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 김서진-178화 (178/250)

<위험한 만남 (4)>

뜬금없이 시작된 사이코메트리.

장소는 공항이었다.

***

출국장에서 나온 김윤환이 캐리어를 끌며 걷고 있었다.

그 옆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처음 보는 남자, 잘 빗어 넘긴 깔끔한 머리가 인상적이다.

남자가 옆에 서자 김윤환이 입을 열었다.

“준비는?”

“하고는 있는데, 진짜 할 거야?”

남자가 의문으로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김윤환은 고개를 끄덕인다.

“해야지. 그 개새끼 때문에 처박혀 있던 것을 생각하면…….”

김윤환이 지목한 ‘그 개새끼’가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바로 서진이다.

서진의 얼굴을 떠올렸는지 김윤환이 입술을 씹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아 내려 하는 게 표정에서부터 드러난다.

김윤환이 공항의 흡연실로 이동하며 말을 이었다.

“똑같이 해 줄 거야. 내가 당했던 것처럼, 가짜 범인을 진짜처럼 만들어서 선물해 줘야지. 그 새끼도 한 2, 3년 밖에 나갔다 와야 해. 너무 설쳤어.”

“하…… 씨발, 문제 생기는 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 우리 아빠가 누구냐?”

흡연실로 들어간 김윤환이 담배를 입에 물며 재수 없을 정도로 낄낄 웃었다.

서진의 몰락을 그리며 즐거워하는 거다.

예전보다 강해진 김영준 총장의 권력을 누릴 생각에 기뻐하는 중이다.

그리고 김윤환이 앞에 선 남자에게 담배를 건네며 계속 말했다.

“일단, 애기들부터 불러. 적당히 화해하는 척, 기분 풀린 척, 놀아 줘야 하니까. 원래 옷 벗고 놀아야 친해지는 거잖아? 조금이라도 날 믿게 만들어야 해.”

김윤환의 눈빛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지 슬쩍 거부의 말을 던졌다.

“그런데 얼굴이 꽤 알려졌잖아? 애기들을 부르면 싫어할 것 같은데……. 오늘은 그냥 우리끼리 놀자.”

김윤환이 황당한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김서진이 애기들을 싫어한다고? 내가 그 새끼랑 룸살롱에 뿌린 돈만 해도 아파트 몇 채는 사겠다. 개가 똥을 끊는 게 빠를걸. 지금은 얌전한 척하는 거야. 됐고, 준비나 해. 천천히 말려 죽이게.”

남자는 김윤환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김윤환의 입에서는 뿌연 담배 연기가 흘러나왔다.

***

사이코메트리가 끝나며 서진의 시야에 가식적으로 웃는 김윤환의 얼굴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할 말도 있으니까, 시간 비워 둬. 장소는 형이 잡을게.”

서진이 슬며시 웃었다.

놈의 의도가 빤히 보이는 이상 거부할 필요는 없다.

“그래. 괜찮으면 그렇게 해.”

서진의 답변이 들려오자 김윤환의 시선이 김영준 총장에게 틀어졌다.

“아버지, 오늘 서진이랑 술 한잔해도 되죠?”

김영준 총장이 담뱃재를 털며 김윤환과 눈을 마주쳤다.

철없는 아들은 귀국 첫날부터 술을 마시겠다며 허락을 구하고 있다.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렇게 해. 그 전에 집에 들러서 엄마 얼굴 보는 것 잊지 말고.”

김영준 총장은 허락했다.

상대가 서진이기 때문이다.

김영준 총장은 서진과 김윤환의 사이가 틀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김윤환이 재정건설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으려면 서진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김영준 총장에게 멋쩍은 미소를 보낸 김윤환이 서진을 향했다. 이어서 전화하겠다는 신호를 보낸다.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손에 들었다.

‘개가 똥을 끊는 게 빠르다고?’

원래의 서진이 김윤환과 어울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여자에 빠진 쓰레기는 아니었다.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김윤환이라는 놈을 통째로 잡아먹기 위한 준비이며 그 과정.

비록 원래의 서진은 실패했지만 그 감정은 지금의 서진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는…….’

서진은 다짐했다.

이번에는 도망칠 수 없도록 옭아맨 후 반드시 숨통을 끊겠다고.

놈은 한국에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이곳이 낙원이 되기를 바라고 있겠지만, 서진은 김윤환의 저 가식적인 웃음이 뒤틀어지며 울상을 지을 때가 기다려졌다.

***

“이소희, 네 동기라며?”

“어.”

“어때?”

“괜찮은 애지.”

“예쁘던데?”

그날 오후, 서진은 김윤환과 강남의 한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김윤환은 시작부터 이소희에 대한 이야기다.

“하, 외국 물 먹고 돌아왔는데 오자마자 정략결혼이라니, 이것도 참 웃긴 일이야.”

“그러게.”

서진은 적당히 대답했고 간간이 웃어 주며 분위기를 맞췄다.

바에서 술을 먹는 것은 여자를 만나러 가기 전의 애피타이저다.

놈의 목적은 명확했고 이곳에서 질질 시간을 끌 타입도 아니다.

그리고 놈의 성격은 급했다. 위스키가 비기도 전에 입을 연다.

“형 친구가 이 근처에서 장사하거든? 오랜만에 얼굴 한번 보고 싶은데, 그쪽으로 넘어갈까?”

사이코메트리에서 봤던 남자를 말하는 거다.

깔끔한 인상의 그놈, 뭘 하는 놈이었나 했더니 룸살롱을 하고 있었나 보다.

“그래, 그렇게 하자.”

하지만 이동한 곳은 룸살롱이 아니었다.

호텔의 VIP 객실. 신마그룹의 막내아들 신일승이 잡아 놓고 생활하던 그런 곳.

“이런 곳은 처음이지? 요즘에 이게 트렌드래. 돈 없는 새끼들은 오피 가고 우리 같은 놈들은 호텔 오고. 편하게 술 먹고 편하게 놀고. 어때?”

김윤환은 서진을 가르치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며 사이코메트리에서 봤던 그 남자가 들어왔다.

공항에서 마주했던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 김윤환은 정말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놈을 반긴다.

얼굴이 야위었다느니 어쨌다느니.

“마시고 있어. 금방 애들을 데리고 올 테니까.”

남자가 객실을 벗어났고 김윤환은 술과 안주가 가득한 테이블에 앉아 서진의 잔을 채웠다.

그렇게 몇 잔 마신 후, 김윤환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우리 풀어야 할 일이 있지?”

“어.”

“진짜 내가 널 밀었다고 생각했냐?”

김윤환은 잠시 옛 기억을 더듬었다.

국민안전위원회가 주최했던 정의 사회 시상식.

김윤환은 범인을 잡았다는 이유로 잠시 스타가 되었고 그 상까지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상식의 소감을 말하던 중 진범이 잡혔다.

김윤환이 허겁지겁 서진과 함께 구석의 회의실로 들어갔을 때, 당시 서진과 나눴던 대화.

“하나 물어보자. 네가 나 밀었냐? 기억상실, 네가 밀었냐고.”

“너 지금 내가 밀었다고 생각해서, 이 지랄을 했냐?”

“아니, 네가 밀었잖아?”

그 뒤에는 서로 상처 주는 말을 이어 갔고 주먹다짐을 벌였다.

하지만 김영준 총장이 나타나며 상황은 종료.

그 기억을 떠올리며 김윤환이 쓰게 웃었다.

“지금도 의심하고 있어?”

서진은 조용히 김윤환을 바라봤다. 그리고 놈이 원하는 대답을 전했다.

“아니. 오해였다고 생각해. 그래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럼 이번엔 내가 묻자. 그때 일, 네가 기획한 거야?”

“내가?”

“네가 했다고 해도 화낼 생각 없어. 그런데, 정말 궁금해서 그래. 천천히 생각해 보니까, 모든 게 짜 맞춰진 것처럼 움직였더라고. 가짜 범인부터 진범의 등장까지.”

서진은 대답하지 않자 김윤환이 담배를 입에 물며 말을 잇는다.

“재정건설, 큰아버지가 씨를 뿌렸고 우리 아버지가 비닐하우스를 쳐서 비바람을 막았어. 두 분이 어렵게 키운 회사야.”

“…….”

“그런데 이번엔 입장이 바뀌었지. 넌 비바람을 막아 줄 검사, 난 그 안에서 식물을 돌봐야지. 이런 궂은일을 진영이나 유미가 할 수는 없잖아? 우리가 해야지.”

“…….”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 줘. 난 네가 기획한 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 정도로 머리가 굴러가는 놈이 밖에 서 있으면 든든하다고 생각하거든.”

김윤환은 의도적으로 서진의 대답을 요구하고 있다.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둔 것은 안심하게 만들려는 수작.

분명 어딘가에 녹음기나 CCTV를 설치해 뒀을 게 분명하다.

그런 유치한 장난에 넘어갈 서진이 아니다.

서진이 끌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국에 있더니 할리우드 영화를 많이 본 거야? 형이 가짜 범인을 만든 것을 내가 조종했다고? 그럴 초능력이 있다면, 이러고 살겠어? 지구를 지키겠지.”

서진이 농담처럼 받아치자 김윤환이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그렇지?”

“뭐, 그때 의심해서 막말했던 것은 미안.”

“아니야. 잊었다니까. 우리 오늘 시원하게 마시고 내일부터는 진짜 함께해 보자. 내가 재정건설을 2배, 3배로 키워 볼게. 지분은 걱정하지 마. 똑같이 나눌 거니까.”

김윤환이 계속 거론하는 재정건설이란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떡 줄 놈은 생각도 안 하는데, 놈은 제 것처럼 말하고 있다.

당장이라도 입을 찢어 버리고 싶었지만 서진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술잔을 들었다.

“마시자.”

***

여자 세 명이 들어왔다.

속살이 훤히 보일 만큼 쫙 달라붙는 원피스, 앳되고 예쁜 얼굴의 여자들.

서진과 김윤환의 옆에 앉아 팔짱을 끼더니 부담스러울 만큼 달라붙었다.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얼굴을 비비적거린다.

이어서 김윤환의 친구도 여자 하나를 옆에 두며 자리했다.

“잘 모셔. 내가 제일 아끼는 친구니까.”

여자들이 한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했고 김윤환의 친구가 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얘들이 한국에서 활동 안 해서 모르겠지만, 중국 쪽에서는 꽤 인기 있는 걸 그룹이야. 너 귀국한다고 내가 다급히 불렀어.”

김윤환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자신의 옆에 앉은 여자의 얼굴과 몸매를 살폈다.

“내 스타일이네.”

“마음에 들어?”

“어.”

김윤환이 자연스럽게 여자와 부둥켜안을 때, 놈의 친구가 서진의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장석민이라고 합니다.”

“김서진입니다.”

“얘들은 한국 언론을 안 보니까, 편하게 노셔도 됩니다.”

“네, 사정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진은 술을 입에 대며 장석민의 얼굴을 살폈다.

머릿속에서는 몇 가지 정보가 빠르게 정리되는 중이다.

놈은 김윤환과 손잡고 서진을 곤경에 빠뜨리려 한다.

직업은 포주.

중국에 진출한 걸 그룹.

그런데 성매매.

‘이거…….’

다음 타깃으로 잡은 황윤성 의원과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황윤성 의원은 깡패와 손잡았고 뒷돈을 받아먹고 있다. 그 깡패는 걸 그룹을 시켜 준다며 연예인 지망생을 꼬드긴 후 해외 성매매를 통해 돈을 번다.

지금 이놈이 하는 짓과 다르지 않다.

서진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도록 장지혁 검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장석민이라는 이름 석 자.

곧 도착한 메시지는 예상대로였다.

-그 조직 새끼네.

서진이 휴대폰을 품에 넣으며 머릿속에 새겨진 의문을 되짚었다.

깡패 새끼가 무슨 자신감으로 검사 앞에 얼굴을 내밀었는지, 김윤환은 왜 깡패 새끼를 불렀는지,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이것조차 서진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수작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서진은 표정을 감췄다.

김윤환이 이놈을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몰라도 상관없다.

이놈은 오늘부로 김윤환의 친구가 아니라 서진의 말을 듣게 될 거다.

그리고 장석민도 술을 마시며 계속해서 서진을 관찰하고 있었다.

김윤환에게 들었고 조직에서도 들었다.

서진은 조심하라고.

하지만 지금 얼굴을 보면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순둥순둥.

적당히 예의를 갖추며 술을 마시면 마음을 얻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잠시 후,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김윤환이 여자와 함께 다른 객실로 이동했다.

장석민이 서진에게도 권한다.

“피곤하실 텐데, 쉬시죠. 너 오늘 이분 스트레스 확실히 풀어 드려야 해.”

여자가 “네!” 하며 서진을 꼭 끌어안았고 장석민이 서진의 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윤환이 동생이면 제게도 소중한 동생 같습니다. 그러니까…….”

“동생? 그럼 제가 형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뭐, 편하실 대로요.”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달라붙은 여자를 떼어 내며 입을 열었다.

“넌 나가고.”

“네?”

서진의 냉랭한 목소리에 여자가 당황하자 장석민이 서진을 말린다.

“우려하는 일은 없을…….”

“재밌네. 깡패 새끼가 검사한테 형님이라는 소리를 듣기 바라고.”

“……네?”

장석민은 이제야 봤다.

서진의 얼굴이 돌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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