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이 틀어지면. -(2)>
“조용준 검사장이 원하는 게 뭐지?”
김영준 검사장은 말을 빙빙 돌리지 않고 곧장 직구를 던졌다.
쓸데없는 인사치레로 시간 낭비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 때문이다.
‘그런데, 들어서 뭐?’
서진의 목표는 김영준 검사장의 힘을 자신이 흡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날 목표는 두 가지.
-조준태의 살인사건을 강원 지검으로 사건 이관.
-김윤환의 유배.
그런데 김영준 검사장은 강원지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거다.
김영준 검사장은 한 번 양보하면 호구가 된다 생각하는 사람.
서진이 서준경이었을 때 김영준 검사장에게 들었던 말이 있다.
-서 검사, 요즘 유행하는 말이 있지? 호의가 계속되면 호구가 된다고. 그거 사실이야. 벌레들이 불쌍해서 한 번 양보하면 놈들은 그게 고마운 줄 몰라. 계속 이런저런 요구를 하지.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일 때문에 거절하잖아? 그놈들이 ‘지금까지 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라도 할 것 같아? 아니야. 오히려 욕을 하지. ‘저 새끼 변했네.’, ‘가진 것 있는 새끼가 더하네.’하면서.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부터 들어주지 않으면 돼. 이 세상은 물러서는 순간 끝이야.
김영준 검사장의 성격이라면 강원 지검의 계획을 듣는 순간 그것을 이용해서 역으로 공격할 거다.
다시는 요구 또는 협상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못하게 박살낼게 분명하다.
지금껏 김영준 검사장은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 김윤환이 무리수를 두도록 계획했던 거다.
지금보다 더 난처한 상황이 만들어지면 아무리 김영준 검사장이라 해도 물러나야 할 테니까.
하지만 김영준 검사장이 갑자기 들이닥치며 첫 번째 계획이 틀어졌다.
국회의원과 저녁 약속이 있던 사람이 왜 지금 들어왔는지...
‘어쨌든.’
서진의 목적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
“저도 이번 일로 난처해져서요. 자세한 이야기는 모릅니다.”
“아는 것만.”
권위적인 목소리, 곧바로 아는 것을 끄집어내라는 지시.
예상대로였고 서진은 순순히 진실을 말했다.
“일단 살인 사건을 이관받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김영준 검사장은 서진을 빤히 바라봤다.
거짓이 있는지 판단하는 거다.
자신의 조카인데 이렇게까지 하나 생각이 들었지만 김영준 검사장은 맨손으로 이곳까지 올라온 사람.
금수저 물고 태어난 괴물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악마가 돼야 한다.
그리고 악마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행히 김영준 검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김영준 검사장도 강원도 살인 사건, 그것도 검사장의 아들을 데리고 있는 게 부담스러웠다.
김영준 검사장이 담배를 꺼내며 건조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이건 잘 모르겠는데요. 윤환이 형이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책임?”
서진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꺼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유배 같은 거요.”
보통의 사람이라면 아들을 유배 보내란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나빠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서진의 예상은 맞았다.
김영준 검사장의 표정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묻는다.
“그게 전부야?”
“그럴 거예요. 윤환이 형의 일이라 저도 나름대로 알아보고 있었거든요.”
김영준 검사장이 서진과 시선을 맞췄다.
그는 여전히 관찰의 눈빛은 거두지 않는다.
하지만 대화의 흐름으로 봤을 때 서진이 쫄릴 것은 없었다.
그리고 김영준 검사장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것은 들었고. 그래서 계획은 뭐지? 찌라시로 흔든 후 뭘 하려 했던 거야?”
서진은 테이블 아래 숨겼던 주먹을 꽉 쥐었다.
강원 지검의 계획을 듣고 역으로 이용할 것이란 예상조차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표정을 감춘 후 입을 열었다.
“정말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1시간만 시간을 주시면 최대한 알아보겠습니다.”
“시간을 달라?”
“네, 가족이잖아요. 저도 윤환이 형이 이런 식으로 이용당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요.”
김영준 검사장의 표정이 묘해졌다.
감정 없던 눈동자에 호기심이 깃들며 입가에는 미소마저 드러났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
“그래.”
*
잠시 후 서진이 떠났다.
서재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김영준 검사장이 창밖으로 고개를 틀었다.
강원 지검에서 일어나는 일, 직접 알아볼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자칫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서진에게 맡겼는데...
‘가족이라고?’
김영준 검사장의 입에 빙긋이 미소가 그려졌다.
바로 직전까지 강원지검에서 어떤 일을 꾸미는지가 궁금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서진이 어떻게 알아 올지가 궁금해졌다.
김영준 검사장이 몸을 일으키며 창가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래, 잠시 서진이에게 맡겼다가 윤환이에게 돌려줘도 되는 거야.’
서진은 아직 어리다.
똘똘하다 해도 경험이 부족하다.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다룰 수 있다.
김영준 검사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윤환이가 서진이의 고삐를 잡으면 더 좋은 일이고.’
김영준 검사장이 팔짱을 끼며 빙긋이 웃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
그리고 그 시각.
김윤환의 방문이 삐걱 열렸다.
“윤환아...”
김윤환의 엄마가 들어온 거다.
걱정스레 아들의 상태를 확인하던 김윤환의 엄마가 눈을 크게 떴다.
방은 난리였다.
책장에 있던 책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취미 삼아 치던 기타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박살 나 있었다.
태풍이 지나갔다 해도 믿을만한 상황이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있던 김윤환이 엄마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런데 김윤환의 얼굴도 말이 아니다.
“윤환아!”
“엄마...”
“왜 그래, 왜 이런 거야!”
그녀가 김윤환의 어깨를 잡으며 간절히 물었지만 김윤환은 입을 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김윤환의 엄마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이해해주는 사람이다.
그동안 김윤환이 어떤 사고를 쳐도 다 품어줬다.
그런데, 그런 엄마라 해도 난잡한 파티는 숨기고 싶었다.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왜 그래?”
“괜찮아요. 정말 아니에요.”
하지만 김윤환의 눈동자는 자신도 모르게 휴대폰으로 향했다.
이어서 엄마의 시선 역시 그쪽으로 틀어졌다.
“이거야?”
엄마가 김윤환의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김윤환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휴대폰을 빼앗으려 했다.
“어, 엄마!”
“가만히 있어.”
엄마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김윤환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엄마의 시선은 휴대폰 화면으로 옮겨졌다.
액정에 금이 쫙 갔지만 작동에 이상은 없었다.
그렇게 엄마도 찌라시를 확인했다.
삼류 소설에도 나오지 않을 법한 아들의 사생활.
김윤환의 한숨 소리가 방을 울릴 때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B가 너야?”
“죄송해요.”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고 쥐구멍이 있다면 머리를 쑤셔 넣고 싶었다.
말 그대로 집안 망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마의 태도는 예상과 달랐다.
“...이런 걸 가지고 애를 때려?”
이번에도 엄마는 김윤환의 편이었다.
***
가로등이 흔들리는 시간.
서진은 방배동의 한 주택가를 걷고 있었다.
서준경 검사였을 때, 고위직을 수사하며 남몰래 계약한 전셋집.
물론 타인의 명의를 사용했고 그 계약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서진은 지금 그곳을 찾아가는 중이다.
저벅, 저벅 언덕을 올라가며 생각에 빠졌던 서진이 싱긋 웃었다.
‘어떻게 보면 잘됐네.’
원치 않게 계획이 틀어졌지만 가만히 생각하니까 오히려 좋은 일이다.
김윤환이 무리수를 두며 자폭했다면 김영준 검사장에게 서진의 능력을 보여줄 시간은 없었을 거다.
그저 김윤환만 한심한 놈이 되어 두들겨 맞았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서진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처럼 연출할 수 있다.
어쩌면 김영준 검사장은 서진을 보며 김윤환의 대체재 또는 보좌역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다 왔다.’
언덕 높은 곳에 있는 상가 주택이었다.
서진은 2층으로 올라갔고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비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방 하나에 주방이 딸린 원룸.
에어컨에 텔레비전, 심지어 붙박이장까지 존재하는 완벽한 풀옵션.
하지만 서진은 이 옵션을 누린 적이 없다.
이곳은 사건 기록을 숨기기 위해 계약한 곳.
그 덕에 눈에 보이는 것은 곧 이사 갈 집처럼 널브러진 박스였다.
물론 그 박스는 모두 사건 기록이고.
서진은 박스를 샅샅이 살피며 이니셜 K가 적힌 라면박스 하나를 찾았다.
K는 당연히 김영준 검사장의 ‘Kim’에서 따온 거다.
서진은 무거운 박스를 들어 방으로 옮긴 후 털썩 주저앉았다.
박스를 열자 김영준 검사장에 대한 기록이 가득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기록은 없다.
김영준 검사장이 흔적을 남길 멍청한 사람은 아니다.
즉, 이 기록은 죄다 의혹.
그런데 의혹만 한 박스인 것도 웃긴 일이다.
서진이 중얼거렸다.
“조금 더 힘이 생기면...”
그래서 눈치 안 보고 파고들 수 있다면 의혹이 사실이 될 거다.
그리고 그때가 김영준 검사장의 마지막이다.
‘시작하자.’
서진은 손을 툭툭 털며 서류를 끄집어냈다.
이것도 아니고.
그렇게 십분 쯤 박스를 뒤졌을 때 가장 바닥에 나뒹구는 흰 봉투를 발견했다.
‘찾았다.’
서진이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몇 장의 사진이 보인다.
-김윤환이 룸살롱으로 들어가는 사진.
-룸살롱의 지하 주차장에서 여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차에 오르는 사진.
-여자와 함께 호텔에 들어가는 사진.
누가 봐도 성매매.
하지만 기자에게 건넬 수는 없다.
곧바로 그 소식이 김영준 검사장의 귀에 들어갈 거고 언론은 침묵할 게 분명하다.
오히려 서진만 난처해질 수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려도 마찬가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정치 거물들의 사건이 메인을 장식하는데 평검사의 성매매는 관심받기도 힘들다.
하지만.
‘협박용으로는 충분하지.’
서진은 사진을 바닥에 깔고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소중하게 촬영했다.
이 사진과 몇 가지 추가 혐의를 김영준 검사장에게 들이밀며 협상할 생각이다.
-언론이 아니라 SNS를 이용할 것 같아요. 여기서 브레이크를 걸면 이겨도 상처만 남을 것 같은데, 원본 받으며 적당히 타협하면 어떨까요?
김영준 검사장도 더 거부하지는 않을 거다.
김윤환 외에 서진이라는 대체재가 생겼으니까.
그리고 김윤환의 유배는 확실해질 거다.
‘좋아...’
서진은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확인하며 끌끌 웃었다.
서준경이었을 때만 해도 이걸 이렇게 쓸 줄은 몰랐다.
그때는 김윤환을 더러운 새끼라며 욕만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도움이 된다니, 세상일은 모르는 거다.
그때였다.
지금껏 닫혀 있던 붙박이장이 유령의 집에 온 것처럼 쾅! 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서진은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뭐, 뭐야!”
그런데 붙박이장을 향해 다급히 시선을 옮긴 서진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안에서 이동영 수사관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어?’하는 순간 이동영 수사관이 서진을 덮치며 깔고 앉았다.
서류가 엎어지며 콰당탕! 요란한 소리가 울리는 동시에 이동영 수사관이 서진의 멱살을 잡고 거세게 외쳤다.
“너... 너 뭐야! 뭐냐고 이 새끼야!”
이동영 수사관의 눈이 벌겋다.
서진도 갑자기 이동영 수사관이 튀어나와 깜짝 놀랐는데, 이동영 수사관은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다.
“너 뭐냐고!”
서진이 자신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이동영 수사관의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저기... 수사관님, 일단 놓고 이야기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