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 김서진-159화 (159/250)

<은밀한 비밀 (4)>

서진은 마음을 가라앉힌 후 창고 내부를 천천히 살폈다.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던 것은 작은 창.

그곳의 쇠창살을 뜯고 들어왔다.

‘그리고…….’

이곳에도 여러 대의 CCTV가 놓여 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하지만 전기는 끊겼고 CCTV 역시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잠시 동안 이곳은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것.

‘지체할 수 있는 시간은 최대 30분.’

이 창고에도 곧 불이 붙을 거다.

최대한 버텨 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0분이 전부다.

그 짧은 시간에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사라져야 한다.

‘어떻게?’

서진은 며칠 전, 이곳을 사전답사하며 봤던 모든 것을 떠올렸다.

건물과 나무 같은 지형지물부터 오가던 사람들의 동선까지.

그렇게 생각에 빠졌던 서진이 도광현에게 입을 열었다.

“경호원들 있지?”

도광현이 붙여 둔 서진의 경호원, 그들은 언제나 서진의 근처에서 대기한다.

도광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진이 입을 열었다.

“전화해. 그리고 트럭 몇 대 빌려서 여기로 오라고 해.”

“……네?”

이 시간에 트럭을 빌리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다.

진입로는 하나.

게다가 고장 난 차량과 야간을 이용해 불법 주차된 차량이 그 길을 가로막은 상황.

물론 억지로 뚫고 올 수도 있지만.

“소방차가 올 테고 여기 경비들에게 발각될 거예요. 길이 없어요.”

“있어.”

“네?”

“그리고 소방차는 안 와.”

소방차가 안 온다니.

밖에 서 있는 경비가 여덟, 누구 하나는 분명 신고했을 거다.

도광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검사님이 소방관도 지휘할 수 있어요?”

“무슨 소리야? 내가 소방관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어쨌든, 온다고 해도 뒤늦게 올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일이나 해.”

“네?”

도광현은 여전히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 모든 상황을 이해시킬 시간은 없다.

서진이 시선을 창밖으로 옮기며 말을 이었다.

“됐고. 밭으로 오라고 해.”

“네? 농작물은요?”

“길 있잖아. 저기도.”

도광현이 서진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봤다.

서진의 말대로다.

밭을 지나 조금만 이동하면 아슬아슬하게 차가 다닐 만한 길이 있다.

그곳에 트럭을 주차하고 박스를 옮기면 된다.

그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문제일 뿐.

“전화해. 라이트 끄고 조심해서 이동하라 전하고.”

도광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지만 지금은 서진의 말에 따라야 한다.

그 외에는 답이 없다.

“알았어요.”

도광현은 질문을 멈춘 채 휴대폰을 들었고 서진은 박스를 들고 창밖으로 던졌다.

한 개, 두 개, 세 개…… 끝이 없다.

어느새 팔이 뻐근해졌고 매캐한 냄새와 함께 들어오는 연기.

이마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도광현도 서진의 옆으로 다가와 박스를 손에 들기 시작했다.

“온대요. 10분 안에 오라고 했어요.”

“그래?”

“이 시간에 트럭을 어디서 빌리냐고 징징대기에 보너스 준다고 했더니 훔쳐서라도 갖고 온다네요. 읏차.”

도광현이 박스를 들고 창밖으로 던졌다.

그렇게 몇 번.

도광현이 또 하나의 박스를 들고 창가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밖에 나가서 길 쪽으로 박스를 옮겨 둘게요.”

“그렇게 해.”

서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도광현이 갑자기 끌끌 웃었다.

그리고 서진을 보며 계속 말했다.

“사과 박스에 들어 있는 게 모두 돈이잖아요. 확인은 하지 않았지만 안에 든 모든 게 오만 원이라면 박스당 10억이 넘을걸요.”

“그렇겠지.”

“언젠가 빌게이츠가 초당 150달러 이상을 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거든요. 지금의 환율로 치면 약 18만 원.”

도광현이 들고 있던 박스를 창밖으로 던지며 말을 이었다.

“지금 생각하니까 빌게이츠도 거지네요. 1초에 18만 원밖에 못 벌고.”

도광현은 농담을 던지며 배를 잡고 웃었다.

스스로 긴장을 풀기 위해 노력하는 중.

이곳에도 불길이 넘어오는 중이고 밖은 불을 끄기 위해 시끌벅적.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입이 바짝바짝 마를 거다.

도광현이 창문을 넘으며 입을 열었다.

“일 끝나고 술 한잔하실 거죠?”

“맥주?”

“콜. 불장난 후에는 맥주죠.”

도광현이 폴짝 뛰어 창고를 벗어났다.

서진은 한숨을 내뱉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렇게 옮겼는데 아직도 박스가 가득하다.

‘대체…….’

이렇게 많은 돈이 어디에 필요한지.

엄선주의 끝없는 탐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리고 서진은 궁금했다.

탐욕스럽게 모았던 돈이 잿더미가 되어 사라진 것을 보았을 때, 엄선주가 내보일 표정.

‘뭐, 직접 보기는 어렵겠지.’

엄선주가 비명을 지르는 동안 서진은 시원한 맥주에 치킨을 뜯고 있을 생각이다.

서진은 다시 뚜벅뚜벅 상자를 향해 다가갔다.

엄선주 그리고 그 큰손의 집안, 놈들은 돈을 쥐고 있다.

막대한 돈을 휘둘러 사람들을 노예로 부린다.

그래서 수사기관의 칼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칼을 휘둘러도 꼬리만 내줄 뿐, 몸통과 대가리는 멀쩡하다.

‘그런데…….’

숨겨둔 비자금이 사라지면 놈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손실을 보면 채우려는 게 인간의 본능.

지금보다 더 탐욕스럽게 달려들 테고.

‘탐욕의 끝은 파멸이야.’

서진은 그 진리를 몸소 가르쳐 줄 생각이다.

***

“의원님, 죄송해서 어쩌죠?”

“왜요?”

통화를 마친 엄선주가 룸 안으로 들어왔다.

술을 홀짝이고 있던 국회의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엄선주를 바라봤다.

엄선주의 표정이 이상했다.

억지로 웃고 있다.

가늘게 떨리는 입술은 분노를 참고 있는 듯하다.

“급한 일이 있으면 먼저 가 봐야죠. 얼굴이야 나중에 보면 되는 거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엄선주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세우며 말을 이었다.

“여기 마담에게 특별히 더 신경 쓰라고 말해 뒀어요.”

“허참, 신경 쓰지 말라니까요?”

“귀한 분을 모시고 어떻게 그래요.”

“괜찮아요. 괜찮아.”

하지만 국회의원의 말과 행동은 달랐다.

국회의원은 엄선주의 뒤에 선 세 명의 어린 여자를 보고 활짝 미소를 짓는 중이다.

그러자 반라의 여자들이 국회의원을 향해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엄선주는 국회의원의 밝은 표정을 보며 안심했다.

놈은 국민에 봉사할 생각으로 국회의원이 된 자가 아니다.

그저 배지를 달고 싶어 당에 돈을 뿌린 자다.

요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엄선주가 반라의 여자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권력 무서운 줄 알고 입 무거운 아이들이니까, 평소의 무거움은 내려놓으셔도 돼요. 너희들, 이분 잘 모셔야 해.”

반라의 여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국회의원은 엄선주가 어서 나가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체면을 유지하며 가식적인 웃음을 보인다.

“허허, 나 그런 사람 아니라니까?”

“그럼,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그렇게 엄선주가 룸 밖으로 나왔다.

룸에서는 금세 간지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순간 엄선주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녀가 천천히 휴대폰을 꺼내 귀에 댔고 입에서는 살기 어린 목소리가 내뱉어졌다.

“난 30분 정도 걸릴 거야. 애들 먼저 보내. 창고 문 열고 내용물 꺼내라고 해.”

-알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물건 상하면, 너희들 다 죽어.”

엄선주가 통화를 종료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리고 ‘별일 없을 거야. 괜찮을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차에 올랐다.

“시흥 창고. 최대한 빨리 가. 신호 무시하고.”

운전석에 앉은 기사가 액셀을 밟았다.

엄선주는 뒤에 앉아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

“길은 왜 막고 있는 거야!”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창고로 향하는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언덕 위에 있는 창고.

차를 타고 오르면 금방이지만 고장 난 차가 그 앞을 가로막고 있다.

차 없이 달려서는 약 5분이 걸리는 거리.

“씨발!”

사내들은 소화기를 하나씩 들고 긴박하게 움직였다.

차오른 숨이 폐를 찢을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달렸다.

그렇게 그들은 창고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화르르륵!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고 불꽃의 시뻘건 혓바닥이 창고 문을 막아섰다.

“뿌려!”

그들은 일제히 소화기를 당겼다.

치이이익 소리와 함께 소화액이 분출된다.

하지만 일시적일 뿐, 해결 방법이 될 수 없다.

“소방서는? 연락했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언제 오는 거야!”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시뻘건 눈으로 경비팀장을 찾았다.

팀장의 이름은 김광은, 서진이 만났던 사람이다.

“너 뭐 했어? 뭐 했냐고, 이 새끼야!”

사내는 콱! 콱! 소리가 날 정도로 김광은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때렸다.

김광은이 고통을 참기 못하고 정강이를 만지기 위해 허리를 굽히자 곧바로 손바닥을 휘둘러 그의 뺨을 짝! 짝! 짝! 휘갈겼다.

“이 미친 새끼가, 경비 하나 제대로 못 서서 불이 나는 걸 지켜봐? 넌 뒈졌어, 새끼야!”

김광은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예상했던 일이다.

잠깐의 굴욕과 통증을 참으면 새 삶을 살 수 있다.

잠시 후, 소방차가 도착했고 화재 진압을 시작했다.

이미 창고 안에도 불이 붙어 창문을 깨지고 안에서 바깥으로 불꽃이 뻗어 나오는 중이었다.

도착한 엄선주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창고를 바라봤다.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눈을 시퍼렇게 뜨고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볼 뿐이다.

지금껏 아버지 몰래 악착같이 모은 돈.

그 모든 것이 화마의 입속에 씹어 먹히고 있었다.

엄선주는 잿더미라도 들고 은행에 가 볼까 생각했다.

그럼, 그 무게를 환산해 돈을 준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다.

수사기관에 자금의 출처를 파고들 여지를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

‘하!’

엄선주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어서 분노가 흘러나왔다.

“아아아아악!”

***

불꽃이 휘날리는 게 멀리 보이는 곳.

어디선가 리어카를 훔쳐 박스를 나르던 도광현이 그곳에 멈춰 섰다.

그리고 멍하니 섰다.

와르르르!

굉음과 함께 창고가 무너지는 게 보인다.

주저앉은 창고로 또 다른 불길이 뒤덮이고 있다.

“거, 검사님?”

도광현이 툭 리어카의 손잡이를 놓쳤다.

서진이 나오지 않았다.

이제 그만 가자고 했지만 조금만 더 있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검사님!”

도광현은 창고가 있는 곳으로 뛰었다.

경찰에 잡히든 놈들에게 잡히든, 상관할 바가 아니다.

지금은 서진의 생명이 중요했다.

“씨발! 죽지…….”

“어디 가?”

뜬금없이 옆에서 들려온 서진의 목소리.

도광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을 살폈다.

서진이 통화하며 걸어오는 중이다.

도광현과 마주친 서진이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후 입을 열었다.

“김서진입니다.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상가 좀 쓰고 싶은데요.”

통화 상대는 신지연이었다.

그녀가 가진 공사가 중단된 상가.

박스를 숨겨 두기에 최적의 장소다.

그리고 그녀는 서진의 부탁에 흔쾌히 답했다.

-언제든. 이참에 가질래?

“아뇨. 그럼, 며칠만 신세 질게요.”

서진이 통화를 종료하며 도광현을 향해 시선을 틀었다.

“왜 그렇게 서 있어?”

“아, 검사님이 죽은 줄 알고요.”

“잉? 내가 왜 죽어?”

“저거…….”

서진이 시선을 틀었다.

무너진 창고 위로 보이는 불꽃.

그 위에 뿌려지는 물줄기.

“아, 그 전에 빠져나왔지.”

몰래 숨어 엄선주의 얼굴을 보느라 늦었을 뿐이다.

도광현이 가슴을 쓸어내릴 때, 서진이 수첩에 주소를 적어 건넸다.

“일단 박스는 여기로 옮겨. 중간에 CCTV 없는 곳에서 차 갈아타는 것 잊지 말고.”

“검사님은 안 가세요?”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아, 네.”

도광현이 주소를 건네받은 뒤 지금껏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소방차가 늦게 올 것은 어떻게 알았어요?”

“신고를 늦게 했을 테니까.”

“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라는 것 알지?”

오리엔트 특급 살인, 에거서 크리스티나의 추리 소설.

열차 안에서 살인이 일어났는데, 알고 보니 승객 모두가 범인이었다는 내용.

“회유했지, 경비 여덟 명 모두 우리 편이었어.”

“헐.”

황당해하는 도광현을 보며 서진이 슬쩍 웃었다.

돈은 빼앗았다.

이제 놈들의 반응을 지켜보며 그 액수를 확인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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