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손 (2)>
고민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서진은 그 시간이 길지 않기를 바라며 전동국 검사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서진은 떠났다.
하지만 전동국 검사장은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 뒤에도 서진이 놓고 간 장부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몇 분의 시간이 더 지난 뒤.
전동국 검사장의 시선이 김관용 부장검사에게 틀어졌다.
“어떻게 생각하지?”
김관용 부장검사는 서진의 제안을 매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전동국 검사장은 심지가 굳은 사람.
가볍게 입을 열었다가 욕만 처먹을 수 있다.
상대의 심기를 건들지 않는 선에서 의사를 전달해야 한다.
“저는…… 기회라고 여겼습니다.”
“기회?”
“네.”
김관용 부장검사가 마른 한숨을 내뱉으며 설득을 위한 여러 말을 전했다.
전동국 검사장은 그의 말을 들으며 묵묵히 술을 채우고 마실 뿐이다.
그리고 김관용 검사의 말이 끝났을 때, 전동국 검사장이 술잔을 내려두며 입을 열었다.
“김 검사의 말을 듣고 화가 났어. 그런데 내가 화가 난 이유가 뭔 줄 아나? 김 검사의 제안이 부정한 방법이라 생각해서? 아니야, 김 검사의 제안이 달콤해서야.”
“……!”
서진이 장부를 내려놨을 때부터였다.
전동국 검사장은 서진의 다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오직 장부.
이것을 활용해서 올라갈 수 있는 자리.
그곳에서 누릴 수 있는 권력의 달콤함.
“나도 모르게 차장검사가 된 미래를 떠올렸어. 그런데 그 미래의 나는 힘을 갖고 정의를 행동하지 않았어.”
“…….”
“마누라가 좋아하겠네, 애들이 으쓱거릴 테고 집안에 경사가 나겠어, 이런 생각. 어쩌면, 다음 총장을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내 눈앞에 그런 미래만 펼쳐지더라.”
“…….”
“이래서 권력을 탐하지 말라고 하나 봐.”
전동국 검사장이 씁쓸하게 웃으며 다시 술잔을 채웠다.
김관용 부장검사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안 하실 겁니까?”
전동국 검사장이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욕망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마누라가 좋아할 텐데, 안 하면 안 되지.”
“……!”
“관용아, 부탁 하나 하자. 내가 엇나가면 자네가 내 손에 수갑을 채우도록 해. 그 수갑, 기쁘게 받도록 하지.”
전동국 검사장은 조용히 술잔을 입에 댄 후 끌끌 웃으며 중얼거렸다.
“힘없는 정의라…….”
김관용 부장검사는 전동국 검사장의 잔을 채우며 오늘은 많은 술을 마실 것 같다고 생각했다.
***
전동국 검사장에게 연락이 온 것은 바로 다음 날, 서진이 사무실에서 일에 빠져 있을 때였다.
-자네 뜻을 함께하지.
적어도 이틀은 걸릴 줄 알았는데, 빠른 연락과 확답.
뭔가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에 서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럼,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물론 전동국 검사장만으로 김영준 검사장을 침몰시킬 수는 없다.
총장과 차장의 힘을 비교하자면 하늘과 땅.
‘그저 견제할 카드가 하나 생긴 거야.’
서진은 전동국 검사장의 합류가 매우 기뻤지만 최대한 냉정한 시선으로 상황을 보고 있었다.
‘그래도 김영준의 발목은 잡을 수 있어.’
서진이 고개를 틀어 창밖을 향했다.
본격적인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제 해야 할 일은…….’
김영준 검사장이 생각하는 차장검사는 하나.
-서울 서부 지방 검찰청 추안영 검사장.
전동국 검사장을 차장검사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놈을 끌어내려야 한다.
그렇게 그 자리를 공석으로 만들 생각이다.
그럼, 그 뒤는 간단하다.
비리로 얽힌 국회의원들이 움직일 테고 전동국 검사장을 차장검사의 자리에 앉히려 할 거다.
‘그때가 되면 김영준 검사장도 어쩔 수 없이 허락할 거야.’
김영준 검사장은 전동국 검사장이 차장검사가 되었을 때의 이득을 계산할 거다.
비록 자신의 사람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카드로 여기며 그 자리에 앉힐 게 분명하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해.’
남은 시간은 길게 생각해야 3주.
그 안에 해결해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한 서진이 빙긋이 미소를 그렸다.
‘이거…….’
의도하지 않게 또 하나의 뒷배경이 생길 것 같다.
이제는 김영준 검사장만이 아니라 전동국 검사장과의 연결 고리도 만들어진 거다.
‘검찰총장과 대검 차장검사라…….’
대한민국 검사 중에 백 좋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것 같았다.
물론 모든 계획이 착착 들어맞았을 때다.
***
며칠 후, 한정식집.
서진은 도광현을 만났다.
도광현이 진땀을 흘리며 물었다.
“누구요? 누구를 만나라고요?”
“이기승, 서울 서부지방검찰청의 1차장검사야.”
“와…….”
도광현의 전직은 사기꾼, 검사라면 겁부터 낸다.
그런데 차장검사라니, 도광현은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서진은 상관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지금부터 넌 도광현이 아니야. 신마건설, 대주주 제이든 김이야.”
서진이 저후안을 잡는 동안 도광현은 제이든 김을 실체화시켰다.
그리고 신마건설의 최대 주주 중 하나가 되었다.
“보통 사람이 전화를 하면 거들떠보지도 않겠지, 하지만 신마건설의 대주주가 전화하면 발 벗고 뛰쳐나올 거야. 이기승이라는 놈은 그런 놈이니까.”
이기승은 김영준 검사장이 차장검사로 생각하는 추안영의 오른팔이다.
놈들은 서로가 끈끈한 신뢰로 뭉쳐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아니다.
인간의 신뢰는 쇠사슬 같지 않다.
작은 변수 하나로 등을 돌리는 게 인간이다.
그리고 서진은 이기승의 탐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만나서 뭘 하라고요?”
“돈을 줘.”
“네?”
“가격은 그때 가서 정할 거야.”
“검사와 만나서 냅다 돈을 주다가 제가 끌려가면…….”
농담처럼 말을 내던지던 도광현은 뒷말을 줄였다.
서진의 표정을 보고 장난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거다.
도광현이 고민 가득한 표정으로 술잔을 만지작거릴 때, 서진이 테이블에 초소형 이어폰을 올렸다.
“네가 할 일은 내 말을 그대로 전하는 거야.”
서진이 직접 나설 수는 없다.
서진의 얼굴은 검찰 내에서 알려질 대로 알려진 상태.
게다가 까딱 잘못하면 서진의 행동이 김영준 검사장의 귀에까지 들어갈 수 있다.
김영준 검사장의 단꿀을 전부 빨아먹을 때까지는 철저히 숨어 있어야 한다.
도광현이 한숨을 내뱉으며 이어폰을 손에 들었다.
“아니, 이런 것은 어디서 구하는 거예요? 국정원도 아니고.”
“인터넷 쇼핑. 5만 원.”
서진은 진실을 말했지만 도광현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
그 시각.
김영준 검사장은 법무부 장관을 만나고 있었다.
법무부 장관은 판사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
그녀의 시선이 테이블에 놓인 두 개의 이력서로 향했다.
이력서는 김영준 검사장이 총장이 되었을 때, 그 옆을 보좌할 차장검사의 후보다.
“인사권은 장관님께 있지만 제 선택을 존중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법무부 장관은 이력서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빙긋이 미소를 그렸다.
“검사장, 뭐가 그리 급해요? 이제 내정이 났어요. 발표가 남았고 청문회가 남았어요. 인선은 그 뒤에 천천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삐딱한 목소리.
법무부 장관은 김영준 검사장과 기 싸움을 하려 한다.
검찰총장은 대한민국 검사의 정점이며 무소불위 권력의 끝판 중 하나.
하지만 검찰에 대한 인사권과 예산 편성권은 법무부에 있다.
그렇다고 검찰총장을 막 대할 수는 없다.
검사의 수사를 지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총장에게 있고 마음만 먹으면 법무부 장관의 목을 그어 버릴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미묘한 관계.
줄타기가 실패하면 피를 보게 된다.
“천천히, 청문회부터 준비하세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하는데, 김영준 검사장은 어떨까요? 궁금하네요.”
떨어지기를 바란다는 눈빛.
하지만 김영준 검사장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일평생 법밥을 먹고 살아왔습니다. 먼지 날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김영준 검사장은 이미 국회의원들의 입에 돈을 쑤셔 넣었다.
돈을 삼켜 먹을 때까지 그 입은 열리지 않을 거다.
잠시 후, 김영준 검사장이 떠났다.
법무부 장관이 다시 테이블에 놓인 이력서를 손에 들었다.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하…….’
법무부 장관은 김영준 검사장을 잘 알고 있다.
이미 국회의원과 어울리며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사람.
게다가 판사 출신인 자신을 법무부 장관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 사람이 총장까지 된다면, 정말 아찔한 일.
그런데 인선까지 좌지우지하려 한다.
물론 인사권은 자신에게 있지만 막을 명분이 없다.
그 자리가 모두 김영준 검사장의 사람으로 채워지면…….
“……안 돼.”
하지만 그녀는 김영준 검사장을 막을 수 없다.
최근 중앙지검은 엄청난 업적을 쌓았고 김영준 검사장은 청와대 관계자들의 신뢰를 얻었다.
지금은 김영준 검사장이 원하는 대로 질질 끌려가야 한다.
인선도 행정도, 모든 것을…….
***
김영준 검사장이 검찰총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이 공식적으로 알려졌다.
청문회까지 3일.
“처음 뵙겠습니다. 제이든 김입니다.”
도광현은 겉에서 볼 수 없는 작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이기승을 만나고 있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호텔의 차이나 레스토랑, 그중에서도 VIP 객실.
검사의 지갑으로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이기승은 잠시 멍한 눈으로 방을 살핀 뒤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도광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신마건설의 대주주라 해서 나왔다.
돈 있는 놈과 인맥을 쌓는 것은 언제나 이득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30대 중반쯤 되는 놈이라니.
“생각보다 젊으시네요? 어린 나이에 큰돈도 만지고, 집에 돈 좀 있으셨나 봐요?”
“운이 따르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이기승은 도광현을 관찰하고 있었다.
돈 많은 어린 놈.
인맥으로 만들어야 할지 타깃으로 정해야 할지 가늠하는 중이다.
하지만 도광현의 뒤에는 서진이 있다.
놈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빤히 눈에 보였다.
도광현이 서진의 목소리를 그대로 따라 읊었다.
“인사 시즌이라고 들었습니다. 추안영 검사장님이 대검 차장검사로 올라간다죠?”
동시에 이기승의 눈이 반짝였다.
도광현이 어떤 의도로 자신을 불러냈는지 알겠다는 표정이다.
이기승이 빙긋이 웃으며 술잔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비웃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마건설에 문제가 있나요? 그래서, 꼬리를 자를 테니 문제를 덮어 달라고 청탁하는 겁니까? 대검 차장검사면 그럴 힘이 있으니까? 죄송하네요. 청탁은 받을 수 없습니다.”
이기승의 눈빛이 바뀌어 있었다.
도광현을 타깃으로 생각한 거다.
김영준이 총장이 된 후 그 첫 사업.
신마건설급의 대기업을 박살 내는 것은 꽤 괜찮은 그림이다.
그리고 그 사업이 자신의 손에서 시작된다면, 정말 금상첨화.
하지만 그것은 이기승의 착각이다.
서진은 그런 시답잖은 청탁을 위해 도광현을 이 자리에 앉힌 게 아니다.
서진은 이기승의 탐욕을 건들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청탁은 됐다고 했습니다.”
“저희는 대검의 차장검사로 추안영 검사장님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
이기승은 더 들을 게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살벌한 눈동자로 도광현을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이든 김이라고? 조만간 다시 봅시다, 이런 곳 말고 취조실에서.”
“…….”
도광현은 죽을 맛이었다.
차장검사의 눈빛은 정말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서진의 지시를 받아 평안한 척 앉아 있지만 당장이라도 집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이기승이 손을 닦은 티슈를 테이블에 툭 떨어뜨리며 말을 이었다.
“그때도 건방 떨 수 있을지, 정말 궁금하네.”
이기승은 그 말을 끝으로 VIP 룸의 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순간.
“50억.”
“……!”
이기승의 걸음이 멎었다.
못 들은 척하기에는 큰돈이다.
그 시선이 천천히 도광현을 향해 틀어졌다.
“……뭐라고?”
“50억, 그리고 대검에 자리 하나를 놔주죠.”
이기승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도광현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인사 시즌,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하죠. 정말 작은 비리로 대검 차장검사 자리가 날아가기도 하고요.”
“…….”
“딱 그 정도, 추안영 검사장님이 저지른 작은 비리, 그거 하나만 던져 주세요. 50억이면 그 값은 차고 넘친다고 생각하는데요.”
“…….”
“왜 고민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추안영 검사장님이 옷 벗는 거 아니잖아요? 추안영 검사장님이 구속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단지, 대검 차장검사가 못 되는 것뿐이에요.”
“……!”
“추안영 검사장님이 대검 차장검사가 된다고 해서 이기승 검사님께 이득 되는 게 있습니까?”
없다.
기껏 대검에 자리 하나를 얻는 거다.
그런데 도광현은 그 자리와 함께 50억을 얹어 준다고 한다.
“결정하세요.”
도광현의 목소리에 이기승은 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 고개를 끄덕였다.
“돈부터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