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흔적 (1)>
작은어머니가 과거에 만났던 남자, 이름은 선채오.
특이 사항으로는 실종.
서진이 시선을 틀어 이동영 수사관을 바라봤다.
그러자 이동영 수사관이 빠르게 설명했다.
“같은 학교 사범대학에 다녔던 사람입니다.”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새로운 사람과의 결혼.
젊은 날에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일.
하지만 상대는 김영준 총장.
석연치 않다.
찝찝한 짐승이 어둠 속에 꽈리를 틀고 앉아 있는 것 같다.
이동영 수사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시기에 실종 신고가 들어왔죠.”
서진이 마른침을 삼켰다.
‘실종?’
찝찝했던 짐승이 실체를 띠기 시작했다.
놈이 대가리를 내밀고 서진을 기다리고 있다.
서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동영 수사관이 말을 이었다.
“저도 뭔가 이상하다 생각해서 흥신소를 통해 탐문 수사를 진행했어요.”
이동영 수사관은 작은어머니의 과거 선채오라는 사람의 그림자를 밟았다.
같은 학과를 졸업한 사람.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창.
“그리고 선채오가 살았던 그 동네.”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 선채오를 기억하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그나마 기억을 해낸 것도 ‘실종’, 그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거침없이 이야기를 내뱉던 이동영 수사관이 잠시 뒷말을 줄였다.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거다.
어쨌거나 서진은 김영준 총장의 조카.
피는 물보다 진하다 했다.
서진이 이동영 수사관의 마음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말씀해 주세요. 괜찮아요.”
“선채오의 고향 친구 중에 한 사람이 이런 말을 전했습니다.”
-……임신을 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낙태를 해야 하니까, 돈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그 사람이 돈을 빌려줬답니다.”
“……그리고요?”
“얼마 지나지 않아 실종된 거죠.”
서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아니, 할 말을 잊었다.
머릿속에서 온갖 막장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낙태?’
뭐, 백번 양보해서 거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돈이 필요해?’
작은어머니의 집안은 큰손이다.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상상할 수 없는 돈을 품고 사는 괴물, 놈들은 서민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
작은어머니의 남자 친구가 돈을 필요로 했다는 게 이해할 수 없다.
그 정도 돈은 작은어머니의 한 끼 식사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
잠시 생각에 빠졌던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막장 드라마의 실체는 직접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정의 내려서는 안 된다.
생각이 한쪽에 쏠리는 순간, 모든 퍼즐은 생각이 기울어진 방향으로 짜 맞춰지기 마련.
반드시 오류가 발생한다.
지금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과거를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것은.
“실종 상태는 지금도 이어지는 중이죠?”
“네.”
선채오는 발견되지 않았다.
숨어서 사는지, 이미 죽었는지 그것은 모르겠지만 선채오는 분명 과거의 기억을 몸에 담고 있다.
진실을 찾고자 하는 검사의 본능이 서진의 핏줄을 간지럽혔다.
서진이 선채오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툭 가리키며 생각했다.
‘이 사람을 찾는 게 우선이야.’
그때 이동영 수사관이 입을 열었다.
“엄선주라고 알고 계십니까?”
서진이 고개를 틀어 이동영 수사관을 바라봤다.
엄선주는 작은어머니의 친동생.
그 이름이 왜 뜬금없이 나오는지 의아했다.
“그쪽에서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는 첩보를 들었습니다.”
엄선주는 지금 장지혁 검사가 수사하고 있다.
하지만 겉핥기다.
엄선주가 어떤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 또는 누구를 만나고 있는지.
그 생각과 기억까지 알 수는 없다.
과거를 헤집기 위해서는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는 방법이 전부.
취조실로 끌고 오든 인연을 만들든,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
***
며칠 후, 서진은 신마그룹의 신지연을 만나고 있었다.
신지연이 통째로 사 버린 건물의 옥상이었다.
여름이 다가오는 바람을 느끼며 신지연이 맥주를 홀짝였다.
“요새 바쁘지?”
“그렇죠.”
서진은 저후안부터 채용 비리까지, 정신없이 일만 하는 중이다.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싶어도 퇴근을 할 수 없으니, 책상에 콕 박혀 앉아 있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 누나가 부르니까 쪼르르 나오네? 누나가 보고 싶었어?”
“감사하는 말은 직접 전하고 싶었거든요.”
SR제약의 채용 비리, 그 소스를 전해 준 게 신지연이다.
그 덕에 서진은 SR제약과 식약처 처장을 흔들 수 있었고, 작은어머니 측은 서진에게 점차 관심을 끊는 중이다.
그 감사의 말은 전하고 싶었다.
“고맙습니다. 누님 덕에 실적을 올릴 수 있게 됐어요.”
“우리 생각이 똑같네? 나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불렀거든.”
서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지연이 자신에게 고마울 게 뭐가 있는지 생각해 봤지만 없다.
제이든 김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신마건설의 대주주가 된 것?
그래서 신지연의 지분을 공고히 해 준 것?
그건 상부상조였을 뿐, 어느 쪽에 더 큰 이득이 되지는 않았다.
서진이 생각을 이어 가고 있을 때, 신지연의 비서가 다가와 태블릿 PC를 서진의 손에 건넸다.
화면에는 기사가 보인다.
[위기의 SR제약, 신마제약 인수 확실시]
[신마제약, 업계 1위로 거듭 날 예정]
[재계, 이번 인수전은 신지연 사장의 경영 능력을 확실히 보여 준 행]
[미국 경제 잡지, 영향력 있는 여성에 신지연 사장 선정]
“……어?”
신지연이 활짝 웃으며 건배를 권하듯 캔 맥주를 내밀었다.
“동생 덕에 SR제약의 주가가 크게 떨어졌네?”
잠시 눈을 깜빡이던 서진이 크게 웃었다.
“당했네요.”
말 그대로 이용당했다.
신지연은 애초에 SR제약 인수전에 뛰어들었고 서진에게 채용 비리 소스를 던졌다.
이어서 연이어 터지는 비리 소식.
식약처 처장에게 뒷돈을 주고 확인되지 않은 의약품이 승인되고.
결국 SR제약의 대표이사가 구속됐으며 개미들은 주식을 던졌다.
주가는 폭락.
“좋은 가격에 살 수 있었어. 고마워.”
서진이 신지연과 건배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 정도 머리는 굴릴 줄 알아야 손을 잡은 의미가 있다.
그리고 서로의 쓰임이 강해질수록 이득의 신뢰는 깊어진다.
“그럼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서진의 말에 신지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돈밖에 없는데, 내 스케일로 동생의 지갑을 채워 주기는 어렵고…….”
서진은 재정건설의 아들, 돈은 남부럽지 않을 만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신마건설의 대주주 중 하나인 제이든 김과 어떤 인연을 갖고 있는 사람.
몇 푼 안 되는 돈에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
“그럼 사람이 필요한가?”
“…….”
“아니면, 재계의 비리?”
스무고개 같은 질문이 이어졌지만 서진은 번번이 고개를 저었다.
“말해. 답답하네?”
“기사 하나만 터뜨려 주실 수 있을까요?”
“……기사?”
예상 밖의 부탁에 신지연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서진을 바라봤다.
서진이 캔 맥주를 우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SR제약의 인수전에 검찰이 신마제약을 도왔다. 이런, 솔직한 기사요.”
“동생?”
“당연하지만 명확한 증거가 없으니 흐지부지될 겁니다. 잠깐의 혼란은 있겠지만 그저 논란 또는 음모론으로 치부되겠죠. 신마제약에 해가 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신마제약은 상관없을 거다.
재계의 비리에 대해 사람들은 무감각해져 있다.
그들이 비리를 저질러도 “에이, 씨발.”이라며 넘어간다.
하지만 검찰은 다르다.
이번 사건의 지시는 김영준 총장이 내린 것.
총장이 되고 처음으로 쏘아 올린 포탄이 재계와 손잡은 것처럼 이미지화된다.
그리고 그 기사의 출처로 서진을 의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
-채용 비리의 사건을 가져온 것이 서진.
-서진은 신마그룹과 사이가 좋지 않다.
-신마그룹의 막내아들 신일승을 집어넣은 게 서진이기 때문이다.
-서진과 신지연의 커넥션은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비밀.
서진이 슬쩍 웃었다.
‘재밌겠네.’
김영준 총장이 혼란에 빠진 그 잠시의 시간, 서진은 마음껏 ‘엄선주’, 즉 작은어머니의 동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신지연이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가가 또 떨어지겠네?”
신지연에게 주가는 상관없다.
지금은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며 훗날 벌어질 왕자의 난을 대비해야 한다.
신지연이 서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기사의 출처는 이종석 식약처 처장으로 만들면 되겠네. 그쪽, 요즘에 지푸라기라도 쥐고 싶어 하잖아. 이 정도 소스를 손에 얻으면 여기저기 말하고 싶어서 입이 간지러울걸.”
“그렇겠네요.”
짧은 순간에 계획이 세워졌다.
신지연이 서진의 빈 캔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한 잔 더 할래?”
***
-신마제약이 SR제약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검찰의 수사 도움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SR제약의 채용 비리, 뇌물 알선과 함께 주가가 폭락했고!
채널이 돌아갔다.
마찬가지 소식이 시끄럽게 울린다.
-신지연 사장은 SR제약의 인수는 사전에 계획된 것이고 모든 이야기는 사실 무근이라며 일축했지만…….
다른 채널도 마찬가지.
-이종석 식약처 처장은 정치적 음모가 맞는다며…….
기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김영준 총장이 리모컨을 들었다.
삑 소리와 함께 텔레비전이 꺼진다.
적막한 속에서 김영준 총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시작한 일인데, 흠집이 되고 있어서다.
하지만 김영준 총장은 흥분하지 않았다.
냉랭한 눈으로 꺼진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때, 김영준 총장의 앞에 서 있던 반부패, 강력부장이 입을 열었다.
“구속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식약처 처장은 한 기관의 기관장.
언론을 상대로 목소리를 낼 만큼의 힘은 있다.
그래서 지금껏 가만히 내버려 뒀다.
놈이 떠들어 댈수록 김영준 총장의 이미지가 좋아지는 반등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입이 문제가 됐다.
“혐의는 충분하고 오늘 중으로 영장을 받아 낼 수 있습니다.”
“잠깐만…….”
김영준 총장이 손을 살짝 들었다.
그러자 반부패, 강력부장은 입을 다물었고 김영준 총장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종석 처장은 검찰과 신마그룹의 결탁을 부르짖는 중이다.
‘지금 구속하면…….’
그 음모론에 힘을 더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
세상은 더 시끄러워질 거다.
“구속은 문제가 아니야. 언제든 할 수 있어. 타이밍이 문제지.”
김영준 총장은 그 타이밍을 만들 수 있는 사람.
머릿속에 이종석 처장의 입을 찢어 버릴 여러 방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입에 담지 않았다.
“이놈이 어떻게 움직일지 또 궁금해졌어.”
김영준 총장이 휴대폰을 들었다.
찾는 주소록은 서진이다.
***
중앙지검.
주차장에 나와 차에 오르던 서진은 전화를 받았다.
상대는 김영준 총장.
검찰에 대한 음해를 벗어날 방법을 묻고 있었다.
‘어?’
서진은 잠시 당황했다.
김영준 총장은 젊은 사람의 생각을 듣고 싶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이번 일은 일개 사건을 넘어선 검찰 전체의 문제.
이런 일을 서진에게 질문할 것이란 생각은 못 했다.
‘신뢰를 쌓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계속해서 시험하는 중일까?’
하지만 깊은 생각을 할 시간은 없었다.
김영준 총장이 원하는 것은 즉답.
그리고 김영준 총장이 서진의 말을 따라 준다면, 또 하나의 기회.
“내버려 두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음모론이 선동이 되면 더 시끄러워지는 법이야.
“이미 선동은 시작됐고 우리가 결백을 주장할 증거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혐의는 있다.
검찰의 수사와 동시에 터진 인수.
하지만 결백을 주장할 근거는 없다.
김영준 총장에게는 말 그대로 까마귀 날자 배가 떨어진 것.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리한 것은 검찰이다.
“하지만 이종석 처장은 문제가 많은 사람이에요. 처장이 떠들어댈수록 그 치부를 들춰내면, 사람들은 발악으로 여길 거예요.”
김영준 총장은 특별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따금 “그렇지.”라는 추임새를 넣었을 뿐이다.
그리고 잠시 후, 통화가 종료됐고 서진은 어이없다는 듯 휴대폰을 바라봤다.
‘이거 참…….’
이 음모론을 만들어 낸 게 서진이다.
그런데, 그 해결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으니, 뜬금없이 ‘병 주고 약 주고’란 말이 떠올랐다.
그때였다.
드르륵.
휴대폰이 진동했다.
장지혁 검사다.
-엄선주, 지금 건물로 들어갔어. 그런데, 뭘 어떻게 하려는 거야?
서진이 차에 오른 이유다.
엄선주를 통해 작은어머니의 과거, 선채오를 알아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