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 김서진-145화 (145/250)

<수면 아래 (4)>

***

안나 루는 비서를 쫓아 각 건물을 지나고 또 지났다.

최종적으로 몸수색, 그제야 저후안이 기다리는 공실 앞에 설 수 있었다.

“들어 가.”

비서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하자 안나 루는 지옥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저후안이 있는 공실의 문고리를 잡으며 눈을 꾹 감았다.

‘……이걸 쫓아올 수 있다고?’

서진이 뒤를 쫓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놈들은 끝까지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상가와 상가 사이를 지났다.

심지어 공사 현장을 스치는 등 계속해서 미로처럼 옮겨 다녔다.

위치 추적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헤매면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찾았다 해도 문제야.’

이 상가에는 인부로 변장한 깡패 이십여 명이 주변을 지키고 있다.

서진이 몇 명을 끌고 올지는 모르지만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적은 숫자로 깡패들을 뚫고 진입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안나 루는 한숨을 내뱉었다.

어차피 남은 미래는 두 가지다.

죽거나 혹은 감옥에 가거나.

그리고 서진은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믿으라 했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살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였다.

안나 루는 문고리를 당겼다.

저후안은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안나 루가 들어온 것을 느낀 저후안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여전히 창밖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믿기 위해 의심을 하지. 그리고 나조차 의심을 하지. 믿는 것은 단 하나, 돈이야.”

저후안 사장이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생각을 해 봤어. 내가 네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너였다면, 내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았을 것 같아. 넌 나를 무서워하니까.”

“…….”

“그리고 내가 너였다면, 지하철이나 마트의 캐비닛에 여권과 돈을 넣어 달라고 했을 거야. 일본으로 떠나는 배 정도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잖아?”

안나 루의 얼굴이 심각할 정도로 구겨지자 저후안 사장이 그녀를 향해 저벅저벅 다가가며 계속 말했다.

“그래서 궁금했어. 네가 그 정도 머리가 안 돌아가는 애가 아닌데, 굳이 나를 보고 싶어 한 이유. 그 이유가 뭘까?”

안나 루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저후안 사장이 안나 루의 앞에 섰다.

그리고 콱, 안나 루의 목을 움켜쥐며 스산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말해 봐, 그 이유가 뭐지?”

저후안 사장의 눈빛은 두려울 정도로 또렷했다.

그 눈빛이 안나 루를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안나 루의 눈동자가 겁에 질렸다.

그녀가 대답을 못 하자 저후안 사장이 끌끌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더러운 빵쯔 새끼들과 붙어먹었나? 누구? 김서진? 그 하찮은 새끼가 너를 구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어? 멍청해? 생각이 없나?”

“…….”

“네 죄를 생각해. 불법체류자로 들어와서 정치인과 매춘으르 벌였어. 뇌물을 먹이고 몸을 팔고! 네가 직접 운영하던 사채는? 그런 것을 김서진이 봐줄 것이라 생각했나?”

“…….”

“다 거짓이야. 넌 이용당하고 있어.”

저후안 사장이 목을 쥔 손에 힘을 주자 안나 루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충혈됐다.

안나 루의 입에서는 “컥! 컥!” 하고 죽음의 신음 소리가 흘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사, 살려 주세요. 거, 검찰과 저는 상관이 없어요.”

저후안 사장이 히죽 웃으며 목을 잡았던 손에 힘을 풀었다.

안나 루가 목을 잡고 괴로워할 때, 저후안 사장이 담배를 입에 물며 물었다.

“상관이 없다? 그래, 한번 들어 보지. 배신자가 누구야? 대답 여하에 따라 네 처분이 달라질 수 있어.”

“……먼저 여권을 확인하고 싶어요.”

“여권?”

저후안 사장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몰라서 말하는 거야? 여권은 없어. 그리고 기억해. 넌 나와 거래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야. 언제나 지시를 받고 따라야지.”

“…….”

“내가 결정한 네 처분은 세 가지. 편하게 죽거나, 고통스럽게 죽거나, 또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거나.”

“…….”

“대답이 없다는 것은 역시 네가 배신자였던 건가?”

안나 루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안나 루 역시 배신자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이다.

알고 있었다면 지금 당장 말했을 거다.

안나 루는 불안했고 무서웠다.

안나 루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권을 주면 말할게요.”

안나 루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서진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서진이 안나 루에게 이야기했었다.

“끝까지 여권을 달라고 해. 그래야, 배신자를 알려 주겠다고 해. 그럼, 그놈은 너를 죽일 수 없을 거야.”

그리고 여권을 달라는 말에 저후안이 이마를 짚으며 어이없다는 웃음 소리를 터뜨렸다.

“하! 미치겠네.”

저후안 사장이 안나 루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이어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콱, 움켜잡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빵쯔에게 달라붙은 더러운 년, 넌 죽이지 않으마.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넌 내일을 살게 될 거야. 그러니까 말해. 그렇지 않으면 오늘부터 네 역할은 우리 애들의 욕정을…….”

그때였다.

쾅!

문이 다급히 열리더니 비서가 들어왔다.

식겁한 표정의 비서를 보며 저후안 사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검찰인지, 경찰인지 모르겠지만 수사기관이 온 것 같습니다.”

“뭐?”

비서의 말에 저후안 사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밖이 소란스럽다.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고 쾅, 쾅, 폭력의 소리가 울리고 있다.

여기저기 욕설이 난무한다.

“씨발 새끼야!”

“뒈져!”

“이 개새끼들!”

저후안 사장이 쥐고 있던 안나 루의 머리카락을 놓으며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저후안 사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로가에 승용차와 승합차가 가득 서 있었다.

그곳에서 낯선 남자들이 빠루 등의 쇠뭉치를 들고 거침없이 내리는 중이다.

그 숫자를 셀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상가에 모인 스무 명을 훨씬 넘어 선다.

저들이 이곳까지 들이닥치는 것은 시간문제다.

‘젠장.’

저후안 사장은 입술을 씹으며 그들의 신분을 단번에 알아봤다.

경찰 또는 수사관.

저후안 사장의 시선이 안나 루를 향해 틀어졌다.

발발 떨고 있는 안나 루를 보며 비서를 향해 지시했다.

“저년 끌고 와. 일단 이곳을 빠져나간다.”

저후안 사장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비서가 안나 루의 머리채를 잡았다.

“따라와!”

비서의 앙칼진 목소리에 안나 루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안나 루는 그렇게 질질 끌려가야 했다.

공실을 나온 그들은 곧바로 비상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5층, 한 계단만 올라가면 옥상.

그리고 그 옥상에 최종 접선 장소로 이 상가를 선택한 이유가 있다.

이 상가는 소방법에 위배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옆 상가와 딱 붙어 있는 곳.

즉, 옥상으로 향하면 건너편 상가로 도주할 수 있다.

저후안 사장은 비상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향하며 힐끗 안나 루를 바라봤다.

‘어떻게…….’

또 의문이 들었다.

안나 루가 이곳에 오기까지, 검찰 또는 경찰과 연락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비행기 탑승 수속에 준할 정도로 몸수색을 했지만 특이한 부분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놈들이 귀신처럼 알고 찾아왔다.

‘정말 배신자가 있다는 것인가? 안나 루가 아니었던 거야?’

저후안 사장은 끝까지 안나 루를 의심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뭔가 이상하다.

또 다른 배신자가 있지 않고서는 지금 상황은 처음부터 끝가지 이해되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도주다.

자신만 잡히지 않으면 여기서 검찰과 몸싸움을 벌인 놈들은 큰 처벌을 받지 않고 풀려날 거다.

이 나라의 법은 우습다.

그리고 도망칠 자신은 있었다.

경찰인지 수사관인지, 놈들은 계속 이 건물로 들어오는 중이다.

옥상을 넘어 다른 건물로 도주할 것이란 생각은 전혀 못한다.

‘멍청한 새끼들.’

저후안 사장과 비서 그리고 안나 루는 옥상에 섰다.

비서가 먼저 다른 건물로 이동했다.

그리고 저후안 사장이 안나 루의 등을 떠밀었다.

“너부터 넘어.”

“네?”

비서는 다른 건물로 넘어간 상태.

저후안 사장이 먼저 이동하면 안나 루는 혼자 남게 된다.

그럼, 안나 루는 수사 기관에 자수를 할 게 분명하다.

저후안 사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떨어져 죽고 싶지 않으면 넘어!”

안나 루는 옥상의 난간에 섰다.

틈이 좁다 해도 상가와 상가 사이다.

아찔했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뛰어야 했다.

여기서 떨어뜨려 죽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안나 루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난간을 뛰었다.

그러자 저후안 사장이 혀를 쯧 차며 안나 루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세 사람은 건물을 이동했다.

그리고 저후안 사장이 픽 웃었다.

이제 안심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에 준비한 차에 오르면 끝이다.

수사기관이 깡패들을 제압하고 자신을 찾고 있을 때면, 호텔에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을 거다.

저후안 사장이 느긋하게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안나 루에게 물었다.

“배신자를 알고 있다고?”

“여권을 주면…….”

“앵무새처럼 지껄이지 말고 대답해.”

저후안 사장이 안나 루의 뺨을 움켜쥐었다.

이어서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안나 루를 노려보며 말했다.

“누구야? 누가 저쪽에 달라붙은 거야?”

하지만 안나 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일 뿐이다.

그러다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는 있어요. 하지만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

“일본에 가서 쥐 죽은 듯이 살게요. 조직에 누를 끼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안나 루는 지금도 서진의 지시를 따라 ‘여권’이라는 말을 내뱉는 중이다.

하지만 서진이 자신을 구해 줄 것이란 믿음은 없다.

서진 역시 나름의 머리를 썼지만 저후안 사장에게 비할 수는 없었다.

돈 외에는 어떤 것도 믿지 않으려는 자.

악은 언제나 법을 농락하는 법.

저후안 사장은 결국 도주에 성공했다.

그리고 잠시 몸을 숨길 거다.

그게 한 달이 될지 일 년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 나라의 수사기관은 언제나처럼 잠잠해질 게 분명하다.

승자는 저후안 사장이다.

그래서 지금 안나 루가 할 수 있는 말은 간절한 애원이었다.

“부탁드릴게요.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계속되는 안나 루의 목소리에 저후안 사장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리고 담배꽁초를 비벼 밟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생각 같아서는 나도 널 보내 주고 싶어. 그런데, 보내 줄 수 없다는 것 잘 알잖아?”

“…….”

“가서 이야기하자. 그런데, 난 네가 아프지 않았을 때,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어. 알잖아? 우린 꽤 좋은 파트너였으니까.”

“…….”

“내 앞에서 네 이빨과 손톱을 뽑는 일은 없었으면 해. 밑에 놈들에게 치욕을 당하지 않았으면 싶어. 이 예쁜 얼굴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내가 어찌 볼까?”

저후안 사장이 안나 루의 뺨을 쓰다듬으며 씁쓸히 웃었다.

하지만 안나 루는 알고 있었다.

친절한 목소리였지만 완벽한 협박이다.

사무실에 끌려갈 때까지 앞으로의 고문을 상상하며 스스로 무너지기를 바라는 거다.

고문을 앞둔 인간은 약하다.

그 마음을 조금만 건들어도 진실을 토해 내기 마련이다.

저후안 사장은 그 말을 끝으로 옥상의 문으로 향했다.

비서는 여전히 싸늘한 눈으로 안나 루의 머리카락을 쥔다.

그렇게 안나 루는 고삐에 끌려가듯 머리카락을 잡힌 채 저후안 사장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저후안 사장이 문고리를 돌렸다.

옥상의 문이 힘없이 열린다.

안나 루는 방금까지 있었던 건너편 건물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여전히 폭력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들은 이렇게 이곳을 유유히 빠져나가는데, 한국의 수사기관은 헛물만 켜는 중이다.

그런데 저후안 사장이 더 앞으로 가지 않고 있었다.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인상을 일그러뜨리고 있다.

안나 루는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래서 문을 향해 고개를 트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헤이.”

서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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