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비밀 (2)>
***
도광현은 서진의 말을 그대로 따라 내뱉었다.
“안나 루가 제안했습니다. 엄선주의 조직도 같은 방법으로 날려 버리자고.”
저후안의 조직은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다.
저후안을 비롯한 주요 인물이 잡혔으며 남은 조직원도 수사기관에 쫓기는 중.
만만하게 생각했던 대한민국의 수사기관은 집요했고 저후안의 조직은 말 그대로 뿌리까지 뽑혔다.
그래서 자력 보복은 어렵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
“안나 루는 이이제이를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이제이, 오랑캐로 오랑캐를 다스린다는 말.
“검찰도 엄선주도 같은 한국인입니다. 놈들끼리 싸우고 지지고 볶으면 꽤 괜찮은 이야기 아닐까요? 사장님은 손대지 않고 코 푸는 것이죠.”
저후안이 입술을 쓸었다.
나쁘지 않은 이야기.
문제는…….
“검찰에게 어떤 식으로 연결할 거지?”
“제 직업이 변호사입니다. 검찰 몇 명은 친구로 알고 지내죠.”
저후안의 시선이 다시 엄선주의 기록물로 옮겨졌다.
앞에서는 웃으며 뒤에서는 김서진과 손을 잡고 뒤통수를 치다니.
다시 생각해도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잠시 분노를 삭이던 저후안이 입을 열었다.
“손을 잡고는 있었지만 그쪽 집안 문제까지는 몰라. 이득과 정보만 공유했을 뿐, 철저히 다른 조직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저후안이 입을 닫자 짧은 침묵 속에 답답한 공기가 채워졌다.
저후안은 눈동자를 움직이며 생각에 빠졌고 도광현은 그런 저후안을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저후안은 엄선주가 가진 조직의 문제를 잘 모른다고 말했어.’
관리하는 조직이 다르니 당연한 일.
도광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어떤 소득도 없이 돌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 순간 저후안이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이놈은 알고 있지.”
저후안이 손에 쥔 것은 엄선주의 경호원, 그 남자의 사진.
저후안이 놈의 사진을 흔들며 입을 말을 이었다.
“이놈은 살인을 즐기는 놈이야. 양주의 공장, 그곳에 이놈이 만든 소각장이 있어.”
“……!”
“그래, 그 소각장부터 시작하라고 해. 그럼 놈의 꼬리가 밟힐 테니까.”
“……!”
“그 소각장에서 뭘 태웠겠나? 엄선주의 지시를 받고 사람의 껍데기를 던져 넣었겠지.”
저후안은 그 말을 끝으로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회색 연기를 내뱉으며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안나 루에게는 미안하다고 전해 줘.”
“알겠습니다.”
해야 할 말은 끝났다.
도광현이 몸을 일으킨 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문을 향해 다가설 때였다.
“잠깐.”
저후안이 도광현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도광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를 돌아보는데, 저후안이 입을 열었다.
“아까…… 엄선주가 사채시장에서 중요한 게 돈발보다 호구 명단이라 했다고? 내 고객 명단을 확보했고?”
“아, 네.”
저후안의 마음에 의심의 씨앗을 심기 위해 별생각 없이 내뱉었을 뿐이다.
그런데 저후안은 어이없다는 듯 웃기 시작했고 곧 그 입에서 살벌한 음성이 이어졌다.
“미친년.”
저후안의 눈빛이 돌변했다.
복수심으로 가득하다.
지금 저후안에게 엄선주는 원수.
조직의 일에 검찰을 끌어들인 또라이.
죽여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대상.
저후안의 일그러진 눈빛은 뒤를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경기도 시흥의 거모동이라고 했던가? 그곳에 양고기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어.”
“양고기요?”
“신고만 그렇게 했지 실상은 엄선주가 현금을 보관하는 곳이야. 그 돈을 자네가 빼서 사용하든 소각장에 넣고 태워 버리든 검찰에게 말해서 나랏돈으로 돌리든, 그건 알아서 해. 액수가 마음에 들면 내 변호를 해 줘도 좋고.”
저후안이 끌끌끌 소름 끼치게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마지막 말을 이었다.
“엄선주에게 호구 명단보다 돈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줘.”
***
건물 밖으로 나온 도광현이 이어폰을 빼며 멍한 눈으로 서진을 바라봤다.
“검사님?”
“들었어.”
“공돈이 굴러 들어오는 것 맞죠?”
도광현의 눈은 반짝였다.
신마건설의 지분을 매입한 후로 현금이 바닥을 보이는 중이다.
그런데 또 돈이 보인다.
그것도 큰손의 딸, 엄선주의 비자금.
그 액수가 얼마일지 몰라도 적지는 않을 거다.
“착하게 살려고 했는데…….”
“슈킹해서 좋은 일에 쓰면 착한 거예요. 그렇죠. 그게 착한 사람이죠.”
도광현은 신이 났다.
얼마일지 모를 액수를 상상하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난리도 아니다.
“10억? 20억? 아니지, 큰손의 딸이니까 100억 정도는 숨겨 뒀겠지. 아니, 10억만 있어도…….”
10억이 옆집 개 이름도 아닌데, 도광현은 10억, 10억 하고 있었다.
서진이 기뻐하는 도광현의 등을 쓸며 입을 열었다.
“김칫국 그만 마시고 일단 알아봐. 비자금을 숨겨 둔 곳과 사람을 태운다는 소각장, 계획은 그다음에 생각하자.”
***
중앙지검 대강당.
중앙지검의 호출을 받은 검사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숫자만 이백 명이 훌쩍 넘는다.
그런데 검사들을 호출한 검사장은 아직 등장하기 전이다.
자리에 앉은 검사들이 속닥거리고 있었다.
“바빠 죽겠는데, 왜 호출한 거야? 그것도 전 검사 집합?”
“검사장 스타일이래. 취임한 후에 조용히 지켜보다가 문제 되는 거 일일이 적어서 군기 잡는 거.”
“아이고, 김영준 간 다음에 편해진다 했더니 다시 가시밭길 되겠는데?”
“힘들어질 것은 네가 아니라 저놈이지.”
검사들의 시선이 틀어졌다.
타깃은 구석에 앉은 서진이다.
김영준 총장의 조카라는 이유로 온갖 혜택은 다 받은 놈.
사이비 종교의 일부터 제멋대로 행동하며 선배들의 머리 꼭대기에 선 놈.
결과가 좋았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중앙지검은 망신살이 뻗쳤을지도 모른다.
“우리 검사장이 김영준 총장의 라인이 아니고 법무부 장관이 넣었대. 그러니까 김서진의 영혼까지 털어 버릴 수 있다는 거지.”
“작은아버지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이르는 거 아니야? 검사장한테 혼났다고?”
놈들이 낄낄거렸다.
그때.
“조용히 해라.”
묵직한 목소리에 그들의 시선이 틀어졌다.
뒤에 앉은 장지혁 검사가 한심한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배울 만큼 배운 새끼들이 중학생처럼 쫑알거리면 안 쪽팔리냐? 김서진 저놈도 너희들 후배야. 같은 검사고, 연차도 비슷하고, 옷 벗지 않으면 앞으로 계속 같이 갈 테고. 친하게 지내, 새끼들아.”
장지혁 검사가 혀를 끌끌 찼다.
서진을 씹던 놈들이 눈을 내리깔며 “죄송합니다.”라고 말한 후 앞을 바라봤다.
하지만 장지혁 검사가 선배라서 사과를 했을 뿐.
앞을 바라본 놈들은 입술을 씹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조우재 부장검사도 느꼈다.
조우재 부장검사가 서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믿음직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만 믿어.”
조우재는 부장검사.
몇 번이나 검사장과 독대할 기회가 있었고 검사장에게 좋은 인상을 박았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원래 좆도 아닌 놈들이 잘나가는 사람을 시기하는 거야. 신경 쓰지 마. 어?”
“네.”
서진은 짧게 답했다.
처음부터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
인간관계란 좋게 보는 사람이 있는 만큼 그 반대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변에서 왜 난리인지 모르겠다.
그때.
“검사장님 입장하십니다.”
그 목소리와 함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단상 위로 중앙지검의 검사장이 걸어오고 있었다.
검사장은 말없이 마이크 앞에 섰다.
이어서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식구가 되었으니 얼굴 한 번씩 보고, 손 한 번씩 잡고 싶어서 불렀어. 그 전에 하고 싶은 말도 있고.”
검사장은 자신이 생각하는 중앙지검의 미래를 전했다.
전력으로 싸워라.
국민에게 항상 친절하라.
하지만 범죄자에게는 악마가 되어라.
검사장은 중앙지검의 왕이다.
지금 그의 목소리로 수사의 기준이 잡힌다.
검사들은 집중해서 검사장의 발언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검사장이 단상에서 내려왔다.
차장검사부터 부장검사, 서열에 따라 악수를 한다.
한 명, 한 명.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검사 윤기화입니다!”
“나이 많은 수사관한테 반말한다며?”
“네?”
“수사관이 네 친구야!”
벼락처럼 쩌렁거리며 울린 호통에 검사는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그다음도 마찬가지.
“박태경입니다!”
“금융통이라고?”
“아, 네.”
“그래서 금융회사 직원들과 만나 술 마시는 게 일인가?”
“네?”
“적당히 해, 적당히. 대낮부터 술 처먹고 기어 들어오지 말고!”
취임 후, 검사장의 행보에 특이점은 없었다.
조용히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는 게 전부였다.
검사장은 김영준 총장의 라인이 아니다.
김영준 총장을 견제하기 위해 법무부 장관이 끌어 올린 비주류.
그래서 이백 명이 훌쩍 넘는 엘리트 집단을 휘어잡을 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강당에는 검사장의 호통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검사들은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그리고 그 순서가 서진에게까지 왔다.
서진을 시기하는 검사들이 홱 고개를 틀었다.
놈들의 눈이 반짝인다.
서진이 어떻게 당할지 기대하는 눈빛이다.
하지만.
“김서진?”
“네, 검사 김서진입니다.”
그런데 놈들이 기대하던 호통과 망신은 서진에게 날아오지 않았다.
검사장은 서진과 손을 맞잡고 조용히, 주변 사람들이 들을 수 없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처럼만 해. 총장님께 들었어. 채용 비리를 자네가 만진 거라며? 총장님이 그 자리에 앉은 게 자네 덕이라며?”
“네?”
“나도 자네 덕을 봤으면 좋겠군. 해서, 다음도 기대하고 있어, 또 뭘 가지고 올지. 이번에는 총장님이 아니라 내게 직접 가져왔으면 해.”
서진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동안 지나치며 슬쩍 마주했던 적이 있다.
그때는 고개만 까딱거리던 사람이 갑자기 말이 많아지다니.
하지만 깊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고 다급히 고개를 숙여야 했다.
“보고하지 않고 대검에 찾아간 무례한 행동은…….”
“그걸 탓하는 게 아니야. 자네 작은아버지잖아? 선물로 그 정도는 줄 수 있지.”
검사장은 법무부 장관에 의해 중앙지검에 올라온 사람.
하지만 이미 김영준 총장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서진을 바라보는 검사장의 눈빛에 기대가 가득했다.
제발 원하는 것을 가져오라는 강렬한 눈빛.
“내가 원하는 것은 다음이야.”
검사장은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날개를 달아 훨훨 날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서진의 앞에 오래 서 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
모든 검사들에게 보여 준 거다.
서진을 신경 쓰고 있다고.
다른 놈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게.
검사장이 서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후 옆으로 이동했다.
서진은 시선을 틀어 검사장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법무부 장관과 손을 잡았다가 김영준 총장에게 쪼르르 달려온 사람.
누군가는 박쥐라 말할 테고 또 누군가는 이해타산에 예민한 사람이라 말한다.
하지만 서진에게는 앞으로의 계획에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서진을 시기하는 검사들.
그들은 먼 곳에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있었다.
자신들을 대하는 태도와 서진을 보는 눈빛은 정반대였다.
검사장은 서진의 앞에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눴고 서진의 앞길은 계속해서 평탄할 예정이다.
***
검사장과의 인사가 끝나고 모든 검사들이 사무실로 돌아갈 때였다.
서진도 복도를 걷고 있었다.
하지만 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느끼고 방향을 틀어 야외로 빠졌다.
발신 번호는 도광현.
아무도 없는 곳으로 이동해 휴대폰을 귀에 댔다.
“어, 말해.”
-두 곳 모두 소재지 파악했어요. 그런데 예상보다 경계가 삼엄하네요.
그동안 도광현은 살인마의 소각장과 엄선주의 비자금 창고를 조사했다.
“삼엄? 얼마나?”
-제가 본 것만 해도 비자금 창고에는 여덟 명, 소각장에는 네 명이요. 밤에도 그 인원이 계속해서 돌아다니더라고요. 쉴 새 없이 계속.
엄선주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안전하다고 느낄수록 허점이 있는 법.
그 구멍을 쑤시고 들어가면 놈들의 것을 빼앗아 먹을 수 있다.
“오케이, 엄선주의 창고부터 털자.”
“비자금부터요?”
“어.”
살인마의 소각장부터 건들면 놈들이 숨어 버릴 가능성이 크다.
세상이 조용해질 때까지 수면 아래에서 숨을 꽉 참고 기다릴 거다.
하지만 돈은 다르다.
잃은 만큼 회수하고 싶은 게 인간의 심리.
발버둥은 무리수를 만들고, 요란하게 움직일수록 놈들의 흔적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
며칠 후, 밤.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길에 서진과 도광현이 섰다.
멀리 보이는 곳은 비자금 창고.
도광현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용히 웃었다.
“긴장되네요.”
“쓸어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