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3)>
아들이 있으면 사위를 삼고 싶다니, 숨겨 둔 딸 이소희를 놓고 저런 말을 내뱉는 게 정말 가증스러웠다.
하지만 서진은 표현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시지.”
술잔이 오갔다.
그사이 별 이야기는 없었다.
안부 인사와 함께 그저 사는 이야기 그리고 백기호 의원이 판사 시절 있었던 일.
서진은 이따금 맞장구를 치며 백기호 의원의 기분을 맞췄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만나 친분을 나누는 것처럼 보일 정도.
서진이 들어오면서부터 좌불안석이었던 보좌관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나 보다.
넥타이를 살짝 풀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테이블에 술 몇 병이 올라왔을 때다.
백기호 의원이 술잔을 내려 두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자네와 종종 술을 마시며 옛 이야기를 하고 싶어.”
“언제든 연락 주시면 달려 나가겠습니다.”
“첫 만남이니까 기분 좋게 선물 하나 싶은데, 받을 생각이 있는가?”
그 말과 동시에 보좌관이 서류 봉투 하나를 테이블에 올렸다.
“읽어 봐.”
백기호 의원이 빙긋이 웃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고 서진이 서류 봉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닿는 느낌이 칼을 쥔 것처럼 섬뜩하다.
이런 종류의 서류 봉투라면 분명.
‘청부.’
서진을 칼잡이로 생각하고 청부하는 거다.
누구 하나 죽여 달라고.
하지만 망설일 수는 없다. 상대의 행동을 알아야 다음 계획을 생각할 수 있는 것.
서진은 거침없이 내용물을 꺼냈다.
“……!”
정준우 부장검사와 밀담을 나눴던 여동수 의원, 놈의 비리 자료.
아들의 로스쿨 부정 입학부터 여러 중소기업의 사장들에게 뒷돈을 받은 것.
마지막으로 세금을 아끼려고 다운 계약서를 작성한 것까지.
시시콜콜한 비리로 가득했다.
서진이 천천히 시선을 들자 백기호 의원이 담뱃재를 툭툭 털며 입을 열었다.
“국회의 이번 회기는 끝났으니 불체포특권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야. 그걸로 여동수의 목을 치도록 해.”
“…….”
“독극물 연쇄살인마에 이어 여동수의 목까지 자네가 들어 올리면 꽤 괜찮은 그림 아닌가? 난 자네가 잘됐으면 좋겠어.”
여동수 의원은 백기호 의원의 라인이었다.
백기호 의원이 이 자리에 올라설 때까지 여동수 의원의 많은 도움을 받았을 거다.
하지만 백기호 의원은 여동수 의원을 가차 없이 내버리고 있다.
여동수 의원이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준 총장의 타깃이 되었고 그와 손을 잡은 정준우 부장검사가 체포된 상태.
여동수 의원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즉, 서진의 손에 온 이 서류는 도마뱀 꼬리 자르기이며 생색을 내는 것.
백기호 의원의 아래서 갖은 고생을 하던 여동수 의원의 마지막 쓰임은 서진에게 주는 선물.
정치라는 것은 참 야비하다.
인간이 가진 욕망의 끝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서진은 이번에도 감정을 숨긴 채 고개를 숙였다.
***
서진이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아직 그곳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백기호 의원을 향해 보좌관이 슬쩍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동수 의원도 참 딱합니다.”
여동수 의원은 백기호 의원의 오른팔이라며 승승장구하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 마지막은 젊은 검사가 쥔 칼에 목을 베여야 할 운명.
그게 딱하다는 말이었는데, 백기호 의원이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보좌관을 바라봤다.
그리고.
“죽이지 않은 게 어디야?”
그 건조한 목소리에 보좌관은 소름이 쭉 끼치는 것을 느꼈다.
***
서진은 집으로 가지 않고 호텔 로비에 앉아 있었다.
이 호텔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근무하는 동생 진영을 기다리는 거다.
휴대폰을 들고 이것저것을 검색하며 앉아 있는데,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형!”
분명 같은 집에 사는데, 얼굴을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원수 같은 놈이지만 이렇게 보니 또 반갑다.
백기호 의원을 만나 찝찝했던 기분이 싹 씻기는 것만 같다.
서진의 앞에 다가온 진영이 코를 킁킁 거리며 물었다.
“뭐야? 술 마셨어?”
“조금.”
“운전시키려고 기다린 거지?”
“잘 아네.”
서진이 픽 웃으며 손에 쥔 자동차 열쇠를 던졌다.
진영이 열쇠를 받아 들며 낄낄 웃는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다른 곳 음식을 먹어? 그거 좀 아니지 않아?”
“야, 내가 예약한 거 아니야.”
“목소리 들어 보니까 멀쩡하네? 진짜 술 많이 안 마셨나 봐?”
“왜? 한잔할까?”
“이히히, 엄마한테 전화할게. 형 만나서 늦게 들어간다고. 술은 형이 사는 거지? 알잖아? 난 박봉이야.”
서진은 진영을 볼 때마다 신기했다.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난 놈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주방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하고.
옷은 나름 명품을 입고 다니지만, 그것은 어머니가 사 준 옷을 집어 입는 것, 집의 재산을 생각하면 정말 검소한 거다.
서진이 진영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가자. 형이 살게. 뭐 먹을까?”
“곱창.”
“좋네.”
***
집에 차를 주차하고 근처의 곱창 집에 들렀다.
백기호 의원을 마주했을 때와 달리 술이 달다.
분명 그곳에서 마신 술과 음식이 수십만 원을 호가할 정도로 비쌌지만 앞에 놓인 소주와 곱창이 더 맛있었다.
두 형제는 도란도란, 두서없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다가.
“형이 이런 이야기 하면 싫어하는 것 아는데…….”
“싫어하는 것 알면 하지 마.”
“그게 아니라, 오해하지 말고 들어.”
“내 결혼에 대한 이야기면 절대 하지 마.”
“그거 아니야.”
“그럼 뭔데?”
진영의 눈빛이 진지했다.
서진도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것을 멈추고 진영을 바라봤다.
진영이 잔을 싹 비운 뒤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 그만두려고.”
“뭘?”
“요리하는 거.”
“……!”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서진이 인상을 찌푸리자 진영이 빈 잔을 만지작거리며 계속 말했다.
“윤환이 형 들어온대.”
“들었어.”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려고 난리 치는 것 같아.”
“그것도 들었어.”
“그래서 나도 재벌 놀이 해 보려고. 윤환이 형한테 뺏길 수는 없잖아? 분명히 망쳐 놓을 텐데.”
진영이 씁쓸히 웃으며 계속 말했다.
“형은 신경 쓰지 말고 거기 있어. 아버지 회사는 내가 있을게. 혹시라도 나중에 상속, 그런 거 해야 하면 똑같이 반으로 나눌게. 그래서 오해하지 말라고 한 거야. 괜히 아버지 재산 노리고 회사 들어가는 것 같잖아. 그리고 요리 그만두는 것, 꼭 이번 일 때문이 아니야. 생각해 보면 재능이 없는 것 같아.”
“야…….”
“오래 고민한 거야.”
언젠가 진영이 아버지 회사에 대해 그런 말을 한 적 있다.
괜한 재벌 놀이 하지 말고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자고.
그런데 그 생각이 바뀌었다.
곧 돌아올 김윤환의 존재.
그놈 때문이다.
그리고 그놈이 회사에 들어오면 뻔하다.
아버지가 만들어 둔 모든 것을 모래성처럼 무너뜨릴 거다.
서진은 진영의 마음을 느꼈다.
오랫동안 꿈꾸며 버텨 왔던 시간을 뒤로해야 할 때의 가슴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서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때 했던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자는 생각, 지금도 똑같아?”
“내가 뭘 안다고 까불겠어, 제대하고 삽질 한번 해 본 적이 없는데. 김윤환 때문인 거지.”
서진이 조용히 웃으며 술병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진영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럼 됐어. 걱정하지 말고. 네 일이나 해. 계속 프라이팬 잡아.”
“오래 생각한 거라니까?”
“형으로서 해 줄 수 있는 게 딱히 없지만 김윤환은 치워 줄게.”
“어?”
“나, 검사야.”
진영은 눈을 깜빡였다. 치워 준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이해 못 한 거다.
그러다가 빵 터졌다.
“형, 윤환이 형 아빠는 검찰총장이야.”
“응, 몇 개월 후면 백수. 난 계속해서 검사.”
“캬! 평검사의 패기!”
진영은 배를 잡고 웃었다.
하지만 서진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은 느꼈다.
한참을 웃던 진영이 물었다.
“정말 계속 프라이팬 잡아도 돼?”
“어. 나중에 네 이름 건 식당을 차릴 때까지 해.”
서진의 말은 믿음직스럽다.
진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형은 언제 결혼할 거야? 나 먼저 해도 돼?”
“왜? 결혼할 사람 있어?”
“햐…… 동생한테 관심 없는 것 봐라. 보여 줄까? 사진 봐 봐. 예쁘지?”
“음…….”
서진의 반응이 미지근하자 진영이 다시 채근했다.
“안 예뻐?”
“매력 있네. 눈 코 입도 다 있고.”
“형!”
“농담이야. 예뻐.”
두 형제의 밤은 즐거웠다.
***
며칠 후, 여동수 의원의 사무실.
여동수 의원은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김서진?”
옆에 선 그의 보좌관이 처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김서진이 칼을 잡은 것 같습니다.”
독극물을 이용한 연쇄살인마, 회담을 망치기 위해 준비되었던 하나의 무대.
야당은 여동수 의원을 단두대에 올렸다.
그리고 자신들은 어떤 관여도 하지 않았다며 물러섰다.
여당은 그 정도에서 타협했다.
모든 것을 쓸어버릴 것처럼 행동했던 김영준 총장도 마찬가지, 그쯤에서 멈췄다.
김영준 총장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여당이 타협한 이유는 하나다.
그들은 정치적 문제로 시끄러워지는 것을 우려했다.
노력했던 회담 소식이 알려져야 대선해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오직 대선을 위한 쇼.
문제는.
“……나를 그런 애송이한테?”
김영준 총장이 나선 것도 아니다.
중앙지검장의 지시도 없다.
그저 애송이 하나의 제물이 되어 사라져야 하는 것.
이건 치욕이다.
“씨발!”
한참 동안 욕을 내뱉던 여동수 의원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래.”
방법이 보였다.
“기회가 될 수도 있잖아?”
여동수 의원의 시선이 천천히 보좌관을 향해 틀어졌다.
그 눈동자에 지금껏 담겨 있던 초조함은 없다.
“일개 평검사야.”
평검사, 의욕만 높지 아직 실력과 권한은 낮은 자들.
지금껏 서진이 해 왔던, 아니 표면적으로 드러난 업적 중에 권력자를 상대한 적은 없다.
기껏해야 경찰서장과 검사.
그저 살인 사건.
여동수 의원은 주먹을 꽉 쥐었다.
경험의 부재는 크다.
서진 정도는 얼마든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5년 정도 예상되는 형량을 이야기에 따라 대폭 낮출 수 있는 거다.
“어쩌면 집행유예 또는 증거불충분으로 끝날 가능성도 존재해! 그러니까, 옭아맬 수 있는 게 있는지 생각해 봐. 그놈 집안, 재정건설이라고 했어. 먼지 많은 집안에 문제가 없는 게 이상한 거지. 그쪽부터 파 봐.”
여동수는 국회의원.
사건은 불구속으로 수사될 거다.
시간은 많다.
그동안 세상은 잠잠해질 테고 거래를 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은 계획대로 이뤄질 게 분명하다.
“찾아! 여자 문제든, 그 집안의 문제든. 뭐든!”
“네!”
보좌관은 몸을 틀었다.
국회의원이 사라지면 보좌관 역시 직업을 잃는다.
계속해서 국회에 남아 있으려면 그 확률이 희박해도 최선을 다해 막아야 한다.
국회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
먼저 선거법 위반의 징역이나 벌금 100만 원 이상의 형벌이다.
물론, 이번 일은 선거법 위반은 아니기 때문에 벌금 정도야 몇천만 원이 나오든 상관없다.
하지만 이번은 형사사건.
금고 이상의 형이 나오면 국회를 떠나야 한다.
반대로 징역만 받지 않으면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
‘가능해.’
보좌관도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여는데, 사무실 앞에 난처한 얼굴의 비서가 서 있었다.
그 얼굴이 뭔가 섬뜩하다.
보좌관이 천천히 눈동자를 움직여 비서의 뒤를 바라봤다.
“직접 모시러 왔는데요. 소환하면 안 오실 것 같아서요.”
비서의 뒤에 서진이 서 있었다.
동시에 여동수 의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건방지게 뭐 하는 짓이야!”
하지만 서진은 위축되지 않았다.
보좌관을 스치며 저벅저벅 여동수 의원을 향해 다가섰다.
그리고 그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적당히 드시지. 참 많이 잡수셨어요.”
“그건 정당한 정치자금이었어. 영수증 처리…….”
“영수증 처리요?”
“그래, 영수증 처리하고 있으니…….”
순간 서진이 여동수 의원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이어서 그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진정하시고, 전 영수증 처리하듯 의원님 처리하러 온 게 아닙니다. 거래를 제안드리러 왔습니다.”
“어?”
“거래요, 거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