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 김서진-155화 (155/250)

<과거의 흔적 (2)>

***

“야…… 선배를 잠복근무시키는 후배가 어디 있을까?”

“죄송합니다.”

장지혁 검사의 차 안.

서진이 사과하자 장지혁 검사가 빵을 씹으며 낄낄 웃었다.

“됐고. 이거나 읽어 봐. 흥신소 애들한테 얻은 거야. 형수가 바람난 것 같다고 하니까 진짜 탈탈 털어 주더라. 경찰보다 더 무서워.”

장지혁 검사가 내민 것은 두툼한 서류, 그동안 조사한 엄선주의 자료였다.

불륜 의뢰로 시작된 것이라 그런지 첫 장부터 자극적이다.

“……진짜 불륜을 하고 있었어요?”

“엄선주의 막내아들이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거든? 그런데 막내아들보다 더 어린 남자애를 스폰 하고 있네?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는 모양이야.”

서진이 서류를 착착 넘겼다.

놈들은 엄선주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누구를 만났고, 어디를 갔고, 스폰 하는 남자와 어떤 호텔에 들어갔는지까지.

그중에 눈에 띄는 것은 계속해서 공실로 내버려 뒀던 꼬마 빌딩의 지하실.

장지혁 검사가 입을 열었다.

“사무실로 이용하는 게 맞아. 오가는 사람도 종종 있고.”

“깡패들인가요?”

엄선주는 사채업자.

건물을 공실로 두면서까지 누군가와 접선을 한다면 깡패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잘 차려입은 놈들. 딱 봐도 정말 일반 회사원. 내 두 눈으로 본 거니까 믿어도 돼. 내가 강력범죄전담부 검산데 깡패를 구분 못하겠어?”

“그 사람들에 대한 자료는요?”

“아직 파악 중. 일주일 정도 걸릴 거야.”

장지혁 검사는 자동차의 창문을 내린 후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힐끗 서진을 보며 걱정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괜찮겠어?”

“뭐가요?”

“상대가 김영준 총장의 배우자잖아? 내 입장에서는 거물이라 부담스러운 것뿐이지만, 넌…….”

서진에게는 작은어머니.

만약 이 일이 나비효과가 되어 가족 간의 싸움이 벌어지면, 서진의 집에도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 있다.

가족은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는 법.

“상대는 김영준 총장이야.”

김영준 총장의 성격은 잔혹하며 치밀하다.

그 성격이라면 서진의 집안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을 약점을 박스째 들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서진은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김영준 총장의 성격이라면 서진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방안은 서진도 계속해서 준비하는 중.

작은어머니의 비리 역시 그에 대한 방편이다.

“괜찮아요. 범죄 사실을 알고도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더 찝찝한 일이죠.”

서진은 빙긋이 웃으며 다 읽은 서류를 뒷좌석에 내려 뒀다.

그때 장지혁 검사의 조용한 목소리가 서진의 귀에 박혔다.

“왔다.”

건물에서 엄선주가 나오고 있었다.

온몸에 걸친 것은 한눈에 봐도 고가의 명품.

걷는 걸음걸이와 시선은 살아온 인생을 보여 주듯 거만하다.

“어떻게 할 거야?”

“오늘은 인사만 할 겁니다.”

“어?”

“앞으로 친해지려면 얼굴부터 익혀야죠. 우연을 가장해서.”

서진이 휴대폰을 손에 쥐고 차에서 내렸다.

이어서 바쁜 걸음으로 통화하는 척 휴대폰을 귀에 대고 엄선주를 향해 갔다.

‘오늘은 얼굴만 마주친다.’

서진은 의도적으로 엄선주와 부딪칠 생각이다.

그렇게 몇 번 우연적인 만남을 가장할 계획.

유치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

사람은 처음 본 사람은 경계하지만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점차 경계를 풀고 친근감을 느낀다.

‘익숙해진 다음은…….’

여러 방법을 통해 과거를 끄집어낼 수 있다.

천천히, 늪에 빠뜨리는 것처럼.

그리고 이 일이 작은어머니의 귀에 들어가도 상관없다.

어차피 우연이니까.

서진이 엄선주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갈 때였다.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며 낯선 사람들이 서진의 앞을 막아섰다.

양복을 입은 덩치 큰 남자들.

엄선주의 경호원.

그들이 살벌한 눈빛으로 서진을 내려다봤다.

목소리는 내지 않지만 그들은 눈빛으로 말하고 있다.

‘돌아가. 저분 옆에 가까이 가지 마.’

서진은 고개를 숙인 채 미소를 그렸다.

경호원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 않고 접근한 이유.

‘애초에 오늘의 목표는 안면을 트는 것.’

얼굴만 알리면 된다.

엄선주의 시선이 서진을 향할 때, 서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얼굴을 똑똑히 보이며 민망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앞을 못 봤네요.”

목적은 이뤘다.

서진은 몸을 틀어 그들의 옆을 스치려 했다.

그런데.

“……김서진 검사?”

엄선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서진을 알고 있었다.

서진이 사채업자 엄선주의 뒤를 쫓는 만큼 그들도 서진의 뒤를 캐는 중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꼬리를 밟고 치명적인 상처를 주기 위해.

“맞죠? 김서진 검사.”

서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엄선주를 향했다.

“……누구시죠?”

“……뭐라고 해야 하나? 관계가 애매하네? 검사님의 작은엄마 엄시영의 동생이에요. 엄선주라고 해요.”

엄선주가 경호원들을 뒤로하고 서진에게 다가왔다.

서진은 그녀를 보며 웃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천천히 늪에 빠뜨릴 생각이었는데 알아서 다가오고 있다.

그 앞에 발을 들이면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도 모른 채.

***

“언니가 하도 자랑을 해서 알고 있었어요. 기사로도 많이 봤고요.”

커피숍.

서진은 엄선주와 마주 앉아 있었다.

엄선주는 작은어머니의 동생, 호칭이 존재하지 않지만 가깝다면 또 가까울 수 있기에 애매한 관계.

서진과 엄선주는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서진은 조용히 미소를 그렸다.

짧은 시간 동안 엄선주는 작은어머니를 여덟 번이나 거론했다.

서로의 연관점이 작은어머니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니야.’

엄선주가 작은어머니를 거론할 때는 대부분 ‘자랑’이라는 단어가 따라붙었다.

작은어머니 엄시영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여자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검찰총장에 오른 남편과 우수한 대학을 졸업 후 검사였던 아들 그리고 의사인 딸.

언론은 김영준 총장의 흙수저 시절을 밝히며 내조를 잘한 아내를 조명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작은어머니를 보며 성공한 여자라 말하고 있다.

‘설마, 질투?’

가능성은 충분하다.

질투란 먼 존재를 향해 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 또는 가족에게 뻗어 나가기도 한다.

서진은 엄선주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슬쩍 미끼를 던져 봤다.

넘어오면 좋고 아니면 말고라는 식의 낚시질.

“작은어머니의 대학 시절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미인이셨더라고요. 작은아버지는 어떻게 작은어머니를 만난 거예요?”

“네?”

“궁금하기는 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직접 여쭤볼 수는 없잖아요. 하하.”

엄선주의 눈빛에 악감정이 선명히 보인다.

고민하는 거다.

작은어머니를 난처하게 만들지, 아니면 카드로 남겨 둘지.

그리고 엄선주는 작은어머니의 과거를 남겨 둘 카드로 결정했다.

“글쎄요. 우리 언니를 쫓아다니는 남자는 많았는데, 어떻게 형부와 만났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뻔히 드러나는 거짓말.

서진은 엄선주의 뱃속에 깔린 진실을 토해 내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렵다.

발목을 잡아 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하기 마련.

‘하지만…….’

얻은 게 있다.

지나간 과거를 카드로 남겨 둘 정도면 예삿일은 아니라는 거다.

서진이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엄선주가 질문하기 시작했다.

-취준생들이 분노하는데, 채용 비리는 어떻게 되어 가는 것이냐.

-정말 검찰과 신마제약에 어떤 커넥션이 있었냐.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연예인의 신변잡기처럼 시답잖은 질문이라고 생각할 거다.

하지만 엄선주의 의도는 다르다.

서진이 사채시장에 대한 관심을 끊은 것이 정말인지 파악하려 한다.

한참동안 쓸데없는 질문을 내뱉던 엄선주가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이제 사채? 그쪽은 안 하는 거예요?”

“네, 고생은 고생대로 하는데 실적에는 큰 도움이 안 돼서요.”

“아…… 그래요?”

믿는 눈치가 아니다.

서진을 보는 눈빛에 의심이 가득하다.

하지만 서진은 일관적으로 관심 없는 태도를 유지했다.

잠시 후.

서진과 엄선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회가 되면 또 봬요.”

입에 발린 말이 아니다.

서진을 통해 일선 검찰의 이런저런 소식을 알고 싶은 거다.

그런데 악수를 나눌 때였다.

서진의 시야가 흑백으로 물들었다.

***

엄선주는 꼬마 빌딩의 지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앞에는 서진의 작은어머니가 보인다.

“딱 한 명만 만나면 돼. 교육위 간부, 내가 원래 이런 부탁 안 하는 거 알잖아? 그런데 지금 내 상황이 난처해. 돈 벌 곳은 눈에 보이는데, 나한테 용돈 받아먹은 애들이 다 낙선했네? 그러니까, 한 번만.”

엄선주가 테이블에 지도를 올려 두며 계속 말했다.

“여기가 투자할 곳이야. 국유지거든? 사학 재단을 만들어 학교를 짓는 목적으로 매입할 계획이야.”

물론 학교를 지을 생각은 없다.

교육위 간부, 즉 국회의원을 통해 시세보다 싼 값에 매입할 생각만 가득하다.

“이런저런 문제로 2년 정도만 시간을 끌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 잊힐 거야. 그때 팔아야지. 이것저것 떼고 예상 수익은 2천억 정도. 윤환이 이름으로 30% 넣어 줄게.”

엄선주는 탐욕스러운 눈빛을 숨기지 않았고 작은어머니는 조용히 지도를 바라봤다.

“30%?”

“언니는 다리를 놔주고 떡고물은 윤환이가 얻어먹는 거야. 아무것도 안 하고 다리를 놔준 것만으로.”

30%면 600억.

단순한 소개비의 대가로는 꽤 먹음직스럽다.

하지만 작은어머니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김영준 총장의 위치, 이제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곳까지 올라섰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투기로 시끄러워질 것 같은데…….”

그 말에 엄선주가 깔깔 웃었다.

“투기? 왜 그래? 걸리면 투기고 안 걸리면 투자야. 언니도 형부한테 안 걸리고 투자 잘했잖아?”

“야…….”

“걱정하지 마. 계속해서 안 걸릴 거야. 걸릴 것 같으면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그 사람들 다 조용히 처리하면 되는 거고.”

엄선주의 시선이 뒤로 틀어졌다.

큰 덩치의 남자가 문을 가로막고 서 있다.

엄선주가 그 남자를 향해 턱짓하며 속삭였다.

“쟤가 그런 거 잘해.”

***

사이코메트리가 끝났다.

앞에는 생글생글 웃고 있는 엄선주가 보인다.

지금껏 서진과 엄선주는 가식적인 대화를 통해 서로의 간을 봤을 뿐이다.

하지만 서진은 방금 사이코메트리를 통해 엄선주의 살벌한 모습을 봤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서진은 억지로 웃으며 엄선주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지금은 표정 관리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엄선주는 서진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또 봐요.”

그게 끝이었다.

엄선주는 그 말을 남기고 몸을 틀었다.

그리고 서진은 엄선주의 뒷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거…….’

뭔가 엄청난 것을 본 것 같다.

국유지 매입으로 얻을 2천억의 수익, 김영준 총장을 향한 작은어머니의 성공한 투자 그리고 살인.

사이코메트리는 단편을 보여 주기 때문에 전체적인 그림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본 것은 작은어머니의 모든 행동을 의심하기에 충분하다.

‘일단…….’

서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사이코메트리의 마지막에 봤던 남자.

엄선주가 “쟤가 그런 거 잘해.”라고 지칭했던 사람.

그런 것이란 분명 살인일 테고, 놈의 행동은 경호원처럼 여겨졌었다.

‘경호원이라면 주변에 있을 거야.’

그리고 찾았다.

구석에 앉아 홀로 커피를 마시며 엄선주가 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놈.

딱 봐도 엄청난 덩치.

눈빛은 매섭다.

놀이터에서 여중생을 연쇄살인 하던 그놈이 떠오를 정도다.

서진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놈이 떠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놈이 떠나는 것은 순간이었다.

놈은 엄선주가 문을 나서자 그림자처럼 뒤를 쫓았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하지만 서진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그곳에 있었다.

엄선주가 차를 타고 이곳을 떠날 때까지.

-갔다.

서진은 장지혁 검사의 메시지가 도착하는 순간 움직였다.

마신 커피를 놓고 가는 회수대.

그곳에서 놈이 마셨던 쟁반을 손에 들었다.

이어서 카운터로 가져갔다.

커피숍의 직원이 쟁반을 건네받기 위해 손을 내밀며 친절히 입을 연다.

“감사합니다.”

“아뇨, 이 컵이요. 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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