게 행복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들었던 이야기를 술술 내뱉는 중이다.
역시 놈들의 세상에도 의리 따위는 없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주변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다.
그렇게 놈의 입이 닫혔을 때, 서진은 어이없다는 듯 끌끌 웃었다.
“요즘 깡패 새끼들은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봐. 정말 재밌네.”
장석민에게는 재밌다고 말하는 서진의 목소리가 꼭 ‘죽이겠다.’라는 엄포로 들려왔다.
그리고 서진의 살벌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쩐주…… 엄선주지? 사채업자.”
“……!”
장석민의 눈이 부릅떠졌다.
쩐주의 이름까지는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서진은 이미 알고 있다.
“그, 그걸 어떻게…….”
지난번, 사이코메트리에서 본 것.
작은어머니는 엄선주를 만나 서진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서진을 찾아와서는 엄선주를 박살 내 달라고 부탁했다.
누구 하나 다치든, 둘 다 죽든 하라는 것.
그 계획이 시작된 거다.
서진이 엄선주를 타고 작은어머니의 목을 노린다는 것을 모른 채.
서진은 슬쩍 웃었다.
엄선주를 짓밟았을 때, 작은어머니에게 들을 칭찬.
그 칼이 자신을 향해 휘둘렸을 때, 볼 수 있는 표정.
‘그리고…….’
깡패들을 짓밟으며 그들과 손잡은, 그러니까 다음 타깃인 황윤성 의원까지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다.
여러모로 이득이 많은 사건.
벌써부터 기대되기 시작했다.
서진이 술병을 들고 장석민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너희 조직, 사라질 거야. 괴멸되겠지.”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믿지 않았을 거다.
뿌리 깊게 박힌 폭력 조직을 뜯어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는 김서진.
가볍게 던진 말이지만 묵직하게 들려온다.
털어 내는 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저후안의 조직을 찢어 버린 자.
장석민이 몸담은 조직 역시 지금 말대로 사라질 수 있다.
“넌 빼 달라고?”
“……네.”
“가볍게 2년, 말 잘 들으면 집행유예. 어때?”
장석민은 지금 서진의 눈빛을 보며 또 한 번 느꼈다.
악마라고.
그리고 생각했다. 김윤환 그 멍청한 놈은 서진을 상대로 왜 미친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