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통수를 친다는 것. -(1)>
서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김윤환은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이다.
서늘한 분위기가 방을 채울 때, 서진이 슬쩍 웃으며 분위기를 바꿔버렸다.
“뭐야? 일기였어? 그런 거였으면 잘 숨겨놔야지.”
“뭐?”
서진은 전혀 보지 못한 것처럼 다가가 뺏으려는 시늉을 했다.
김윤환이 펄쩍 뛰며 뒤로 물러선다.
“아, 진짜!”
“미안, 미안.”
서진은 양손을 들어 장난을 그만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시선을 다시 책상으로 옮겼다.
“다른 것은 봐도 되는 거지?”
“어.”
서진이 기록물을 툭툭 넘겼다.
하지만 눈빛이 돌변한다.
‘미친 새끼.’
이런 놈 때문에 검찰이 욕을 먹는다.
수천 명의 검사가 잠 못 자며 고생하는데 이런 놈 하나가 떡검이니 섹검이니, 엿을 뿌리는 거다.
‘즐겨라. 며칠 안 남았으니까.’
이런 놈을 계속해서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다.
서진의 머릿속은 김윤환을 부숴버릴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서진은 미끼를 뿌려 두기로 했다.
“현장은 가봤어?”
“기록물에 나와 있는데, 거길 왜 가? 그리고 알잖아? 내가 사무실 스타일인 거. 현장은 무식한 새끼들이 발발거리고 뛰어다니는 곳이고. 나 같은 놈은 책상머리에 앉아 서류나 들춰봐야지.”
지랄을 하고 있다.
기록물을 봐서 해결될 것 같으면 미제가 아니다.
서진은 일그러지는 표정을 숨기며 놈의 말에 수긍하는 척 입을 열었다.
“하긴.”
“그런데, 현장은 왜? 기록물에 이상한 거 있어?”
“아니, 그런 것은 아니고. 내가 아궁이 유골 사건 어떻게 해결했는지 알지?”
김윤환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전혀 모르는 표정이다.
애초에 사건을 조작해서 범인을 만들려 했던 놈이라 그런지 연구조차 하지 않은 거다.
서진은 최대한 한심한 표정을 숨기며 입을 열었다.
“처음 시작은 언론이었어. 언론이 움직이면 관심이 다시 집중되잖아. 그럼, 제보도 받을 수 있고 수사도 수월해져.”
3년 전 사건을 수사하겠다고 동네 슈퍼를 들쑤시고 다니면 반겨줄 사람이 많지 않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냐며 핀잔이나 들을 게 분명하다.
“친한 기자 있지? 이 사건 운 좀 띄워 달라고 부탁해.”
“언론이라...”
김윤환은 턱을 매만졌다.
고민이 될 거다.
카메라 마사지를 받으며 브리핑실에 서고 싶은 욕망.
그리고 혹시나 사건 조작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야 하지 않겠냐는 우려.
놈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을 때, 서진이 준비했던 진짜 미끼를 뿌렸다.
“난 형이 정말 잘 됐으면 좋겠어. 사실 우리가 그렇잖아? 어딜 가도 작은아버지 빽 믿고 설친다며 손가락질이나 받고.”
“야, 어떤 새끼가 우리한테 손가락질을 해! 뒈지려고!”
놈도 뒷말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나 보다.
쓸데없이 버럭하고 있다.
서진이 김윤환의 앞에 서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형이 스펙을 쌓았으면 좋겠다고. 다른 놈들이 무시하지 않게.”
“......”
“어차피 우리는 지지고 볶아도 같이 갈 거잖아? 밀어주고 끌어주고. 그런데, 누가 형을 무시해봐. 밀어줘야 하는 내 기분이 어떻겠어?”
김윤환이 침을 삼켰다.
생각해 보면 서진은 스펙이 화려하다.
미제와 깡치를 연이어 해결하며 몇 번이나 언론에 이름을 올렸다.
일반 사람들은 ‘김서진’의 이름을 모를 수 있어도 검찰 내부에서는 심심치 않게 들려올 정도다.
‘새끼...’
지금껏 김윤환에게 스펙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딴 것은 없는 놈들이나 쌓는 것.
지금껏 하이패스 달고 고속도로를 질주했고 손쉬운 사건이나 받아먹으며 이력을 관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김서진의 얼굴을 박살 내고 싶었다.
그리고 스펙을 쌓는 가장 쉬운 방법은 언론에 이름을 올리는 거다.
“그럼, 난 갈게.”
서진이 김윤환의 옆을 스치며 아파트를 떠났다.
문이 닫혔을 때 김윤환이 입을 꽉 씹으며 휴대폰을 귀에 댔다.
조우재 부장검사에게 거는 거다.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시사 프로그램 PD 하나만 구워줄 수 있을까요?”
-PD? 갑자기 왜?
“제가 미제를 받았잖아요. 그런데...”
김윤환은 서진이 했던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언론이 움직여야 수사가 수월해진다.
이야기를 들은 조우재 부장검사가 껄껄 웃었다.
-그런 생각까지 했어? 동남 가더니 인간 됐네.
“그동안 제가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죠.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열심히 해보려고요.”
-그래, 잘 생각했어. 서포트해 줄 테니까 최선을 다해봐.
통화가 종료됐다.
김윤환의 표정이 거만해졌다.
‘기자? 난 그런 거랑 안 놀아 새끼야. 그러니까 네가 내 밑인 거야.’
김윤환은 손에 들고 있던 노트를 펼쳤다.
[시나리오 1.
김태경 33세.
직업 : 사건 당시 학원 강사. 현재는 무직.
죄명 : 성폭행.
1심에서 7년을 받았지만 2심에서 2년으로 감형.
범죄 사실을 끝까지 부인.]
김윤환이 손가락으로 그 이름을 툭 짚었다.
‘범인은 너야. 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쓰레기. 7년을 살아야 할 놈이 고작 2년? 기다려, 다시 넣어줄게. 이번엔 무기징역 가자.’
김윤환이 끌끌끌 웃기 시작했다.
*
김윤환의 집에서 나온 서진은 곧장 차량에 올랐다.
그리고 핸들을 틀며 이 사건을 정리했다.
-피해자는 6명.
-8개월 동안 이어진 연쇄 살인.
-공통점은 전부 중학생.
-발견된 곳이 놀이터.
-시신은 새벽 또는 아침에 발견.
-피해자들은 학원을 간다며 나갔거나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지 않음.
-성행위는 없었고 지문과 혈흔도 없었음.
-강원도 전역에서 불특정하게 일어난 살인 사건.
사건은 발생 8개월 후 뚝 끊겼다.
전문가들은 이럴 때 세 가지 의견을 전한다.
-살인범이 죽었거나.
-교도소에 복역 중이거나.
-또는 다른 방식의 살인에 집착하거나.
서진은 세 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며 엑셀을 밟았다.
그리고 잠시 후.
서진은 이 사건이 처음으로 일어난 동남군의 놀이터에 도착했다.
놀이터는 3년 전의 끔찍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건 이후 아이들은 이곳을 찾지 않았고 불량 청소년과 취객들의 장소로 이용되는 중이다.
서진은 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주택 단지에 있는 곳으로 바닥은 모래.
‘피해자가 발견된 곳은...’
뺑뺑이라 불리는 놀이기구.
여기서 죽이지는 않았을 거다.
주변은 주택이 가득하다.
범인은 피해자가 비명 지를 것을 염려했을 테고.
‘다른 곳에서 살해 후 이곳으로 옮겼겠지.’
서진은 뺑뺑이를 향해 이동하며 계속 주변을 살폈다.
‘CCTV를 피해 시신을 들고 왔다면 동선은...’
서진은 살인범이 이동한 길을 예상해 봤다.
CCTV를 피할 수 있는 길은 단 한 곳.
놀이터의 난간.
‘차를 주차했을까?’
서진의 시선이 난간 너머로 향했다.
그런데, 주차된 차로 가득하다.
밤이면 댈 곳이 아예 없을 거다.
‘그럼, 방법은...’
먼 곳에 주차 후 이동했거나.
길 중앙에 잠시 정차했거나.
아니면.
‘낮에 시신을 트렁크에 넣고 차를 이곳에 주차해뒀겠지. 그리고 새벽에 돌아와 시신을 꺼낸 거야.’
지금의 생각이 맞는다면 정말 대담한 놈이다.
서진은 몸을 돌려 다시 차로 향했다.
그리고 주말을 이용해 살인이 벌어진 여섯 곳의 놀이터를 전부 확인했다.
실제 현장을 방문하며 또 한 가지 공통점을 알 수 있었다.
-주택가이며 주차하기가 어렵다.
-바닥이 모래다.
-시신은 놀이터에서도 가로등이 비치지 않는 으슥한 곳에서 발견됐다.
***
“땅 본 거 맞지?”
-맞아요. 만 평 정도 주머니에 넣던데요? 그런데...
“됐고. 무조건 사.”
주말이 지났다.
서진은 커피와 케이크를 바리바리 들고 지검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통화는 도광현과 하는 중이다.
도광현이 정말 모르겠다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검사님, 그린벨트에요. 주변에 논, 밭...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 보면 뭔가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아? 그쪽 당선된 의원이 여당이야. 그런데, 총선이 끝나니까 이제 대선을 앞두고 있네? 당선되었으니까 감사의 인사로 떡도 돌려야 하고? 가장 티 안 나고 주민들 호의를 끌면서 명분까지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개발이다.
부동산 투기꾼들이 몰려 한탕하고 떠나게 만드는 것.
-사기꾼 새끼들.
“사기꾼은 너고.”
-전 손 씻었습니다.
“계속 깨끗해라.”
서진은 통화를 종료하며 사무실에 들어왔다.
“오셨어요?”
그런데, 인사를 하던 실무관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서진이 뭔가 사 오면 꼭 하는 말이 있어서다.
-이거 드시고 오늘도 힘내죠.
그럼, 야근이다.
실무관이 어색하게 웃을 때, 서진이 그녀의 앞에 커피를 내려뒀다.
“이거 드시고...”
예상했던 말이 나오려 하자 실무관이 앓는 목소리와 함께 급하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오늘은 또 뭘 시키시려고요.”
“일단 드시고요.”
“먹기 전에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럼, 3년 전 이 사건이요.”
서진이 실무관의 앞에 기록물을 내려뒀다.
기록물을 빤히 보던 실무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건 왜요?”
“이 기간에 기소된 놈들 전부 찾아줄 수 있을까요?”
“성범죄자만 빼는 게 아니라 전부요?”
전부라니, 쌓일 서류의 높이만 생각해도 암담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고요. 감옥에 있는 놈들 위주로요.”
그나마 다행이었다.
실무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 좋게 전화기를 들었다.
보존 계에 연락해서 열람 요청을 하려 하는 거다.
하지만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실종이나 가출 신고가 들어온 여자 확인해주시고요. 살인사건 또는 미수...”
서진의 말은 한참 동안 이어졌고 실무관은 영혼 없는 눈빛으로 커피를 손에 들었다.
“마시고 힘낼게요.”
“그리고 저는 좀 나갔다 오겠습니다.”
*
서진이 향한 곳은 원주였다.
한 커피숍에 들어가자 두 명의 남자가 서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왜소하고 또 한 명은 덩치가 좋다.
“...왜 보자고 하셨어요?”
입을 연 사람은 왜소한 남자, 이름은 김태경.
성폭행으로 징역 2년을 살았고 몇 달 전 사회로 복귀한 자.
김윤환이 지목한 범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옆에 앉은 남자는 김태경의 친구.
김태경이 워낙 불안해해서 함께 나왔다고 한다.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전 성폭행을 저지르지 않았어요. 억울해요.”
김태경이 고개를 저었다.
형기를 마치고 나왔지만 지금도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전 정말 아니에요.”
사건 발생 몇 달 전에 만났던 여성.
3주 정도 만남을 이어왔지만.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것은 부담스러워서 헤어지자고 했어요.”
그런데, 뜬금없이 성폭행으로 고소를 당했다고 한다.
“생각해 보세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증거는 하나였어요! 제가 모텔비를 결제한 카드 내역! 신고했으면 바로 했어야죠! 그리고요. 저는 정말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술 취한 그 여자를 침대에 두고 바로 나왔다고요!”
서진은 물끄러미 김태경을 바라봤다.
진실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김태경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서준경 검사로 성폭행 의혹을 받았던 것과 일치한다.
“그런데, 전자발찌까지 차고 있으라니, 씨발...”
김태경이 머리를 쥐어뜯었고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흘렀다.
서진이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동남군에 거주하셨잖아요?”
“난 정말 아니라고!”
김태경이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며 테이블을 두 손으로 쾅! 치며 일어섰다.
“검사면 다야? 사람 범인으로 몰아도 되는 거야? 힘없으면 다... 이런 거냐고!”
트라우마가 가득한 눈빛.
과거를 묻기 위해 온 게 아닌데,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조용히 있던 김태경의 친구가 그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검사님, 태경이가 아직...”
“아, 괜찮습니다.”
이럴 땐 흥분을 가라앉힐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서진의 시선이 테이블 아래로 틀어졌다.
김태경이 테이블을 치며 자동차 키와 휴대폰이 떨어져서다.
“아, 제가 주울게요.”
김태경의 친구가 말했지만 서진이 이미 몸을 숙였다.
누가 줍던 중요한 것도 아니고 떨어뜨린 자동차 키를 손에 쥐어 테이블에 올리려는데.
그 순간 세상이 흑백으로 물들었다.
*
한 남자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다.
도착한 곳은 놀이터.
자동차 앞에 서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더니 콧노래를 부르며 트렁크를 연다.
교복을 입은 소녀가 누워 있다.
놈이 소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히죽 웃으며 라텍스 장갑을 착용했다.
“아저씨가 재밌게 놀아줄게.”
그리고 놈이 소녀를 꺼내며 그 얼굴이 드러났다.
김태경의 친구다.
*
그렇게 사이코 메트리가 끝났다.
서진이 손에 쥐고 있던 자동차 키를 천천히 내려뒀다.
‘이런 미친...’
울고 있는 김태경을 선량한 표정으로 달래주는 놈.
이놈이 범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