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자. -(1) >
“부담은 없습니다. 오히려 죄송하네요.”
기자는 시위에 대한 부담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죄송하다니, 기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한 기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죄송하다는 게 무슨 말씀이시죠? 혹시 시위대의 주장을 인정하시는 겁니까? 종교 탄압이라고?”
그 질문에 기자는 물론이고 시위대마저 조용해졌다.
시위대가 살벌한 눈으로 서진을 쏘아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라도 주눅 들 상황이다.
하지만 서진은 평소와 다름없이 건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부운 교의 교리를 보면 교주 신지석은 초법적인 인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법은 모두에게 평등하고 피고인 역시 똑같은 법을 적용받게 될 겁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저분들의 믿음에 찬물을 끼얹을 것 같아서요.”
“.....!”
기자들이 눈을 깜빡였다.
대단히 도발적인 대답, 가뜩이나 흥분한 시위대에게 기름을 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시위대에서 욕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개새끼, 소 새끼, 건방진 새끼 등등, 별놈의 새끼가 다 나오는 중이다.
“죽어!”
“지옥에나 가라!”
경찰들이 다급히 시위대의 앞을 가로 막아 섰다.
그리고 기자들조차 기겁한 눈동자로 주변을 살폈다.
언제 어디서 시위대가 달려나와 테러를 벌일지 알 수 없어서다.
하지만 서진은 느긋했다.
이런 말을 내뱉은 이유가 시위대 들으라고 한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진의 시선이 계단 위로 틀어졌다.
그곳에 신지석의 변호인이 보였다.
강석룡 변호사가 구속되며 새롭게 선임된 변호사, 이두진.
그가 냉랭한 눈으로 서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진은 이두진 변호사와 눈을 마주치며 뚜벅, 뚜벅 계단을 걸어 올랐다.
그리고 이두진 변호사의 옆에 서서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법대로 하죠.”
이두진 변호사, 대기업을 상대로 싸우는 자.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어떻게든 물고 뜯으며 질질 늘어졌다.
그 모습이 추잡하다는 말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는 많은 승리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그 이두진 변호사가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법대로요?”
“네.”
“그게 아니면?”
“또 법정에서 만날 수 있겠죠. 그때는 변호인이 아니라 피고인의 신분으로 바뀌겠지만.”
법대로 하지 않으면 강석룡 변호사처럼 구치소에 처박겠다는 협박.
이두진 변호사가 끌끌끌 웃었다.
“김서진 검사님, 소문대로네. 변호사한테 되지도 않는 협박도 하고. 누가 들으면 검사가 아니라 동네 양아치인 줄 알겠어요. 그런데 어쩌나? 난 돈을 받았고 밥값은 해야지. 20억 받았거든요. 그 돈으로 순댓국도 사 먹었고.”
“순댓국 사 먹을 돈도 없으신가? 나한테 말했으면 특대로 사줬을 텐데.”
“특대? 그건 좀 아쉽네요. 그런데 난 검사랑 같이 밥 안 먹어요. 앞에서 썩은 내가 진동하거든.”
“사이비 종교의 교주를 변호하는 분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서진과 이두진 변호사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하지만 내뱉어지는 말은 서로의 감정을 사정없이 찌르고 있었다.
법정에 들어가기 전, 상대를 흔드는 전략이다.
하지만 소득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있었다.
“됐고. 열심히 합시다.”
이두진 변호사가 악수를 권했다.
서진도 더 입을 열지 않고 그 악수를 받았다.
두 사람의 손이 맞닿자 기자들이 빠르게 셔터를 눌러댔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서진의 시야가 회색으로 변했다.
*
“검찰의 정보력이 필요해요. 우리 사무실의 힘으로는 어려워요!”
이두진 변호사의 사무실, 두진 법률 사무소였다.
단발머리 실장의 말을 들으며 이두진 변호사는 인상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방금 봤던 여유 넘치는 표정이 아니다.
다급한 시선으로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서류를 들추고 있었다.
“검찰이 하겠어? 그 새끼들이 움직였으면... 이 사건은 우리한테 오지도 않았어.”
이두진 변호사가 손에 든 사진에는 ‘신마그룹’의 막내아들 신일승의 얼굴이 보였다.
신마 그룹은 국내 최대 재벌 기업 중 하나, 그 집안의 막내아들 신일승은 망나니로 통했다.
그리고 얼마 전.
신일승은 벤처 기업을 만들었고 코스닥에 올렸다.
그 후 사채업자와 함께 주가를 조작, 개미 투자자들을 태운 후 고의적으로 상장 폐지 시켰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신마 그룹의 이름만 믿고 투자를 했던 개미 투자자들은 막대한 손해를 입었고 심지어 실종, 자살하는 일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중이다.
“이게 그냥 자살일 것 같아?”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주가 조작에 참여한 사채업자가 도박장의 꽁지 역할에 나서기도 했다는 거다.
그러니까, 놈들은 개미 투자자들에게 돈을 빌려준 후 허위과장공시를 통해 주식을 추가 매수하게 만들었다.
“의혹을 제기한 사람들이 자살을? 말도 안 돼. 억울해서 못 죽지, 궁금해서 못 죽고! 계속해서 추가 피해자가 생길 거야! 그리고 이 소상우라는 놈!”
이두진 변호사가 손가락으로 사채업자의 이름을 쿡 찍으며 중얼거렸다.
“이놈... 돈이 되는 일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는다고 들었어. 사람 목숨을 돈으로 평가하는 놈이야.”
이두진 변호사가 입술을 씹을 때, 실장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변호사님, 냉정하게 생각해야 해요. 이건 회사 문제로 싸우는 게 아니에요. 그 집안 자식이라고요!”
신일승은 신마 그룹의 핏줄.
그쪽에서도 이를 악물고 싸울 게 분명하다.
“이길 수 없다고요! 오히려 위험해요! 제발 오지랖 좀 그만...”
“잠깐!”
이두진 변호사가 실장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천천히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틀었다.
뉴스가 보였다.
법원 앞에 선 기자가 빠르게 입을 열고 있었다.
-신지석 부운 교 회장의 재판을 앞두고 재판 거래가 있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입니다. 중앙지검 김서진 검사는 오늘 오후...
서진이 판사와 변호사를 잡았다는 뉴스였다.
이두진 변호사가 텔레비전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 검사... 맞지? 종로 경찰서 서장하고 검사 잡았던 사람? 그리고 부운 교 들어가서 영화 찍은 그놈?”
“맞아요.”
“확인 좀 해봐야겠어. 신지석 그 사람 변호사 구하고 있을 거야. 알아봐.”
*
사이코 메트리가 끝났다.
서진은 이두진 변호사와 악수를 하고 있었다.
이두진 변호사가 손을 떼며 입을 열었다.
“잠시 후에 봐요.”
그 말을 끝으로 이두진 변호사가 서진을 스쳐 법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서진의 시선이 이두진 변호사의 뒷모습을 향했다.
이두진 변호사는 서진과 함께 그 사건을 조사하고 싶은 거다.
이 법정은 서진의 스타일을 파악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서진의 생각이 다른 쪽으로 틀어졌다.
‘사채업자 소상우?’
들어본 적이 있다.
종로의 새로운 큰손으로 떠오른 인물.
지방에서 양아치 깡패로 활동하던 소상우가 서울로 올라와 큰손이 되었다고 했을 때, 모두 의아함을 느꼈었다.
‘그런 근본 없는 놈이 신마 그룹의 신일승과 어울렸다고?’
잠시 생각에 빠졌던 서진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올랐다.
‘괜찮네.’
서진이 김윤환을 박살 낼 때였다.
놈에게 누가 자신을 밀었는지 알고 있느냐고 물었었다.
그리고 김윤환은 이렇게 대답했었다.
-하······ 사채업자.
-그냥 사채업자 말고 큰손들.
-그때 네가 사채시장을 훑는다는 소문이 있었어. 꽤 깊숙이 파고들었다고 들었는데, 그 인간들 무서운 것 몰랐냐? 그 인간들은 돈이 걸려 있으면 검사든 뭐든 상관 안 해.
서진이 법정으로 몸을 틀며 계단을 올랐다.
‘어차피...’
이번 사건이 끝나면 사채 시장을 쑤셔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냄새가 난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원래의 서진을 죽음으로 몰아간 놈들, 그들의 낯짝을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신마 그룹이 가진 77개의 계열사...
‘3천억으로 살 수 있는 게 있을까?’
부수고 박살 내면, 얻을 수 있는 보상이 떨어질 수도 있다.
그걸 손에 쥐면...
서진이 끌끌끌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틀어 시위하는 부운 교의 신도들을 향했다.
‘저도 신을 믿습니다. 진짜로.’
3천억을 시작으로 이제 이두진 변호사와 함께 신마 그룹의 약점도 얻을 기회까지 생겼다.
김칫국부터 마시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보인다.
‘일단...’
지금은 법정에서 신지석부터 박살 내야 한다.
***
“...점 등을 볼 때 피고인이 최성돈에게 살인을 지시했다고 봄이 마땅합니다. 밝혀진 살인만 여섯! 이것은 연쇄살인범입니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을 뿐, 저 입으로 지시를 내렸고!”
서진의 목소리가 법정을 울리고 있었다.
어느덧, 1,2차 공판이 끝나고 결심을 앞둔 3차 공판.
법정의 분위기는 서늘했다.
재판장과 배석 판사는 물론이고 방청석에 앉은 사람들도 침묵 속에서 서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난 1, 2차 공판 때, 신지석은 계속해서 무죄를 주장했다.
자신은 어떤 잘못도 없고 신의 계시만 받았을 뿐이라고.
하지만 그게 독이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피고인은 반성하지 않고 정신질환 등을 주장하며 감형을 노리고 있습니다! 죄질이 악랄하며 사회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지석은 고개를 숙인 채 서진의 의견 진술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기도를 하는 것처럼 꼭 잡은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다.
서진의 입에서 어떤 구형이 떨어질지 예상하고 있어서다.
‘...무기징역이겠지.’
그리고 서진의 입에서 구형이 떨어질 시간이 되었다.
방청석에 앉은 기자들은 눈을 마주치며 의견을 나눴다.
‘무기?’
‘15년 정도 아닐까?’
‘에이, 연쇄살인범이란 말까지 나왔잖아.’
‘그건 예로 든 거고. 저 나이에 무기를 때린다고?’
서진의 발소리가 뚜벅, 뚜벅, 법정을 울렸다.
그리고 서진이 신지석 앞에 서서 그를 내려다봤다.
신지석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있다.
묵묵히 무기징역을 예상하며 서진의 구형을 기다린다.
그런데.
“이에 본 검사는 사형을 구형합니다.”
“.....!”
예상과 다른 구형이 터졌다.
법정은 얼음이 쏟아진 것 같았고 신지석이 곧바로 고개를 들어 서진을 바라봤다.
잘 못 들었나 싶어서 중얼거렸다.
“...사형?”
서진의 눈빛은 냉랭했다.
그리고 그 눈빛을 본 순간 신지석은 현실을 느꼈다.
잘 못 들은 게 아니다.
서진은 ‘사형’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신지석의 괴로운 목소리가 법정을 울리기 시작했다.
“사형이라고? 사형? 내가 뭘 잘 못 했다고!”
교주의 모습은 없었다.
발가벗겨진 인간 신지석만 남았다.
사형수가 되면 일흔이 되었을 때 빠져나오기가 어려워진다.
영원히 감옥에서 살다가 정말 반병신이 되어서야 나올 수 있을 거다.
“내가 안 죽였다고 했잖아!”
신지석의 눈에 핏발이 섰다.
구형이 떨어진 것뿐인데, 다가올 미래가 심각할 정도로 무서웠다.
“씨발!”
신지석이 발악하자 법정이 시끄러워졌다.
재판장이 손바닥으로 법대를 두들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하세요! 조용!”
“난 안 죽였다고!”
결국 재판장은 신지석을 무시했다.
어차피 재판 절차는 변호인의 최후 변론만 남은 상태.
“변호인! 피고인에 대한 최후 변론하세요!”
그 말과 동시에 신지석의 눈동자가 이두진 변호사를 향해 확! 틀어졌다.
지금 신지석이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은 서진이 아니라 이두진 변호사였다.
1,2차 공판 때, 나름 열심히 했지만, 아무것도 막지 못한 무능한 변호사.
“7년 만들어 준다며! 어? 7년이라며! 내가 준 돈이 얼만데!”
“죄송합니다. 80억은 못 받겠네요.”
“뭐?”
계약이었다.
선불 20억, 7년 이하로 잡으면 추가 80억.
이두진 변호사가 신지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마지막 밥값하고 오겠습니다.”
이두진 변호사의 마지막 미소가 묘했다.
그제야 신지석은 이두진 변호사에게 속았다는 것을 느꼈다.
“개새끼야!”
이두진 변호사 역시 신지석을 무시했다.
몸을 일으키며 무심한 눈으로 서진을 보고 있었다.
***
“판사 분위기를 봐도 무기징역 이상은 떨어질 것 같던데요?”
서진은 이은하 기자와 앉아 있었다.
법원에서 멀지 않은 커피숍이었다.
“그런데, 안 드세요?”
테이블에 케이크가 놓여 있었지만 서진은 포크 한번 대지 않았다.
앞에 놓인 커피만 마시는 중이다.
“드세요. 전 올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요.”
“올 사람?”
“네, 아마... 올 거예요.”
이은하 기자는 더 권하지 않았다.
케이크의 단맛을 느끼며 커피를 즐긴다.
그러다가 힐끗, 힐끗 서진을 바라봤다.
느긋하게 창밖을 보는 모습이 잘생기기는 했다.
‘뭐...’
사심은 금물이다.
서진의 태도만 봐도 철벽남인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에게 관심도 없는 것 같고.
이은하 기자가 애꿎은 케이크를 푹푹 찌르며 입을 열었다.
“이제 경호원 대동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경호원이요?”
“이런 말씀 드리면 죄송하지만, 검찰에서 검사님 소문을 좀 들었거든요.”
소문이라는 말에 서진이 관심을 보였다.
“어떤?”
“그... 싸움은 좀 약하시다고. 아, 괜찮아요. 주먹 쥐고 싸우는 게 야만적인 거죠. 검사님은 똑똑하니까 상관없어요. 진짜, 진짜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이게 욕을 하는 것인지 위로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은하 기자도 수습하는 것을 멈추고 계속 말했다.
“어쨌든, 부운 교 신도들에게 검사님은 원수 같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이은하 기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험상궂은 두 남자가 테이블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주먹을 꽉 쥔 눈빛이 정확히 서진을 향하고 있다.
이은하 기자가 다급히 일어서서 양팔을 벌린 채 서진을 막아섰다.
마치 보호해 주는 것처럼.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를 숨길 수는 업었다.
“누, 누구세요? 밝히지 않으면, 신고할 거예요.”
남자들은 황당한 시선으로 이은하 기자를 바라봤다.
이은하 기자가 키가 작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팔도 얇고, 다리도 얇고.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몸으로 막아서다니.
“...신고한다고요?”
이은하 기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살벌한 목소리로 남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네, 신고한다고 했어요. 가세요.”
그런데, 뒤에서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서진이 웃고 있었다.
이은하 기자가 눈을 말똥거리며 서진을 바라봤다.
뭔가 불길했다.
“...왜 웃으세요?”
“제 경호를 해주시는 분들이에요.”
“네?”
“경호를 받아야 할 것 같다면서요? 그래서 받고 있다고 보여 드린 거예요.”
“아... 경호원?”
이은하 기자가 민망한 표정으로 두 명의 경호원을 향했다.
그리고 다급히 구십도 인사를 전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그때, 서진이 몸을 일으켰다.
“오셨네.”
서진이 기다리던 사람, 이두진 변호사가 커피숍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두진 변호사가 서진을 알아본 후 저벅, 저벅 앞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테이블에 앞에 선 이두진 변호사가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합시다.”
이두진 변호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그림자.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