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아래 (1)>
***
“푹 잤어요.”
다음 날, 오전 7시.
서진은 어머니와 통화하고 있었다.
어제는 퇴근을 못하고 사무실에 남아 밤을 샜다.
밀린 업무와 벌인 일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24시간은 모자랐고 책상에는 처리하지 못한 기록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께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잘 잤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오늘이요? 글쎄요. 조금 늦을 것 같은데요.”
어머니는 서진이 일찍 퇴근했으면 하는 바람을 말씀하셨지만 밤을 새고 일을 했다 해서 일찍 퇴근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오늘도 새로운 기록물이 쉬지 않고 들어올 거다.
“네, 꼭 먹을게요.”
서진은 아침 잘 챙겨 먹으라는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이어서 수건을 어깨에 두른 후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세수를 하고 물기를 닦아 낸 서진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원래의 서진을 향해 중얼거렸다.
‘기다려, 곧 꼬리가 밟힐 것 같으니까.’
서진의 머릿속에 어젯밤, 안나 루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스쳤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자산가들이 모여 만든 모임이에요. 큰 의미는 돈이지만 세부적인 목적은 각자 달라요.”
일본 측은 기업, 중국 측은 기관, 한국은 권력자를 사냥하려 한다.
물론 주목적이 그렇다는 것.
기업을 사냥한다 해서 기관이나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엄선주는 한국 측의 실장이에요. 급으로 따지자면 우리 사장님급. 쩐주의 바로 밑에서 활동하고 있죠.”
그래서 쩐주가 회장인가 물었지만 안나 루는 고개를 저었다.
“쩐주는 이사와 전무라고 부르고요. 회장님은 저도 실제로 본 적이 없어요.”
서진이 픽 웃었다.
‘같잖은 것들이.’
국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놈들이 회장, 사장, 실장, 이사 등 좋은 이름은 다 갖다 붙이며 놀고 있다.
‘조금만 더 놀아라. 놀이는 금방 끝날 테니까.’
서진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저벅저벅 세면장을 벗어났다.
“좋은 아침입니다.”
수사관이 출근했고 실무관이 자리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힐끗힐끗 서진을 보고 있다.
기록물을 넘기던 서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 보세요?”
뭐가 묻었나 싶었는데, 실무관이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을 들고 서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보세요.”
서진이 눈을 깜빡이며 휴대폰을 향했다.
화면에는 어제의 일이 담겨 있었다.
서진이 방화범을 잡고 팔을 꺾는 장면.
가까이서 찍었는지, 목소리도 선명하게 들린다.
-체포 구속적부심을 청구할 권리가 있다. 그러니까 얌전히 가자.
-놔! 놓으라고! 이 개새끼……. 팔! 팔! 꺾지 마! 아아아악!
곧 싸움이 났다고 생각한 경찰들이 달려왔고 그들이 서진을 말리려 했다.
하지만 서진이 그들에게 손을 내밀며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중앙지검 김서진 검사입니다. 수갑 가진 것 있으면 좀 빌려주세요.
그렇게 영상이 끝났다.
동영상의 제목도 가관이다.
[불 지르고 불구경 하다가 김서진 검사 만나서 초살당한 방화범]
댓글도 난리다.
멋있다느니, 싸움을 잘한다느니, 이제 많은 사람이 서진의 얼굴과 이름을 알아보고 응원해 주고 있다.
“사람들이 엄청 좋아해요.”
실무관이 엄지를 척 내밀었고 수사관도 낄낄 웃는다.
함께 일하는 검사가 잘되는 모습을 보면 수사관과 실무관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지는 법.
서진이 슬쩍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괜히 부끄럽네요.”
실무관이 자리로 돌아가며 잠시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잠잠해졌다.
그렇게 업무가 시작됐다.
책상에 가득 쌓인 기록물을 끝내야 다음 수사도 이어 갈 수 있는 거다.
그런데 한참 일을 하던 서진이 고개를 거렸다.
턱을 쓸며 휴대폰을 꺼내 방금 봤던 동영상에 접속했다.
이미 봤던 동영상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댓글을 보고 있다.
많은 의견 중 몇 개.
-그런데 방화범인지 어떻게 알았대?
└CCTV 영상에 찍혔겠지.
└멍청한 놈이 거기서 구경하고 있던 거고?
└불장난도 똑똑한 놈이 하는 거야 ㅋㅋㅋ
서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거…….’
잘하면 이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서진의 머릿속에 다시 안나 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안나 루도 놈들이 불을 낼 것이란 생각은 0.1%도 하지 않았다.
만약 노래방에서 방화범을 만났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갔을 것이라 했다.
즉, 안나 루도 방화범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이야기.
‘그런 놈이 단번에 잡혔어.’
조직의 윗선이란 자들은 의문을 갖기 시작했을 거다.
방화범이 어떻게 잡혔는지, 자신들이 어느 부분에서 실수를 했는지.
‘이 상황에 슬쩍 떡밥을 던지면…….’
놈들은 고민할 거다.
‘안나 루가 배신자가 아니었나? 설마 다른 배신자가 내부에 있는 거야?’
의심과 의문이 꼬리를 물며 이어질 게 분명하다.
의심이 커지면 진실을 앞에 두고도 외면하는 법.
서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복도로 나가며 휴대폰을 귀에 댔다.
통화 상대는 이은하 기자다.
“기사 하나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내용은 제 인터뷰, 직접 오실 필요는 없고요. 제가 작성해서 보낼게요.”
***
잠시 후, 기사가 올라왔다.
[연쇄 방화범 체포]
노래방에 화재를 저지른 이 모 씨가 체포되었다……(중략)……중앙지검 김서진 검사는 연쇄 방화범을 체포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중략)……거동이 수상한 사람이 주변을 배회한다는 시민의 고발이 있었다며……(중략)……김서진 검사는 취조를 통해 여성 공범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지만 검거에 실패했다고…….
‘시민의 고발?’
커튼이 드리워진 어두운 방.
태블릿 PC를 통해 기사를 읽던 남자가 눈을 찌푸렸다.
‘그게 말이 돼?’
방화범은 프로다.
그동안 수차례 범죄를 저질렀지만 모두 합선 및 원인 모를 폭발과 화재로 결론지어졌다.
시민의 고발 따위로 잡혔다면 이 세상에 범죄자는 없을 거다.
남자는 시민의 고발을 내부자 고발로 해석했다.
그게 아니면 방화범이 순식간에 잡힐 이유가 없다.
서진은 사이코메트리라는 능력을 통해 잡을 수 있었지만, 정상적인 사람이 초현실적인 능력을 예상하기는 어렵다.
“쯧.”
혀를 찬 남자가 기사를 쭉쭉 내렸다.
그리고 ‘여성 공범의 검거 실패’라는 문장에 집중했다.
‘안나 루를 놓쳤나?’
남자도 안나 루가 병원을 빠져나간 후, 손잡은 검사와 경찰에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김서진 검사? 여자를 끌고 왔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였다.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는 안나 루를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상처를 입고 도망간 짐승만큼 무서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꼬인 거냐? 김서진과 연락을 취하는 놈은 대체 누구고?’
그 시각.
서진도 노트북에 올라온 기사를 보고 있었다.
댓글 하나 없는 토막 기사지만 놈들은 읽었을 거다.
그리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서진이 조용히 웃었다.
‘장고 끝에 악수 나는 법이야.’
장고 끝에 악수 난다는 말, 바둑의 용어다.
너무 깊은 생각에 빠지면 국면의 흐름을 잊고 흐려진 판단력으로 악수 또는 무리수를 둔다는 것.
서진은 놈들이 결국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일 것이라 생각했다.
***
며칠 후.
서진은 장지혁 검사와 함께 강남의 한 꼬마 빌딩 앞에 와 있었다.
작은어머니의 친동생 엄선주 소유의 빌딩.
특이한 점으로는 지하실이 오랜 시간 공실이라는 거다.
“이렇게 유동 인구가 많은데, 계속 공실이었어요. 이상하지 않아요?”
“그렇긴 한데…… 누구 거야? 왜 우리가 차에 숨어서 보고 있어야 해?”
서진과 장지혁 검사가 앉아 있는 곳은 차량 안이었다.
서진은 혹시라도 엄선주의 눈에 자신의 얼굴이 노출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잠시만요.”
서진이 장지혁 검사에게 서류를 건넸다.
엄선주에 대한 자료, 서류를 보여 주고 설명하는 게 빠르기 때문이다.
장지혁 검사가 서류를 툭툭 넘기며 물었다.
“엄선주? 이게 누구야?”
“저 빌딩 주인이요. 제가 지금 수사하는 사채업자고요. 그쪽 간부라고 생각하시면 편해요.”
“혐의는 있는데, 증거가 없어서 못 잡고 있다 이거지?”
“그것보다는 저희 작은어머니 친동생이에요.”
“작은어머니?”
“네.”
장지혁 검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부릅뜬다.
“작은어머니? 네 작은어머니? 그러니까 엄선주는 김영준 검사장님의 처제?”
“네.”
장지혁 검사는 멍한 눈으로 서진을 바라보다가 ‘이거 진짜 큰일 낼 놈이네.’라고 중얼거렸다.
서진이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장지혁 검사에게 건네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빠지고 싶으면 빠지시고요.”
“잠깐만, 내가 혼란스러워서 그렇거든? 작은어머니의 동생이라면 가깝지는 않지만 친척 아닌가? 그런데 잡는다는 것은…….”
“검사잖아요. 죄를 지었으면 잡아야죠. 그게 우리 일이고, 그러라고 월급 받는 거고.”
장지혁 검사가 짧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짜증 난다는 듯 말했다.
“네가 이 정도까지 말했는데, 내가 빠지기는 좀 그렇잖아? 그래, 내가 뭘 하면 되는데?”
“미리 말씀드리는데, 유배 갈지도 몰라요.”
“하…… 유배? 동남군 괜찮아?”
“바다가 예쁘죠. 회도 맛있고요.”
“그거면 됐지. 혹시, 나 유배 가게 되면 그쪽으로 추천 좀 해 줘라.”
장지혁 검사는 결심으로 가득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략적인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서진이 안나 루의 일당을 쫓는 동안 장지혁 검사는 작은어머니의 집안을 수사할 거다.
그 수사의 끝은 같겠지만 겉에서 볼 때는 완벽한 투 트랙.
서진이 초콜릿 껍데기를 내려 두며 입을 열었다.
“일단 접촉 사고 좀 내 주세요.”
“어?”
“이런 번거로운 일은 안 하려고 했는데, 마침 엄선주의 차가 보이네요. 얼굴도 한번 보고 싶고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어서요.”
도로변에 엄선주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장지혁 검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접촉 사고를 내 달라는 서진을 보며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거 비싼 차야.”
“대물, 10억 가입하셨죠?”
“야…….”
잠시 후, 장지혁 검사는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조심한다는 게 그만…….”
장지혁 검사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엄선주.
외모는 나이답지 않게 젊어 보였다.
얼굴과 몸매에 얼마나 많은 돈을 쏟아부었는지 여실히 느껴질 정도다.
엄선주가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의 자동차를 바라봤다.
검은색 고급 세단.
스크래치가 난 범퍼.
“보험 처리 다 해 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장지혁 검사는 엄선주의 싸늘한 시선에 진땀을 흘리며 힐끗 건물 입구를 바라봤다.
그곳으로 모자를 눌러쓴 서진이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빨리 끝내라.’
장지혁 검사는 간절히 바랐다.
숱한 범죄자를 만나온 장지혁 검사였지만 엄선주의 눈빛은 오래 마주치기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건물 내부로 들어온 서진은 힐끗 주변을 살폈다.
지상 층에는 관심이 없다.
확인하고 싶은 것은 오직 지하 층.
하지만 일단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각 층에 뭐가 있는지 적힌 광고판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예상대로 지하층의 자리는 비어 있다.
서진은 3층에서 내린 후 주변을 살폈고 비상계단을 통해 2층으로 내려와 똑같이 확인했다.
‘CCTV는 건물 입구와 엘리베이터에만 있어.’
2층과 3층에 CCTV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다음.’
서진은 다시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목적지인 지하로 가기 위해서다.
그렇게 지하로 내려온 서진은 비상구의 문을 살짝 열며 밖을 살폈다.
‘여기는 CCTV가 있어.’
가게로 꽉 채워진 2, 3층에는 CCTV가 없었다.
그런데 공실로 놔둔 곳에 CCTV를 설치해 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점점 더러운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서진은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지 않았다.
CCTV에 찍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내부를 살필 뿐이다.
그런데 공실이 아니다. 사무실이 있다.
당장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지만 비어 있는 곳은 절대 아니다.
사무실의 유리는 깨끗했고 복도 역시 사람이 오간 흔적이 있다.
서진은 두 가지를 염두에 뒀다.
‘엄선주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공간 또는 놈들의 조직에서 일어나는 불법적인 일을 해소하는 곳.’
어찌 되었든, 두 가지 모두 합법적인 일을 위한 곳은 아닐 거다.
그때였다.
“거기?”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서진이 천천히 시선을 틀어 계단을 향했다.
한 남자가 계단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이 건물의 관리인.
나이는 젊다.
체형 역시 보통 체격이 아니다.
관리인이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왔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요?”
관리인의 목소리가 쫙 낮게 깔렸다.
행동을 보면 언제든 서진과 몸싸움을 할 수 있도록 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서진이 빙긋이 웃었다.
장지혁 검사를 뒤로하고 서진이 이곳에 직접 들어온 이유.
이 관리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