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비밀 (1)>
“……컵을 산다고요?”
어디선가 들었다.
이성의 입술이 닿은 컵을 사들이는 변태 새끼가 존재한다고.
그런데 문제는 커피숍에 있던 손님이 셋.
앞에 선 서진을 제외하면 오십이 넘은 여성과 우락부락한 남자, 그게 전부였다.
분명 빨대를 사용했겠지만.
‘이건 확실히 변태야.’
친절했던 직원의 눈빛이 이내 혐오로 물들었다.
“……저기요? 매장용이라 판매가 불가한데요.”
직원의 냉랭한 말투에 서진은 당황했다.
“네?”
“팔 수 없다고요. 가세요.”
직원이 작은 목소리로 ‘신고하기 전에.’라는 말을 덧붙이자 그제야 서진은 어떤 오해를 받고 있는지 깨달았다.
“아, 죄송합니다. 꼭 필요한 데가 있어서요.”
“안 됩니…….”
서진이 신분증을 꺼내 올린 후 그 위를 오만 원권으로 덮었다.
“……검찰?”
“정말로 필요해서요. 생각하시는 그런 것은 아니고.”
얼어붙었던 직원의 눈빛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비닐봉지까지 건네며 다시 친절한 미소를 그린다.
“먼저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괜히 오해했네요.”
서진은 컵을 비닐에 넣으며 커피숍을 둘러봤다.
매장 내 CCTV는 하나.
그것도 계산대만 비추고 있으니 서진이 이곳에 남아 무엇을 했는지 알 방법은 없다.
그리고 직원을 향해 시선을 틀었을 때, 직원은 서진이 원하는 말을 내뱉었다.
“비밀로 할게요.”
***
“……그건 왜 가지고 왔냐?”
서진이 비닐봉지에 컵을 담아 차에 오르자 이번엔 장지혁 검사가 황당한 눈으로 바라봤다.
엄선주를 만나러 간 놈이 커피숍의 컵을 들고나왔으니 이상할 수밖에 없다.
“알아볼 게 있어서요.”
“왜? 혈흔이라도 묻었어?”
장지혁 검사의 표정은 진지했다.
서진이 탐정 놀이를 시작하면 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다.
게다가 서진의 눈빛은 진지했다.
“더 심한 게 묻어 있을지도 모르죠.”
“진짜?”
“네, 확인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장지혁 검사가 눈을 반짝였다.
서진의 탐정 놀이를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게 괜히 즐거웠기 때문이다.
서진이 컵이 든 비닐을 가방에 넣으며 계속 말했다.
“그리고 부탁 하나 더 드릴 게 있는데요.”
“뭐든.”
“엄선주의 경호원, 그 사람들 신상 좀 털어 줄 수 있을까요?”
서진은 엄선주의 경호원을 가까이에서 봤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놈들.
어쩌면 그놈들도 살인에 익숙한 인간 백정일 수 있다.
그리고 장지혁 검사는 시원하게 답했다.
“인상이 일반 경호원들은 아니었지? 딱 봐도 주먹질 좀 하던 놈들인 것 같더라. 오케이, 그놈들은 나도 궁금했어. 알아봐 줄게.”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같이 나쁜 놈들 잡는 처지에.”
장지혁 검사는 담배를 물었고 서진은 다시 생각에 빠졌다.
사이코메트리에서 봤던 것.
국유지를 헐값에 매입해 눈먼 돈을 꿀꺽할 완전범죄, 엄선주의 그 계획에 작은어머니가 들어서 있다.
‘엮을 수 있을까?’
아슬아슬한 줄타기다.
조금이라도 실패하면 느닷없이 김영준 총장을 상대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럼, 어떻게?’
서준경 때는 천애 고아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멋대로 날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김서진이다.
가족이 존재하고 그 행복을 계속해서 이어 가고 싶었다.
서진이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장지혁 검사가 고개를 저었다.
서진의 심각한 표정을 본 거다.
‘새끼…….’
서진의 집안 사정까지는 모른다.
하지만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를 타깃으로 했을 때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상대는 김영준 총장.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며 숨 막히는 집안 생활.
장지혁 검사가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쉬엄쉬엄해라. 후배 새끼가 혼자 다 해 먹겠다고 설치면 선배들은 뭐 하라는 거야?”
“네?”
“눈에 힘 풀어. 그리고 좀 즐기면서 살아. 얼굴도 잘생기고 돈도 많은 놈이 뭐 그렇게 팍팍하게 살고 있어? 가서 이거나 먹어. 경호원 새끼들 신상은 내가 뒷주머니의 먼지까지 탈탈 털어 줄 테니까.”
장지혁 검사가 뜬금없이 검은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뭐예요?”
“호박잎.”
“네?”
“먹어.”
“갑자기 왜요?”
“확! 주면 그냥 먹어. 난 집에 많으니까.”
장지혁 검사는 앞을 바라보며 시동을 걸었다.
***
잠시 후, 비닐봉지를 두 개나 들고 사무실에 들어온 서진을 보며 이동영 수사관이 물었다.
“그게 뭐예요?”
“이건 지문 감식 좀 부탁드리고요.”
서진은 먼저 컵이 든 봉지를 건넸다.
이동영 수사관이 비닐봉지를 받아 들며 서진의 반대쪽 손에 들린 호박잎을 바라봤다.
“이건 장지혁 검사님이 먹으라고 준 호박잎인데, 혹시 수사관님 드시겠어요? 저는 집에 언제 들어갈지를 몰라서요.”
“장 검사님이요?”
“네, 집에서 농사를 짓는지 이런 걸 주시네요.”
이동영 수사관이 웃었다.
“모르셨구나? 수사관들 사이에서는 유명해요.”
“……네?”
“가끔 길에서 나물 파는 할머니들 있잖아요? 장지혁 검사님이 그런 할머니들을 보면 그냥 못 지나치거든요. 자기 어머니가 생각난다나? 그러면서 아주 싹쓸이를 해 와요.”
수사관들은 말렸다.
그런 거 일일이 다 사면 호구 된다고.
“그런데 그런 말을 하면 차라리 호구가 되겠다면서 바보처럼 웃잖아요. 매력 있어요, 그 검사님. 하하하.”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군고구마를 한가득 사 왔던 기억이 난다.
요즘 세상에 흔치 않은 개천 출신 검사.
검사들은 괴팍하다며 어울리고 싶어 하지 않지만 수사관들에게는 꽤 좋은 사람.
생각할수록 나쁘지 않다.
“어쨌든, 이 지문 주인이 누군지 알아 오겠습니다.”
이동영 수사관이 컵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사무실을 떠났다.
지문의 주인, 서진은 이미 그가 누군지 알고 있다.
알고 싶은 것은 놈의 과거, 지문이 감식되면 놈의 과거를 들여다볼 수 있을 거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어쩌면 놈을 시작으로 엄선주까지 감옥에 처넣을 수도 있다.
‘시간문제인가?’
서진은 엄선주를 잡아넣을 시간을 기대했다.
하지만 잠시 후, 이동영 수사관이 가져온 자료에는 어떤 것도 없었다.
“……불법체류자인 것 같습니다.”
쉽게 가나 했더니, 또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다.
하지만 서진의 표정에 아쉬움은 없었다.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그리고 있었다.
애초에 놈들은 범죄 집단, 숨어 있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엄선주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같이 한 큰손의 집안이다.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서진이 손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센 척하는 놈일수록 밟았을 때 시원한 법이다.
***
늦은 밤, 구치소.
도광현이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었다.
“제가 이런 짓까지 해야 해요? 지난번에는 차장검사, 이번에는 중국 깡패요? 검사님, 제가 목숨이 몇 개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쏘리.”
“영어로 하지 마요. 그게 더 얄미워요.”
도광현이 담배 연기와 함께 한숨을 푹 내뱉었다.
서진이 빙긋이 웃으며 도광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정말 미안. 내가 직접 나설 수 없어서 그래. 연습했던 대로만 하면 다 될 거야. 그리고 걱정하지 마. 위험할 일은 없을 거니까. 있다고 해도 내가 여기 있잖아.”
“아이고…… 알겠습니다. 해야죠.”
도광현은 머리를 북북 긁으며 일전에 차장검사를 만났을 때 사용했던 작은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안 보이죠?”
“전혀.”
“그럼, 갑니다.”
“파이팅!”
“한국말로 하세요. 영어 쓰면 정말 얄밉다니까요.”
도광현은 털레털레 구치소로 향했다.
면회가 될 수 없는 늦은 밤.
하지만 돈은 귀신도 부릴 수 있는 거다.
도광현은 변호사 접견실까지 막힘없이 갈 수 있었다.
***
끼이익.
변호사 접견실의 문이 열리고 도광현이 들어섰다.
그러자 부릅뜬 저후안의 시선이 도광현에게 꽂혔다.
살 떨리는 눈빛에 도광현이 마른침을 삼킬 때, 저후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
“안나 루의 변호사를 맡고 있는 김성문입니다.”
김성문이라는 이름은 아무거나 갖다 붙인 거다.
놈이 어깨에 힘을 주고 있지만 조직은 이미 박살 난 상태.
면회 오는 놈 하나 없다고 들었다.
즉, 놈은 바깥 정보를 알 수 없으니 안나 루의 변호사가 누구인지 알기는 어렵다.
“저후안 사장님을 만나면 따로 돈을 더 챙겨 준다고 해서요. 하하.”
그리고 서진의 예상대로였다.
저후안은 도광현을 잠시 노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 밤에 날 찾아온 이유는?”
“안나 루의 전언을 가져왔습니다.”
도광현이 굽실대며 저후안과 마주 앉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담배를 올렸다.
저후안이 담배를 물고 연기를 내뱉으며 다시 도광현을 바라봤다.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라는 뜻.
도광현이 그 뜻을 알아채고 사진 두 개를 툭툭 올렸다.
엄선주와 그 경호원의 사진이다.
그리고 도광현은 그 사진을 저후안에게 밀며 입을 열었다.
“아시죠?”
저후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엄선주의 얼굴은 알고 있지만 도광현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나 루의 전언을 갖고 왔다고 하지만 그게 더 의심스러웠다.
‘안나 루는 내가 죽이려 했던 사람이야. 그런데 전언을 가져와?’
저후안은 누군지도 모를 놈에게 입을 여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침묵을 지킨 채 도광현의 모든 것을 살피다가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왜 이런 것을 묻는 거지?”
하지만 서진은 놈이 이렇게 나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곧바로 도광현을 통해 준비했던 말을 내뱉었다.
“안나 루가 전달하기를, 엄선주 실장이 배후였다고 합니다.”
“……배후? 어떤?”
“조직원 중에 김서진한테 실시간으로 소식을 알려 준 사람, 그 뒤에 엄선주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
저후안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냉정히 있으려 했지만 배후라는 말이 기폭제다.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참아 내기는 힘들었다.
도광현의 말이 맞는다면 엄선주의 손에 조직이 무너졌고 저후안의 인생이 끝난 것이다.
하지만 저후안은 입술을 씹으며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엄 실장이?’
이들은 한국, 중국, 일본의 자금이 모여 만든 사채 조직.
서로의 국적은 달랐지만 돈에는 국적이 없다.
그 덕에 이득을 공유했고 적당한 신뢰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적어도 서로의 등을 찌르는 짓 따위는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톱니바퀴의 큰 축을 담당한 엄선주가 밀고했다니.
믿을 수 없다.
‘논리적으로 말이 안 돼.’
저후안이 만났던 엄선주는 탐욕으로 일그러진 여자, 하지만 작은 것을 탐하기 위해 큰 이득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다.
여기까지 생각한 저후안은 더욱 도광현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안나 루가 보냈다고?”
“네.”
“변호사 양반, 난 아직 그쪽을 믿을 수 없어. 그래서 묻겠다. 정말 안나 루가 보냈다면 알고 왔을 거야.”
이들의 조직은 언제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고 군부대의 암구호 같은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지 못한다면 놈은 첩자다.
안나 루가 보낸 게 아니라 수사기관이 정보를 캐내기 위해 함정을 파 둔 게 분명하다.
하지만 도광현의 말이 빨랐다.
“사채시장에서 중요한 것은 돈발보다 호구 명단이라고 했습니다. 엄선주가 사장님 측 채무자 명단을 확보했고.”
도광현은 다급했다.
암구호에 대한 정보는 없기 때문이다.
질문이 던져지기 전에 놈에게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모든 게 어그러진다.
“그 명단을 사용하면 사장님의 조직 없이도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서진과 손잡고 조직을…….”
하지만 저후안은 넘어가지 않았다.
놈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으며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은 됐고, 내 질문에나 대답해. 안나 루가 보냈다면 대답 못 할 이유가 없어. 이봐, 우리에게 8월 20일이란 무엇이지?”
동시에 도광현이 서류 한 장을 테이블에 탕, 올렸다.
“엄선주는 김영준 총장의 배우자 엄시영의 친동생입니다. 그리고 김서진은 김영준 총장의 조카죠.”
“……!”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저후안의 시선이 서류로 향했다.
도광현이 내려 둔 서류는 엄선주의 기록물이다.
그녀의 가족 관계, 친인척 관계 그리고 김서진.
기록물을 보던 저후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엄선주, 엄시영, 김영준, 김서진?”
저후안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눈이 시뻘겋게 변했고 입술을 씹는다.
놈의 머릿속에서 도광현에 대한 의심 따위는 삽시간에 사라져 버렸다.
엄선주가 검찰총장 그리고 김서진과 관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황은 확실해졌다.
저후안의 분노한 시선이 도광현에게 옮겨졌다.
지금은 엄선주를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했다.
***
서진은 구치소 앞에 서 있었다.
휴대폰 너머로 저후안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놈은 빵쯔는 믿을 수 없다니 어쩌니를 시작으로 온갖 욕을 내뱉고 있다.
또 속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난동을 피우는 중이다.
서진은 조용히 저후안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놈의 목소리가 작아졌을 때, 서진이 입을 열었다.
“안나 루가 제안했다고 해, 엄선주의 조직도 같은 방법으로 날려 버리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