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 김서진-144화 (144/250)

<수면 아래 (3)>

***

중국 측 자본을 총괄하는 저후안 사장.

그는 커튼이 드리워진 어두운 공간에 앉아 안나 루와 통화하고 있었다.

“시흥의 공단?”

-네. 거기서 뵙고 싶어요.

저후안 사장이 손짓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비서가 태블릿 PC에 ‘시흥 공단’을 검색한 후 저후안 사장에게 화면을 틀었다.

저후안 사장이 지도를 보며 슬쩍 웃었다.

계획된 공단으로 바둑판처럼 길이 나 있다.

어디로든 도주할 수 있고 깡패를 동원해도 먼 곳에서부터 확인이 가능한 곳.

살기 위해 제법 머리를 쓴 것처럼 보인다.

“그래, 배신자를 알고 있다고?”

-네, 저는 억울해요.

“억울하다? 찔리는 게 없다면 편히 봐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왜 굳이 이런 냄새나는 공단에서 보자는 거야?”

저후안 사장은 이런 저런 말을 내뱉으며 안나 루의 반응을 살피는 중이었다.

거짓으로 이뤄진 사람은 반드시 말실수를 하기 마련.

하지만 안나 루의 말은 처음과 같았다.

-공단이요? 화재 이후로 누구도 믿지 못하겠어요. 그래서 한국에 더 있고 싶지도 않아요. 떠나게 해 주세요. 제가 요구하는 것은 여권과 일본으로 향하는 배 그리고 현금 5천만 엔이에요. 그것만 준비해 주시면 배신자가 누군지 말씀드릴게요.

“거래를 하자?”

-네.

그때 비서가 저후안 사장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메모지를 내려 뒀다.

예상하신 대로 대포폰입니다.

안나 루와 통화하는 짧은 사이, 저후안 사장은 비서를 통해 걸려 온 전화의 명의를 확인했다.

저후안 사장이 조용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건강한 목소리를 들어서 기뻐. 난 네가 살아 있기를 바라고 있었어.”

***

호텔,

서진의 앞에 앉아 저후안과 통화하던 안나 루는 순간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살아 있기를 바랐다고?’

그 가식적인 목소리만으로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안나 루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을 때, 저후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 여권과 배를 섭외한 후에 연락하지.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서진의 예상대로였다.

저후안은 기다리라는 지시를 내렸을 뿐, 정확한 날짜와 장소를 약속하지 않았다.

그렇게 통화가 종료됐고 안나 루는 긴장된 숨을 몰아쉬며 휴대폰을 내려 뒀다.

안나 루의 시선이 테이블에 놓인 수첩으로 향했다.

수첩에는 안나 루가 저후안 사장과 통화할 때 필요한 내용이 대본처럼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과 대답은 놀라울 정도로 일치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뭐든.”

“이 질문…… 어떻게 예상한 거죠?”

“뻔하잖아?”

뻔하다? 서진은 쉽게 말했지만 결코 뻔하지 않은 일이다.

안나 루가 생각하는 저후안은 괴물.

그런 괴물의 생각을 예측하려면 상대 역시 괴물이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서진은 검사다.

매일같이 범죄를 들여다보고 거짓과 변명, 위선과 뻔뻔함으로 가득한 자들을 쉬지 않고 대한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있어.’

그런데 검사는 괴물이 되기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

안나 루는 서진이 의심과 불신으로 점철된 괴물처럼 느껴졌다.

‘그럼, 믿을 수 없어.’

그런 자들의 특징, 원하던 것을 얻으면 약속된 모든 것을 외면하고 뻔뻔하게 웃으며 사냥개를 잡아먹는다.

게다가 안나 루는 범죄자, 검사의 입장에서 약속 따위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

안나 루의 눈빛을 본 서진이 슬쩍 웃었다.

“저기……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는데, 그런 거 아니야.”

서진의 옆에는 김영준 검사장이 있다.

김영준 검사장은 형제는 물론 자식과 아내마저 이용하는 냉혈한이며 저후안 같은 놈보다 몇 단계 위에 있는 소시오 패스다.

김영준 검사장은 누구도 믿지 않는다.

심지어 김영준 검사장 자신조차도.

서진은 서준경이었을 때부터 그런 김영준 검사장을 상대했기에 저후안의 생각은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서진의 눈빛을 바라보던 안나 루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약속 지킬 거죠?”

“5년?”

“네.”

“걱정하지 마.”

하지만 안나 루는 불안한지 몇 번을 물었고 그때마다 서진은 최대한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일일이 대답해 줬다.

***

“안나 루의 행적을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마지막 흔적은 병원이 끝입니다. 경찰과 검찰 어디에서도 안나 루를 확보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며칠 후, 어두운 방.

저후안 사장이 비서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가 보냈던 청소부는 우연히 잡힌 건가?”

저후안 사장은 안나 루를 확인 사살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그놈은 병원 앞 번화가에서 서진에게 잡혀 버렸다.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김서진 역시 안나 루를 쫓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경로가 겹쳤고 운이 없었습니다.”

“운?”

반대로 말하면 서진의 운이 좋다는 이야기다.

“운 좋은 놈이라…….”

저후안 사장은 턱을 쓸며 잠시 몇 년 전을 떠올렸다.

뜬금없이 회장에게 연락이 왔던 날.

-김서진이라는 검사가 있어. 죽여, 조용히. 사고 또는 자살로 처리할 수 있도록.

서진이 회장에게 어떤 미운털이 박혔는지는 모른다.

알고 있는 것은 신임 검사 하나가 회장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다는 것 정도.

“하긴, 운이 좋은 놈이지. 그 높이에서 떨어졌는데도 살아났으니.”

서진이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기억을 잃었다는 정보에 잠시 관심을 끄고 있었는데, 그 칼이 지금은 자신들을 향하고 있다.

“그때 확실히 죽였더라면 지금의 일은 없었을 텐데.”

저후안 사장이 아쉬운 목소리를 토해 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던 그가 눈을 찌푸렸다.

“잠깐…….”

서진을 죽이려 했던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그런데 서진은 그 짧은 순간에 미제를 해결하고 동남이라는 곳에서 중앙지검으로 기어 올라왔다.

그때와 달리 인지도 있는 사람이 된 거다.

‘그런데 시간이 더 지나면 어떻게 될까?’

저후안 사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인지도를 넘어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권력을 쥘 가능성도 크다.

잡초는 초반에 뿌리 뽑지 못하면 끝까지 골치 아픈 법.

그때가 되면,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을지 모른다.

“김서진…… 죽여야겠어.”

검사도 사람이다.

찌르면 죽는다.

게다가 검사의 자살률은 결코 낮지 않다.

적당히 유서를 쓰고 고위급에서 덮어 주면 일은 간단히 마무리된다.

저후안은 배신자를 색출한 뒤, 그다음의 타깃으로 서진을 겨냥했다.

“그건 그렇고…….”

저후안 사장이 몸을 일으켜 창가로 향했다.

가려진 커튼을 젖히자 밝은 빛이 내부로 스며들었고 저후안 사장이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배신자가 있다고 생각하나?”

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판단은 사장이 내리는 법이다.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저후안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씁쓸히 웃었다.

“조직이 쑥대밭이 됐어.”

안나 루의 오피스텔에 서진이 나타났고 방화범과 청소부가 잡혀 버렸다.

뒤를 봐주던 경찰이 구속됐으며 정치권과 연결된 출판사가 난도질을 당했다.

이 모든 것이 며칠 만에 일어났다.

내부 정보가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

“몇몇 의심되는 놈들이 있어. 하지만 그놈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고.”

아무래도 안나 루를 만나 봐야 한다.

“적당한 장소를 알아봐.”

“직접 가실 겁니까?”

“가기는 가야지.”

“그럼, 안나 루가 요청한 여권과 배는 어떻게 할까요?”

저후안 사장이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스산하게 웃었다.

“납골당이나 알아봐.”

어둠 속에 잠긴 저후안 사장의 눈이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

그 시각.

서진은 사무실에 앉아 기록물을 확인하고 있었다.

“검사님? 혹시, 식사 안 하셨어요?”

점심시간, 막 식사를 마치고 온 실무관이 서류에 파묻힌 서진을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아서요. 적당히 먹고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토스트라도 사다 드릴가요?”

“아뇨, 정말 괜찮아요.”

그때 서진의 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 휴대폰으로 연락이 올 사람은 안나 루.

서진이 복도로 나가며 휴대폰을 귀에 댔다.

그러자 안나 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후안에게 연락이 왔어요. 공단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보자고 하네요.

이번에도 서진의 예상대로였다.

***

그날 밤.

서진은 안나 루가 지내는 호텔을 찾았다.

안나 루는 초췌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놈들에게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죽음의 공포 때문에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잠을 잔 적이 없다.

그런데 막상 저후안까지 만난다고 생각하니 심각할 정도로 불안했다나 보다.

안나 루는 서진의 앞에서 가늘게 몸을 떨고 있었다.

“많은 검사와 경찰 그리고 수사관이 그 사람들의 돈에 얽혀 있어요. 체포 날짜에 맞춰 수사관을 모으면 어떤 식으로든 저후안의 귀에 들어갈걸요. 그럼, 제가 검사님의 옆에 섰다는 것을 알 테고. 하…… 어쩌죠?”

“…….”

“어쩌죠?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은 정치인뿐이고 수사기관은 김재훈 그 사람 하나라…….”

두서없는 말을 전하던 안나 루가 말끝을 흐리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더욱 불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교도소에 가도 안전하지 못할 거예요.”

“저기……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외국인, 그것도 불법체류자가 대한민국 검찰과 경찰을 상대로 저런 말을 하다니, 우습지도 않았다.

하지만 안나 루는 끝까지 부정했다.

“아뇨, 그동안 제가 만난 사람들은…….”

“개똥 같은 새끼들만 만나서 그렇지. 어쨌든, 그건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이제 저후안이란 놈을 어떻게 요리할지 얘기해야지?”

안나 루가 눈을 깜빡였다.

서진의 말을 듣고 있으면 정말로 그 조직이 뿌리째 뽑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저후안을 잡기 위한 작전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도 그랬다.

서진은 저후안의 생각을 완벽히 파악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게 한참 말을 이어 가던 서진이 볼펜을 툭 던지며 말했다.

“물론 이 계획이 완벽하지는 않아. 사람은 언제나 변수가 있으니까. 하지만 최악의 경우가 되더라도 네가 죽게 만들지는 않을게.”

범죄자는 스스로 죽거나, 살해당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감옥에 보내서 법의 엄벌을 받아야 한다는 게 서진의 생각이다.

그리고 안나 루는 범죄자, 그것도 대한민국의 고혈을 빨아먹던 불법체류자.

당연히 감옥에 가야 했다.

하지만 안나 루는 서진의 말에 안심을 느꼈다.

“감사해요.”

***

“중앙지검 수사관들의 스케줄에 김서진 검사와 관련된 것은 없었습니다. 관할 경찰도 마찬가지, 지원 공문은 없었다고 합니다.”

저후안과 안나 루가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저후안은 마지막까지 안전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게 지금껏 이 땅에서 범죄를 저지르며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다.

저후안이 담배 연기를 내뱉자 비서가 계속 말했다.

“수사관들의 특이 동향으로는 오늘 압수 수색이 하나 있는데, 듀잇이라고 벤처기업에 간다고 들었습니다.”

“듀잇? 거기 담당 검사가 누구야?”

“조우재 부장검사라고 합니다.”

비서가 태블릿 PC를 내려 뒀다.

화면에 중앙지검 검사 배치표가 보인다.

조우재는 서진과 다른 부서의 부장검사, 서진과는 상관이 없다.

하지만 저후안은 비서를 향해 또 물었다.

“김서진은 뭘 하고 있지?”

아무래도 서진의 행동이 가장 불안했다.

이 사태를 만들어 낸 원흉이기 때문이다.

“사무실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무실이라…….”

저후안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안나 루와 김서진은 연관이 없는 것 같다고.

그렇게 팔짱을 낀 채 한참을 생각하던 저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문으로 향했다.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었다.

사무실의 복도 밖으로 각양각색의 옷을 입은 사내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게 보인다.

그들을 향해 저후안이 입을 열었다.

“가자.”

***

서울 강남의 한 커피숍.

안나 루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얼음이 다 녹아 버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보고 있었다.

이따금 손목시계를 통해 시간을 확인할 뿐,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그때, 안나 루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저후안이다.

-차가 밀려서 그러는데, 약속 장소를 바꾸지.

의심병 환자는 장소까지 바꾸려 한다.

단 하나의 가능성도 없애려는 거다.

그런데 안나 루는 갑작스러운 장소 변경에 당황하지 않고 희미하게 웃었다.

놈이 서진의 손바닥에서 놀아난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서진은 놈이 장소를 변경할 것까지 예상하고 있었다.

안나 루가 대답했다.

“어디로 갈까요?”

-그 앞으로 택시를 보내지. 5분 후에 나와.

***

경기도의 한 신도시, 개발이 막바지에 들어선 곳이지만 아직도 공사 현장이 가득했고 각 건물에는 ‘임대 문의’, ‘커피숍 오픈’ 등의 현수막이 펄럭였다.

한 건물의 5층.

시멘트 바닥이 훤히 드러난 텅 빈 공실에 저후안이 서 있었다.

그 차가운 눈동자에 안나 루가 택시에서 내리는 모습이 담겼다.

저후안이 휴대폰을 귀에 댔다.

“택시에서 내렸지? 그 앞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 가.”

-……아직 오픈 전인데요?

“문 열려 있으니까 들어가.”

***

안나 루는 눈동자만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저후안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공사장 인부들이 그녀를 힐끗힐끗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저후안과 함께 온 자들이다.

안나 루는 긴장된 숨을 토해 내며 커피숍으로 향했다.

커피숍 안에는 저후안의 비서가 앉아 있었다.

비서가 몸을 일으키며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안나 루를 바라봤다.

“안부 인사는 됐지?”

비서의 말에 안나 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커피숍의 뒷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알잖아? 우리 사장님, 의심 많은 거. 뒷문으로 나가서 다른 건물로 이동할 거야.”

안나 루의 눈빛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이러면 서진이 꼬리를 놓칠 수도 있다.

이렇게까지 빙빙 도는데, 아무리 서진이라 해도 추격은 어려울 거다.

‘어쩌지?’

안나 루는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생각할 때다.

안나 루의 머릿속에 서진의 목소리가 스쳤다.

“의심하지 말고 끝까지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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