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편? -(2)>
조우재 부장의 뜬금없는 술 약속.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언제가 좋을까요?”
-금요일 괜찮아? 주말에 그쪽 갈 일이 있거든.
“네, 괜찮습니다.”
그렇게 통화가 종료됐다.
하지만 서진의 생각은 깊어졌다.
보고 있던 기록물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조우재?’
삼류 대학 출신으로 지방을 전전하던 인물이다.
김영준 검사장의 눈에 띄며 중앙 권력에 들어왔고 그 뒤를 보좌하며 주워 먹은 돈만 수십억이란 소리가 있다.
김영준 검사장의 지시라면 죽는시늉도 마다하지 않을 인물.
하지만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
밑바닥부터 발악하며 올라왔기에 눈치가 빠르고 진흙탕에 나뒹구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그리고 서진이 서준경 검사였을 때, 김영준 검사장을 향해 휘둘렀던 칼이 모두 막힌 이유도 조우재 부장검사 때문이다.
‘그런데, 놈이 찾아온다는 거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아궁이 유골 사건이 실패로 끝났다면 와서 위로하는 척 김영준 검사장의 밑으로 구겨 넣었을 텐데, 지금은 성공한 상황이다.
‘뭐지?’
잠시 생각하던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뭐든 상관없어.’
과거에는 철저히 박살났다.
외톨이였고 어떤 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재정건설 대표 김준만이고 작은아버지가 김영준 검사장.
김윤환과 저울질을 한다 해도 밀리지 않을 스펙이다.
상대의 의도가 무엇이든...
“...이용할 수 있겠어.”
***
-강원 지검 조용준 지검장은 최근의 사태에 책임을 지고 자리를 물러나겠다며...
조우재 부장검사는 라디오를 들으며 강원도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가 입술을 씹었다.
‘김서진...’
김영준 검사장의 지시를 받아 어쩔 수 없이 만나러 가는 것이지만 조우재 부장검사는 서진이 불길했다.
‘그놈이 끼어서 제대로 된 게 없었어.’
서진을 무시하던 김윤환이 뒤통수를 맞으며 유배를 갔다.
물론 김윤환이 혼자 설친 게 가장 큰 문제였지만 꺼림칙한 기분은 어쩔 수 없다.
게다가 그놈의 운빨.
‘그게 제일 불안해.’
조우재 부장검사는 한숨을 내뱉으며 가게 앞에 차를 주차했다.
상견례 장소로 이용되는 고급 식당, 서진이 예약한 곳이다.
‘젠장, 금수저 아니랄까 봐.’
조우재 부장검사는 서진과 만났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그때 느낀 감정은 하나.
-돈 많은 애송이.
건방졌고 제멋대로였다.
그게 전부다.
살갑게 구는 김윤환과는 정반대의 스타일.
그래서 김서진과 만나는 게 더 싫을 수도 있다.
조우재 부장검사가 혀를 쯧 차며 차량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오셨어요?”
그 앞에 서진이 서 있었다.
예전과 달리 허리를 구십 도로 굽혀 인사한다.
조우재 부장검사가 눈을 찌푸렸다.
‘뭐지?’
예상했던 것과 다른 예의 바른 태도.
‘사고 이후 성격이 바뀌었다고는 들었는데...’
조우재 부장검사는 한번 시험해 보기로 했다.
변했는지, 아니면 꿍꿍이가 있는지.
“쓸데없이 비싼 곳을 잡고 있어? 돼지 껍데기에 소주 한잔하면 되는데.”
공들여 준비한 밥상이 엎어지면 본심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예상과 달랐다.
서진이 정말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죄송합니다. 여기까지 오신다고 해서 블로그나 유튜브 보면서 많이 알아봤거든요. 그런데, 여기가 제일 맛있는 집이라고 해서... 지금이라도 껍데기 집을 알아볼까요?”
“됐다. 들어가자.”
조우재 부장검사는 그 말을 끝으로 가게로 향했다.
그리고 서진은 조우재 부장검사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서진은 이미 조우재 부장검사를 겪어 봤고 그 성격을 알고 있다.
지방대 출신의 자격지심.
언제나 무시 받고 있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깍듯한 사람에게 약하다.
서진이 놈의 옆에 서서 더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차 가지고 오셨는데, 술 괜찮으세요?”
“말했잖아. 내일 볼 일이 있어서 왔다고. 자고 갈 거야. 호텔 예약했어.”
“다행이네요. 와인을 주문해 뒀거든요.”
“좋네.”
놈의 기분이 조금은 좋아 보였다.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 된다.
놈은 조우재다.
*
잠시 후.
조우재 부장검사가 와인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검사장님이 칭찬 많이 하시더라.”
계획이 틀어졌다며 집안 물건을 집어 던지고 있을 게 분명한데, 초등학생도 믿지 않을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서진은 모른 척 입을 열었다.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여기 생활은 어때?”
“아무래도 아쉬움이 많죠.”
조우재 부장검사가 웃었다.
“힘들어도 내년까지만 견뎌. 서울로 올라온다며?”
“그런 말씀을 하시긴 했는데, 가봐야 알겠죠.”
“검사장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야.”
술이 한잔 두잔 들어갔다.
이어지는 입바른 소리.
-벌써 몇 개를 터뜨린 거야?
-서울로 오면 내 밑으로 올 텐데, 지금처럼만 해라.
-그럼, 내가 네 자리는 확실히 보장할게.
하지만 서진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조우재 부장검사의 특기다.
사람을 비행기 태워놓고 알게 모르게 추락시키는 것.
서진은 술이 들어갈수록 정신을 조이며 조우재 부장검사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와인 두 병이 비워졌을 때였다.
이곳에 온 이유를 들을 시간.
조우재 부장검사가 입을 열었다.
“윤환이가 동남군 간 것은 알지?”
“네, 들었습니다.”
“그놈이 거기서 힘든 모양이야. 미제를 맡았다네?”
“...미제요?”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눈을 깜빡였다.
조우재 부장검사가 와인을 마신 후 계속 말했다.
“그래, 이재승 부장검사 알지? 그놈이 자극하는 모양이야. ‘김서진도 했는데, 넌 못하냐?’ 하면서. 유치한 새끼. 그래서 네가 좀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서진이 아궁이 유골 사건을 해결한 후 김영준 검사장은 고민을 시작했다.
-김윤환이 김서진의 고삐를 잡을 수 있을까?
그래서 김영준 검사장은 서진을 시험하려 한다.
어디까지 발 벗고 나서는지.
서진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물러섰다.
서진의 짬밥에 덮어놓고 돕겠다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놈들 앞에서는 돌다리도 수백 번 두들기며 걸어야 한다.
“그런데, 제 위치에 동남을 오가기는 힘들어서요.”
“주말은 괜찮잖아?”
“아, 그 정도라면 제가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윤환이 형이 제 말을 들을까요?”
“걱정하지 마. 내가 잘 이야기해둘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거야.”
조우재 부장검사가 끌끌 웃었다.
원하는 대로 이뤄졌다는 표정이다.
그런데, 서진이 수락한 이유는 김윤환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다.
돕는 척 지켜볼 거다.
그리고 미친 짓을 하는 순간.
‘박살 내야지.’
이번엔 감옥에 구겨 넣을 생각이다.
그렇게 조우재 부장검사의 볼일은 끝났다.
지금부터는 서진의 시간이다.
다시 술이 들어갔을 때 서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부장검사님.”
“왜?”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연락드려도 될까요?”
와인을 마시던 조우재 부장검사가 움직임을 뚝 멈추고 서진을 바라봤다.
“연락?”
“조언을 받고 싶어서요.”
연락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전화번호를 알고 있고 통화 버튼만 누르면 된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새끼...’
조우재 부장검사는 서진이 서울에 연줄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단한 집안을 가진 놈이 유배지를 전전하며 말랑말랑하게 변한 거다.
그리고 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검사장님이 검찰을 떠난 뒤, 그때를 걱정하나?’
김영준 검사장의 검찰 생활은 얼마 남지 않았다.
떠난다 해도 영향력은 있겠지만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를 일.
하지만 서진은 이제 시작이다.
검사장의 우산이 없어진 뒤를 걱정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내 라인을 잡겠다고?’
조우재 부장검사가 슬쩍 웃었다.
서진 같은 놈과 함께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집안도 좋고 실력도 있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사근사근하기까지 하다.
조우재 부장검사가 잔을 내밀었다.
“그래, 다음엔 내가 술을 사지.”
서진이 활짝 웃으며 두 손으로 잔을 들었다.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여기까지.
경계를 푸는 것으로 됐다.
목을 틀어쥐는 것은 천천히 하면 된다.
권력이라는 바닥에서 정치인의 목을 꺾는 것은 수행비서.
검사장의 목을 베는 것은 조우재 부장검사의 역할이 될 것이다.
*
“들어가십시오!”
대리 기사가 왔고 조우재 부장검사는 손을 흔들며 호텔로 떠났다.
차량이 멀리 사라지자 서진이 천천히 허리를 폈다.
서진의 표정이 조우재 부장검사와 있을 때와는 다르다.
서늘한 눈으로 차량의 뒤를 노려보고 있다.
그리고 천천히 휴대폰을 들어 귀에 댔다.
통화 상대는 자금을 세탁해 준 도광현이었다.
-아이고,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춘천 스위트 호텔, 차량 번호 0924.”
-네? 갑자기 그건 왜요?
조우재 부장검사는 춘천에 볼일이 있다고 했다.
딱 봐도 땅 사러 온 거다.
곧 개발될 땅.
“그놈이 어떤 땅을 사는지 확인하고 쫓아가. 몇 배는 뛸 거야.”
-...지금 춘천을 가라고요?
“어. 그럼, 그렇게 알고 끊는다.”
-거, 검사님?
총선이 끝났다.
당선된 의원들은 선거에 퍼부은 자금을 회수해야 한다.
가장 쉬운 방법이 명분 좋은 개발.
조우재 부장검사는 그런 정보를 기가 막히게 주워 먹는 놈이다.
***
“놀리러 왔냐?”
다음 날, 서진은 김윤환을 만나러 왔다.
그런데 처음부터 삐딱하다.
제멋대로 검사장 아들의 살인 사건을 들고 가서 일을 망쳐놓고 서진을 탓하는 중이다.
‘이기적인 새끼.’
서진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놈을 믿게 하려면 한 번은 짚고 가야 할 일이다.
“왜 그렇게 인상을 써? 형이 여기 온 게 내 탓이야? 나한테 언질이라도 줬으면 이렇게까지 안 됐던 거 몰라!”
“하, 씨발. 그래서 똥 밟은 것은 나잖아! 됐다. 가라.”
“나도 조우재 부장검사님 부탁 아니었으면 안 왔어.”
믿을만한 사람의 이름이 나오자 김윤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부장검사님?”
“어.”
서진이 김윤환의 옆을 스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39평, 아파트.
혼자 쓰기에는 부담스럽게 넓은 곳.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없다.
놈의 책상에 기록물이 쌓여 있는 것은 신기할 뿐이다.
뒤를 쫓아온 김윤환이 되물었다.
“야, 조우재 부장검사님이 너한테 부탁했다고?”
“그래, 그래도 핏줄인데 우리 둘이 끌어주고 밀어주고 같은 편 하래. 그래야 눈 감으면 코 베가는 서울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김윤환은 픽 웃었다.
서진이 서울로 올라가고 싶어 안달 난 놈으로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면 사건까지 뺏어간 놈을 돕겠다고 나타날 이유가 없다.
‘그렇다는 거지?’
그사이 서진은 김윤환의 책상으로 향했다.
기록물을 보려 했는데 미친놈이 증거물을 가지고 나왔다.
피해자가 당시 입고 있던 교복.
서진이 교복을 가리키며 고개를 틀었다.
“이건 왜 가지고 나온 거야?”
“잔소리할 거면 꺼져. 아니면 닥치고 돕던가.”
김윤환은 일단 강하게 말했다.
하지만 생각은 다르다.
서진이 정말 떠나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중이다.
몇 번이나 미제를 해결한 서진의 능력을 이용하고 싶어서다.
“하... 나도 그냥 꺼지고 싶다. 그런데, 서울 생활 편하려면 어쩔 수 없네.”
서진이 다시 책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건을 정리한 노트를 툭 열어 보는데, 김윤환이 갑자기 달려들었다.
노트를 확 뺏더니 사나운 이빨을 드러낸다.
“이걸 왜 봐, 이 새끼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예민한 반응.
그런데 그 짧은 순간, 서진은 사이코 메트리를 통해 봤다.
예상했던 대로다.
예상은 했지만 그 예상이 너무 충격적이다.
‘미친 새끼. 정말 조작할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