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악. -(2)>
김종재 변호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질린 얼굴을 수습 못 하고 있다.
“이, 이게...”
여중생 연쇄 살인 사건은 기자들이 환장하는 기삿거리다.
옷 벗을 각오로 임하겠다는 서진의 각오와 윤민우의 발악이 겹치며 여론을 뒤덮고 있다.
별것도 아닌 기사에도 댓글이 우르르 달리며 온갖 커뮤니티를 후끈하게 달구는 중이다.
그런데 재판 전에 법원장과 변호사가 만났다는 소식이 뜨면?
‘안 돼...’
김종재 변호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L 그룹의 고문으로 들어가는 게 문제가 아니다.
최악의 경우 가족의 신상까지 털리며 갖가지 치욕을 당할 수도 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김종재 변호사의 눈동자가 다급히 좌우로 움직였다.
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usb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확 집어 던졌다.
구둣발로 쾅! 쾅! 쾅! 짓밟기 시작했다.
“변호사님!”
서진이 외쳤다.
하지만 김종재 변호사는 멈추지 않는다.
시뻘게진 눈으로 계속해서 발을 움직인다.
usb가 깨져 나갔고 짓이겨졌다.
그렇게 usb가 완벽히 박살 나자 김종재 변호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벌건 눈을 부릅뜨고 서진을 노려봤다.
서진이 입술을 뜯어 물었다.
그 모습을 본 김종재 변호사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다.
악랄하게 웃으며 입을 연다.
“너 사람 잘못 봤어. 그리고 기억해. 지금이 네 인생의 정점일 거야. 앞으로는...”
“미치겠네...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usb를 꺼냈을 것 같아요? 클라우드 몰라?”
서진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미안한데, 저장해 뒀다고요.”
김종재 변호사는 아직도 서진의 말을 이해 못 했다.
눈동자를 굴리는 게 전부다.
그래서 서진은 똑똑히 가르쳐 줬다.
“usb를 부숴봤자 소용없다고. 이미 인터넷 드라이브에 저장되어 있으니까.”
“너 이 새끼!”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김종재 변호사가 서진의 멱살을 콱 잡았다.
“지워! 지우라고!”
서진은 한숨을 내뱉었다.
동네북도 아니고 요즘 왜 이렇게 멱살 잡는 사람이 많아졌는지 모르겠다.
서진이 김종재 변호사의 팔을 탁 쳤다.
그러자 멱살을 잡았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내린다.
서진이 김종재 변호사의 앞으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잘못을 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법을 공부했다는 사람이 그것도 모르나?”
“잘 났다고 까불지 마. 일 키우지 말고 덮어. 시끄러워지면 다치는 것은 너야.”
“기대되네. 누가 다칠지.”
그 말을 끝으로 서진은 가방을 손에 쥐고 몸을 틀었다.
빽빽대는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뒤에서 김종재 변호사가 발악한다.
“야! 내가 너희 검사장하고 어떤 사인지 몰라? 어!”
서진은 그 목소리를 외면한 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재판이 시작되기 전, 여준혁 검사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앞으로 김종재 변호사가 내 이름을 거론해도 상관하지 마. 하고 싶은 대로 해.
서진은 손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서진이 법정을 떠나자 김종재 변호사의 눈이 번뜩거렸다.
“새끼가...”
김종재 변호사가 서둘러 휴대폰을 꺼냈다.
여준혁 검사장의 번호를 찾다가 고개를 저었다.
‘약해.’
지금은 서진을 박살 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언론에 오를 영상도 막아야 한다.
여준혁 검사장에게 그런 힘은 없다.
김종재 변호사는 다시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였고 연락처 하나를 찾아냈다.
-백기호 의원.
판사 출신의 4선 국회의원.
서민적이며 소박한 정치인이란 이미지가 있지만 언론을 주무를 수 있는 거대 권력자 중 하나.
김종재 변호사가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연결 음이 이어졌고 곧 느긋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쩐 일이야?
“의원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재판을 하나 하고 있는데...”
-어, 알아.
알고 있다면 설명할 필요가 없다.
김종재 변호사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김서진이란 놈이 제가 법원장을 만나 식사한 것을 가지고 꼬투리를 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김서진을 유배 보냈으면 합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낮은 웃음이 흘렀다.
그 웃음소리에 김종재 변호사는 주먹을 꽉 쥐었다.
‘됐어.’
이제 적당히 후원금이란 이름으로 포장해서 뇌물을 보내면 된다.
그럼, 서진을 혼내주고 언론도 통제해 줄 거다.
그런데.
-이 사람아, 김서진이 누군지 몰라? 그놈 작은아버지가 중앙지검 김영준 검사장이야.
“누, 누구요?”
-김영준 검사장이라고.
김종재 변호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이어진 말이 쐐기를 박았다.
-그런데, 내가 자네 부탁을 받고 김서진을 유배 보낼 거로 생각해?
휴대폰을 잡고 있던 김종재 변호사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내려갔다.
“기, 김영준?”
김종재 변호사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틀거렸다.
*
서진은 법원 앞에 서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이은하 기자가 빠르게 뛰어와 서진 앞에 섰다.
이은하 기자는 호흡을 가다듬지도 않고 서진을 보며 활짝 웃는다.
“전화하셨죠?”
“굳이 올 필요 없다니까요.”
“아뇨, 이 앞에 있었어요. 괜찮아요. 그런데, 왜요?”
딱 봐도 멀리 있던 것 같은데, 거짓말을 하고 있다.
뭐, 그건 상관없는 일이다.
지금 중요한 일은 아니다.
서진이 휴대폰을 손에 들고 이은하 기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무심한 한 마디.
“올려주세요.”
“네?”
이은하 기자가 재빨리 메시지를 확인했다.
CCTV 영상이다.
법원장과 김종재 변호사가 한정식집에 들어가는 모습.
“어? 이, 이거...”
이은하 기자가 놀란 눈으로 서진을 바라봤다.
“영상에 날짜 보이죠? 재판 전입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요?”
뻔하다.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 수작을 부렸을 거다.
“버, 법원장을 건드려야 하는 일이에요.”
“언론이 하는 일이 그런 것 아닌가요?”
“맞죠. 맞는데...”
“못 하나요?”
“아뇨,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거 또 빚지는 것 같아서...”
“나중에 밥이나 사세요.”
이은하 기자의 눈이 깜빡일 때, 서진은 그녀의 옆을 스치며 계단을 내려갔다.
이은하 기자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검사님, 우리 언제 밥 먹어요?”
“시간이 되면요.”
이은하 기자는 서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선배님?”
이은하 기자의 시선을 뗀 것은 후배 기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였다.
“어? 어.”
“왜요? 무슨 말 했어요?”
“되게 시크하네.”
“네?”
“아니야, 당장 가까운 커피숍 알아봐. 기사 좀 쓰게.”
커피숍으로 향한 이은하 기자는 두 개의 기사를 썼다.
하나는 당연히 법원장과 변호사의 밀회.
그리고 또 하나는 이번 사건을 해결한 서진에 대해서다.
[김서진 검사의 각오. ‘진실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옷을 벗겠습니다.’
국민은 무리한 수사로 김태경 씨를 범인으로 몰아간 수사 기관을 신뢰하지 않았다.
게다가 증거 하나 없이 모든 흔적을 지워 버린 범인은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전관예우를 바라는 판사 출신의 변호사까지, 김서진 검사는 절벽에 서 있었다. (중략).
하지만 김서진 검사는 오직 윤민우에게만 집중했고 그 결과 끔찍한 살인범의 입에서 진실을 토해내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신념 있는 검사를 기대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을 끌어내는 슈퍼맨 같은 검사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서진의 이번 활약은 국민의 입맛에 딱 맞아떨어졌다.
서진의 이름이 실검을 도배했다.
***
그날 밤, 형사 2부는 축제였다.
지세헌 부장검사가 술잔을 들어 올리며 힘차게 외쳤다.
“쏜다!”
지세헌 부장검사의 말에 다른 검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정아 검사가 지세헌 부장검사를 말렸다.
“부장님! 돼지가 아니에요!”
“괜찮아, 먹고 싶은 만큼 마음껏 먹어! 벨트 풀어도 허락할게.”
지세헌 부장검사는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다.
지금껏 거물 변호사만 나오면 힘을 쓰지 못하고 온갖 엿을 처먹은 게 형사 2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선임된 변호사가 또 거물이었다.
그냥 거물도 아니고 국회의원 출신의 김종재.
다른 검사들이 지세헌 부장검사만 보면 혀를 끌끌 찼다.
-또? 거물이야?
-거긴 왜 그래?
지세헌 부장검사는 그동안 위장약을 달고 살았다.
하지만 그 거물이 서진에게 학살당했다.
심지어 법원장과 쎄쎄쎄 했다는 소문마저 돌고 있다.
지세헌 부장검사가 사이다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진짜 굿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했다니까? 푸핫핫핫!”
승리 후에 마시는 술은 언제나 행복하다.
다들 공판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을 연다.
“김종재 얼굴 봤어? 난 사람 얼굴이 그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것은 처음 봤다니까?”
“야, 김서진 기사 떴다. 댓글 난리네. 너보고 검찰총장 하란다. 하하하!”
그때, 지세헌 부장검사가 손을 들었다.
“잠깐.”
그 한 마디에 떠들던 목소리가 조용해지자 그가 말을 이었다.
“맥주잔 가져와.”
한정아 검사가 잽싸게 맥주 오백 잔을 대령했다.
지세헌 부장검사가 소주병을 손에 들더니 맥주잔에 콸콸콸 부었다.
“내가 우리 막내한테 한 잔 줘야지.”
그리고 소주가 가득 들다 못해 찰랑거리는 잔을 서진의 앞에 탁 놓았다.
“마셔!”
이 미친 인간.
이건 축하주가 아니라 벌주다.
하지만 거부하기에는 지세헌 부장검사의 눈빛이 지나치게 따듯하다.
‘에이!’
서진이 잔을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자 검사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와!”
서진이 잔을 싹 비운 뒤 입을 열었다.
“부장님, 저도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서진은 거침없이 소주병을 들었다.
검사들이 ‘어? 어?’ 했지만 이미 늦었다.
잔은 소주로 채워졌고 서진은 그 잔을 지세헌 부장검사에게 정말 공손히 내밀었다.
그리고 고개까지 꾸벅 숙이며 말했다.
“잘 가르쳐주신 덕분에 깔끔하게 끝낼 수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복수다.
하지만 지세헌 부장검사는 거절할 수 없었다.
다른 검사들이 손뼉을 치며 자지러지고 있어서다.
“부장님 드셔야죠? 예쁜 막내가 주는 거잖아요?”
“막내도 원샷했어요!”
지세헌 부장검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젠장! 나 먹으면 잔 돌릴 거야. 각오해.”
서진이 활짝 웃으며 지세헌 부장검사의 앞 접시에 잘 익은 소고기를 내려뒀다.
“감사합니다!”
“요망한 놈.”
지세헌 부장검사는 잔을 입에 댔다.
*
잠시 후, 검사들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너도나도 서진의 옆으로 다가와 한마디씩 한다.
고생했다느니, 젊은 시절 자신을 보는 것 같다느니.
그런데, 그 순간에도 서진의 휴대폰은 계속 진동하고 있었다.
드르륵.
대부분 모르는 사람이다.
로스쿨에 같이 다니던 동기부터 어떻게 연락처를 알았는지 고등학교, 중학교 친구까지.
변호사를 하는 중인데 밥 한번 먹자는 등, 닭강정 집을 오픈했는데 얼굴 한번 비춰달라는 등.
내용은 각양각색이었다.
서진은 휴대폰을 꺼버리기 위해 손을 가져갔다.
이대로 두면 어떤 쓸데없는 메시지가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에도 휴대폰은 또 진동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메시지가 아니었다.
발신 번호가.
-조우재 부장검사.
서진이 전화를 받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이미 취한 검사들은 서진이 나가는 것도 모르고 떠들고 있다.
가게 밖으로 나가자 겨울을 알리는 바람이 차갑게 불어온다.
서진은 숨을 내뱉으며 술기운을 조금 날린 후 휴대폰을 귀에 댔다.
그러자 조우재 부장검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저기 있네요.
“네?”
서진이 시선을 틀었다.
“여기!”
길 건너에 김영준 검사장과 조우재 부장검사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