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2)>
*
서진이 벽 앞에 서 있었다.
지금의 서진이 아니라 과거의 서진이다.
차가운 눈으로 벽지를 바라보던 서진은 볼펜을 들고 거침없이 글씨를 적어갔다.
아버지 - 26.11%
김영준 - 24.27%
재정 건설의 주요 지분 현황이다.
이어서 김영준 검사장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그리더니 그 옆에 한주철이라는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툭 치며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이룬 것을 꿀꺽하려고? 안 되지.”
서진의 손가락이 김영준 검사장의 이름을 타고 슥 움직였다.
손가락이 멈춘 곳은 김윤환의 이름.
서진이 김윤환의 이름을 툭툭 건들며 계속 말을 이었다.
“회사를 가져가는 것은 막을 거야. 그런데 네가 이룬 것은 내가 가질 거야. 김윤환이 아니라.”
서진은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음산했다.
살 떨리는 욕망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서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은퇴를 생각한다고?”
김영준 검사장이 검찰에 남아 있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몇 년 후면 시간에 등을 떠밀려 옷을 벗어야 한다.
그게 세상의 순리다.
하지만 김영준 검사장은 권력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뒤를 생각하고 있다.
바로 정치다.
그래서 검찰을 장악하고 싶어 한다.
영원히...
정치판은 괴물이 득실거리는 곳이다.
쩌리가 되지 않으려면 힘이 필요하다.
돈 또는 인맥.
김영준 검사장은 그 힘을 검찰에 뒀다.
무소불위라 불리는 검찰의 힘을 빌려 정치권에 자리 잡을 생각이다.
그래서 이곳에 자신의 후계를 남겨두고 싶어 한다.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역시 핏줄.”
김영준 검사장이 후계로 생각한 것은 당연하지만 김윤환이다.
아들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이며 거역하지 못할 사람.
그리고 꼭두각시다.
서진의 입술이 움직였다.
“김윤환을 끌어내리면 김영준의 관심은 나에게 온다.”
김윤환이 사라지면 김영준 검사장은 그 대체재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완벽한 후보는 바로 서진이다.
서진이 김윤환의 앞에 체크 표시를 그었다.
“이놈부터.”
*
세상이 다시 색을 찾았다.
서진은 멍하니 낙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거야?’
서진은 잠시 사이코 메트리의 능력으로 본 것을 정리했다.
먼저 김영준 검사장의 지분.
검사장은 주식 백지 신탁 대상자다.
직계존비속이 보유한 주식을 모두 합쳐 3천만 원을 넘겨서는 안 된다.
‘그런데 24%?’
서진은 휴대폰을 들고 재정 건설을 검색했다.
지분 현황을 검색했지만 김영준 검사장의 이름은 없다.
‘그럼 차명을 쓰고 있나?’
가장 높은 가능성이다.
그리고 그 대상자는.
‘그게 한주철?’
한주철이 누군지는 모른다.
하지만 사이코 메트리에서 본 세상, 서진은 ‘한주철’이라는 이름을 적으며.
-아버지가 이룬 것을 꿀꺽하려고?
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게다가 지분 현황을 봐도 그렇다.
한주철이라는 사람이 김영준 검사장의 24.27%와 동일한 지분을 갖고 있었다.
‘흠...’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 김영준 검사장과 한주철이 한배를 탔을 가능성이 꽤 높다.
‘그건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서진의 생각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 시선이 김윤환의 이름에 닿았다.
과거의 서진은 김윤환을 끌어내리려 했다.
‘그 이유가.’
김영준 검사장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다.
‘김윤환이 없다면 김영준 검사장은 나에게 날개를 달아줄 거야.’
그럼 서진은 그 날개를 타고.
“김영준을 부숴버리는 거지.”
서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과거의 서진처럼 김윤환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이어서 과거의 서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네가 어떤 놈인지 궁금했는데... 마음에 드네.”
서진은 책장을 들어낸 후 벽지를 북북 뜯기 시작했다.
적힌 내용과 계획은 누구에게도 보여서 안 된다.
***
강원 지검.
지검장은 은퇴를 준비하며 정계를 기웃거리는 사람이다.
지검장이 찻잔을 내려두며 앞을 바라봤다.
“김영준이 조카라고?”
“네.”
“김영준이는 잘 있고?”
“네, 잘 있습니다.”
강원 지검으로의 첫 출근 날.
서진은 지검장과 면담을 하고 있었다.
지검장은 몹시 귀찮다는 눈으로 서진을 보다가 손에 든 서류를 툭 내려두며 말했다.
“하나 묻자. 이거 진짜 다 네가 한 거야?”
자매 살인을 시작으로 유아성과 기획 부동산 등등.
단 몇 달 만에 신입 검사가 해냈다고 보기는 무리가 있었다.
“동남 애들이 김영준 눈치 보면서 너한테 밀어준 것은 아니고?”
“아닙니다.”
지검장은 믿지 못하는 눈이었다.
그러다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열심히 해. 가봐.”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서진은 지검장실을 나와 밖으로 향했다.
이번에 가는 곳은 부장검사실이다.
서진이 배정받은 곳은 형사2부.
부장검사실로 향하며 서진은 쭉 기지개를 켰다.
‘부장검사도 비슷하겠네.’
검사장이라는 빽이 단점이 되기도 한다.
혈연, 지연, 학연으로 움직이는 사회에서 그동안 해왔던 업력을 깎아내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초반에는 이런 분위기가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생각을 하며 부장검사실의 문을 열었는데.
‘어라.’
부장검사만 있는 게 아니었다.
부장검사를 비롯해 나머지 4명의 검사가 앉아 있었다.
한창 일이 바쁠 시간에 왜 여기 와서 죽치고 있나 했더니.
“너냐?”
부장검사가 대뜸 물어본다.
서진이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십니까? 김서진이라고 합니다.”
하도 당해서 또 텃세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부장검사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환하게 웃는다.
가식적인 표정이 아니라 진심이다.
“오는데 안 힘들었어? 커피 줄까?”
악수를 시원하게 하더니 자신의 옆에 앉으라며 소파 옆을 탁탁 친다.
“앉아. 앉아.”
“아, 네.”
서진이 자리하자 다른 검사들이 반색하며 한마디씩 했다.
“유튜브에서 본 것보다 실물이 훨씬 괜찮은데?”
“난 ‘법대로 하겠습니다.’ 그 말에 감명받았어. 하하하.”
예상했던 텃세나 깔보는 분위기 따위는 없었다.
진심으로 반겨줬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후 부장검사가 입을 열었다.
“이명수 검사님께 들었다. 네가 그렇게 죽여준다며?”
“네? 이명수 검사님이요?”
“어, 네 칭찬을 엄청나게 하던데?”
이명수 검사, 이 양반...
며칠 전만 해도 자신은 도와줄 게 아무것도 없다며 이렇게 말했었다.
-야, 이 나이에 이제야 부장이라는 딱지를 달아 본다. 그런데, 내가 널 어떻게 도와줘? 내 똥 치우기도 바쁜데. 힘들면 연락해. 술은 사줄게. 인생은 혼자야.
그런데 뒤에서 서진의 칭찬을 열심히 하고 다녔다.
형사 2부에는 소문이 쫙 돌 정도로.
-내가 허접하게 키웠을 것 같아? 뭐, 내가 키운 것은 아니지만. 그놈, 꽤 괜찮아. 키워봐.
부장검사가 찻잔을 내려두며 입을 열었다.
“이명수 검사님이 말할 때만 해도 안 믿었어. 네가 브리핑하는 게 방송에 나올 때, 그저 잘생긴 애송이를 앉혀두고 얼굴마담 시키는 줄 알았거든.”
하긴 오해할 수도 있다.
동남 지청에서 그나마 반반한 얼굴은 서진이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딱 알았어. 얼굴마담 시키려면 네가 아니지. 그 이소희라는 애. 걔를 시켰겠지.”
서진의 평가가 바뀐 이유 중 하나다.
이소희를 보는 순간 부장검사는.
-아, 이명수 검사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김서진은 얼굴마담이 아니었어.
정말 좋아했다고 한다.
그게 사람을 앉혀두고 할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맞은편에 앉은 여 검사가 부장검사를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부장검사님도 참... 왜 그런 농담을 하세요. 얘도 꽤 잘생겼는데.”
그녀의 타박에 옆에 앉은 다른 검사가 입을 열었다.
“몰라서 그래? 원래 부장검사님이 멀끔한 애들 안 좋아하잖아?”
검사들이 낄낄거렸다.
하지만 그 말투나 행동이 예의 없어 보이지 않는다.
상당히 괜찮은 분위기다.
부장검사가 다른 검사를 ‘큼큼’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뭐, 어쨌든. 사건 풀어가는 능력이 좋다고 들었는데.”
“아닙니다. 열심히 했는데 운 좋게...”
“겸손 떨지 마. 운도 한두 번이지. 그런 게 연이어 터진다고? 초능력이라도 있냐? 그리고 운이라 해도 이 정도 좋은 놈은 대환영이지.”
초능력이라는 말에 서진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고 부장검사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맡을 업무는 강력, 마약, 조직폭력, 성폭력, 방화, 실화 그리고 소년이야.”
검사는 하나의 분야만 도맡지 않는다.
게다가 지방은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에 수도권보다 더 많은 분야를 손대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때였다.
부장검사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탁탁탁 내려뒀다.
서진이 그동안 해결한 사건의 기록이다.
이걸 또 왜 내려놓고 있을까 생각할 때 부장검사의 시선이 서진에게 향했다.
“너 온다고 해서 조사 좀 했어. 기록도 보고 그쪽 수사관들한테 물어도 보고. 마지막으로 이명수 검사님께 네 포지션을 들었지. 프리롤이라며? 바운더리에 연연하지 말고 동남에서 했던 것처럼만 해라. 부담 갖지 말고.”
그런 말이 더 부담된다.
서진은 어깨에 바위가 올라온 것 같았다.
사이코 메트리의 능력이 있지만 그게 마음대로 조절되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대답은 해야 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동시에 여 검사가 기다렸다는 듯 파일철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뭡니까?”
여 검사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우리 미제 목록.”
부장검사가 서진의 목에 팔을 두르며 굵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파이팅!”
*
부장 검사실에서 나온 서진은 자신의 사무실을 찾아 이동했고 여 검사가 안내했다.
가는 길이 같다면서.
여 검사의 이름은 한정아.
이제 6년 차, 30대 중후반, 아직 미혼이다.
한정아 검사는 사무실로 안내하는 한편 형사 2부에 대해서도 설명해줬다.
“우리 부서는 정치인, 지역 유지, 깡패 등 대물만 나오면 헛물을 켜는 것으로 유명해. 열심히 해보자고 팔을 걷어붙였지만 걔들이 데려온 게 서울의 유명 변호사였어. 그것도 수십 명이나.”
검사와 변호사가 붙으면 변호사가 승리할 확률이 높다.
검사는 특별팀이 편성되지 않는 이상 여러 사건을 동시에 봐야 한다.
하지만 변호사는 이 악물고 하나만 파고들 수 있고 그 차이는 크다.
그런데 그런 변호사가 수십 명이 온다면 결과는 뻔하다.
놈들은 법망을 피해 요리조리 변명을 늘어놨고 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감형.
-집행유예.
“열심히 수사했는데 자유의 몸이 되는 놈들을 보면 정말 힘이 쭉 빠져. 그런 일이 반복되니까 뇌물 받고 봐주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듣고 있고. 정말 욕 나오지.”
그러던 와중에 서진이 온 것이다.
운도 좋고 실력도 좋고 빽도 대단하다.
한정아 검사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넌 우리 토템이야.”
검사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싶었지만 이곳의 분위기는 즐거웠다.
그리고 잠시 후.
“자, 여기야.”
한정아 검사가 한 사무실의 문 앞에 섰다.
331호.
이곳이 앞으로 서진이 생활할 곳이다.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진이 허리를 굽히자 한정아 검사가 손을 흔들며 떠났다.
그리고 서진은 몸을 틀어 문고리를 잡았다.
언제나 새로운 환경에 들어서는 것은 설렌다.
또 다른 시작이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수사관과 실무관은 보이지 않는다.
서진은 적막한 사무실을 둘러보며 자신을 책상으로 이동했다.
책상에는 전에 있던 검사가 남겨둔 사건이 놓여 있다.
동남에서는 신임이라고 배려를 해줬지만 이곳은 얄짤 없다.
처음부터 가득하다.
서진이 사건을 툭툭 만지며 책상을 손으로 쓸었다.
그때.
딸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진이 문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사십 대 후반, 중년의 남성.
조금은 벗겨진 이마가 보인다.
서진과 눈을 마주친 남성이 조용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동영 수사관입니다.”
그런데 그를 마주한 서진의 눈이 떨려왔다.
“...이동영 수사관님?”
서진이 서준경이었을 때, 동고동락했던 수사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