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자. -(3) >
***
“불구속으로 수사 진행할 테니까, 알아서 협조해. 비협조적이면 가둬놓고 시작할 거야.”
서울 중앙지검, 서진의 사무실.
앞에는 방금 잡아 온 사채업자가 앉아 있었다.
사채업자가 한숨을 푹푹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상대는 검사다, 그리고 이곳은 검사의 사무실.
얌전히 말을 듣지 않으면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로 영혼까지 털릴 수 있다.
지금은 고개를 끄덕이는 게 최선이었다.
서진이 다리를 외로 꼬며 물었다.
“돈 안 갚는다고 사람 때린 적은?”
“그런 적은 없...”
서진이 놈의 사무실에서 들고 온 USB를 흔들었다.
놈에게 돈을 빌린 사람들의 명단이다.
“피해자들 불러서 물어보면 다 까발려질 거야. 속일 생각 말고 솔직히 말해. 때린 적은?”
“하... 몇 번 있어요. 그런데, 영화처럼 잔인하게 두들겨 패고 그런 짓은 진짜 안 했어요. 그냥, 겁주려고 가슴 몇 대 때린 거? 그게 전부에요.”
“오케이, 폭력은 인정했고. 그럼 죽인 적은?”
“아뇨! 폭력 인정이 아니라요!”
“됐고. 죽인 적은?”
서진은 발견된 신원 미상의 시신, 실종된 사람들, 모두 놈의 어깨에 올릴 것처럼 말했다.
그때마다 사채업자는 간절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왜 그런 짓을 해요! 사람을 왜 죽여요? 죽이면 돈도 못 받잖아요!”
사채업자의 이름은 이동준.
지금껏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의 등골에 빨대를 꽂고 살아왔다.
사람을 돈으로 보고 병신처럼 취급했다.
자신의 앞에서 벌벌 떠는 사람을 보며 우월감을 느낀 적도 많았다.
하지만 서진의 앞에서 파리처럼 손바닥을 비비고 있었다.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제발요! 제발!”
검사가 무서운 점은 없는 죄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거다.
혐의가 만들어지면 재판이 끝날 때까지 구치소에 처박혀야 한다.
어쩌면 교도소까지 갈 수도 있다.
게다가 그는 사채업자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하지만 그는 털리는 순간 썩은 냄새가 진동할 거다.
“앞으로 정말 법정 이자만 받을게요.”
사채업자 이동준의 목소리는 애처로웠다.
“잘 못 했어요. 네?”
그가 본 서진은 미쳐있었다.
미제로 끝날 모든 사건을 자신에게 몰아넣고 실적을 쌓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서진이 빙긋이 웃으며 놈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동준아, 그럼 지금부터 솔직히 말하는 거다?”
“...네?”
“소상우 그놈이 네 쩐주라고 그랬지?”
서진의 타깃은 사채업자 이동준이 아니다.
ENS 주가 조작의 헤드라고 알려진 소상우, 그놈이다.
사채업자가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일 때, 서진이 계속 말했다.
“내가 생각할 때는 소상우 그놈도 바지 같거든? 넌 어떻게 생각해?”
지방에서 깡패 짓이나 하던 소상우가 갑자기 종로의 큰손으로 데뷔했다.
중학교조차 졸업 못한 놈이 주가 조작을 지휘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 뒤에 선 그림자가 분명히 존재할 거다.
그리고 그놈의 그림자를 밟는 순간 신마 그룹의 꼬리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진의 죽음에 한발 다가설 수 있다고 여겼다.
놈들은 장사꾼이다.
그것도 ‘돈’을 사고파는 놈들.
돈이 관련되어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한다.
서진의 머릿속에 김윤환의 목소리가 스쳤다.
-그 인간들 무서운 것 몰랐냐? 그 인간들은 돈이 걸려 있으면 검사든 뭐든 상관 안 해.
서진의 시선이 다시 사채업자 이동윤을 향했다.
“대답해. 모르면 편하게 네 생각을 말해봐.”
“...소상우 사장을 잡으려는 거예요?”
“어.”
“검사님... 협박이나 그런 게 아니라요. 그쪽은 진짜 위험해요. 하지 않으시는 게...”
“내 걱정해줘서 고마운데, 세상에 제일 쓸데없는 게 검사 걱정이라고 했어. 그러니까 말이나 해.”
*
서진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비틀비틀, 검찰을 빠져나가는 사채업자 이동준이 보인다.
서늘한 눈으로 그를 지켜보던 서진이 몸을 틀었다.
벽에 걸린 거울에 서진의 얼굴이 비쳤다.
시선을 거울로 옮긴 서진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복수해줄게.’
***
퇴근 후, 서진은 집에 들어왔다.
진영은 아직 오지 않았고, 오늘따라 일찍 퇴근한 아버지가 한강이 보이는 응접실에 앉아 와인을 들고 있었다.
아버지의 표정은 심각했다.
무거운 눈으로 창밖만 보고 있다.
서진이 인사하자 아버지가 와인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한잔할래?”
“아, 네.”
서진이 아버지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아버지가 와인을 디캔터에 옮겨 닮은 후 천천히 돌리며 입을 열었다.
“사이비 종교, 고생했어. 이 아빠가 요즘에 너 하는 거 보는 낙으로 살아.”
“...그런데, 무슨 일 있으세요?”
아버지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서 와인을 마시며 그 고민을 들어 주려 했는데, 대답은 어머니가 들어오며 했다.
“이사를 고민하고 계셔.”
“...이사요?”
진영을 통해 들은 말이 있다.
최근 작은어머니가 집에 들이닥치는 횟수가 높아졌다고.
자기 덕에 이렇게 살면서 왜 김윤환을 받아 주지 않느냐고.
‘설마...’
법정을 오가면 재산 때문에 싸우는 가족을 많이 봤다.
그리고 그 끝은 비슷했다.
파국이다. 휴대폰 번호를 바꾸고 찾아올 수 없게 집 주소를 바꾸고.
‘작은어머니 때문에?’
서진의 시선이 어머니를 향했다.
어머니가 서진의 옆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네 기사, 보관하기에 집이 좁다고.”
“네? 그게 무슨...”
서진은 부모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보관하기에 집이 좁다니?’
그리고 아버지가 한숨을 푹 내뱉으며 말했다.
“좁아. 정말 좁아. 성북동이나 평창동에 창고 있는 주택으로 이사 갈까? 어떻게 생각해?”
하지만 어머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난 아파트가 좋아요.”
“여보! 앞으로 서진이 관련된 기사가 계속 나올 텐데, 그거 어디에 보관해! 지금도... 하...”
서진은 이제야 이해했다.
집에는 곧 이사 갈 집처럼 박스가 가득이었다.
물론 그 안에는 이삿짐이 아니라 서진의 활약에 대한 기사가 채워져 있다.
‘아이고...’
이사를 고민하는 이유가 작은어머니 때문이 아니라 서진의 기사였다.
서진이 허탈하게 웃으며 와인잔을 입에 댔다.
‘부모님 멘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부모님은 작은어머니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서진은 두 분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그런데, 윤환이 형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가 뚝 끊어졌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선이 서진을 향해 틀어졌다.
“윤환이?”
“네.”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놈 머리 좋은 것은 알아. 그런데, 오냐오냐 자란 놈이 공구리를 이해할까? 결국은 머리 굴리면서 장난질이나 치겠지. 임금 삭감하고 자재 빼돌리고.”
“......”
“제수씨는 윤환이를 과대평가해서 다 잘할 거로 생각하지만 이쪽은 치맛바람이 통하지 않아. 네 작은애비도 그걸 아니까 더 요구하지 않는 거고.”
작은어머니의 김윤환에 대한 집착은 광적이었다.
얼마 전 만난 광신도들이 정상으로 보일 정도로.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도 잘 알고 있었다.
“...작은어머니를 설득하기 쉽지 않을 텐데요.”
“넌 신경 안 써도 돼.”
서진의 질문에 아버지는 씁쓸하게 웃으며 와인 잔을 한 번에 비웠다.
*
잠시 후, 서진은 방에 들어와 책장을 확인하고 있었다.
원래의 서진은 사고를 당하기 직전까지 사채업자를 수사하는 중이었다.
‘그럼, 흔적이 남아 있을 텐데...’
원래의 서진은 꽤 치밀했다.
수사한 기록을 어디엔가 남겨뒀을 게 분명하다.
그것도 가장 안전하다고 믿을 자신의 방에.
‘하...’
서진의 방은 꽤 넓다.
그리고 한 쪽 벽 모두가 책으로 채워져 있다.
지금껏, 저 책을 전부 확인한 적은 없었다.
제목만 확인하며 김서진이란 사람을 파악하려 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확인해야 한다.
“책장 뒤.”
한참을 뒤적거리고 있을 때, 진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들어왔는지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빙긋이 웃고 있다.
“책장 뒤에 있어.”
“어? 알아?”
“아니. 몰라. 그냥 형이 낙서해 두는 공간이야. 그거 찾는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야.”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낙서라...’
동남지청에서 춘천으로 이동할 때도 낙서를 확인했던 적이 있다.
원래의 서진이 책장의 뒤에 이것저것 끄적여 놓은 것들.
‘이번에도?’
서진이 책장을 손에 쥐고 움직여 봤다.
바퀴가 달린 책장이라 어렵지 않게 틀어지며 벽에 가득, 어지럽게 적힌 낙서를 봤다.
엄청난 악필, 말 그대로 휘갈겨 쓴 것 같은 글씨.
직접 쓴 사람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진영이 낄낄 웃으며 말했다.
“고대 이집트 문자 같지? 난 형이 조현병 걸린 줄 알았어. 하하하.”
진영의 말이 공감될 정도였다.
삐뚤, 삐뚤 적힌 것, 분명 일부러 이렇게 남겨둔 거다.
그런데, 서진은 그 난해한 문자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이상했지만, 뭘 적어둔 지 느껴졌다.
A-24.
B-L,m. : loan shark
A/B-separation
서진이 입술을 쓸었다.
loan shark는 사채업자를 뜻하고 separation은 분리라는 뜻.
그리고.
‘A-24?’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김영준 검사장은 차명을 통해 재정건설의 지분을 24%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원래의 서진은 김영준 검사장의 24% 지분을 빼앗아 올 계획을 세우던 중이다.
‘A는 김영준 검사장, 그럼, B가 작은어머니를 뜻하나? L,m은 설마 리틀 맘? 유치하네. 어쨌든, 김영준 검사장과 작은어머니를 분리해야 한다는 거지?’
그런데, 생각을 이어가던 서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작은어머니의 옆에 사채업자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니, 어울리지 않아서다.
서진이 진영에게 시선을 틀었다.
“혹시, 작은어머니가 사채 같은 것을 했었어?”
“응? 그 글씨가 사채야? 이야, 기억을 잃어도 자기 글씨는 알아보네? 완전 신기해.”
“대답부터.”
진영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작은어머니 집안이 큰손 집안이잖아. 지금은 연 끊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쪽 집안이 지금도 돈놀이하는지는 모르고.”
서진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리고 천천히 벽을 향해 다시 시선을 옮겼다.
‘뭐야...’
뭔가 끔찍한 소리를 들은 것 같다.
-작은어머니의 친정이 큰손.
-원래의 김서진은 큰손을 수사하다가 살해당함.
서진의 입에서 끌끌끌 어이없는 미소가 흘렀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무리 미쳤어도...’
서진의 눈빛이 점점 서늘해졌다.
만약 예상하는 게 사실이라면.
‘죽여 버려야지.’
용서할 수 없었다.
*
씻고 나온 진영이 침대에 걸터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줬다.
아버지가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그쪽 집안에서 꽤 많은 돈을 빌렸었고 이제는 다 갚았다는 것.
그것 때문에 한동안 힘들었었다는 것.
김영준 검사장 역시 그쪽 집안과 연을 끊기 위해 애를 썼다는 것, 등등.
그리고.
“그런데, 결혼은 언제 할 거야?”
뜬금없이 대화가 이은하 기자로 이어졌다.
서진이 손을 저었다.
“진짜 그런 사이 아니야.”
“에이, 아닌 것 같은데?”
그때, 서진의 휴대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발신 번호가 이소희다.
“잠깐만.”
서진이 진영에게 양해를 구한 뒤 휴대폰을 귀에 댔다.
“어, 소희야.”
이소희가 춘천으로 돌아간 후 첫 통화다.
이번 사이비 종교 재판의 결과를 보고 연락한 거다.
그런데, 진영은 옆에서 휴대폰을 들고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소희 이름을 검색하는 거다.
그리고.
“대박!”
몇 안 되는 기사 중에 이소희의 얼굴이 나온 것을 찾았다.
진영의 눈이 이소희의 얼굴에 꽂혔다.
이어서 벌떡 일어서더니 부모님이 계신 응접실로 뛰어갔다.
“엄마! 엄마! 이번엔 다른 여자예요! 이 시간에 또 여자한테 전화가 왔어요. 그런데, 이번에도 예뻐!”
원수다. 정말 원수다. 전생에 이 악물고 싸웠을 게 분명하다.
서진이 이소희에게 다급히 말했다.
“내일, 내일 전화할게. 지금은...”
하지만 늦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진영이 문 앞에 서서 서진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엔 검사라고?”
***
다음 날.
서진은 이은하 기자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진짜, 이렇게 올려요?
“네.”
-괜찮으시겠어요?
“경호원 있잖아요. 준비는 해뒀어요.”
이은하 기자는 머뭇거렸다.
하지만 서진은 이미 결정을 내린 뒤다.
“올려 주세요.”
-...알았어요.
서진이 통화를 종료했다.
곧 이은하 기자에게 메시지가 왔고 기사 링크가 떴다.
서진은 무심한 눈으로 기사 링크를 꾹 눌렀다.
화면이 바뀐다.
-김서진 검사, 이번엔 악덕 사채 시장과 전쟁 선언.
서진이 슬쩍 웃었다.
어제는 사채업자 이동준을 풀어뒀다.
놈의 입에서 서진의 악랄함이 소문날 거다.
이번엔 기사까지 터졌다.
말 그대로 놈들에게 전하는 선전포고.
서진이 창밖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또 죽여 봐. 능력 있으면.”
그때, 사무실에 벨 소리가 울렸다.
실무관이 전화를 받는다.
“네, 김서진 검사... 아, 네. 알겠습니다.”
실무관이 전화를 내려두며 서진에게 말했다.
“검사님, 검사장님이 올라오라고...”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벅, 저벅 사무실을 벗어나기 위해 문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고 돌리자 끼이이익 문이 열린다.
< 그림자.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