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아래 (2)>
서진은 이미 이 건물의 임차인과 관리인에 대한 조사를 끝냈다.
관리인은 아웃소싱 업체에서 파견된 사람, 엄선주와는 상관이 없다.
즉, 서진의 옆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거다.
서진이 모자를 눌러쓰며 관리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리고 만들어 뒀던 명함을 건넸다.
더 강남
부동산 경매, 투자 전문 회사
모자를 눌러썼기 때문에 얼굴을 알아보기는 힘들다.
서진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락내리락한다 해도 연예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리인은 명함을 받아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동산? 그런데, 여기는 왜요?”
“회사 차원에서 이 건물을 매입할까 고민하고 있어요. 아직 건물주에게는 알리지 않았고. 일단 천천히 알아본 후 접근하려고 하거든요.”
관리인은 힐끗 서진을 살폈다.
모자를 눌러쓴 사람을 신뢰하기는 어려운 일.
하지만 서진은 넉살 좋게 악수를 권하며 말을 이었다.
“소장님이죠? 찾아가 뵈려 했는데, 괜히 어려운 발걸음 하게 만들었네요. 천천히 말씀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차 한잔 주실 수 있을까요?”
“아, 네. 뭐…….”
관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건물이 팔려 버리면, 그래서 아웃소싱 업체가 바뀌어 버리면, 직장을 잃게 된다.
관리인은 일단 서진이 어떤 말을 하는지 듣고 싶었다.
그리고 서진은 관리인을 따라 계단을 오르며 조용히 웃었다.
장지혁 검사에게 이런 일을 맡길 수는 없다.
그는 원칙에 얽매여 있는 사람.
꼼수를 부린 자, 꼼수로 망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장지혁 검사가 본격적으로 수사를 시작하기 전에 물밑 작업은 직접 해 둬야 했다.
***
“그래서, 말씀하고 싶다는 게…….”
관리소장의 사무실이었다.
뜨끈한 녹차를 앞에 둔 채 관리인이 물었고 서진은 말을 돌리지 않았다.
“건물의 CCTV를 보고 싶습니다.”
“……네?”
“유입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각 개별 상가의 단골은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고 싶거든요.”
“그게 무슨…….”
건물주가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세만 걱정하면 됐지, 단골까지 생각하다니.
관리인이 고개를 갸웃할 때, 서진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자세한 것은 저희 회사 영업 기밀이고요.”
서진이 품에서 흰 봉투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관리인의 시선이 봉투로 향하자 서진이 말을 이었다.
“약소하지만 정보 제공에 대한 대가입니다.”
“……!”
관리인은 봉투를 들어 힐끗 안을 살폈다.
세종대왕, 두께로 보아 100만 원.
서진이 마른 입술을 핥는 관리인을 보며 말을 이었다.
“만 원짜리 물건도 최저가를 찾고 가성비를 찾는데, 수 백억이 오가는 판떼기에 이 정도 조사는 당연한 겁니다. 그리고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한 달에 한 번, 거래가 끝날 때까지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약속드리죠. 명의가 바뀌어도 소장님이 변경될 일은 없을 겁니다.”
“…….”
“물론 우리가 나눈 대화는 비밀로 해 주셨으면 해요. 우리 같은 업체가 건물에 침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 건물주가 무리한 웃돈을 요구할 수도 있거든요. 그럼 우리는 이 건물을 포기할 테고 소장님의 용돈도 줄어들 겁니다.”
CCTV 영상을 건네주는 대가로 받는 돈.
한 달에 100만 원.
월급쟁이에게는 정말 큰 돈이다.
집에 들어가면 목에 힘을 줄 수도 있다.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진이 궁금했던 것을 하나 물었다.
“그런데 지하실에 입주한 곳은 어디예요? 찾아봐도 안 나오던데요.”
정말 일반적인 질문이며 건물을 매입하려는 사람은 당연히 궁금해할 업체.
하지만 관리인도 몰랐다.
“뭘 하는지는 저도 모르고요. 여기 건물주가 직접 사용한다고만 들었어요. 일주일에 두어 번 드나드는 사람은 있는데…….”
***
잠시 후, 서진은 CCTV의 영상이 든 USB를 들고 관리소를 나섰다.
관리소는 1층의 구석.
이제 복도를 지나 빌딩의 입구를 벗어나면 된다.
‘그런데 엄선주는 왜 오늘 이곳에 온 거지?’
서진은 생각을 이어 가고 있었다.
엄선주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
‘엄선주는 많은 건물을 소유했어.’
차명으로 잡힌 것까지 하면 서진의 상상 범위를 넘어설 수도 있다.
그리고 각 건물은 지금처럼 지역의 아웃소싱 업체를 통해 관리하는 중이다.
즉,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 건물에 들를 이유가 없다.
‘그럼, 지하층에 볼일이 있어서?’
서진은 곧 고개를 저었다.
관리소에서 CCTV를 돌려 봤지만 오늘 지하의 사무실을 오간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엄선주가 혼자서 어떤 일을 처리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우습다.
‘말도 안 돼.’
엄선주는 평생 지시만 해 오던 사람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금수저.
그녀의 한마디와 손가락질 하나로 사람들이 움직이고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스스로 어떤 일을 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럼, 왜?’
서진이 생각에 생각을 이어 갈 때다.
장지혁 검사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그 여자, 지금 건물로 들어갔다.
접촉 사고에 대한 시시비비가 끝난 거다.
서진이 모자를 더 눌러썼다.
그리고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어?’
문이 열리고 엄선주가 들어왔다.
이어서 그 뒤로 작은어머니다.
수백만 원짜리 명품 코트를 입은 작은어머니가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울리며 복도를 걷고 있다.
그리고 작은어머니의 시선이 천천히 앞을 향한다.
서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작은어머니는 서진을 알아볼 수도 있다.
모자를 눌러썼지만 익숙한 실루엣을 놓칠 리가 없다.
서진은 재빨리 눈동자를 움직였다.
몸을 숨길 수 있는 곳.
하나 있다.
두 걸음 앞의 화장실.
서진은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고 다행히 작은어머니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작은어머니와 엄선주가 사라졌을 때, 서진은 다시 몸을 틀었다.
향하는 곳은 관리사무소.
두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예상대로 두 사람은 지하실의 사무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어떤 대화를 나눌지는 모른다.
하지만 작은어머니와 엄선주가 강한 연결 고리로 묶여 있다는 것은 예상할 수 있었다.
***
서진이 차 문을 열고 오르자 장지혁 검사가 참고 있던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와, 엄선주? 그 사람, 진짜 무서웠어. 위아래로 나를 훑어보는데, 어지간한 사이코패스도 그 여자 앞에 서면 울걸?”
“보험 처리한 거예요?”
“아, 됐대.”
“네?”
엄선주는 장지혁 검사의 자동차를 슬쩍 본 후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거지한테 뭘 바라겠어?”
장지혁 검사는 관자놀이에 심줄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면서도 최대한 사과하며…….
“보험 처리해 드릴 테니까…….”
하지만 엄선주는 “됐어요.”라며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거지 취급까지 당했는데, 취조실에서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정말 궁금하네.”
장지혁 검사가 방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끌끌 웃었다.
벌써부터 엄선주와 마주 앉을 시간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어진 서진의 말에 장지혁 검사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방금 엄선주와 같이 들어간 사람 봤어요?”
“어? 어.”
“작은어머니예요.”
“뭐?”
“엄선주와 함께 오랫동안 비워진 그 공실로 들어갔어요.”
장지혁 검사는 눈을 깜빡였다.
검사장 아내의 친동생이 엄선주, 당연히 어울릴 수도 있다.
하지만 공실로 향하다니.
장지혁 검사도 좋지 않은 냄새를 맡았다.
“그 공실에는 사무실이 있었고요. 관리소장에게 물어보니까, 엄선주가 개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 같대요.”
엄선주는 무등록 사채업자.
그런데 검사장의 아내가 무등록 사채업자의 사무실에 들어갔다.
장지혁 검사도 서진의 작은어머니가 동생과 함께 사채에 손을 뻗은 것은 아닐까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설마?”
“수사해 봐야죠.”
서진의 건조한 목소리에 장지혁 검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거…… 빠져도 될까? 너희 가족의 평화를 위해 비밀은 지킬게.”
농담으로 내뱉은 말이지만 검사장의 아내를 수사한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다.
***
그날 밤.
서진은 안나 루가 숨어 있는 호텔로 향했다.
장지혁 검사에게 엄선주와 작은어머니에 대한 일을 맡겼지만 안나 루가 속한 조직을 상대로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김영준이 알게 되는 것은 찰나야.’
장지혁 검사의 수사가 시작된 이상, 아무리 극비로 움직인다 해도 그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다.
장지혁 검사가 아니라 서진이 움직였다 해도 마찬가지.
작은어머니가 타깃이라면 걸릴 수밖에 없다.
중앙지검은 그 자체가 김영준 검사장의 눈과 귀, 특히 김영준 검사장은 자신의 비리에 예민하다.
‘그런데 자신의 아내가 표적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김영준 검사장은 작은어머니를 지키려 할 거다.
사랑이라는 로맨틱한 이유는 아니다.
집사람의 비리가 총장으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내가 진행하는 수사도 엎어질 수 있어.’
장지혁 검사가 김영준 검사장에게 들키기 전에 놈들의 팔다리 하나는 끊어 놔야 한다.
‘그래서…….’
서진은 각국의 더러운 돈이 한국에 들어와 서슴지 않고 범죄를 버린다는 이야기가 언론에 공론화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여론이 움직이면, 작은어머니가 아니라 김영준 검사장 본인이 개입되어 있어도 멈출 수 없을 거다.
이미 씨앗은 충분히 뿌려 뒀고 뽑아내기만 하면 된다.
***
호텔의 객실.
안나 루는 와인을 마시며 야경을 보고 있었다.
서진이 앞에 앉아 있지만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다.
애초에 눈길을 주고받으며 잡담을 나눌 사이는 아니었다.
“너희 사장, 잡고 싶은데.”
안나 루의 시선이 서진에게 틀어졌다.
안나 루는 중국 측 자본.
쩐주에게 돈을 받아 운영하는 사장의 이름은 저후안.
안나 루가 와인을 테이블에 내려 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요? 제가 알고 있던 사무실은 비어 있을 거예요. 집도 마찬가지고요. 짧은 시간에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질문은 하지 마세요. 대한민국은 돈만 있으면 뭐든 다 할 수 있는 나라잖아요? 그런데 꽁꽁 숨어 버린 사장을 어떻게 잡아요?”
“네가 미끼가 되면 돼.”
안나 루가 깔깔 웃었다.
“미끼? 저후안 사장이 내가 불러낸다고 나올 것 같아요? 일단 의심부터 할걸요. 그리고 청소부를 보내겠죠, 내 목숨을 수거하려고.”
“나올 거야.”
서진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안나 루의 눈썹이 살짝 휘어질 때, 서진은 테이블에 휴대폰을 내려 뒀다.
방화범을 잡은 후 서진이 직접 쓴 기사가 보인다.
서진이 기사를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저후안은 며칠 동안 고민했을 거야.”
-안나 루가 배신자였을까? 아니면 또 다른 첩자가 있나?
“연락해서 말해, ‘배신자가 누군지 알고 있어요.’라고. 그럼 그놈은 또 고민하겠지. 네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
“여기서 중요한 것은 놈의 고민이 아니야. 놈이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거지. 의심 많은 놈일수록 진실이 무엇인지 직접 보고 싶어 하거든.”
안나 루의 눈이 깜빡였다.
그녀는 서진이 어떻게 저후안 사장의 성격까지 예상하고 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서진이 태블릿 PC를 꺼내 어느 지역의 지도를 펼쳤다.
“접선 장소는 이곳이 좋을 것 같아.”
경기도 시흥시의 공단 지역이다.
“주거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야간이 되면 인적이 드물어. 아니,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게다가 사방이 길게 뚫린 도로라 도주하기도 쉽고 다른 놈들을 끌고 왔는지 확인하기도 편해.”
“…….”
“네가 이곳으로 접선 장소를 잡으면 그놈은 조금이지만 너를 믿을 거야. ‘살고 싶어서 최대한 안전한 장소를 찾았네.’라고 생각하면서.”
안나 루가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만요. 다 좋은데요. 애써 전화를 했는데, 저후안이 안 나타나면요? 그럼, 나만 노출되는 거잖아요?”
“당연히 안 오지.”
“네?”
“뭘 믿고 냉큼 만나자고 하겠어?”
“하! 그런데 왜 쓸데없이…….”
안나 루는 입을 다물고 다시 와인 잔을 손에 들었다.
더 할 이야기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놈은 전화를 끊은 후 모든 것을 알아볼 거야. 처음부터 하나씩, 다시 한번 모든 것을.”
“…….”
“우리 지검에 있는 검사, 관할에 있는 경찰, 혹시라도 네가 내 손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면서.”
“…….”
“그리고 너와 나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도 없다는 확신이 들 때, 다시 연락이 올 거야. 접선 장소 역시 자신이 가장 안전하다 생각하는 곳으로 요구할 테고.”
안나 루는 황당한 표정으로 서진을 바라봤다.
도대체 몇 번을 꼬아 생각하는지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안나 루는 방금 서진이 한 말을 떠올렸다.
“의심 많은 놈일수록 진실이 무엇인지 직접 보고 싶어 하거든.”
그 말이 꼭 서진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서진이 안나 루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놈 잡으면, 네 구형은 5년으로 맞춰 줄게. 콜?”
안나 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있으면 어차피 죽을 목숨, 그녀에게 선택권은 많지 않았다.
서진이 테이블에 대포폰 하나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모든 놈들의 연락처가 바뀌지는 않았을 거잖아? 적당히 한 놈에게 전화해, 사장을 바꿔 달라고.”
안나 루가 손을 뻗어 휴대폰을 쥐자 서진이 수첩을 꺼내 그녀의 앞에 내려 뒀다.
안나 루의 시선이 수첩으로 향하자 서진이 입을 열었다.
“대본.”
“하!”
안나 루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제는 서진이 어디까지 미리 보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따르면 된다.
그리고 안나 루가 전화번호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유일하게 외우는 번호예요. 이 번호가 바뀐 거면 나도 몰라요. 핑계가 아니란 것 알죠?”
휴대폰은 노래방 화재 때 함께 잃어 버렸다.
안나 루는 긴장된 표정으로 휴대폰을 귀에 댔다.
다행히 신호가 간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에 안나 루가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야. 사장님과 통화하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