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비밀 (5)>
***
불이 완벽히 진압된 것은 동이 틀 무렵이었다.
잿더미가 된 창고 앞에 엄선주가 서 있었다.
부릅뜬 눈으로 어떤 말도 없이.
엄선주를 지켜보던 경비원들과 검은 양복들은 생각했다.
엄선주가 손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 던지며 쌍욕을 퍼부을 게 분명하다고.
그들은 폭언과 폭력의 시간을 기다리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예상은 틀렸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지만 엄선주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적막.
말 그대로 폭풍전야.
순간, 엄선주의 눈빛이 식겁할 정도로 변하며 그 입에서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 부장.”
정 부장이라 불린 사내가 다급히 엄선주의 옆에 섰다.
정 부장은 검은 양복을 이끌고 이곳에 온 책임자.
그는 재빨리 두 손을 배꼽 아래에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최악의 날이다.
조금이라도 엄선주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죽는다.
최대한 굽실거려야 한다.
“네, 실장님.”
정 부장이 초조하게 숨을 내뱉었다.
엄선주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냥 넘어갈 리 없다.
여기 있는 모두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려 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지금의 예상은 맞았다.
“여기 있는 놈들의 명단, 전부 이 부장한테 넘겨.”
“……!”
엄선주가 말한 이 부장은 인간 백정, 항간에는 장기 매매까지 한다는 소문이 있다.
물론 소문이라 생각되지만 그놈은 그만큼 잔인했다.
정 부장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정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실장님, 경찰이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화재가 일어난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를 시작할 겁니다. 그런데, 조사 과정에서 누구 하나 실종되거나 하면 의심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
엄선주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경찰? 경찰 조사가 무서워서 벌을 주지 마라? 신기하네, 언제부터 그렇게 경찰을 무서워했어? 두 번 말하게 할래?”
“죄송합니다.”
엄선주는 정 부장을 쏘아보며 그 옆을 스쳤고 정 부장은 엄선주가 차를 타고 떠날 때까지 허리를 굽히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엄선주가 탄 차가 보이지 않게 됐을 때가 되어서야 정 부장은 허리를 세웠다.
“씨발…….”
이곳에 있는 경비원과 검은 양복들, 밤새 불을 끄느라 고생했고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질책 전에 ‘고생했어.’라는 한 마디가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선주의 입에서는 그 한 마디가 나오지 않았다.
“하…….”
정 부장이 한숨을 내뱉을 때, 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 번호가 저장되지 않은 전화.
그런데, 전화를 받은 정 부장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알겠습니다.”
조용히 통화를 종료한 정 부장이 창고 옆에 있는 숲길로 걸음을 옮겼다.
거침없이 성큼성큼.
그리고 그 어 두운 곳에 서진이 서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모자를 눌러 쓴 서진이 입을 열자 정 부장이 슬쩍 웃었다.
“뭘요.”
엄선주에게 전화해서 소방차의 진입이 힘들다고 말했던 사람.
검은 양복의 사내들을 끌고 일부러 뒤늦게 도착한 사람.
정 부장이었다.
서진이 그에게 악수를 권하자 정 부장은 서슴없이 손을 맞잡았다.
에거서 크리스티나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 그들의 트릭이 실패한 것은 형사를 섭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진은 엄선주를 제외한 이곳의 인물 전부를 손에 넣었다.
엄선주 하나를 바보 만들기 위해.
만약 그녀가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서진의 계획이 실패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엄선주에게 그들은 그저 집 지키는 개였고 그들은 더 큰 먹이를 위해 주인을 바꿨을 뿐이다.
정 부장이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여자가 우리를 다 죽이려 할 텐데……. 어떻게 합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말씀드린 것처럼 화재 사고에 대한 경찰 조사가 시작될 거고 2주일 정도 시간을 벌어 줄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엄선주고 뭐고 할 수 있는 게 없을 테니까…….”
“상황 봐서 외국으로 튀라는 거군요.”
“네, 6개월. 올 해가 가기 전에 정리되어 있을 테니, 휴양이나 즐기고 오세요. 돈은 충분하잖아요?”
정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의문 가득한 눈으로 서진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어느 조직에서 온 겁니까?”
서진이 픽 웃었다.
예전에도 한 번 들었던 말이다.
이놈들은 자신들을 공격한 게 수사기관이란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나?’
수사기관이 이들을 무너뜨리는 것은 어려운 일.
법에 따른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절차를 따르는 사이 놈들은 몸을 숨기고 꼬리를 잘라 버린다.
하지만 서진의 방식은 과격했고 파격이다. 수사기관을 의심 못하는 게 당연하다.
서진이 가만히 있자 정 부장은 뜬금없는 질문까지 했다.
“……혹시 일본 자본입니까?”
“일본 자본이요?”
“그렇잖아요. 중국 저후안이 끌려갔고 엄선주 실장까지 노리는 걸 보면 일본 측에서 싹 다 해먹겠다는 거 아니에요? 맞죠?”
서진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 부장이 씁쓸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배신한 놈이 할 말은 아니지만 조심하세요. 저 여자, 정말 위험해요.”
***
서진이 신지연의 상가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7시가 지나갈 무렵이었다.
서진은 상가에 주차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유치권 행사 중이라는 현수막이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펄럭이고 있다.
이곳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곳.
게다가 신지연의 보호 아래 있어 누구도 드나들 수 없는 곳.
돈을 잠시 보관하기에는 최적이다.
도광현이 있는 곳은 401호.
서진은 401호를 향했고 문을 열었다.
끼이익 문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지폐 계수기에 돈을 집어넣던 도광현이 서진을 반기며 낄낄 거렸다.
“아이고, 손해 봤어요.”
“손해?”
“네! 손해요. 모두 5만원인 줄 알았는데, 창고를 돼지 저금통으로 썼는지 알뜰살뜰하게도 모았네요. 흐흐.”
“5만원 권이 아니야?”
서진의 질문에 도광현이 지폐 다발을 흔들었다.
“외국 돈도 있어요.”
달러와 엔화다.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종류별로 묶여 있다.
그것도 몇 박스 씩.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했는지…….”
도광현이 손을 툭툭 털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정확한 금액은 모르겠고요. 대충 예상하면…….”
서진이 도광현의 말을 기대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돈이 담긴 사과 박스가 이백 개 가까이 된다.
도광현의 말대로 어디에 쓰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엄선주가 알뜰살뜰 모아온 돈.
그 돈의 예상액은.
“세어 보고 환율도 확인해야 알겠지만, 적어도 2천억은 넘을 것 같아요.”
“미친…….”
대포 통장이나 그림 같은 예술품을 이용하는 놈은 봤어도 이런 식으로 현금을 모아 두는 것은 처음 봤다.
이건 정말 미친 거다.
***
짝!
뺨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곳, 엄선주의 꼬마 빌딩 지하 사무실이었다.
그날 오후, 엄선주는 서진의 작은어머니를 만나고 있었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작은어머니는 살벌한 눈으로 엄선주를 노려봤다.
그런데, 엄선주도 만만치 않다.
눈을 깔지 않고 오히려 치켜뜬다.
“하! 언니 돈만 있어? 거기 내 돈도 있었어.”
두 사람은 자매.
하지만 자매의 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이득, 공존해야 하는 목표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목표가 불 타버렸다.
남은 것은 잿더미.
“내가 일부러 불냈어? 불이 난 것을 어떻게 하라고?”
엄선주의 말대답에 서진의 작은어머니는 피가 흐를 정도로 입술을 씹었다.
그리고 천천히 엄선주를 향해 다가섰다.
“그 입 다물어. 지금 당장 죽이기 전에. 그리고 난 네 돈이 얼마인지는 관심 없어. 그 돈, 윤환이를 위했던 거야. 그래서 네 뒤를 봐줬던 거고. 그러니까, 그 돈 돌려 놔. 그렇지 않으면 감방에 처넣을 거야.”
엄선주의 입 꼬리가 비틀어졌다.
“형부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이르려고? 그럼,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실검에 언니 이름 한번 오르게 해 줘? 나도 지껄일 거야. 어떤 미친년이 사채에 투자했는데, 그게 검찰총장의 마누라였다! 그게 수백억이다! 사람들이 좋아하겠네.”
작은어머니는 입을 다물었다.
냉랭한 눈으로 엄선주를 노려볼 뿐이다.
발목을 잡혔다는 생각에 끌어오르는 화를 애써 누르고 있었다.
그러자 엄선주가 얼굴을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방금과 다른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화내지 마. 나도 손해 봤어. 배에 구멍이 났는데, 누가 구멍 냈는지 찾고 앉아 있을래? 손실 계산하고 다시 채워야지. 어?”
“다시?”
“1년, 2년 고생하면 다시 채울 수 있을 거야. 믿어 봐.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잠시 생각에 빠졌던 작은어머니가 시선을 틀었다.
향한 곳은 벽에 걸린 달력.
“내가 돈을 모으던 이유 알지?”
“재정 건설?”
“쉽게 가자. 쉽게…….”
작은어머니가 달력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계속 말했다.
“윤환이 곧 올 거야. 네 형부하고도 이야기 끝냈어. 그 애가 왔을 때, 난 좋은 미래를 선물하고 싶어. 그게 약속이었으니까.”
“……그래서?”
“궁금한 게 생겼어. 서진이가 없으면 재정건설의 뒤는 누가 맡을까?”
엄선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서진? 걔는 회사를 잇는 것에 관심 없지 않아?”
“서진이가 직접 말했었어. 자기는 총장이 목표가 아니라고. 그럼, 부장검사쯤 옷을 벗을 텐데 걔가 변호사를 하겠어? 그거 몇 푼이나 번 다고.”
작은어머니가 달력 앞에 섰다.
한 장, 두 장 넘기며 계속 말했다.
“서진이가 없다면 재정건설은 어떻게 될까? 지금부터 뒤를 준비해야 세금 문제에서도 자유로울 텐데……. 그 동생 진영이는 회사의 오너가 될 깜냥이 안 되고. 우리 유미는 관심이 없고. 윤환이는 곧 돌아오네?”
반복된 말.
엄선주는 이제야 서진의 작은어머니가 한 말을 이해했다.
서진을 치워 달라는 뜻.
엄선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억지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걔, 많이 컸어.”
“이상한 생각 하지 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니까. 그런데, 우리가 계속 함께 할 수 있는 방법. 잃은 손실을 굳이 돈으로 주지 않아도 되는 방법. 있었네.”
***
중앙지검.
서진은 세수를 하고 있었다.
밤새 돌아다녔더니 이제야 피곤이 몰려오는 중이다.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수건으로 닦을 때였다.
품에 있던 휴대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
발신번호가 작은어머니.
서진은 심장이 쾅!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잠이 확 깼다.
창고를 턴 게 ‘들켰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 거다.
그게 아니면 전화가 올 일이 없다.
안부 인사를 나눌 사이도 아니고.
서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혹시 놓친 것이 있는지 떠올렸다.
CCTV와 블랙박스 등등.
하지만 누가 밀고하지 않는 한 들킬 일이 없다.
‘뭐지?’
서진은 긴장된 눈빛을 지우지 못한 채 휴대폰을 귀에 댔다.
“네, 작은어머니.”
-잠깐 좀 볼래?
***
지검 앞 커피숍이었다.
서진은 반가운 척 인사하며 작은어머니의 앞에 마주 앉았다.
“어쩐 일이세요?”
“그냥, 조금 껄끄러운 말을 하고 싶어서.”
작은어머니는 그 뒤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서진도 굳이 묻지 않았다.
그저 작은어머니의 목소리를 기다리며 커피만 마셨다.
설레발을 치다가 그림자가 밟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만히 커피만 마시는 것은 아니다.
작은어머니의 시커먼 속이 무엇인지 예상해 봤다.
어젯밤 엄선주의 창고가 털렸고 곧장 작은어머니가 달려온 이유.
그런데,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고민하는 표정.
만약 서진이 범인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당장 멱살을 쥐었을 텐데, 또 그건 아니다.
‘왜?’
서진은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불안함과 초조함의 조각을 맞췄다가 흐트러뜨리길 반복했다.
그리고 작은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내가 사채 시장을 좀 안다고 했던 것 기억 나?”
“아, 네.”
“친정이 큰손이었거든. 지금도 친동생이 그 일을 하고 있고.”
서진의 머릿속이 순간 차갑게 식었다.
익히 알고 있던 사실.
문제는 그 사실을 왜 내뱉고 있는지 예상할 수 없었다.
작은어머니가 스트로우로 얼음을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껄끄러웠어. 혹시나 조카의 손에 내 친동생이 잡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제는 안 되겠네.”
서진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작은어머니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작은어머니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우연히 들었어. 내 동생이 우리 조카를 위험에 빠뜨릴 것 같아.”
“네?”
작은어머니가 서진의 손을 덥석 잡으며 다급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핑계를 댈 것 같아. 내가 약자잖아. 총장의 아내가 사채업자의 집안 이었다는 것, 누가 좋게 보겠어?”
“…….”
“그래서 찾아왔어. 친정 일이니까 그리고 집안 일이니까 조용히 해결해 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