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비밀 (3)>
“그래도 검사님이랑 있으니까 그나마 덜 긴장되네요.”
도광현의 말에 서진이 슬쩍 웃었다.
긴장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걸리면 죽는다. 저후안의 말처럼 소각장에서 타 죽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성공하면 놈들의 머리채를 잡고 수면 위로 끌어 낼 수 있다.
게다가.
“최소 50억은 있겠죠? 그러니까 여덟 명이 밤낮으로 지키는 거고요. 이 정도 스케일로 움직이는데, 50억은 있어야 이득이죠.”
성공하면 돈 잔치, 실패는 지옥.
무엇이든 극단적인 결과.
도광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 전화는 없어?”
“네. 배우들이 도착했다는 것까지는 들었는데요. 아직 연락은 없네요.”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대로만 되면 문제는 없다.
모든 것은 서진의 손바닥에서 놀아날 거다.
서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며칠 전을 떠올렸다.
***
며칠 전 오후 2시, 서진은 시골길에 서 있었다.
차를 대 놓고 조용히.
이곳은 엄선주의 비자금 창고가 있는 지역이었다.
엄선주가 도심의 빌딩이나 건물을 창고로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
찔리는 게 많은 범죄자이기 때문이다.
언제든 수사기관이 들이닥칠 수 있고 자칫 모든 것을 추징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래서 엄선주는 이곳을 선택했다.
명의는 다른 사람.
명목은 양고기 보관 창고.
저후안같이 내부자의 정보가 없었다면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
만약 감옥에 다녀온다 해도 그녀의 생활을 다시 윤택하게 해 줄 현금.
하지만 그 모든 계획이 서진에게 들켜 버렸다.
조만간 엄선주에게는 인생 최악의 상황이 펼쳐질 거다.
‘차 한 대가 간신히 빠져나갈 1차선 도로. 가로등과 CCTV는 없고…….’
서진은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확실히…….’
비자금을 숨겨 두는 곳답다.
접근이 어려운 곳이며 심지어 창고는 조금 높은 언덕 위에 있다.
즉, 멀리서도 시골길의 시작을 확인할 수 있는 곳에 위치.
‘쉽지 않겠어.’
서진은 모자를 눌러쓴 채 마실을 나온 사람처럼 시골길을 걸었다.
창고까지는 걸어서 5분.
지나는 길에 보이는 가정 주택은 두 곳.
좌측은 산이며 우측은 밭.
그렇게 서진은 엄선주의 비자금이 숨겨진 창고에 도착했고 그곳을 스치며 힐끗 지키는 놈들을 살폈다.
도광현의 말대로 꽤 많은 놈들이 창고를 지키는 중이다.
‘하지만…….’
놈들은 시간만 때우고 있다.
담배를 피워 대고 맥주를 마시는 놈도 보인다.
서진이 옆을 지나치고 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말 그대로 느슨하다.
어떤 긴장감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껏 창고가 습격당했던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다.
‘예상대로야.’
완벽한 경비를 생각할수록 그리고 그 경비의 목적이 희미해질수록 인간은 나태해진다.
‘내가 아니어도 네가 지키잖아.’라는 생각과 함께 타인에게 의존하는 거다.
‘그래도…….’
서진은 한숨을 내뱉었다.
놈들이 오합지졸처럼 있다 해도 창고를 털기는 쉽지 않다.
‘진입로는 하나, 그 뒤는 밭, 창고를 지키는 놈들의 숫자가 여덟.’
게다가 창고 위를 수놓고 있는 많은 CCTV.
날고뛰는 도둑이라 해도 저 많은 눈동자를 피해 안으로 들어가 돈을 빼 오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저기는 이용할 수 있을까?’
창고 바로 옆에 폐가가 보였다.
숨어들기엔 좋아 보이는데, 문제는 놈들이 폐가 앞 공터를 주차장으로 사용한다는 거다.
차량의 블랙박스가 반짝이고 있다.
서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필 때였다.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알았어, 알았다고. 갚는다고! 일주일만 기다려.”
서진의 시선이 다급히 틀어졌다.
폐가 앞 공터, 주차된 차량에 몸을 기대고 전화를 하는 남자.
남자의 표정은 썩어 있다.
통화 내용은 계속해서 돈, 돈, 돈.
“야, 내가 돈 떼먹을 사람이야?”
놈은 도박을 했고 많은 돈을 잃었다.
심지어 꽁지 돈까지 빌려 쓴 상태.
서진은 놈의 통화를 듣는 순간 모든 상황을 예측할 수 있었다.
‘놈이 앉은 도박판…….’
그것을 연 것은 엄선주의 사채업자 패거리다.
놈들의 악랄한 수법 중 하나.
월급을 주지만 일부러 도박판에 앉혀 그것조차 앗아 간다.
그리고 대출 이자의 고리 속에 노예처럼 부려 먹는다.
“씨발…….”
남자가 심각한 얼굴로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담배를 입에 물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늪에 빠진 것을 깨달았지만 벗어나기는 늦었다. 남자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진은 빙긋이 웃었다.
‘찾았다.’
창고의 보안을 뚫을 수 있는 구멍.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구조.
남자는 돈을 얻고 서진은 엄선주에게 치명타를 선물할 수 있다.
서진이 천천히 마스크를 꺼내 착용했다.
깊게 눌러쓴 모자와 마스크, 부모님이라 해도 알아보기 힘들 거다.
그리고 남자의 통화가 종료됐을 때, 서진이 그를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잠깐만.”
서진의 목소리에 남자가 휴대폰을 품에 넣으며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곧장 인상을 찡그린다.
사람이 거의 오가지 않는 곳에 얼굴을 가린 놈이 나타났으니 당연한 반응.
하지만 서진은 눈을 부릅뜬 놈을 향해 천천히 다가섰다.
“경계할 필요는 없고.”
“누, 누구야?”
서진이 걸음을 멈춰 섰다.
더 가까이 다가갔다가는 놈의 목소리가 커질 수도 있다.
그럼, 창고 앞에 옹기종기 모여 담배나 피우고 있는 놈들도 이곳으로 올 가능성이 크다.
이럴 때 통하는 것은 하나.
서진이 품에서 흰 봉투를 꺼내 남자를 향해 툭 던졌다.
가득한 오만 원권.
돈이 곧 명함이다.
남자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릴 때, 서진이 입을 열었다.
“퇴직금 두둑이 줄 테니까 내 일 좀 도와줄래?”
“……뭐요?”
남자의 시선이 서진에게 향했다.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사람에게 결코 좋은 의도는 없다.
하지만 남자는 돈이 필요했고 서진의 말을 잠시 들어도 좋다는 결정을 내렸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진이 입을 열었다.
도박판이 어떤 이유로 열렸는지.
그 뒤에 누가 있는지.
남자의 얼굴은 시뻘겋게 변했고 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서진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복수해 줄까?”
***
“연락 왔어요. 준비됐대요.”
도광현의 말에 과거를 기억하던 서진이 시선을 틀었다.
도광현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시작할까요?”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해.”
***
경비팀장, 김광은.
그는 연신 줄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며칠 전 만났던 낯선 남자를 떠올리는 거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던 그 남자.
그 남자의 정체가 서진이었지만 김광은이 그것까지 알 수는 없었다.
‘오늘이라고 그랬어.’
당시 서진은 김광은에게 경비 시스템을 자세히 뜯어 물었다.
로테이션이 어떻게 되는지, 사고가 났을 경우 어떤 대응책이 있는지, 마지막으로.
-저 창고에 뭐가 있는지 알아?
서진의 목소리를 떠올리던 김광은이 시선을 틀어 창고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구인난에 허덕이다가 여기까지 흘러왔을 뿐이고 경비를 서라고 해서 섰을 뿐이다.
김광은은 ‘내가 정말 생각 없이 살았구나.’ 생각하며 긴장된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였다.
“부, 불이야!”
신호탄이 올렸다.
창고 옆 폐가에 불이 붙은 거다.
휘발유라도 뿌렸는지 삽시간에 타오른다.
“소, 소화기! 소화기 챙겨!”
“신고해!”
김광은도 다급히 휴대폰을 꺼냈다.
창고에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상부에 연락하는 것, 그게 남자의 임무였다.
“시흥의 창고입니다! 옆 폐가에 불이 났는데, 이게 갑자기 일어난 거라…….”
김광은의 다급하고 두서없는 말에 수화기 너머는 분노했다.
-무슨 말 하는 거야!
“불이 났다고요!”
-갑자기?
“네!”
-창고는? 창고는 어때?
“아직…….”
김광은이 말하는 순간 창고에도 불이 옮겨붙었다.
화르륵!
엄청난 불꽃이 화마처럼 일그러진다.
“……붙었습니다.”
김광은의 망연자실한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는 쉬지 않고 욕설을 내뱉었다.
-너 이 개새끼! 무슨 수를 쓰든 막아!
“부, 부장님, 소방서에 신고는 했고요. 일단 우리 애들부터 좀 구하겠습니다.”
-뭐?
“그래도 사람 목숨이 우선이잖아요.”
-야! 이 개새끼야!
김광은이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불을 끄기 위해 이리저리 달리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피해! 피하라고!”
김광은이 고개를 숙였다.
누가 보면 불붙은 창고를 보며 괴로워하는 것으로 봤을 거다.
하지만 김광은은 웃고 있었다.
***
그 시각, 서울 강남의 한 룸살롱.
엄선주는 교육위 국회의원을 만나고 있었다.
밀담을 나누기에 이곳만큼 좋은 곳은 없다.
엄선주가 술병을 들어 국회의원의 잔을 채우며 입을 열었다.
“제가 용건만 말씀드리고 가야 의원님께서 어린 동생들이랑 재밌게 놀 수 있겠죠?”
국회의원이 껄껄 웃었다.
“아이고, 난 엄 사장이랑 노는 게 더 좋은데.”
“에이, 마음에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저도 어린 동생이랑 노는 게 더 재밌는걸요.”
“내가 이래서 엄 사장을 좋아해요. 내 마음이랑 똑같거든. 하하하.”
국회의원이 술잔을 단번에 비운 후 엄선주를 바라봤다.
그러자 엄선주가 다시 국회의원의 술잔을 채우며 계속 말했다.
“제가 의원님 스케줄을 좀 건드려도 될까요?”
“내 스케줄을?”
“의원님 이름으로 보육원과 양로원에 선물을 보낼 예정이거든요. 날짜는 보좌관에게 전달해 놨으니까 가서 사진만 찍고 오시면 되는데…….”
“그런 거야, 당연히 가야죠.”
이번엔 국회의원이 엄선주의 잔을 채웠다.
얻은 게 있으면 줘야 하는 게 세상의 법칙.
엄선주 정도의 사람이 어떤 대가도 없이 보육원과 양로원에 돈을 뿌릴 이유는 없다.
국회의원이 술병을 내려 두며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저도 이제 노후를 준비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서요. 마지막에 좋은 일 해 보고 싶은데,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좋은 일?”
“학교를 짓고 싶어요. 요즘 시골에 학생 수가 모자라서 폐교 되는 곳이 많다죠? 그래서 생각했어요. 기숙사가 완비되어 여러 동네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어떨까 하고요.”
엄선주는 헐값에 국유지를 손에 쥘 생각을 하고 있다.
미공개 정보를 통해 들은 게 있어서다.
그 지역은 개발이 예정된 곳.
시골 학생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학교 설립을 진행.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에 의해 좌초.
그럼, 학교를 설립할 의지가 있었다는 증거와 함께 그 땅 역시 고스란히 엄선주의 손에 남는다.
이후 건설 회사 등에 땅을 팔아 버리고 해당 사업을 도운 국회의원과 돈을 나누면 완벽 범죄.
‘적어도 3천억.’
엄선주는 서진의 작은어머니에게 예상 수익으로 2천억을 말했지만 3천억은 남길 생각.
“기숙사도 짓고 체육관도 짓고 시골에 이런 학교가 있을 수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만들…….”
엄선주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국회의원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그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입을 열었다.
“엄 사장, 내가 정말 국가에 봉사하려고 국회의원이 된 것 같나요?”
“네?”
“배지 하나 달자고 수억을 들였어요. 발품 팔아 악수나 하러 다녔고요. 왜 그랬겠어? 적어도 본전은 찾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표면적인 이유 말고 그 뒤를 말해 봐요. 나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에요.”
엄선주가 활짝 웃었다.
앞에 앉은 국회의원은 말이 통하는 사람이다.
“그건 차차 알려 드리려고 했는데, 벌써 알고 싶으세요?”
하지만 이번에도 엄선주의 말은 이어질 수 없었다.
휴대폰이 부르르르 떨렸기 때문이다.
통화 거부를 눌렀지만 또 울린다.
엄선주가 국회의원에게 살짝 미소를 그린 후 양해를 구했다.
“잠시만요.”
엄선주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룸 밖으로 나가며 휴대폰을 귀에 댔다.
“왜?”
-시, 실장님!
긴박한 목소리에 엄선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무슨 일이야?”
-시, 시흥 창고에 불이 났습니다! 소방차가 갔는데, 시골 길 중간에 고장 난 차가 있어서 진입을 못 하는 중입니다!
“뭐?”
***
서진은 도광현과 함께 창고의 유리창을 통해 안에 들어와 있었다.
밖은 불 때문에 난리다.
이 안에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할 겨를이 없다.
도광현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검사님, 여기 미쳤는데요.”
사방에 사과 박스가 가득하다.
그 안에 든 것은 모두 현금.
여간해서는 당황하지 않는 서진이 입술을 씹었다.
“낭패야. 예상을 넘어섰어.”
이 정도의 현금을 옮기려면 트럭이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