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현재. -(1)>
*
탁.
지검장실을 벗어난 조우재 부장검사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초조한 눈빛과 함께 긴장된 한숨을 내뱉었다.
‘하...’
곧 지검장실 안에서 쩍! 쩍! 뺨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대, 두 대, 세 대, 네 대!
그 소리가 얼마나 잔혹했는지 밖에서 듣던 조우재 부장검사가 눈을 감을 정도였다.
그리고 급기야 김윤환의 앓는 소리가 터졌다.
“아, 아버지! 죄송해요! 죄송해요!”
다 큰 녀석이 애원한다.
하지만 김영준 검사장은 봐줄 사람이 아니다.
뭐로 때리는지 몰라도 쾅! 쾅!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딸칵’ 소리와 함께 지검장실의 문이 열리며 김윤환이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얼마나 맞았는지 뺨이 붉다 못해 퍼렇고 와이셔츠의 단추가 모두 뜯겨 있다.
“괜찮냐?”
“...네.”
대답은 했지만 그 목소리가 서글펐다.
조우재 부장검사가 김윤환의 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좋게 생각해.”
평검사 나부랭이가 강원 지검 검사장의 아들을 체포했다.
어떤 사전 연락도 없이, 그것도 기물파손으로 잡혀 온 양아치의 말만 듣고 속전속결로 영장을 청구했으며 일을 처리했다.
게다가 그 짧은 시간에 언론에도 알려졌다.
정말 미친 거다.
조용준 검사장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김윤환이 처음부터 계획을 짜놓은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아버지가 김영준 검사장이 아니었다면 김윤환은 이미 강원도로 달려가 무릎 꿇고 싹싹 빌고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조우재 부장검사가 김윤환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검사장님이 커버 쳐주실 거야.”
이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
“김윤환? 뭐 이렇게 여자를 좋아해? 이거 병 아니야?”
강원 지검, 형사 2부.
지세헌 부장검사는 조용준 검사장이 조사한 김윤환의 기록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죄다 여자 만난 이야기다.
여기서 만나고 저기서 만나고 심지어.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은 왜 기웃거려?”
“애들 잡아두고 특강을 한답니다.”
한 검사의 말에 지세헌 부장검사가 코웃음을 쳤다.
“지가?”
지세헌 부장검사가 한심한 눈으로 고개를 저으며 들고 있던 서류를 툭 던져뒀다.
그리고 천천히 앞을 바라봤다.
앞에는 서진을 비롯해 형사 2부의 검사들이 쫙 앉아 있었다.
“알겠지만 이걸로 김영준 검사장은 못 무너뜨려. 그래서 가이드라인을 확실히 했으면 좋겠어. 목표를 어디까지로 잡을까?”
검찰 내에서 김영준 검사장의 기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른다.
정,재계의 인맥은 물론이고 끌어줄 윗선과 밀어줄 아랫선이 모두 엘리트 코스를 밟은 자들이다.
과한 욕심 부리다가 유배를 당할 수도 있다.
그리고 지세헌 부장검사의 시선이 서진에게 닿았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글쎄요.”
서진은 가만히 있으려 했다.
이들이 볼 때 서진과 김영준, 김윤환은 친척이다.
그리고 서진은 이곳에서 가장 막내.
나서기보다는 조용히 귀를 기울이려 했는데 지세헌 부장검사가 멍석을 깔아줬다.
다른 검사들도 서진의 대답을 기다린다.
“두 가지를 목표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하나는 사건을 다시 우리가 가져오는 것.”
검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할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곳에 중앙지검 놈들이 와서 설치고 다니는 꼴은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김윤환이 동남군을 경험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조용히 있던 한정아 검사가 ‘풉!’하고 웃었다.
“김 검, 지금 사촌 형을 유배 보내겠다는 말이야?”
맞다.
유배 보내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 것은 좀 나쁜 놈 같고.
“아뇨. 동남 바다가 얼마나 예쁜데요. 회도 맛있고요.”
다른 검사들이 낄낄 웃었다.
“착한 동생이네. 거기 겨울 바다가 진짜 예술이잖아. 해변에 앉아서 소주 먹으면 진짜 ‘캬!’ 소리가 저절로 나와.”
“그렇지. 그런 곳이면 당연히 사촌 형에게 보여줘야지.”
“나중에 김윤환 동남 가면 맛있는 횟집 꼭 소개해줘야 한다. 어?”
지세헌 부장검사가 손뼉을 짝 치며 분위기를 잡았다.
이어서 그 시선이 한쪽으로 틀어졌다.
그의 눈에 머리를 2:8로 잘 빗어 넘긴 검사가 보인다.
“주 검사가 중앙 지검에 있다 왔지?”
“네.”
“소문 좀 내. 김서진이 여기서 왕따당한다고.”
이들은 김윤환을 공격하려 한다.
그런데 서진은 그의 사촌.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
특히 집안 모임에서 만났을 때 얼굴을 붉히는 것은 모양새가 안 좋다.
그래서 지세헌 부장검사는 서진이 이 팀과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꾸미려 한다.
주 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조용준 검사장님 일로 김서진이 난처해졌다. 같은 부서도 피한다. 뭐 이런 식으로 소문내면 되겠지? 더 필요한 것 있어?”
“아뇨, 없습니다.”
“좋아, 김서진은 왕따.”
주 검사가 수첩을 들고 ‘김서진 왕따, 소문, 전화’라고 적는다.
분명 가짜인 것을 알지만 보고 있으니까 기분이 참 묘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자 지세헌 부장검사는 한정아 검사를 향했다.
“한 검사, 연락해봤어?”
한정아 검사는 언론사를 담당하기로 했다.
성격이 좋아 친하게 지내는 기자가 많은 모양이다.
그런데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지령이 떨어졌대요.”
“지령?”
“김윤환의 이름을 쓰지 말라고.”
“하... 빠르네.”
김영준 검사장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조용준 검사장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언론사와 포탈사이트의 사장을 만나 술잔을 돌리며 언론 장악을 시작했다.
-조용준 검사장의 아들을 건든 게 제 아들놈입니다. 그쪽에서는 괘씸하게 보겠죠. 그런데, 살인자를 잡은 게 그렇게 잘못 한 일입니까? 그쪽에서 어떤 선동을 할지 모르겠지만 혈기왕성한 사내놈의 애정 문제는 적당히 눈 감아 주셨으면 합니다.
김영준 검사장은 차기 또는 차차기 총장이 확실시 되는 상황이다.
그런 사람이 사장들을 만나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그것도 그들이 생각할 땐 별것 아닌 여자 문제로.
언론사의 사장들은 좋은 게 좋다고 생각했다.
“작은 언론사를 통해 기사를 낼 수는 있어요. 그쪽이라도 만나볼까요?”
한정아 검사가 볼펜을 똑딱이며 입을 열었지만 지세헌 부장검사가 고개를 저었다.
“작은 곳은 어려워. 곧 묻힐 거야. 힘만 빼는 일은 하지 마.”
“그럼, 여론전은 실패네요?”
조금이라도 타격을 주려면 언론이 여론을 끌어줘야 한다.
하지만 언론이 움직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모두의 입에서 ‘끔’ 무거운 한숨 소리가 흐를 때, 서진이 입을 열었다.
“김윤환의 내용은 기사보다 찌라시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나요?”
“...찌라시?”
언론이 적어낸 기사보다 금융가에서 튀어나온 찌라시를 신뢰하는 사람도 많다.
“게다가 유명 연예인이 포함된 찌라시라면 그 파급력은 기사보다 크죠.”
단 며칠 안에 전국을 채울 거다.
하지만 여기도 문제가 있다.
“금융 쪽에서도 김영준 검사장이 관련되어 있으면 꺼릴걸?”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여론전을 가장해서 부담을 주는 게 목표에요. A군, B양, C양... 일반 사람이 봤을 때는 누군지 모르겠지만 김윤환은 그 내용이 자기란 것을 알겠죠.”
김윤환은 김영준 검사장의 눈치를 엄청 본다.
김영준 검사장의 귀에 찌라시가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 할 거다.
반드시.
“서두르겠죠. 실수할 겁니다.”
그 순간을 노리면 제대로 약점을 잡을 수 있다.
지세헌 부장검사가 손뼉을 짝 쳤다.
“좋아. 한정아 검사는 찌라시를 찔러 봐.”
“네.”
한정아 검사가 시원하게 대답했고 지세헌 부장검사의 지시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
김윤환을 향한 칼이 은밀하게 벼려지고 있을 때, 서진은 토요일을 이용해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집에도 들리고 돈세탁을 부탁한 도광현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리고.
“세탁 끝냈습니다. 수수료 떼고 73억.”
서울 강남, 1층에 있는 커피숍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도광현의 외모는 상당히 바뀌었다.
깡마른 몸은 그대로지만 나름 이발도 하고 목욕도 했는지 깔끔하다.
서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도광현이 계속 말했다.
“한국계 미국인 사업가 제이든 김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었고요.”
“제이든 김?”
“네, 편하게 쓰려면 가상의 인물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미술품으로 시작해서 지구 몇 바퀴를 돌다 온 돈이라 검찰 할아버지가 와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껏 쓰셔도 됩니다.”
도광현은 서진이 서준경이었을 때, 맺었던 인연이다.
한국 최고의 대학에 입학했던 놈이 사기꾼이 된 이유.
도광현의 부모님은 작은 중소기업을 운영했었다.
재벌급은 아니었지만 남부럽지 않게 살았고 화목한 가정이었다.
하지만 녀석의 집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악질적인 사모펀드가 이를 악물고 사냥을 시작한 거다.
도광현의 아버지는 놈들의 손아귀를 빠져나갈 수 없었고 결국 배임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었다.
배임 - 자기의 이익을 위해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국가나 회사에 재산상의 손해를 끼치는 경우.
업무상 배임죄는 공직자와 기업인에게 피할 수 없는 칼날과 같다.
돈을 주고받은 사실이 없어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A라는 사람이 B라는 회사의 물건이 좋아 샀어도.
-성능미달의 제품을 구입해서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
라는 말로 수사를 받게 될 수도 있다.
즉, 수사 기관의 재량에 따라 두들겨 팰 수 있다는 거다.
도광현의 아버지는 치욕을 당했고 수사 과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도광현의 복수는 사모펀드와 당시 그 수사에 관여했던 검사들을 향해 있다.
서진은 도광현의 그 복수를 도와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 과정까지는 믿을 수 있는 놈이다.
“고생했다.”
“그런데 어떻게 할 거예요?”
“뭘?”
“불릴 거잖아요?”
73억은 일반 사람은 만져 볼 일 없는 엄청난 돈이다.
하지만 서진의 목표를 이루기에는 푼돈이다.
앞으로 계속해서 불려 나가야 한다.
“생각해둔 게 있기는 한데.”
“뭔데요?”
서진은 도광현에게 계획을 이야기하려 했다.
그런데.
“잠깐만.”
서진은 손을 살짝 들며 말을 멈췄다.
창밖으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조금은 벗겨진 이마, 누가 봐도 사십 대 후반의 스타일.
누가 봐도 이동영 수사관이다.
‘서울에는 왜?’
이동영 수사관 역시 서울에서 근무하던 사람이다.
이곳에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동영 수사관의 행동이 수상하다.
초조한 표정으로 시계를 확인했고 품에서 수첩을 꺼내 몇 번이나 읽고 있다.
“미안, 나중에 얘기하자. 기다리고 있어.”
“네?”
서진은 도광현에게 사과한 후 커피숍을 나가 이동영 수사관의 뒤를 쫓았다.
이동영 수사관은 같은 곳을 계속해서 빙빙 돌고 있다.
수첩을 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딘가를 찾는 모양이다.
휴대폰을 사용하면 편한데, 스마트폰을 어려워하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
그러다가 이동영 수사관이 휙 하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서진도 계속해서 이동영 수사관의 뒤를 따랐다.
*
이동영 수사관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디야.’
서준경 검사를 성폭행으로 고소했던 실무관 진윤희가 이번엔 호프집을 오픈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상한 점이 많아.’
같이 일을 할 때의 그녀는 항상 돈에 쪼들렸었다.
오피스텔 관리비가 밀렸다며 징징거렸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서준경 검사 사망 후 실무관을 그만두더니 곧장 커피숍을 열었다.
‘그리고 또?’
처음 열었던 커피숍이 잘 되었다면 모른다.
하지만 커피를 잘 모르는 이동영 수사관이 볼 때도 장사가 썩 잘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또 가게를 연다고?’
진윤희는 짧은 기간에 몇억이나 되는 돈을 펑펑 써대고 있었다.
오랜 시간 범죄 현장에 있던 수사관으로서 그녀의 모든 행동은 뭔가 찝찝했다.
‘느낌이 와.’
이동영 수사관은 진윤희의 뒤에 서준경 검사를 모함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누군가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찾았다.’
대로변에서 멀지 않은 곳,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깔끔한 인테리어의 호프집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진윤희가 나와 파라솔을 펼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뭐지?’
이동영 수사관은 자신의 바로 뒤에서 어떤 인기척을 느꼈다.
천천히 고개를 틀어 뒤를 바라보는데.
‘어?’
김서진이 서 있다.
서준경 검사와 똑같이 무서운 눈으로 진윤희를 노려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