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단 하나. -(2) <수정> >
서진에게 이름을 불린 진유경 형사는 진심으로 당황한 표정이었다.
‘······날 알아?’
진유경 형사 역시 서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언론을 통해 봤을 뿐이다.
대화는 물론 실제로 만난 적도 없다.
그런데 서진의 눈빛은 달랐다.
마치 자신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뭐지?’
진유경 형사가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서진을 바라볼 때였다.
서진이 빙긋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소개부터 했어야 했는데, 중앙지검 김서진 검사입니다.”
“강남경찰서 진유경 경장이에요. 그런데, 저를 어떻게······?”
“그게······.”
서진이 서준경이었을 때, 중앙지검에 있으며 진유경 형사의 도움을 곧잘 받았었다.
진유경 형사는 겁이 없고 경찰이라는 직업이 잘 어울리는 사람.
서준경과 함께 권력자를 잡은 적도 있었다.
나눴던 소주잔이 지금도 눈에 아련하지만 죽었다 깨어났다는 말을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프로파일러 정민우가 빠르게 다가오더니 서진과 진유경 형사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서진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검사님.”
정민우가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서진을 쏘아보고 있다.
잔뜩 시비를 걸고 싶은 눈빛.
서진이 눈을 가늘게 뜨자 놈이 말을 이었다.
“면식범이 아니라는 근거를 듣고 싶은데요.”
정민우는 프로파일러다.
그런데 서진이 자신의 추측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그것도 다른 경찰들이 쫙 깔린 곳에서, 어떤 이유도 대지 않고 무작정 “면식범이 아니에요.”라고 입을 열었다.
정민우는 서진에게 병신 취급을 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궁금하네요. 검사님이 어떤 과학적 근거를 통해 그런 식으로 말씀하셨는지.”
서진이 정민우를 훑었다.
휴대폰을 들고 있는 손이 뭔가 어색하다.
애써 화면을 가리고 있는 게 보인다.
‘녹음?’
놈은 서진의 목소리를 박제하고 싶어 한다.
‘뻔하네.’
서진은 놈의 행동이 빤히 보였다.
서진은 미제를 연이어 해결하며 나름 이름이 알려진 검사.
탐정이니 뭐니 이상한 별명도 생겼다.
동시에 프로파일러 세계에서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비난을 받게 된 이유를 하나 들면, 춘천에서 있었던 아궁이 살인사건.
프로파일러들은 그 사건을 보며 말했었다.
-범인은 30대 중반의 고학력자.
-범행 장소 인근에 살았거나, 살았던 경험이 있는 자.
-어릴 때 학대를 당했던 기억이 있음.
하지만 잡고 보니 이십대 중반의 군인이었다.
프로파일러들의 예측이 완벽히 빗나간 거다.
그래서 정민우는 서진이 삐끗 실수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서진이 틀리고 자신의 예측이 들어맞으면, 미제 전문 검사를 꺾은 프로파일러라는 호칭을 얻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놈의 체면에 어울려 주고 싶었지만 사건 현장이다.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
게다가 진유경 형사가 지켜보고 있다.
서진은 그녀를 만나러 왔고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니까, 제가 어떤 근거로 사건을 추측했는지 궁금하다는 거죠?”
“네, 근거!”
정민우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청사진을 떠올렸다.
서진을 꺾은 게 알려지면, 방송 출연이 지금보다 더 잦아질 거다.
그럼, 이깟 현장을 다니지 않아도 출연료와 강의료만으로 부유한 삶을 살 수 있다.
한강이 보이는 오피스텔, 억 소리가 날 정도의 고급 외제 차, 그것들이 정민우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나중에 녹음을 공개했을 때, 검찰이나 경찰에서 뭐라고 떠들든, 돈만 많이 벌면 상관없다.
‘고맙다, 김서진.’
정민우가 눈동자를 움직여 현장을 살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놓친 것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역시다.
면식범이 아니면, 이런 현장은 발생하기 어렵다.
친절히 문을 열어 줬고 최초 살인에 격투의 흔적은 없다.
일방적인 칼부림.
정민우가 활짝 웃으며 서진에게 시선을 옮겼다.
‘어디 쇼 한번 해 봐라.’
그리고 서진이 입을 열었다.
“정민우 씨, 범인을 피해자의 남자 친구나 스토커로 추측하고 있었죠?”
“네, 꼭 남자 친구가 아니어도 면식범의 우발적인 살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살인을 끝낸 후 범인은 당황했고 화재를 일으켜 흔적을 숨기려 했죠.”
정민우는 당당했다.
하지만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면식범이었다면 피해자는 등을 찔렸을 겁니다. 들어오라 말하며 몸을 틀었을 테니까요.”
“······!”
“범인 역시 문이 닫힌 상태에서 살해를 저질렀을 겁니다. 아무리 우발적이라 해도 최대한의 방음을 고민했을 테니까요.”
“······!”
“하지만 피해자······ 편의상 집주인이라고 할게요. 뒤로 물러서며 칼을 맞았어요. 상대가 문을 열자마자 칼을 휘둘렀기 때문이죠.”
정민우는 당황했다.
서둘러 부검 사진을 들여다봤다.
서진의 말이 맞다.
‘등은 깨끗해.’
오직 복부와 팔에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그 상처가 면식범이 아닌 것을 증명하기는 어렵다.
정민우가 끌끌끌 웃으며 말했다.
“검사님, 경험이 없으셔서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우발적 살인도 문을 열자마자 찌르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범인은 면식범이 맞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문을 왜 열어 줬겠습니까?”
“계획 살인입니다.”
“네?”
“배달 사원을 가장했거든요.”
서진은 사이코메트리에서 봤던 것을 천천히 전하기 시작했다.
3층은 주인집이었고 1, 2층은 원룸으로 만들어 세를 주고 있다.
그런데 단 몇 시간 동안 열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유는 하나, 201호가 시끄럽다는 거였어요. 조용히 시켜 달라는 민원이 들어왔고 집주인은 내려가 주의를 줬죠.”
201호는 여성 세입자, 남자 친구와 함께 있었다.
여성은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싶었고 그 이유로 심하게 싸우는 중이었다.
집기를 부수고 칼을 손에 쥔 상태였다.
그 상황에 집주인이 내려가 경고를 했다.
“집주인은 조용히 하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협박했죠. 그때 분노의 대상이 틀어진 겁니다. 여성에게서 집주인으로.”
남자 친구는 여성에게 “나와 헤어지면, 전부 죽여 버리겠다.”라는 말로 경고했다.
여성은 당연히 무시했고 남자는 욱하는 마음과 함께 집을 나섰다.
손에 칼을 든 상태로.
“남자는 여자의 집에서 쫓겨나 현관으로 나섰습니다. 칼을 품에 숨기고 담배를 피웠죠. 누구 하나 죽이고 싶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때 주인집의 딸이 전단지를 뜯어 치킨을 주문하는 것을 봤습니다.”
“······!”
“적당한 시간에 그 뒤를 밟아 주인집으로 향했죠. 초인종을 누르고 ‘배달 왔습니다.’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의심 없이 문을 열어 줬죠.”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남자는 칼을 휘둘렀다.
“여기서부터 한 번, 두 번. 팔을 긋고 배를 찔렀어요.”
“하! 일가족 살해의 이유가 단지 여자 친구와 싸우는데 조용히 하라고, 경찰을 부르겠다고 했던 말 때문이라고요?”
“더 어이없는 경우도 많아요.”
진유경 형사가 옆에 있던 경찰을 툭 치며 “201호 세입자 찾아봐요.”라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정민우는 피해자의 통화 내역을 꺼내 살폈다.
‘젠장.’
치킨을 배달시킨 게 맞고 세입자에게서 전화가 온 것도 맞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범인을 특정할 수는 없다.
“······검사님, 억측입니다. 소설이에요. 그런 식으로 범인을 잡으면 세상 사람들이 다 억울한 사람 되는 거 모르세요? 프로파일링은 사건 현장과 범인의 심리 상태를 보고······.”
“이곳에 올라오면서 세입자들에게 어젯밤 있던 일을 들었어요. 집주인의 딸이 전단지를 뜯어 올라가는 것, 공동 현관 앞에 서성이던 남자 친구가 그 뒤를 쫓는 것을 본 사람도 있고요. 이러면 소설이 아니라는 게 설명될까요?”
“그, 그래도······.”
정민우가 가진 실낱같은 희망은 이제 하나였다.
진범이 다른 사람이었으면, 차라리 그냥 강도였다면.
하지만 그 바람은 엇나갔다.
허겁지겁 계단을 올라온 경찰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진유경 형사가 보냈던 그 경찰이었다.
“기, 김서진 검사님의 말이 맞습니다! 남자 친구가 그런 식으로 싸운 후 나갔고 불이 났대요! 그런데 지금 연락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끝이 아니었다.
진유경 형사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네, 진유경······. 네, 알겠습니다.”
정민우가 눈을 깜빡이며 진유경 형사를 살폈다.
그리고 진유경 형사가 휴대폰을 품에 넣으며 입을 열었다.
“어이없이 잡힌 것 같네요.”
“······!”
정민우가 눈을 반짝였다.
“누, 누구죠? 그냥 강도?”
“김서진 검사님이 맞았어요. 세입자의 남자 친구가 맞고요.”
놈은 끔찍할 정도로 뻔뻔했다.
범행을 벌인 후 술을 마셨다.
“술에 잔뜩 취한 후 태연히 노래방에 가서 도우미를 불렀어요.”
도우미를 향해 “내가 지금 사람을 죽이고 왔어.”라는 말을 자랑삼아 내뱉었다.
도우미는 놈의 말을 믿지 않았다.
헛소리를 내뱉는 손님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우미는 놈과 모텔로 향했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놈의 옷에 피가 묻어 있어서 무서워서 신고했대요.”
말을 마친 진유경 형사가 묘한 눈빛으로 서진을 바라봤다.
검찰에 사건을 넘기기 전이다.
그런데, 간단한 탐문과 현장을 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들여다보다니.
‘...가능해?’
정민우의 얼굴은 심각할 정도로 구겨진 상태였다.
완벽하게 졌다.
자신의 추측은 멍청할 정도로 빗나갔다.
‘하지만...’
그래도 비벼볼 수 있는 것은 있다고 생각했다.
휴대폰에 음성이 녹음되어 있고 그걸 이렇게 저렇게 편집하면...
그런데, 그때였다.
서진이 정민우의 손에 쥐어 있던 휴대폰을 낚아챘다.
정민우가 ‘어? 어?’ 하고 당황한 사이 녹음 파일을 지우며 입을 열었다.
“불법 녹취, 이번은 봐드릴 텐데, 앞으로 이런 거 하지 마세요.”
“어,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고요? 쥐고 있던 손이 어색했어요. 휴대폰의 마이크 있는 부분을 저한테 들이 밀고 있었잖아요?”
잠시 눈을 부릅뜨고 있던 정민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죄, 죄송합니다.”
* * *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서진은 진유경 형사와 함께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진유경 형사는 막 범인을 잡은 상태라 시간이 없었지만.
“저를 어떻게 아시죠?”
진유경 형사는 서진이 자신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서진이 슬쩍 웃었다.
“강원도에서 이동영 수사관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동영 수사관의 이름이 나오자 진유경 형사의 얼굴이 씁쓸하게 변했다.
서준경부터 이동영까지, 당시 함께했던 사람들이 모두 떠났다.
서준경은 살해당했고 이동영은 유배.
서울에 남은 것은 진유경뿐이다.
진유경이 그 두 사람을 기억하며 커피를 손에 들었을 때다.
“이동영 수사관님께, 형사님이 어떤 것을 수사하고 있었는지 들었습니다.”
“······!”
서진이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화면에 토막 기사가 보인다.
-빗속의 음주 운전, 여섯 살 아이 의식 불명
진유경 형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하고 있다.
지금과 다른 시퍼런 눈으로 서진을 쏘아보며 냉랭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죠?”
여섯 살 아이, 진유경 형사의 아들이다.
남편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주말에도 바쁜 진유경 형사를 대신해 아들을 데리고 처갓집에 다녀온다던 남편.
“다녀올게, 엄마. 밤에 봐.”라며 손을 흔들던 아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비가 많이 내렸고 사고가 났다.
그것도 음주.
“남편분은 평소 술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태우고 음주 운전을 했다? 충청도에서 서울까지?”
“뭐 하는 거냐고 물었어요.”
“그런데 사건 결과를 보면 남편분의 혈중알코올농도는 이미 만취 상태였고 혼자 가드레일을 박았다고 결론 났죠.”
“뭐 하는 거냐고!”
진유경 형사는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서진은 상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때마침 블랙박스는 고장이 났고 도로에 흔치 않은 외제 차의 파편이 발견됐으니까요. 그 외제 차의 파편, 그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단 한 명. 신마전자 사장 신종서.”
신종서는 신마그룹 신무학 회장의 셋째.
“신종서는 사건을 은폐시킬 능력이 충분하죠. 차고 넘치는 증거도 그놈 앞에서는 밑 빠진 독이니까요.”
“······!”
“제 실력은 아까 정민우 씨와 함께 보셨을 테고. 겁이 없는 것도 사이비 종교를 잡는 것을 보면서 아셨겠죠. 그리고 얼마 전에 신일승도 집어넣었어요.”
진유경 형사는 신종서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다.
남편의 복수 그리고 그 명예 회복을 위해 조용히 자료를 모아 왔다.
아마 지금도, 놈들의 눈을 피해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을 거다.
서진은 그 자료를 통해 신종서를 부숴 버릴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신종서가 가진 것을 손에 쥐려 한다.
“신종서도 별것 없을 것 같은데. 죽입시다, 신종서.”
< 일단 하나. -(2) <수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