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를 내지 않은 사람. -(1)>
“서진아, 밥이라도 같이 먹고 싶었는데, 어렵겠어.”
“괜찮습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서진은 조용히 몸을 일으킨 후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자리를 떠나기 위해 몸을 돌리는데 김영준 검사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서진아.”
“네, 작은 아버지.”
“그건 지워야지?”
김영준 검사장의 손가락이 서진의 휴대폰을 가리키고 있었다.
박상영 부장의 음성이 들어간 녹취 파일을 지우라는 거다.
“당연하죠.”
서진이 휴대폰 화면을 보인 후 녹취파일을 삭제했다.
김영준 검사장이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서진의 시원한 행동에 작은 신뢰가 싹 튼 것 같다.
“고맙다. 그럼 나중에 보자.”
김영준 검사장의 시선이 다시 김윤환에게 옮겨졌다.
서진을 볼 때와 달리 악귀 같은 눈빛으로 잡아먹을 듯이 노려본다.
그리고 서진이 떠나며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사나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주변 사람이 네 수준이야.”
자신의 이름을 팔고 다닌 것에 대해 화를 내는 게 아니다.
양아치와 어울린 것을 꾸짖는 거다.
“같잖은 것과 어울리지 마. 너도 똑같이 양아치로 취급되는 거야. 그럼, 난 양아치의 애비가 되는 것이고.”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김영준 검사장 본인의 평판이었다.
“아, 아버지. 죄송해요.”
김윤환이 다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김영준 검사장은 용서하지 않았다.
가차 없이 팔을 휘둘렀다.
짝! 짝! 짝!
*
‘클라우드가 있는데...’
차에 오른 서진은 시동을 걸며 휴대폰을 바라봤다.
방금 김영준 검사장의 앞에서 삭제한 녹취 파일이 그대로 보인다.
삭제하기 전에 이미 클라우드로 옮겨뒀기 때문이다.
서진이 픽 웃으며 휴대폰을 조수석에 던져뒀다.
이런 녹취 파일로 김윤환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사용될지 인생은 모르는 것, 차곡차곡 모아둘 필요는 있었다.
***
“형!”
동생 진영이 서진을 반겼다.
“어머니, 아버지! 형 왔어요. 형!”
현관에서부터 요란을 떨고 있다.
녀석의 소란에 텔레비전을 보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달려왔다.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밥은? 밥은 먹었어?”
어머니는 역시 서진의 밥부터 걱정했다.
서진이 배를 슬쩍 만지며 입을 열었다.
“배고파요.”
“뭐 해줄까? 먹고 싶은 것 있어?”
갑작스레 늦게 들어와서 밥 차려 달라고 말하기는 조금 죄송스러웠다.
“치킨 시켜 먹을까요?”
아버지가 눈을 반짝였다.
“맥주도?”
“좋죠.”
어머니가 치킨을 주문할 동안 진영이 팔을 걷으며 냉장고로 향했다.
“치킨만 먹기 그러니까 가볍게 뭐 해줄까? 내가 이래봬도 호텔에서 접시 닦는 놈이잖아. 어떤 게 좋을까, 파스타?”
“그래, 한번 해봐.”
“기다려. 호텔 설거지 파트의 실력을 보여줄 게.”
진영이 의욕적으로 면을 삶기 시작했다.
적당량의 소금을 넣는 게 실력이라나 뭐라나.
설거지라고 하지만 나름 이태리에 단기 연수도 다녀올 정도로 열성이다.
잠시 후, 진영이 제법 맛있게 보이는 토마토 파스타를 서진의 앞으로 슥 밀어 넣었다.
“먹어봐.”
서진이 젓가락을 들자 아버지가 끌끌 웃는다.
“난 라면이 낫더라.”
“아버지가 맛을 잘 모르는 거죠.”
“내가 먹어보면 되겠네.”
서진이 파스타를 한 입 먹고 젓가락을 탁 내려뒀다.
진영이 긴장된 표정으로 서진을 바라봤다.
“...어때?”
“재능은 없는 거로 하자.”
“형!”
“농담이야. 맛있어.”
“정말이야?”
“어, 맛있어.”
“진짜지?”
진영은 몇 번이나 물어봤고 확인했다.
서진이 접시를 깨끗이 비운 뒤에야 안심했는지 만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서진아, 다 먹었으면 이리 와봐.”
이번엔 어머니였다.
서진을 방으로 안내한다.
“이게 다 뭐예요?”
서진의 방에 박스가 한 가득 보였다.
누가 보면 곧 이사갈 사람의 집처럼 여겨질 정도다.
황당한 표정의 서진을 보며 어머니가 고개를 절래 저었다.
“네 기사야.”
“...기사요?”
진영이 서진의 옆에 섰다.
“아버지가 전부 산거야. 저기는 형 이름이 나온 신문 모아둔 거고 이쪽은 인터넷 기사 인쇄한 거고. 쓸데없는 어뷰징 기사까지도 죄다 인쇄하셨다니까. 장남 사랑이 대단하시지?”
아버지가 신문을 모아뒀다는 말을 전화로 듣기는 했다.
그런데, 이정도로 쌓여 있을지는 몰랐다.
치워 달라 말하고 싶지만 아버지가 흐뭇하게 웃고 계셔서 차마 입을 열 수는 없었다.
***
-서울 공기는 어때? 오늘 미세먼지 최악이던데.
다음 날 아침.
한정식 집에 앉아 서류를 넘기던 서진은 이소희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가 조심스레 묻는다.
-...그런데 언제 올 거야.
이소희는 밤을 샜다.
위준상 의원에 박상영까지, 갑작스레 닥친 일로 정신이 없다.
그런데, 서진까지 없으니 더 답답한 모양이다.
“4시까지 갈 게. 힘들면 이명수 검사님께 도와달라고 해.”
-하하,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당연히 불가능하다.
군대로 따지면 이등병이 병장에게 가서 힘드니까 삽질 좀 도와 달라고 하는 거다.
서진이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 금방 갈 게. 조금만 고생하고 있어.”
이소희와 통화를 종료 후 시선을 다시 서류로 옮겼다.
적힌 이름이 익숙하다.
‘조선봉.’
송파 정 지역의 국회의원이다.
말 그대로 초, 중, 고를 이곳에서 나왔고 4선이나 해먹었다.
정치 전문 기자들은 조선봉이 버티는 이상 이 지역에 새로운 인물이 나기는 어렵다고 평가한다.
즉, 동남군 엄일섭 의원의 승리할 가능성은 상당히 저조하다.
‘흠...’
서진은 엄일섭 의원을 송파에 박아 두고 권력 싸움의 선봉에 세울 생각이다.
그리고 그 계획은 머릿속에 세워졌다.
-엄일섭 의원을 저격수로 만든다.
-조선봉 의원의 자식 사랑을 까발린다.
하지만 현실과 계획은 다르다.
현실은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모르며 상대의 반격 역시 예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곳을 찾았다.
서진이 손목을 틀어 시간을 확인했다.
동시에 드르륵 문이 열리고 50대 초반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은 피곤으로 가득했고 머리는 부스스한 남자.
이렇게 말하면 미안하지만 정말 촌스럽게 생겼다.
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김서진입니다.”
남자는 불편한 표정으로 서진의 위아래를 살폈다.
“전화한 분?”
“네, 강원도 동남 지청에서 근무하는 김서진 검사입니다.”
“뭐, 우진욱입니다. 아시겠지만 조선봉 의원님의 보좌관이고요.”
조선봉 의원에게는 두 명의 보좌관이 있다.
오른팔 이상주와 왼팔 우진욱.
조선봉 의원은 이상주를 편애한다.
술자리가 있으면 이 지역을 이상주에게 물려줄 것이란 말을 쉽게 내뱉고 다닌다.
-조선봉이 무너지면 다음 후보는 이상주다.
서진은 그렇게 예상했다.
그리고 아무리 무던한 성격이라 해도 대놓고 차별하면 시기심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남자의 질투는 생각보다 무섭다.
그래서 우진욱을 선택했다.
‘투 트랙.’
엄일섭 의원이 저격하고 내부에서 우진욱 보좌관이 백병전을 벌인다.
그럼 조선봉 의원은 무너질 수밖에 없을 거다.
서진의 계획이었다.
“앉으시죠.”
“중요한 말씀이 있다고 해서 나왔는데, 짧게 말씀해 주세요. 총선이 가까워지면서 일이 바빠졌거든요.”
잠을 못 잤는지 눈이 벌겋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음식이 가득했는데, 우진욱 보좌관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차라리 이 시간에 잠을 자고 싶어 하는 눈빛이 역력하다.
우진욱 보좌관이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청탁? 아니면 소스?”
우진욱 보좌관은 어린 검사가 따로 만나자고 연락한 이유를 두 가지로 압축 시켰다.
자리에 대한 청탁 또는 상대 당의 국회의원을 부술 소스.
“그것도 아니면 협박? 셋 중에 하나 아닌가요? 청탁은 패스. 총선을 앞두고 위험하거든. 소스는 환영하고요. 협박은 아니었으면 하네요. 협박을 하면 더 크게 부수는 게 우리 의원님 스타일이라, 젊은 검사님 안 다쳤으면 하거든요.”
“보통 그런 이유로 연락하고 식사를 하나요?”
“검사니까요. 다른 의미를 찾는 게 어렵지 않나? 뭐, 뭐가됐든 말씀하세요. 난 밥 먹고 있을 테니까.”
우진욱 보좌관이 넥타이를 풀더니 젓가락을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종일 굶은 사람처럼 씹지도 않고 넘긴다.
정말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것 같다.
참 정신없는 사람, 그런데 우진욱 보좌관이 하는 모든 행동은 격의가 없었다.
서진이 어려서 무시하는 것은 아니고 원래 그런 성격 같다.
서진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셋 중의 하나는 아니고요.”
“그럼?”
“우진욱 보좌관님이 궁금해서 연락했습니다.”
우진욱 보좌관이 젓가락으로 나물 집던 것을 멈추고 눈동자만 움직여 서진을 향했다.
“나요? 나를 왜?”
우진욱 보좌관, 54세.
운동권 출신으로 조선봉 의원의 정치 인생과 함께 했다.
하지만 영원한 3인자.
이상주에게 밀리며 절대 2인자가 될 수 없는 운명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 스스로도 알고 있고 감추고 싶어 한다.
서진이 서준경 검사였던 시절, 조선봉 의원과 몇 번 술자리를 가진 적 있다.
다른 사람이 있는 그 자리에서도 우진욱 보좌관은 갖은 무시를 당했었다.
-넌 그래서 안 돼.
-멍청한 새끼.
-넌 딱 술 상무야.
조선봉 의원은 이렇게 병을 주고.
-내가 너 믿는 거 알지?
-끝까지 함께 가자.
-네 딸 주례는 나한테 맡겨야 해. 내가 꼭 해주고 싶어서 그래.
이런 개소리로 약을 줬다.
어르고 달래고, 인간을 상대로 당근과 채찍을 주며 길들이는 수법.
우진욱 보좌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존심 상하는 상황에서도 끌끌 웃으며 바보처럼 자세를 낮췄었다.
그 생각을 하다 보니, 서진이 조선봉 의원에게 들었던 치욕도 함께 떠올랐다.
-일개 검사가 나를 잡는다고?
-내가 검찰총장과 각별한 사이인 것 몰라?
-확!
서진은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어쨌든, 지금부터 그 역린을 건드려 우진욱 보좌관을 손아귀에 움켜쥘 생각이다.
그리고 우진욱 보좌관의 내부 총질을 통해 엄일섭 의원을 송파구의 국회의원으로 만든다.
조선봉 의원은 국민 앞에 무릎 꿇고 두 손 두 발 빌며 사죄해야 할 거다.
그 모든 준비는 끝났고 지금부터 그 첫걸음이 시작된다.
서진이 술잔을 손에 들었다.
“한잔 드시겠습니까?”
“한잔만 주세요.”
우진욱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였고 서진이 두 손으로 공손히 술병을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보며 서진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깝네.’
검사 생활을 하며 많은 정치인을 만나봤지만 이렇게 수더분한 사람은 처음이다.
기억하면 조선봉 의원이 하는 대부분의 일을 우진욱 보좌관이 처리한다고 들었다.
‘실력도 좋고.’
하지만 거기까지다.
지금 서진에게는 착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다.
나쁘더라도 당선되어 도움될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데, 술이 채워지는 그 순간이었다.
세상이 색을 잃고 흑백으로 물들었다.
*
-송파구 정 당선 확정! 기호 2번 우진욱!
텔레비전 화면에 당선 확정! 이라는 글자가 우진욱의 머리 위에 꽝! 하고 박혔다.
우진욱이다.
조선봉이나 이상주, 엄일섭이 아니라 우진욱 보좌관!
그가 당선됐다.
동시에 선거 사무실에 앉아 방송을 보던 엄일섭이 고개를 푹 숙이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씨발...”
어깨까지 가늘게 떠는 것을 보면 울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이번 패배를 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표정이다.
반전은 없었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고 있다.
하지만 한숨이 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나 보다.
곳곳에서 ‘하...’ 한숨이 흘렀다.
이어서 장면의 장소가 바뀌었다.
나타난 곳은 서진의 자취방, 서진은 소주를 마시며 선거 방송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당선 확정이 나는 순간 소주를 털어 넣은 뒤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 테이블에 놓인 서진의 휴대폰이 ‘지이잉’ 진동했다.
그런데 발신번호가 우진욱 보좌관.
서진이 손가락으로 툭 스피커폰을 누르며 활짝 웃었다.
“축하드립니다. 의원님.”
-다 김서진 검사 덕이에요. 하하하!
*
세상이 다시 색을 찾았고 서진의 눈동자는 우진욱 보좌관을 향했다.
부스스한 머리의 우진욱 보좌관이 술잔을 내려두며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말씀해 주세요. 나를 왜 보자고 했습니까?”
서진이 끌끌끌 웃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