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1)>
***
서진이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지청장 전동국과 형사 4부 부장 검사 김관용이었다.
전동국 지청장이 창밖을 내다보며 입을 열었다.
“관용아. 여기에 몇 년 갇혀 있었지?”
김관용 부장 검사가 쓰게 웃었다.
유배 생활을 셀 필요가 있을까?
처음에는 다시 중앙으로 진입할 것을 믿으며 세월을 보냈지만 지금은 도시에 있는 가족들에게 월급을 보내주기 위해 버티는 중이다.
전동국 지청장의 말이 이어졌다.
“김서진, 저놈을 보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 앞뒤 안 가리고 공정 사회를 만들겠다며 설치고 다닐 때. 그래서 그런지 요즘 검사가 된 기분을 다시 느끼고 있어. 넌 어때?”
“저도 느끼고 있습니다. 자매 살인 사건부터 이번 유아성까지, 조용했던 지청이 시끌시끌하니까요.”
“관용아, 지금까지 포기하고 있었는데, 다시 서울 가야겠다.”
“네?”
“가야겠다고. 서울. 검사라는 직업 가지고 있을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한 번 설치고 싶어졌어.”
전동국 지청장이 블라인드를 올리며 몸을 틀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느릿하니 말했다.
“시나리오 한번 만들어 봐.”
김관용 부장 검사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전동국 지청장은 여당 대표의 아들을 교도소에 집어넣고 정치권을 상대로 칼을 휘둘렀으며 ‘법대로 하자.’라는 말이 무엇인지 후배들에게 알려줬던 대쪽 검사다.
하지만 그 결과는 씁쓸했다.
동남 지청으로의 좌천... 이후 죽은 듯 살았었다.
그랬던 전동국 지청장이 다시 칼을 뽑고 있다.
김관용 부장 검사가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알겠습니다.”
***
“위하여!”
동남 지청의 형사 3, 4부가 함께 회식을 가졌다.
수습 딱지를 떼고 새롭게 자리한 서진과 이소희를 환영하는 한편 앞으로 시작될 특별 수사팀의 구성을 위한 자리다.
장소는 지청에서 멀지 않은 횟집.
검사는 물론 수사관과 실무관까지 약 40명이 모인 자리라 횟감은 종류별로 마련되었다.
모듬회를 시작으로 오징어, 해삼, 전복, 대게...
서진은 상당히 기대했다.
회를 접한 적이 많지 않았고 먹었어도 광어나 우럭 또는 참치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한번 종류 별로 먹어보자 결심하며 젓가락을 들었는데...
“김서진!”
김관용 부장 검사가 서진을 불렀다.
그는 앞으로 서진이 활동할 형사 4부의 부장 검사, 서진은 젓가락을 내려두고 그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형사 4부에 막내가 들어왔는데, 첫 잔은 내가 줘야지.”
김관용 부장 검사가 술병을 기울였다.
그러자 비어 있던 술잔에 술이 쪼르르 채워졌다.
“브리핑 잘하던데? 떨지도 않고.”
“감사합니다.”
“최근에 두 건이나 해냈지?”
“운이 좋았습니다.”
“그래, 운이 좋아야지. 운...”
김관용 부장 검사는 조용히 웃으며 ‘운’이라는 말을 몇 번 중얼 거리더니 서진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 눈빛이 뭔가 결심한 것 같다.
“운이 좋은 사람. 그래, 마음에 들어.”
그 말을 끝으로 김관용 부장 검사는 다 채워진 술잔을 서진을 향해 슥 밀어 넣었다.
“마셔.”
“네.”
서진이 술을 마시기 위해 술잔을 손에 쥐었을 때다.
세상이 갑자기 흑백으로 변해버렸다.
*
흑백의 세상, 서진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서진은 소파에 앉아 있고 옆에는 이소희와 잘 생긴 다른 검사.
그리고 앞으로 김관용 부장 검사가 보였다.
김관용 부장 검사가 서진의 앞으로 다가와 서류 한 장을 내려뒀다.
연쇄 살인범 이재환의 특별 수사팀 명단.
비록 말단이지만 서진의 이름은 당연히 적혀 있었다.
김관용 부장 검사가 서진의 맞은편에 앉으며 손가락으로 서진의 이름을 쿡 찍었다.
“연쇄 살인 범 이재환의 특별 수사팀에 네 이름이 올라갈 거야. 그런데, 이름만 올려두고 다른 일을 해줬으면 좋겠어. 걱정하지 마. 네 실적을 가로 채려는 것은 아니야. 네 실적은 그대로 반영될 거야.”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관용 부장 검사가 말을 이었다.
“박상영이라고 알아?”
*
그 목소리를 끝으로 세상이 다시 색을 되찾았고 서진의 손에는 쥐고 있던 술잔이 찰랑였다.
김관용 부장 검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출근하면 내 방으로 와.”
서진의 김관용 부장 검사를 바라봤다.
방금 흑백의 세상에서 김관용 부장 검사는 ‘이름만 올려두고 다른 일을 해줬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내일 아침에 찾아뵙겠습니다.”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입에 댔다.
독한 알콜이 들어가며 머릿속은 더 또렷해진다.
그리고 흑백의 세상에서 김관용 부장 검사가 내뱉은 말을 떠올렸다.
-박상영이라고 알아?
‘박상영?’
누군지 모른다.
서진은 잔을 내려둔 후 테이블 아래에서 휴대폰의 화면을 밝히고 ‘박상영’을 검색했다.
특별히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쭉쭉 내렸더니 작은 토막 기사 하나가 보인다.
-제형 건설 박상영 부장.
부장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어린 나이.
서진은 눈을 찌푸리며 그 이름을 쫓았다.
SNS를 찾을 수 있었고 김윤환과 어깨동무하고 찍은 사진을 볼 수 있었다.
서진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김윤환의 친구?’
아직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김윤환과 연결된 일이면, 그리고 그게 엿을 먹일 수 있다면 이쪽에서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계속 생각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누군가 서진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
“김서진!”
이번엔 이명수 검사였다.
서진은 회를 먹으려던 것을 그만두고 몸을 일으켰다.
옆에 앉자 이명수 검사가 슬쩍 웃으며 서진의 잔에 술을 채운 후 입을 열었다.
“아직 방도 안 봤지?”
서진은 정식으로 사무실을 배정 받았다.
하지만 하루 종일 연쇄 살인범 이재환과 씨름하다보니 사무실은커녕 함께 일할 수사관과 실무관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책상의 명패는 내가 놔주지.”
“감사합니다.”
서진과 이명수 검사는 툭 잔을 부딪쳤다.
한 잔 마신 후 이명수 검사가 말을 이었다.
“그래, 불편한 점 있으면 말하고. 그동안 가르쳐 준 게 많이 없어서 미안하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됐어. 더 붙잡고 싶은데, 널 찾는 사람 많네. 그만 가봐.”
서진이 주변을 둘러봤다.
이명수 검사의 말대로 찾는 사람이 많다.
여기저기 서진의 이름을 불러대며 손을 들고 있다.
“김서진!”
그래서 이번에도 회를 먹을 수 없었다.
*
“술 세네?”
많은 사람의 얼굴이 붉어졌고 혀가 꼬였을 때, 서진은 잠시 밖으로 나와 바다 바람을 맞고 있었다.
서진의 옆으로 이소희가 섰다.
그녀의 말에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세기는...”
“한잔 더 할 수 있겠어? 내 잔도 받아야지?”
“그래야지. 동기의 술을 거부할 수는 없지.”
서진이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틀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넌 왜 여기에 있어?”
이소희는 분명 본청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정식 명령에서 뜬금없이 동남 지청으로 발령이 났고 회식자리에 참석해서 넙죽넙죽 술을 먹고 있다.
이소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이유가 있었나 보지.”
이소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그럴 이유는 없다.
강제로 바꾼 것이고 그런 것은 빽이 없으면 힘든 일이다.
또는 누가 훼방을 놓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서진은 더 묻지 않았다.
그녀의 씁쓸한 미소, 분명 뭔가를 숨기고 있었고 굳이 끄집어 낼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서진의 시선이 바다로 옮겨졌다.
술도 마셨고 검은 바다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듣고 있자니 생각이 많아진다.
서준경의 정의롭던 삶, 서진이 되며 세상을 쥐고 싶은 욕망.
그리고 다 짓밟겠다는 각오.
그 생각에 이소희의 목소리가 조용히 겹쳐졌다.
“좋다.”
*
다시 횟집으로 들어갔을 때다.
술이 얼큰하게 들어간 검사들이 뭔가를 보며 낄낄낄 웃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진은 편히 자리를 잡고 회를 먹을 생각이었다.
긴 시간 동안 끌려 다니며 지금껏 먹은 회가 몇 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소희와 마주 앉은 후 술을 따르고 입에 댔는데...
“김서진 표정 봐! 푸하하하하!”
뭔가 불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모여 있는 검사들을 보며 물었다.
“...왜 그러시죠?”
평소 시크하던 이명수 검사가 웃다가 눈물을 닦고 있다.
“야, 서진아. 링크 보내줄 게. 봐봐. 제목이 ‘기자들에게 공격당한 김서진 검사의 썩은 미소야.’ 크하하하!”
서진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곧장 확인을 했다.
말 그대로 제목은 ‘썩은 미소.’
그런데 올린 사람의 채널 명이 ‘이정우입니다.’
로비에서 기자를 만나 구석으로 몰린 서진이 억지로 미소 짓는 장면이었다.
그 미소가 썩어보였나 보다.
댓글도 ㅋㅋㅋ로 난리다.
‘이런...’
서진이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받지 않는다.
메시지 하나가 더 도착했을 뿐이다.
-미안.
***
“20만 뷰...”
동영상을 보는 김윤환의 눈빛에 짜증이 섞였다.
서진은 짧은 시간에 스타가 되는 중이다.
관심 없던 사람도 미제 사건을 해결한 사람의 이름이 ‘김서진’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됐다.
이건 하늘이 돕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하...’
그때였다.
휴대폰의 화면이 바뀌며 ‘신종승’의 이름이 적혔다.
전화가 걸려 온 거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던 김윤환은 바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입을 열었다.
“어, 종승아. 뭐야? 연락도 안 되고. 서울에 온 거야?”
-뭐가 뭔지 모르겠어.
“어? 술 마셨어?”
신종승의 혀가 꼬여 있었다.
-어, 조금.
이어서 신종승의 입에서 앞뒤 없이 이소희에 대한 이야기가 내뱉어졌다.
-뭐지? 빽이 있나? 그런데, 이상해. 빽이 있으면 동남군에 남아서는 안 되는 거잖아? 그런데, 왜 남은 거지? 왜 그런 거지? 이유가 뭐야!
김윤환은 신종승이 서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이야? 빽이라니?”
-아무래도 우리가 모르는 빽이 있던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야.
김윤환의 눈빛이 찌푸려졌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의 서진은 김영준 검사장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김영훈 검사장의 손아귀를 벗어나고 있다.
김윤환이 마른 침을 삼켰다.
당분간 김영준 검사장에게는 비밀로 하며 몰래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다.
***
다음 날.
서진은 김관용 부장 검사실 앞에 섰다.
옷매무새를 만진 후 노크를 하자 안에서 김관용 부장 검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문고리를 돌리며 들어간 서진이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김관용 부장 검사가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아.”
서진이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사무실에는 서진과 김관용 부장 검사만 있었다.
아직 흑백의 세상에서 봤던 이소희와 다른 검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김관용 부장 검사가 커피를 앞에 두며 말을 이었다.
“두 사람 더 올 거야. 조금만 기다려.”
그때,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고 문이 살짝 열리며 이소희와 다른 검사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서진은 자세를 바로 하며 김관용 검사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이제 김윤환과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을 찍은 박상영의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