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란? -(2)>
***
실무관이었던 진윤희의 호프집이었다.
불이 꺼진 그곳에 신주언이 앉아 있었다.
그가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입을 연다.
“청담동 J 호텔 한정식 식당에서 뵙죠.”
신주언이 통화를 종료한 후 시선을 틀었다.
카운터에 서 있는 진윤희가 보인다.
진윤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꼭... 해야 해요?”
신주언이 몸을 일으킨 후 벽에 걸린 거울로 다가섰다.
퉁퉁 부은 얼굴, 시커멓게 변한 뺨, 송원태 의원에게 맞은 것이지만 이 모든 게 서진의 탓이다.
신주언이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 새끼 죽여 버릴 거야. 그렇지 않으면...”
신주언이 이를 빠득 갈았다.
서진이 실실 웃으며 돌아다닐 세상을 생각하면 분노로 몸이 떨렸다.
“하...”
신주언이 분노의 숨을 토해내며 다시 진윤희를 향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다가서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희야, 내가 감옥에 들어가는 거 보고 싶어? 아니잖아? 김서진만 끝장내면 난 다시 의원님 밑으로 들어갈 수 있어. 그럼, 내년에 지방선거에 공천을 받고... 시장이 되는 거야.”
신주언이 진윤희의 어깨를 잡았다.
신주언의 눈빛이 시퍼렇다.
“딱 한 번만 더 하자. 그리고 우리 결혼하자. 주례는 의원님께 부탁하고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까? 그리스에 가보고 싶다고 했지? 그쪽으로 잡을까?”
“......”
“검사에게 두 번이나 성폭력을 당한 여성, 그리고 그 여성과 결혼한 신주언 시장. 그럼, 내 이름이 전국구로 알려질지도 몰라. 넌 비련의 여주인공이고 난 그런 너를 사랑하는 남자고! 어때?”
진윤희의 시선이 가게로 틀어졌다.
몇 개 안 되는 테이블.
커피숍도 하나 가지고 있지만 그것 역시 돈이 안 된다.
하지만 전국구로 이름을 날리는 시장의 아내가 된다면,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호화롭게 생활할 수 있다.
‘만나는 친구들도 바꿔야겠지?’
지금의 친구들은 돈 걱정하며 우는소리를 하는 인간들이다.
그들의 한탄을 들어줄 시간은 없다.
앞으로는 대한민국을 걱정하는 상류층, 그들의 세계에 끼어 와인을 기울여야 하니까.
거지 같은 가방과 궁상맞게 확인해야 하는 카드 명세서는 안녕이다.
생각을 마친 진윤희의 입술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신주언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우리 노후는 청와대에서 보낼지도 몰라!”
진윤희의 눈이 반짝였다.
“...청와대?”
순간 진윤희의 어깨를 잡은 신주언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야! 넌 이미 서준경 검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여자야. 그런데 또 검사에게 성추행을 당해봐! 여성 단체에서 널 외면하겠어? 너와 결혼한 내 손을 뿌리치겠어? 윤희야, 우리 청와대 한번 가자!”
진윤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어떻게 할까요? 서준경 때는 술에 취한 척했는데, 이번에는?”
진윤희가 넘어왔다.
신주언의 입술이 죽 찢어지더니 귀에 걸렸다.
“J 호텔 한정식 식당은 불륜 고객, 또는 연예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지.”
식당은 꽤 괜찮은 방음 시설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다른 한정식 식당과 달리 음식이 한 상으로 들어가면 끝, 직원들은 손님이 호출하기 전까지 절대 문을 열지 않는다.
“기자들도 잘 알고 있어. J 호텔 한정식 식당에 들어간 남녀가 뭘 하는지.”
“......”
“그리고 식당에 도착한 김서진은 내가 있다고 생각하며 방문을 열겠지. 하지만 그 자리에는 내가 아니라 네가 앉아 있을 거야. 당황한 김서진에게 이렇게 말해.”
-죄송합니다. 신주언 씨는 조금 늦는다고 했습니다. 식사하고 있으면 금방 온다고 했으니까 식사부터 하시죠.
진윤희가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 김서진이 내 얼굴을 알아보면?”
진윤희는 중앙지검의 실무관으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신주언은 자신했다.
“모를 거야. 언론에 네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되어 나갔었잖아? 그리고 그때 김서진은 동남에서 수습 뛰고 있을 때야. 제정신이었겠어?”
“하긴...”
진윤희가 인정한다는 듯 말하자 신주언이 계속 입을 열었다.
“김서진은 의심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올 거야. 그렇게 문이 닫히고 둘만 남게 되면 움직여. 김서진의 앞에서 네가 네 옷을 찢어! 뜯어지기 좋은 옷을 입는 게 좋겠네. 그래, 단추가 있는 블라우스, 스타킹은 검은색으로 신어. 치마는... 단정한 스타일의 스커트를 준비해.”
진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신주언이 진윤희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그사이 난 기자들을 부를 거고 이렇게 이야기할 거야.”
-김서진 저 새끼가 내 여자를 불러냈다!
-있지도 않은 내 약점을 무기로 내 여자를 건드리려 한다.
-저런 새끼가 검사다.
“그 뒤에 내가 문을 열 거야.”
“그때, 내 옷은 다 찢어진 상태겠네요?”
“그렇지.”
“문을 열면 울게요. 우는 것은 자신 있으니까.”
“그래! 네 눈물은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될 거야. 그럼, 김서진은 끝이야!”
신주언이 힘주어 말했고 진윤희의 시선은 거울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배를 만져 본다.
“사람 많은 곳에서 옷 벗으려면 저녁까지 굶어야겠네. 그래도 카메라에 찍히는 것인데 예쁘게 나오면 좋잖아요.”
진윤희의 말에 신주언이 악랄하게 웃었다.
“김서진... 그 개새끼, 오늘 죽여 버릴 거야. 크핫핫핫핫!”
***
청담동 J 호텔.
서진은 서류 가방을 들고 로비를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그때, ‘띵!’ 엘리베이터가 열리더니 도광현이 내렸다.
서진은 도광현을 알아봤지만 인사하지 않았다.
눈인사만 전한 채 스쳐 지났다.
지이이잉.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동영 수사관이다.
“네, 수사관님.”
-준비는 끝났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조심하십시오.
이동영 수사관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서진은 이동영 수사관이 걱정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잘 끝날 거예요.”
서진이 휴대폰을 품에 넣으려 할 때다.
또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이은하 기자다.
-검사님 말 대로네요. 저 지금 신주언의 전화를 받고 J 호텔에 와 있어요. 방 이름은 가람이에요.
예상대로 신주언은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가람?’
서진은 ‘가람’이라는 이름의 옆방에서 진윤희와 마주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럼, 계속 부탁드립니다.”
서진이 긴장된 한숨을 내뱉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서진의 모습이 비친다.
착각일지 몰라도 서준경 검사와 서진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 같다.
서진이 씁쓸히 손가락을 들어 거울을 툭 쳤다.
‘내 복수부터 하자. 그러니까 아쉬워하지 마. 네 복수도 반드시 해줄게.’
원래의 서진은 재개발 아파트에서 떨어졌고 그 이유는 아직 모른다.
그것을 밝혀주는 게 이 몸을 사용하는 예의.
‘그리고...’
누가 서진을 떨어뜨렸는지 알 수 없지만 그놈은 분명한 위험요소다.
언제 다시 서진을 죽이려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도 서진을 죽이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을 수 있다.
그 전에 놈을 쳐야 한다.
‘기다려. 네 복수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서진이 저벅, 저벅 한식당을 향해 걸었다.
“예약하셨나요?”
직원의 말에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주언이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예약자를 확인한 직원이 서진을 안내했다.
예상대로였다.
신주언과 기자들이 앉아 있는 ‘가람’의 바로 옆방이다.
직원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예약은 두 시간입니다.”
불륜이 일상처럼 벌어지는 가게다.
직원은 뭔 짓을 하든 상관없으니 예약 시간만 지켜달라는 것처럼 말을 끝낸 후 몸을 틀어 자리로 돌아갔다.
서진이 픽 웃으며 방문을 드르륵 열었다.
이번에도 예상대로다.
진윤희가 보였다.
하지만 서진은 정말 몰랐던 것처럼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열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방을 잘못...”
“아니에요.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함께 오기로 한 사람입니다. 신주언 씨는 조금 늦는다고 했어요. 식사하고 있으면 금방 온다고 했으니까 들어오세요.”
진윤희는 가증스러울 정도로 친절한 미소를 지어냈다.
서진이 문을 닫고 진윤희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서진의 시선이 진윤희에게 옮겨졌다.
서준경이었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진윤희는 항상 돈이 부족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명품을 사고 비싼 술을 마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준경은 그녀를 여동생처럼 여겼다.
야근이 일상인 직업이라 안쓰러운 마음도 있었다.
-이걸로 카드값 막고 다음부터는 좀 아껴 써.
-생일이지? 받고 싶은 선물 있어? 칼퇴?
-남자 친구 생기면 말해. 남자는 남자가 잘 보는 거야. 내가 오빠 같은 마음으로 냉정하게 봐줄게.
서준경의 월급 역시 많지는 않았지만 가끔 용돈도 챙겨줬다.
그때마다 살포시 웃으며 했던 진윤희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역시 검사님이 최고예요!
-우리 언니 소개해줄까요? 네? 형부 해주면 안 돼요?
그래서 지금 진윤희의 얼굴을 마주하자.
‘정말 죽여 버리고 싶네.’
그때, 진윤희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리며 말했다.
“혹시 몰라서요.”
녹취를 방지하자는 거다.
서진도 이해한다는 듯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렸다.
그러자 진윤희가 살짝 미소 짓는다.
“사실 몸도 검사하고 싶은데, 주머니만 확인해 볼 수 있을까요?”
서진이 재킷을 벗으며 주머니를 꺼내 보였다.
바지 주머니도 마찬가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시계는? 의심되면 푸를까요?”
서진이 시계까지 풀어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진윤희도 자신의 주머니를 열어 확인시켜주며 말했다.
“저도요.”
이제 녹취의 염려는 없다.
신주언이 예약했고 잡은 방이다.
‘하...’
진윤희는 긴장으로 인해 입이 텁텁함을 느끼며 물컵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서진의 표정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순해 보이네. 공부만 잘했던 놈. 신주언의 말대로 의심 없이 들어오다니, 바보야?’
진윤희는 실무관이었다.
검사와 함께 생활했고 엘리트라 하지만 얼마나 허술한 점이 많은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고작 3년 차?’
진윤희에게 서진은 애송이었다.
저 순진한 눈을 보고 있으면 정말 웃음 밖에 안 나왔다.
그리고 진윤희의 시선이 손목으로 향했다.
들어온 지 약 3분.
이제 슬슬 시작할 때다.
진윤희가 스산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김서진 검사님, 죄송해요.”
그 말과 동시에 진윤희가 자신의 블라우스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제 블라우스를 찢고 비명을 지르면 된다.
그럼, 신주언이 기자들과 함께 들어올 테고 서진은 성폭행 미수로 걸려들 거다.
‘됐어.’
진윤희는 잠시 눈을 감았다.
시장의 아내, 국회의원의 아내 그리고 청와대가 눈에 아른거렸다.
자신의 꿈을 위해 서진의 미래를 박살 내는 것은 미안했지만 그렇게 따지면 서준경에게 먼저 사과해야 한다.
진윤희가 손에 블라우스를 찢기 위해 힘을 줄 때였다.
서진의 목소리가 무섭게 울렸다.
“더러운 몸뚱이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만.”
“......!”
진윤희의 눈동자가 서진에게 틀어졌다.
‘어?’
방금과 눈빛이 다르다.
순했던 눈빛이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다.
진윤희가 움찔할 때 서진이 컵에 술을 따른 뒤 입에 댔다.
그리고 무서운 목소리를 이어갔다.
“윤희야, 그만해. 추해지는 꼴 더 보고 싶지 않아.”
서준경의 말투였다.
진윤희는 착각이라 생각하려 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심각할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어... 어...”
진윤희가 입을 벌리고 있을 때 서진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흘렀다.
“우리는 한 공간에 있고 목격자는 없지. 넌 증언할 거야. 내가 네 블라우스를 뜯었고 검은 스타킹이 좋다며 벗겨냈다고. 넌 반항했지만 우악스러운 내 손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고. 맞아?”
“......!”
서진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정확하다.
진윤희가 하려던 말이다.
그녀의 놀란 표정을 보며 서진이 안타깝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윤희야. 실무관 했으면 알잖아? 옷에도 지문이 남아. 난 네 옷을 만진 적이 없고 조금만 조사해도 바로 드러날 거야.”
“......!”
“그리고 기자들? 우리 작은아버지가 검사장이야. 정확한 증거 나오기 전에 언론에 내 이름이 실릴 것 같아? 착각하지 마. 난 서준경이랑 달라. 그런데, 계속 그 지랄을 한다고? 넌 무고죄로 기소될 거야.”
“......!”
“그러니까 손 내려!”
벼락같은 목소리에 진윤희가 스르륵 손을 내렸다.
진윤희는 멍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서진이 컵에 술을 따른 후 진윤희의 앞에 내려두며 계속 말했다.
“신주언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나? 그런데, 그놈이 너와 결혼이라도 할 것 같아? 넌 그놈 야망을 채우기에 집안도 얼굴도 부족해. 미안하지만 신주언의 액세서리로 선택되지 않을 거야. 단지 시간 벌기야. 일이 끝나면 또 버려질 거야.”
“......”
“난 경고했고. 다음은 네 선택이야.”
진윤희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피가 배어 나올 것처럼 붉어졌다.
그러다가 생글 웃는다.
이어서 천천히 손을 올려 블라우스를 다시 잡았다.
서진이 사나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경고했는데.”
“검사된지 얼마나 됐어? 내가 검찰에서 지낸 시간이 더 많을걸? 하나 가르쳐 줄게. 지문보다 내 눈물이 더 확실한 증거가 될 거야. 옷은 더러워서 버렸다고 하면 되는 거고. 그렇잖아? 이 나라의 법... 참 병신같지.”
“그만!”
“그리고 뭐? 신주언이 날 버린다고? 말도 안 돼. 우리 사랑하거든.”
부욱!
단추가 후드득 떨어지며 진윤희의 속살이 드러났다.
동시에 서진의 눈이 부릅떠졌다.
진윤희가 다시 생글거리며 미소 지었다.
“이제 비명을 지를 건데, 그 전에 한 번 할래? 10분 정도 남았는데, 하고 싶으면 해. 안 그러면 정말 미안할 것 같은데.”
“네 몸뚱이는 관심 없다고 말했고. 하나만 묻자. 서준경도 그렇게 보냈냐?”
“대답해서 뭐 하겠어?”
서진이 들고 왔던 서류 가방을 손에 쥐고 그녀의 얼굴로 던졌다.
퍽!
소리와 함께 진윤희의 얼굴에 맞고 떨어진다.
그러자 진윤희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거야!”
“너 좋아하는 돈이야. 뒈지기 전에도 궁금한 것은 못 참아서 그래. 그 돈 받고 대답해. 서준경도 그렇게 보냈어? 정말 누명이었던 거야?”
돈이라는 말에 진윤희의 시선이 가방으로 향했다.
정말 오만 원짜리가 수북이 보인다.
진윤희가 다시 서진에게 고개를 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누명이었어.”
“서준경은 아무 짓도 안 했다는 거지?”
“어.”
“술 취한 너를 내버려 두고 그냥 나왔다는 거지?”
“몇 번을 물어봐! 서준경 그 등신 같은 새끼, 이렇게 예쁜 애가 취했는데 그냥 갔어. 차라리 한번 하던가! 그럼 미안하지라도 않지.”
서진이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진실을 말해줘서.”
이제 대화는 끝났다.
진윤희가 자신의 스타킹을 손으로 죽죽 찢으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어설픈 연기여도 상관없다.
상황이 서진을 성폭행범으로 몰아가고 있다.
신주언과 기자들이 들이닥쳤을 때, 울기만 하면 된다.
진윤희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뭐야?’
뭔가 이상했다.
당황해야 할 서진이 침착하다.
오히려 정말 즐겁다는 듯 크게 웃고 있다.
진윤희가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왜 그래? 미쳤어?”
“어. 미치겠네. 정말 미치겠어. 너희 같은 놈들에게 당했다는 게 쪽팔려서 정말... 돌아버리겠네.”
진윤희의 눈이 가늘어질 때 서진이 테이블 밑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리고 붙어 있던 손가락만한 소형 녹음기를 꺼내 위로 툭 올렸다.
진윤희의 눈동자가 멈췄다.
지르던 비명도 사라졌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서진의 목소리만 흘렀다.
“먼저 있던 손님이 실수로 놓고 갔나 보네?”
도광현이 설치해 두고 간 거다.
그리고 녹음기를 바라보는 진윤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처참할 정도로 박살 나기 시작했다.
서진은 정말 즐겁다는 듯 웃으며 녹음기를 재생시켰다.
그러자 진윤희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몇 번을 물어봐! 서준경 그 등신 같은 새끼, 이렇게 예쁜 애가 취했는데 그냥 갔어. 차라리 한번 하던가! 그럼 미안하지라도 않지.
“너... 너!”
진윤희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
그럼, 저 녹음기만 치우면 된다.
진윤희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테이블을 넘어 서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옷을 벗고 뛰어오는 모습이 정말 추했다.
“이 씨발 새끼가!”
진윤희가 욕을 내뱉으며 녹음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앗’하는 사이에 녹음기를 빼앗더니 자신의 브래지어 안으로 쑥 집어넣었다.
그러더니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뺏어봐! 손만 대봐! 너 정말 성폭행이야! 검사 새끼들! 너희만 똑똑한 줄 알지? 병신 새끼!”
그런데, 이번에도 서진의 표정은 담담했다.
진윤희의 머릿속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 서진이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영상도 있어.”
“......!”
서진이 손가락으로 벽에 걸린 액자를 가리켰다.
진윤희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진윤희가 정말 미친 것처럼 액자를 향해 달려갔다.
머리는 산발이고 블라우스는 다 뜯어졌고.
진윤희가 액자를 뜯어내 집어 던졌다.
와장창창! 소리와 함께 유리가 사방으로 튄다.
하지만 진윤희는 거기에 관심 두지 않았다.
오직 뒤에 박힌 소형 카메라에 집중했다.
“개새끼! 개새끼야!”
진윤희가 욕을 내뱉으며 카메라를 바닥에 놓고 깨진 액자를 손으로 들었다.
유리가 박혀 피가 흘렀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망치처럼 사용해서 카메라를 부수려 했다.
하지만 잘 부서지지 않는지 벽을 향해 집어 던졌다.
“메모리 카드만 빼면 되잖아?”
서진의 말에 진윤희는 눈이 다급히 메모리 카드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 서진의 웃음소리가 다시 크게 들려왔다.
진윤희가 홱! 서진을 노려봤다.
“왜 웃어! 왜 웃냐고!”
“왜 이렇게 멍청해? 내가 왜 가르쳐줬겠어? 이미 다른 쪽으로 실시간 넘어가는 중이야.”
진윤희는 그대로 굳었다.
좆됐다는 말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더니 표정이 기괴할 정도로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