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 김서진-141화 (141/250)

< 입을 다물어도. -(4) >

놈이 천천히 시선을 옮기더니 서진의 얼굴을 봤다.

놈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려왔다.

‘······김서진?’

놈은 서진의 얼굴을 알고 있다.

그 직업이 검사라는 것도 잘 안다.

그리고 서진의 눈빛은 말하고 있다.

-네가 방화범이지?

그 눈빛을 마주한 놈이 마른침을 삼켰다.

방화를 저지르기 전, 몇 번이나 CCTV와 목격자의 유무를 확인했다.

주변엔 어떤 것도 없었고 들킬 이유 역시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하지만 그 의문을 파악할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중요한 것은 도망쳐야 한다는 것.

“놔!”

놈이 서진에게 잡힌 어깨를 뿌리치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이 순간만 벗어나면, 그래서 조직에서 준비한 배를 타고 이 나라를 떠나면, 계속해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서진은 놈의 손목을 낚아챘다.

동시에 놈의 다리를 걸었다.

놈이 ‘콰당탕!’ 소리와 함께 요란할 정도로 자빠졌다.

서진이 놈을 향해 다가가며 건조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어이, 당신을 방화죄로 체포한다.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변명의 기회도 있고······.”

놈이 다급히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서진이 놈의 등을 콱, 밟았다.

이어서 가볍게 팔을 꺾으며 말을 이었다.

“체포 구속적부심을 청구할 권리가 있다. 그러니까 얌전히 가자.”

얌전히 가자고 말을 들을 놈이 아니다.

놈은 밟힌 상태로 발악했다.

“놔! 놓으라고! 이 개새끼······. 팔! 팔! 꺾지 마! 아아아악!”

* * *

안나 루는 눈을 깜빡였다.

천장에 형광등이 보인다.

몇 번을 봤지만 형광등이 맞다.

안나 루는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며 눈동자를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병원?’

가려진 커튼 사이로 분주히 움직이는 의사와 간호사가 보였다.

분위기로 봐서 응급실.

순간, 그녀는 낯선 목소리와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어서 커튼이 확 젖히더니 의사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의식은 없습니다. 하지만······.”

안나 루는 의식이 없는 척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낯선 이들의 시선을 느끼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쯧쯧, 여자 혼자 그런 노래방은 왜 갔는지······.”

“선배님, 되게 예쁜데요?”

“확!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왜요? 사실이잖아요.”

대화 내용으로 파악했을 때, 이들은 형사.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피해자들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시간 내로 깨어날 것 같습니다.”

의사의 말과 함께 커튼이 가려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안나 루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방금 형사가 했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여자 혼자 그런 노래방은 왜 갔는지······.

안나 루가 허탈하게 웃었다.

‘······왜 혼자 갔냐고?’

안나 루는 몇 시간 전을 기억했다.

오피스텔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을 때, 몸담은 조직에서 연락이 왔었다.

-검찰이 냄새를 맡은 것 같아요. 전화로 이야기하기는 어렵고 조용히 만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그 장소가 주택가에 있는 노래방이었다.

방음이 괜찮다는 이유.

그렇게 안나 루는 약속 장소로 이동했고 약속된 자와 만났다.

나눴던 대화는 단 하나.

-사장님이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게 끝이었다.

안나 루는 그가 건넨 맥주를 마신 후 의식을 잃었으니까.

‘하······ 의심?’

점조직에서 의심이란 단어는 없다.

의심은 곧 확신, 그리고 처단이다.

안나 루가 한숨을 내뱉으며 옷에 밴 탄내를 맡았다.

‘불 태워 죽이려 했나?’

안나 루가 씁쓸히 웃으며 커튼을 살짝 열어젖혔다.

그리고 밖의 상황을 살폈다.

‘계속 병원에 있을 수 없어.’

조직은 안나 루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다.

병원에 실려 온 것 역시 모르고 있는 게 이상하다.

‘어디선가 감시하고 있을 게 분명해.’

살기 위해서는 도망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죽는다.

그들은 그녀를 반드시 도살하려 할 거다.

다행히 응급실의 밤은 분주했고 지켜보던 형사들은 담배를 피우러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안나 루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신발을 신었다.

다행히 굽이 낮은 신발이었기에 불편함은 없었다.

*

잠시 후, 형사들이 커튼을 젖혔다.

“아직도 안 일어났나······.”

하지만 있어야 할 사람이 사라졌다.

두 형사는 침묵했고 느리게 흘러나온 말은 욕설이었다.

“······씨발.”

형사는 다급히 주변을 지나는 의사와 간호사를 잡고 물었다.

“여기에 있던 여자요. 어디 갔어요? 화장실? 어?”

하지만 그 누구도 안나 루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있었다.

*

안나 루는 다급히 달리고 있었다.

병원을 빠져나온 후 곧장 신호를 받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 앞은 번화가.

나무를 숨기려면 숲으로 가야 하고, 사람이 숨으려면 인파 속으로 향해야 한다.

번화가에는 사람이 가득했고 안나 루는 그곳에 숨으려 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안나 루는 계속 달렸다.

그리고 달리는 순간에도 앞으로의 일을 계획했다.

‘돈은 있어.’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몰래 만들어 둔 대포통장이 있다.

‘그 돈을 찾아 몸을 숨기고 여권을 만들어 빠져나가면 돼.’

그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한참 달리던 안나 루의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이어서 눈동자는 두려움에 질려 갔다.

‘어······.’

이곳에 있을 수 없는 사람.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

안나 루의 시선은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인파 중에 정확히 한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뭐야······.’

안나 루가 보고 있는 사람은 서진이었다.

서진이 저벅저벅 안나 루를 스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눈 마주치지 말고 들어. 오른쪽 골목 보이지? 그쪽으로 들어가.”

“······!”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 우리는 병원에서부터 널 쫓았고 사방에서 널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얌전히 말 들어.”

“······.”

“그리고 지금은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 죽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안나 루는 눈동자만 움직여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뒤에서 낯선 남자들이 걸어오고 있다.

좌측과 우측도 마찬가지, 그곳에도 남자들이 있다.

모두 서진과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

그들이 사방을 채우고 있었다.

안나 루는 도주하는 것을 포기했다.

걸음을 완전히 멈춘 후 숨을 몰아쉰다.

궁지에 멀린 사냥감의 눈으로 서진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서진은 안나 루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여전히 안나 루를 스치며 입을 열었다.

“안 가? 뒤에서 너 죽이려는 놈이 따라붙은 것 같은데, 그냥 죽을 거야?”

안나 루에게 선택의 결정권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후 서진이 말한 골목을 향했다.

서진은 안나 루가 스쳐 가는 것과 동시에 모자를 꺼내 썼다.

그리고 계속해서 앞을 바라봤다.

서진의 시선이 멎은 곳은 어울리지 않게 벙거지를 쓴 사내다.

안나 루를 쫓는 놈.

번화가의 인파를 헤치며 숨어 있을 안나 루를 찾고 있다.

서진이 옆에 있던 경호원에게 입을 열었다.

“칼 들었을지도 몰라요. 아니, 들고 있을 거예요.”

“방검복 입었습니다.”

“든든하네요.”

경호원이 놈을 향해 다가갔다.

* * *

호텔 VIP 룸.

보안이 완벽하기에 신마 그룹의 막내아들 신승일이 제 집처럼 사용하던 곳.

서진의 경호원에게 끌려 이곳에 온 안나 루는 초조한 눈동자와 함께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왜······.’

안나 루는 검찰로 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호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의도를 파악하려 했지만 무리.

할 수 있는 것은 불안한 심정으로 서진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2시간 정도 지났을 때, 서진이 들어왔다.

서진은 말없이 안나 루를 향해 다가왔고 서류를 꺼내 테이블 위로 툭 던졌다.

서류는 신문 기사.

출판사가 압수 수색을 당했다는 내용이 보였다.

“그 출판사, 실질적 대표가 너였지? 그쪽 대표, 방금 구속됐어.”

“······.”

서진이 또 다른 서류를 그 위에 덮었다.

이번엔 김재훈 경정의 구속영장이다.

“네가 용돈을 주던 아저씨도 구속됐고.”

하지만 안나 루의 눈동자에 놀라는 기색은 없다.

출판사와 김재훈 경정에 관한 이야기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진이 또 서류를 그 위에 던졌다.

이번엔 사진이다.

익숙한 얼굴.

병원에서부터 안나 루를 쫓던 놈.

“얘도 잡혔어.”

지금껏 잔잔했던 안나 루의 눈이 커졌다.

경찰 4명도 따돌렸던 놈인데, 이렇게 쉽게 잡히다니.

‘······말도 안 돼.’

안나 루의 눈빛을 보며 서진이 슬쩍 웃었다.

“아직 놀라기는 이른데.”

서진이 또 하나의 서류를 던졌다.

이번에도 사진.

“네가 있던 노래방에 불 지른 놈이야. 지금 조사받고 있지. 이놈도 내가 잡았어.”

“······!”

안나 루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놈은 프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서진은 그 짧은 시간에 놈을 잡아냈다.

“어, 어떻게?”

안나 루의 기겁한 표정을 보며 서진이 손을 내밀었다.

“이제 손잡을 시간이 된 것 같은데. 내 손을 잡으면 그쪽은 내일도 모레도 똑같이 뜨는 해를 볼 수 있어.”

‘뜨는 해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안나 루가 버릇처럼 하던 말, 하지만 조직원들에게만 했던 말이다.

서진이 그 말을 알고 있을 수 없다.

물론 서진은 사이코메트리를 통해 안나 루가 했던 말을 따라 했을 뿐이다.

하지만 안나 루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몸을 떨기 시작했다.

서진이 안나 루의 놀란 눈동자를 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노래방에 불을 지를 정도로 위험한 놈들이야. 밖에 나가면 넌 죽어. 칼에 찔려 죽거나, 불에 타 죽거나, 어쩌면 얼굴과 지문이 찢긴 채 바다에 던져질 수도 있고.”

서진은 일부러 구체적인 살해 장면을 언급했다.

안나 루의 공포심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다.

“그런데 살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어. 네가 옥살이하는 동안 저 조직이 와해되는 거야. 내겐 그럴 힘이 있지만 네가 도와주면 좀 더 편할 것 같은데.”

이번에는 공포를 이겨 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공포를 이겨 내면 그 감정은 조직에 대한 분노로 바뀔 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정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잡아. 내민 손이 민망하니까.”

안나 루는 서진의 실력을 봤다.

서진은 안나 루가 숨어 있던 오피스텔에 찾아왔고 출판사와 경찰 그리고 방화범까지 잡아냈다.

그것도 정말 짧은 시간에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물론 조직의 윗선에 비하면 지금까지 잡은 놈들은 끄나풀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안나 루가 도움을 주면 달라질 거다.

‘그럼, 살 수 있어.’

안나 루는 코너에 몰렸고 궁지에 빠진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몸 바쳐 충성을 다한 조직이다.

이런 식으로 버려지다니, 서진의 예상대로 안나 루는 조직을 부숴 버리고 싶어졌다.

안나 루가 서진의 손을 잡았다.

“좋아요.”

“좋은 선택이야.”

악수를 끝낸 후, 서진이 창가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당분간 너는 이곳에서 지내. 경호원이 항상 대기할 거고 보안이 튼튼해서 암살당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구치소가 아니라?”

“네 윗선에게 혼선을 주고 싶거든. 네가 잡혔는지, 도망쳤는지, 혼란스러워하도록. 그쪽 윗대가리도 나름 머리를 쓰는 것 같은데, 머리 쓰는 놈들은 깊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스스로의 함정에 빠지기도 하잖아? 그걸 노리고 싶어. 그리고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들을 텐데, 일단 궁금한 것 하나만 묻자.”

안나 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서진이 스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날 죽이려 했던 것, 너희지?”

“네.”

안나 루는 숨기지 않고 담담하게 답했다.

서진이 다시 물었다.

“이유는?”

“그건 저희도 몰라요. 우리 조직의 뒤를 밟은 검사가 있으니, 죽이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행동했을 뿐이에요.”

서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안나 루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

‘지시······.’

안나 루, 그리고 그녀가 모시던 사장은 그 조직에서 꽤 높은 지위를 갖고 있다.

그런데 그런 이들에게 지시를 내릴 정도의 위치.

‘그게 회장인가?’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서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뜩 궁금한 게 생겼기 때문이다.

연결될 것처럼 연결되지 않고 있던 줄기.

‘원래의 서진은 작은어머니 측을 파고 있었어. 그런데 뜬금없이 이들 조직에게 살해당했지.’

하지만 지금껏 이 두 사건은 연결되지 않고 평행선을 달리는 중이다.

굳이 공통점을 찾는다면 사채업자라는 것.

서진이 안나 루에게 시선을 틀며 입을 열었다.

“혹시 엄시영이라고 알아?”

엄시영은 작은어머니의 이름.

안나 루는 눈동자를 올리며 그 이름을 떠올려봤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아뇨. 처음 들어요.”

설마 했지만, 역시.

안나 루를 통해 그쪽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서진이 한숨을 내뱉으며 창가에서 몸을 뗐다.

“알았어. 오늘은 늦었으니까 푹 쉬고 내일 보자.”

서진은 손을 흔들며 현관으로 향했다.

안나 루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지검으로 가야 할 시간.

출판사부터 김재훈 경정 그리고 방화범에 킬러까지, 하루 동안 벌여 둔 일이 너무 많다.

밤을 새도 모자랄 거다.

그런데 문고리를 손에 쥐던 서진이 다시 안나 루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잠깐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엄선주라는 사람은 알아?”

엄선주, 작은어머니의 친동생.

지난번, 서진이 작은어머니의 휴대폰을 통해 잠시 통화했던 사람.

그 인물의 이름을 혹시 알고 있을까 물었는데.

“······엄선주 실장님이요?”

알고 있었다.

“한국 쩐주의 실장이에요.”

< 입을 다물어도.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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