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1)>
***
지청에서 멀지 않은 주택가.
삐리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방 2개에 작은 거실, 15평 빌라였다.
이소희가 보따리를 손에 들고 비틀비틀 안으로 들어왔다.
‘메롱이네.’
술을 많이 마신 것은 아닌데 힘들었다.
며칠 동안 밤을 새운 것도 있고.
“...발령이라고? 모르겠다.”
이소희는 거실의 불을 켜지 않았다.
거실 바닥에 보따리를 던져둔 후 쓰러지듯 소파에 엎어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엎어져 있던 그녀의 시선이 바닥에 뒹구는 보따리로 향했다.
저 안에는 봐야 할 기록물이 가득하다.
당장 일을 시작해야 내일 출근하며 가져갈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이소희의 머릿속에 낮에 지청장실에서 있던 일이 떠올랐다.
지청장이 서울로 가자 말했을 때 이소희는 눈치를 보고 있었다.
서울로 간다고 말하면 앞으로 난처한 일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청장과 부장검사의 기분을 건들까 입을 다물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이소희가 중얼거렸다.
“바보네, 바보야.”
그런데 서진은 달랐다.
그 말을 듣자마자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저는 아직 강원도에 있고 싶습니다.
이소희는 물론이고 지청장과 부장검사들도 깜짝 놀랐다.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히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는 모습.
그러면서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능력.
‘그것도 부럽다.’
그리고 방금.
이소희는 고깃집에서 서진과 마주했고 서울이 아니라 본청으로 갈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생각과 다른 인사 명령을 들으면 싫어할 줄 알았다.
지금껏 이소희가 봤던 서진은 모든 것을 주도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진의 반응은 그녀의 생각과 달랐다.
분명.
‘기대하고 있었어.’
본청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곳에 보물 상자가 숨겨져 있는 것처럼 좋아했다.
서진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가고 싶다.”
이소희는 소파에 놓인 베개를 들고 얼굴을 파묻었다.
이소희는 그녀 스스로 눈치만 보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도 서진처럼 당당하게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지이이잉.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소희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손만 움직여 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시선을 틀어 발신 번호를 확인했다.
-엄마.
이소희의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상체를 일으키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랫입술을 꾹 깨문 후 휴대폰을 귀에 댔다.
어두운 거실, 이소희의 목소리가 울렸다.
“안 가. 안 갈 거야. 그런데 이번에는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의원님한테 힘 써 보라고 해. 여기 남기던가 땅끝 마을로 보내던가.”
휴대폰 너머는 적막했다.
어떤 목소리도 흐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괜찮겠어?
“어.”
스르륵 휴대폰을 내려두는 이소희의 눈동자는 차가웠다.
이미 내려둔 휴대폰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희야. 의원님은 널 사랑해...
이소희는 통화 종료 버튼을 꾹 눌렀다.
그때, 다시 휴대폰이 드르륵 진동했고 이소희가 신경질적인 눈으로 발신 번호를 향했다.
-김서진.
방금 만나고 헤어졌는데.
이소희가 통화버튼을 누르며 귀에 댔다.
“어.”
-입가심으로 맥주?
“뭔 소리야? 배불러.”
-치킨 먹을 배는 있다며? 집 앞이니까 나와.
“야.”
하지만 이미 통화는 종료됐다.
정말 제멋대로인 놈.
이소희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몸을 일으켰다.
*
이소희의 집에서 멀지 않은 호프집이었다.
서진이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대충은 예상하거든.”
“...뭘 예상해?”
“네가 동남군에 남아 있는 이유.”
“어?”
이소희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서진이 맥주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우리 작은아버지가 누군지 알지?”
뜬금없는 말에 이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영준 검사장님.”
“어, 그런데 작은아버지가 나를 별로 안 좋아해. 서울 가면 죽이려고 들걸? 자기 아들보다 잘나가는 게 싫은가 봐. 그런 거 있잖아? 쌩판 모르는 사람이 건물 가진 것은 괜찮아도 옆집 사람 연봉이 10만 원 오르면 배 아픈 거.”
“그래서 안 가는 거였어?”
“그런 거지.”
서진은 일부러 자신의 이야기를 과장되게 풀어냈다.
그리고.
“자세히는 모르지만 너도 비슷하지?”
잠시 멈칫거렸던 이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비슷하네.”
“그런데 이번에는 걱정하지 마. 본청으로 이동할 테니까.”
“뭐야, 또 무당 흉내야?”
이소희가 픽 웃으며 맥주를 손에 들었다.
가끔이지만 서진은 뭔가를 소름 끼치게 맞춰낸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서진이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 발령은 정치적인 문제야. 지청장님이 서울로 가는 이유가 뭘 것 같아?”
정권의 사냥개로 낙점받아서다.
“그런데 이걸 누군가 막는다? 막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지금은 명분이 없어.”
“...명분?”
지금 집권당은 한민당이다.
그런데 동남 지청에서 한민당 소속인 엄일섭을 잡았다.
“한민당은 국민에게 포장할 거야.”
-전동국 지청장은 우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우리는 전동국 지청장을 서울로 끌고 온다.
-권력과 상관없이 수사할 수 있도록 권한도 늘려주겠다.
“총선이 코앞이야. 그런데 이걸 반대할 정치인이 있을까?”
당연하지만 없다.
지금은 정치인들이 국민의 눈치를 보는 유일한 시기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참아야 할 거다.
“고작 신임 검사 두 명의 앞길을 막으면서까지 무리수를 둘 사람은 없어. 우리가 뭐 대단하다고.”
“......”
“게다가 서울이나 경기도도 아니고 강원 본청이잖아?”
이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이십 대인 그녀가 정치적인 관계를 이해하기는 뭔가 어렵다.
하지만 서진의 말이 진짜로 이뤄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소희가 기분 좋게 입을 열었다.
“기분 좋아졌어. 좋아! 오늘 치킨은 내가 쏜다.”
“응?”
이소희가 방긋 웃으며 메뉴판을 탁탁 넘겼다.
“시켜, 시켜. 뭐 사줄까?”
“잠깐만, 나 하나 궁금한 거 있어.”
메뉴판을 넘기던 이소희가 고개를 들어 ‘뭐? 말해?’라는 눈으로 서진을 바라봤다.
서진은 ‘왜 다른 남자들에게 쌀쌀하지?’를 묻고 싶었다.
이소희를 지켜보면 여자들에게는 꽤 친절한데 남자를 상대로는 찬바람이 태풍처럼 불기 때문이다.
“뭔데? 뭐?”
하지만 묻지 않는다.
이번에도 이소희 나름의 사연이 있을 것 같아서다.
“...2만원 넘는 거 시켜도 되냐?”
이소희가 서진을 째려봤다.
*
“강원 본청 정도는 괜찮아. 가라고 해.”
그 시각,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휴대폰을 내려둔 남자가 몸을 일으키더니 저벅, 저벅 창가로 걸어갔다.
남자가 창 앞에 서더니 시선을 내렸다.
아래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졌다.
남자의 얼굴에 빛의 흔들림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밤을 수놓는 불빛을 보던 남자가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이소희...”
그 목소리에는 조금의 언짢음과 많은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
며칠 후.
사무실로 들어온 이명수 검사장이 팔짱을 끼고 문에 비스듬히 기대섰다.
그리고 하는 말이.
“김서진, 짐 싸.”
“네?”
“왜? 이번에도 싫다고 하게?”
인사 명령이 내려왔다.
[김서진 동남 지청 -> 강원 지검.
이소희 동남 지청 -> 강원 지검.]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가야죠. 정식 명령인데요.”
임정택 수사관과 도민지 실무관이 아쉬운 눈으로 서진을 향했다.
비록 얼마 안 된 시간이지만 거의 24시간을 붙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서진은 떠난다.
“한쪽으로는 아쉬운데요. 또 다르게 생각하면 너무 좋아요. 제시간에 퇴근할 수 있잖아요.”
임정택 수사관의 농담에 서진이 슬쩍 웃으며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오늘 우리 팀 회식해야죠. 그동안 고생하셨으니까 오늘은 봉인해뒀던 아빠 카드 쓰겠습니다. 아시죠? 돈 많습니다.”
“아빠 카드라니, 갑자기 검사님이 떠나는 게 너무너무 아쉬워졌어요.”
옆에서 도민지 실무관이 ‘나도, 나도.’라고 말하고 있다.
이명수 검사가 서진의 팔을 툭 쳤다.
“잠깐 나 좀 보자.”
*
서진과 이명수 검사는 야외 휴게실에 섰다.
이명수 검사가 담배를 물며 입을 열었다.
“나도 가는 거 알지?”
강원 지검에 가는 것은 서진과 이소희만이 아니다.
그곳에 이명수 검사도 포함되어 있다.
“아, 네.”
“다른 직원들 생각해서 대놓고 좋아하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이번에 꽤 많은 검사가 이동한다.
일부는 수도권으로 빠지고 경상도와 전라도로 이동하는 사람도 있다.
생각해보면 시골 바닥에 30명에 가까운 검사가 붙어있는 게 더 웃긴 일이었다.
하지만 한 번에 모든 사람이 이동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람도 많다.
형사 1부 이재승 검사라던가.
어쨌든, 동남군을 떠난다고 좋아하는 티를 내면 그들에게 꽤 실례되는 짓을 하는 거다.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명수 검사가 담뱃재를 툭툭 턴 후 계속 말했다.
“본청에서 너를 뭐라고 생각할 것 같아?”
본청으로 간다고 해도 이명수 검사의 위치는 흔들림이 없을 거다.
짬밥이 있고 어떤 식으로 유배지에 들어갔는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진은 다르다.
급으로 따지면 폐급.
즉, 실력이 모자라 동남군에 떨어진 놈.
그들은 그렇게 여길 거다.
이명수 검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쩌면 작은아빠 빽으로 실력도 없는 놈이 본청에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이소희도 힘들겠네요.”
“아니, 걔는 괜찮아.”
똑같은 동남군 출신이다.
그런데 이소희는 괜찮다고 단호히 말했다.
서진이 눈을 찌푸리자 이명수 검사가 한 마디로 답을 내려줬다.
“걔는 예쁘잖아. 얼굴로 따지면 하버드 수석이야.”
확 이해됐다.
외모지상주의.
서진도 얼굴이 못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소희를 향한 남자들의 친절은 상상 이상이다.
며칠 전 이정우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소희를 웃기겠다고.
-웃기는 이야기 해줄까요?
-아뇨.
-사각형 동생이 누군지 아세요?
-모르겠는데요.
-삼각형이래요. 4하고 3. 하하하하.
-네.
-그럼, 영화 좋아하세요?
-아뇨.
-좋아하는 게 뭐죠?
-없어요.
서진이 말리지 않았다면 이정우는 더 비참했을 거다.
이명수 검사가 서진의 등을 토닥였다.
“고생해라. 힘들면 내 방으로 찾아오고. 술은 사줄 테니까.”
서진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실 그런 시선은 익숙하다.
서준경 검사였을 때의 서진은 방송통신대 출신이었다.
사람들은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듯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언제나 대학 간판의 한계에 부딪혀야 했다.
그 수군거림이 지금도 귓가에 선하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우습지도 않다.
실력과 실적을 보여주면 그런 시선은 자연스레 사라질 거다.
서진이 입을 열었다.
“자신 있습니다.”
껍데기는 신임이지만 이 속에는 베테랑이 숨어 있다.
그들의 눈빛을 바꾸고 본청에서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을 거다.
그리고 그 기회는 이미 손아귀에 놓여 있다.
***
주말을 이용해 서진은 짐을 꾸리고 있었다.
이제 본청 근처로 이사를 간다.
관사가 있기는 하지만 이미 다른 검사들이 자리하고 있어서 들어가기도 어렵고.
‘저거...’
어머니의 취향인 엘리자베스 느낌의 식탁이나 중세 유럽에서 사용할 것 같은 소파를 둘 공간도 없다.
그래서 이번에도 30평형대의 아파트를 구했다.
책장에서 책을 빼서 바인더 끈으로 꾹꾹 묶고 있는데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뭐해?
“이사 준비.”
-포장 이사잖아?
포장 이사면 모든 것을 다 해준다.
이사 후 마지막 정리는 스스로 해야 하지만 그전까지는 손을 대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기본적인 것은 해두려고.”
-도와줄까? 2시간이면 도착할 것 같은데. 오랜만에 바다 구경도 하고.
“됐다.”
-아니야. 도와줄게.
“혼자 하는 게 편해.”
서진이 조용히 웃으며 책장에 손을 가져갔다.
몇 권의 책을 더 빼는데.
‘어?’
책장의 뒤가 막혀 있지 않은 디자인이다.
그래서 책을 빼면 벽지가 그대로 보이는데.
낙서 같은 게 지저분하게 적혀 있다.
‘뭐지?’
서진은 서둘러 책을 빼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글씨는.
-김윤환 : 차분한 척 보이지만 기분파.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라왔기 때문에 참을성이 떨어진다.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 이것을 이용하면?
이 글씨는 김서진이 적은 거다.
그러니까 지금의 서진이 아니라 과거의 서진.
서진의 눈이 찌푸려질 때였다.
그 순간 세상이 색을 잃었다.
사이코 메트리의 능력이 발현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