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아래 (5)>
서진이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진짜 여기로 도망쳤네?”
저후안 사장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상가와 상가의 옥상을 오가는 완벽한 도주 계획, 실패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진이 비상구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서 있다니.
‘설마, 이것도 첩자? 첩자를 통해 알게 됐나?’
저후안 사장은 곧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안나 루의 앞에서 계획에 대한 것은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그럼 남은 것은 비서.
그런데 비서는 하루 종일, 화장실에 갈 때를 제외하고는 저후안 사장의 곁에 있었다.
‘잠깐, 화장실?’
저후안 사장이 입술을 씹었다.
화장실에 갔던 그 짧은 순간, 메시지를 보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씨발!’
생각을 마친 저후안 사장의 눈이 살벌하게 변했다.
믿는 도끼에 찍힌 발등은 끔찍한 법.
검찰에 끌려가더라도 배신자는 끝장내야 한다.
그게 이 바닥의 룰이다.
그래야 옥살이를 하고 나온 후에도 조직이 온전할 거다.
“너야?”
저후안 사장이 낮은 목소리로 살벌하게 말했다.
하지만 비서는 간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 저는 아니에요.”
“그럼, 누구야!”
저후안 사장이 섬광 같은 눈빛으로 비서를 쏘아봤다.
지금 당장 비서의 목을 잘라 버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 눈빛에 비서는 주춤주춤 물러설 때, 지금껏 조용히 있던 서진이 입을 열었다.
“걔 아니야.”
그 말과 동시에 저후안 사장의 시선이 안나 루를 향해 홱 틀어졌다.
그러자 서진이 끌끌 웃었다.
“걔도 아니야.”
“……!”
“궁금해?”
***
30분 전.
서진은 안나 루가 택시를 타고 내리는 것까지는 미행을 통해 확인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안나 루는 건너편의 작은 커피숍으로 들어갔고 소식이 끊겼다.
서진은 안나 루가 내린 곳에서 3분 정도를 더 지난 곳에 차를 정차했다.
그리고 지도를 펼치며 생각을 이어 갔다.
‘내가 저후안이라면…….’
놈은 의심이 많다.
게다가 첩자가 있다고 의심되는 상황.
‘모든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을 거야.’
안나 루가 택시에서 내리는 것부터 이 주변을 전부 살필 수 있는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거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곳으로 끌고 가지 않았겠지.’
그곳에는 실제 인부들이 있고 목격자가 많아진다.
그럼, 놈이 선택할 상가는 공사가 90% 이상 진행된 곳.
또는 완공이 되었지만 아직 임대가 되지 않은 곳.
서진이 다시 차를 운전하며 안나 루가 내린 곳을 살폈다.
‘이 모든 조건이 성립되는 곳은 둘.’
서진은 곧장 함께 온 경호원에게 부탁했다.
비상식적으로 인부가 많은 상가를 찾아 달라고.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경호원이 서진에게 연락해서 다급히 입을 열었다.
“붉은 현수막이 있는 상가에요. 거기에 인부들이 지나다니는데,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주변을 감시하는 것 같았어요. 덩치를 봐도 인부가 아니라 깡패 새끼들 같았고요.”
서진 역시 그 상가를 확인했고 경호원의 보고에 동의했다.
하지만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이뤄지고 있었다.
상황이 시작되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
상황을 통제하려면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철저히 준비하는 것이 실패를 줄이는 유일한 방법이다.
‘저 상가가 미끼였다면? 깡패를 저곳에 던져 두고 다른 곳에서 안나 루와 만나고 있다면?’
서진은 그렇게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머릿속에 정리한 뒤에야 조우재 부장검사에게 연락했다.
이어서 주변에서 대기 중이었던 수사관들이 그 상가로 진입.
욕설과 폭력의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서진은 끝까지 방심하지 않았다.
‘놈은 도주로를 확보했을 거야. 그게 아니면 이런 상가로 약속을 잡지 않아.’
그리고 지금, 이들과 마주한 거다.
***
서진이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여기를 알았는지 가르쳐 줄까?”
“......”
“쟤한테 들은 거야.”
서진이 천천히 손가락을 들었다.
모든 사람이 그 손가락에 집중한다.
저후안 사장과 비서는 물론이고 안나 루까지, 대단했던 조직을 한 순간에 박살 낸 원흉이 되어 버린 그 첩자가 누군지 궁금했던 거다.
그런데, 서진의 손가락은 저후안 사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뭐?”
저후안 사장은 여유 없는 눈빛으로 서진을 지켜보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되물었다.
“……나?”
저후안 사장이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놈이었다면 변수와 변수까지 고민했어야 할 거다.
하지만 머리를 쓰는 놈이라 예측 범위 내에 있었다.
“협조해 줘서 고맙고. 일단 가자.”
서진은 더 말하지 않았다.
품에서 수갑을 꺼내며 저벅저벅 저후안 사장을 향해 다가갔다.
“오지 마!”
저후안 사장이 재빨리 칼을 꺼냈다.
그리고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며 칼을 흔들었다.
“하찮은 빵쯔 새끼가!”
서진이 더 다가오면 단숨에 찌를 것 같은 살벌한 눈빛.
그때였다.
쾅쾅! 비상구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후안 사장의 시선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틀어졌다.
그곳에 조우재 부장검사가 보였다.
조우재 부장검사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이런 미친 새끼가 상황 파악을 못하나,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대한민국 검사를 상대로 칼을 흔들고 있어? 칼 내려놔, 새끼야!”
조우재 부장검사의 쩌렁거리는 목소리가 옥상을 울렸다.
그 뒤로 수십 명의 수사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수사관들의 손에는 각양각색의 공사 도구가 들려 있다.
팬지, 빠루, 망치 같은 것들.
저후안 사장의 칼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저 많은 숫자의 수사관들과 싸워서 이길 수 없다.
게다가 검사를 향해 칼부림을 했다는 게 소문이라도 나면, 조직은 정말 끝장난다.
저후안 사장이 절망적인 목소리로 “씨발.”이라고 중얼거리며 툭, 칼을 던져 뒀다.
그리고 항복의 표시로 양 손을 들었다.
저후안 사장과 비서의 손에 수갑이 채워졌고 수사관들에게 질질 끌려 옥상을 내려갔다.
그리고 서진이 안나 루를 향해 다가갔다.
안나 루는 힘없이 손을 내민다.
서진이 안나 루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약속은 지켜.”
구형 5년.
저후안 사장을 체포할 수 있도록 도왔던 대가.
하지만 안나 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인생에서 5년은 짧지 않다.
이제 안나 루는 막막하고 암담하며 오지 않을 것 같은 출소의 시간을 멍하니 기다려야 한다.
서진은 몸을 틀었다.
안나 루는 여성, 여자 수사관이 그녀를 인도해야 한다.
그런데 안나 루가 다급히 물었다.
“자, 잠깐만요.”
서진이 다시 안나 루를 향했다.
“왜?”
“……첩자가 누구였어요?”
그게 그렇게 궁금했나 보다.
서진이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비밀이야.”
***
소란스러웠던 옥상이 조용해졌다.
조우재 부장검사가 입에 담배를 물며 뿌연 연기를 내뱉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검사로 살아오면서 별의별 놈을 다 만나 봤는데, 너 같은 놈은 처음이다.”
“…….”
“여기로 도망칠 것은 어떻게 알았어?”
검찰이라는 조직은 대한민국의 엘리트가 모인 곳 중 하나.
하지만 서진처럼 예상하지 못한 일을 해내기는 쉽지 않다.
조우재 부장검사는 그동안 서진의 행동을 지켜봤다.
그리고 자신의 목에 걸린 개목걸이가 어쩌면 당연하다고까지 여기는 중이었다.
상대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방법은…….
‘아, 한 명 더 있구나.’
조우재 부장검사는 순간 김영준 검사장을 떠올렸다.
그리고 씁쓸히 웃으며 “과연 핏줄이네.”라는 말과 함께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하지만…….’
김영준 검사장과 비교하면 서진은 아직 약하다.
김영준 검사장은 목적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가족조차 버린다.
목적에 어울린다면 그 어떤 악인과도 손잡는다.
조우재 부장검사는 서진이 아직 그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진은 말없이 옥상 아래로 시선을 옮겨 저후안 사장의 조직원들이 줄줄이 엮여 가는 것을 지켜봤다.
‘아직.’
저후안 사장이 잡혔다 해서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일본의 자금 그리고 한국의 큰손.
놈들은 서진을 더 경계하기 시작할 거다.
어쩌면 진짜 위험에 처해질 수도 있다.
공격당하기 전에 공격하는 것은 가장 쉬운 병법 중 하나.
하지만 서진은 긴장하지 않았다.
‘먼저 와 주면 고맙지.’
숨어 있는 놈들을 끄집어내는 일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서진이 조용히 웃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임대 문의를 알리는 현수막이 펄럭거리고 흙먼지가 도로를 채웠다.
서진이 간간이 오가는 차량을 보며 중얼거렸다.
“작은아버지가 총장이 되겠네요.”
***
-불법 사채 및 청부 살인을 일삼아온 거대 폭력 조직의 두목 저후안이 오늘 오후 1시 경 검찰에 붙잡혔습니다. 서울중앙지검 김서진 검사는…….
텔레비전은 물론이고 각 언론사는 저후안의 체포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었다.
채널을 돌려도 마찬가지, 서진의 활약이 세상을 채웠다.
-저후안은 지난 2008년 단기 관광 비자를 발급받아 들어온 뒤 불법체류 상태로…….
댓글도 난리다.
외국의 폭력 조직이 국내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일.
하지만 폭력 조직의 간부 급, 그것도 두목이라 알려진 놈을 끄집어내는 것은 영화에서나 가능했다.
-대박, 대박, 대박!
-미제 해결하고 방화범을 패더니 이제는 깡패도 잡아? 그럼, 다음은?
└정치인들이 말합니다. ‘나 떨고 있니?’
-범인은 이 안에 있다!
└ㅆㅂ 탐정이냐? ㅋㅋㅋ
-제발, 빨리 빨리 다 잡아 넣어라!
검사는 사무실에 처박혀 온 종일 서류와 씨름하는 직업.
범죄자를 알고 있지만 이런저런 법의 제약 앞에 한숨을 짓는 사람들.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검사란, 시원하게 범죄자를 잡아 무릎 꿇리는 검사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렇게 모든 언론에 놈들의 소식이 도배되는 것은 어려운 일.
그 이유는 김영준 검사장이 빠르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검찰은 새로운 검찰총장을 기다리고 있으며 청와대는 검찰총장의 내정자로 김영준 검사장과 다른 인물을 고심하는 중.
그런데 때마침 중앙지검에 소속된 서진이 활약했다.
그 업적이 김영준 검사장의 이력에 쓰이는 것은 당연하다.
김영준 검사장은 각 언론사에 압력을 넣었고 청와대의 시선이 김영준 검사장에게 쏠리고 있었다.
***
-미리 축하드립니다, 총장님.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청문회 걱정은 하지 마세요. 하하하.
검사장실.
지금도 김영준 검사장의 휴대폰은 쉬지 않고 진동했다.
각계의 인사들이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있어서다.
심지어 청와대 비서관에게 내정이 거의 확정되었다는 식의 메시지까지 들어왔다.
-대통령님께서 조만간 청와대로 부르실 것 같습니다.
김영준 검사장이 휴대폰을 내려 두며 앞에 선 서진을 바라봤다.
“잘했어.”
김영준 검사장이 서진을 향해 시원한 미소를 그렸다.
서진 덕에 검찰총장에 한 발 더 다가섰다.
이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총장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역할을 톡톡히 한 서진에게 공신 대우를 해 줘야 한다.
“원하는 것,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봐.”
서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없어요.”
“대검에 자리 하나 마련해 줄까?”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해 둔 게 있었지만 당장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상대는 김영준 검사장이다.
지금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다는 표정으로 멋쩍게 웃어야 한다.
“괜찮아요.”
“천천히 생각해 봐. 그리고 오늘 저녁에 시간 비워 둬. 좋은 일이 있으면 가족끼리 밥을 먹어야지.”
***
그날 저녁.
서진은 오랜만에 일찍 퇴근했다.
“거의 다 왔어요. 주차하고 들어갈게요.”
목적지는 김영준 검사장의 집 앞.
김영준 검사장은 서진의 활약을 핑계 삼아 가족 모임을 추진했다.
이미 부모님은 도착했고 오기 싫다고 징징거리던 동생 진영까지 와 있는 상태.
서진은 가까운 공영 주차장에 차를 주차 후 김영준 검사장의 집을 향해 걸었다.
김영준 검사장의 집은 단독주택, 이미 부모님과 진영의 차까지 주차되어 있기에 더 들어갈 자리가 없다.
‘궁금하네.’
사실, 서진은 오늘 모임이 탐탁지 않았다.
저후안과 그 비서, 안나 루에 대한 일만으로도 앞으로 며칠 밤은 꼬박 새워야 할 게 분명해서다.
하지만 기분 좋게 온 이유는 하나.
‘작은 어머니…….’
작은어머니는 깊든 얕든 놈들과 연관이 되어 있고 이 사건이 확장되면 서진의 칼이 자신에게 향할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 일을 통해 김영준 검사장이 총장을 목전에 뒀다.
‘기뻐할까? 아니면?’
칼이 다가오는 것은 두려울 거다.
하지만 남편이 총장이 되는 것은 기쁠 수밖에 없다.
그 권력과 힘을 등에 업을 수 있어서다.
기쁘지만 기뻐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
서진은 작은어머니의 표정과 행동이 정말 궁금했다.
그렇게 김영준 검사장의 집 앞에 도착해서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집으로 향하는 돌담길이 보였다.
서진이 뚜벅뚜벅 집을 향해 걸었다.
‘끽’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린다.
‘어?’
평소라면 집안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 문을 열어 줬을 거다.
그런데 오늘은 작은어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