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 김서진-12화 (12/250)

<유능하다는 것. -(2)>

이명수 검사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리고 서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가라. 어렵게 검사됐으면 하고 싶은 일을 해야지.”

서진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서울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김영준 검사장이 만들어 둔 새장에 갇혀 생활할 미래.

그 안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이곳에 남아 미제 사건도 처리하고 자유롭게 힘을 키우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하나의 이유가 더 생겨났다.

‘이명수 검사...’

아침에 출근해서 ‘조금 더 가까이서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떠들었던 것이 거짓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그 열망이 조금 더 강해졌다.

이 사람과 함께 하면 뒤통수 맞을 걱정은 덜 해도 되겠다는 느낌이 온다.

서진이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장소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이곳에 있겠습니다.”

“...미련한 새끼.”

이명수 검사가 고개를 저으며 설득하는 것을 멈췄다.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뱉는다.

“오늘 강의 끝. 알아서 시간 때우다가 가라.”

몸을 틀어 밖으로 나가려던 이명수 검사의 시선에 신종승이 들어왔다.

이명수 검사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이런 새끼가 남아야 하는데.”

“......!”

그 말을 끝으로 이명수 검사는 회의실을 떠났다.

문이 쾅 닫혔고 신종승의 얼굴은 목까지 붉어졌다.

‘...남아야 하는데?’

넌 멍청하니까 이곳에 어울린다는 뜻이다.

신종승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이이익.”

이럴 때 해줄 수 있는 말은 없다.

서진은 인사도 하지 않고 회의실을 떠났고 이소희 역시 묵묵히 짐을 챙겼다.

신종승이 시선을 틀어 그녀를 향했다.

“소희야.”

“점점 뒤처지는 느낌이에요.”

“어?”

“김서진 검사에게 뒤처지는 느낌이라고요. 노력해야겠어요. 아니, 찾아서 배워야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못 따라 잡을 것 같아요. 영영.”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소희는 서진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나란히 서고 싶어 한다.

신종승은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 지켜보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젠장.’

그런데, 신종승도 느끼고 있었다.

서진은 뛰어나다.

자신보다 몇 수 위다.

가끔은 까마득한 선배처럼 여겨진다.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잖아?’

서진이 바뀐 것은 병가를 다녀 온 후다.

성격부터 실력까지 급진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처음에는 바뀐 서진이 이상했지만 지금은 저 모습이 익숙해지고 있다.

신종승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미쳐버리겠네.’

***

“네, 아버지.”

서진은 복도를 걸으며 아버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서울로 올려달라고 말해 볼까?

아버지도 서진의 인사 명령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김영준 검사장에게 들었을 거다.

-네 작은 아버지가 그 정도 힘은 있어.

“아니에요. 여기 조금 더 있고 싶어요.”

-서진아...

“제 직업의 첫 시작이잖아요. 제 힘으로 가고 싶어요.”

-네 힘으로?

“네, 작은 아버지의 힘 말고요.

아버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크게 웃는다.

-그래, 그래야 내 아들이지. 하하하!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힘들 때는 이야기해야 해. 내가 이야기는 들어줄 수 있어. 알았지?

“네, 알겠어요. 힘들 때는 기댈 게요.”

통화가 종료됐다.

서진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휴대폰을 품에 넣었다.

‘됐어.’

이제 김영준 검사장의 새장 속에서 살 일은 없다.

지금처럼 자유롭게 날갯짓을 하면 된다.

서진이 도착한 곳은 기록물 보관실이었다.

동남군에서 벌어졌던 10년 전 사건, 흑백의 세상에서 봤던 그 사건, 서진은 유아성 사건의 기록물을 꺼냈다.

학원에 갔던 초등학교 3학년 유아성 군이 2주일 후 근처 야산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사망한 유아성 군의 신체에서 성폭행과 고문 그리고 둔기에 맞은 흔적이 있었고 경찰은 주변 모든 CCTV를 살폈지만 범인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서진은 기록물을 읽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최근 10년간 살인사건은 1만64건, 검거 율은 98.2%.

정말 높은 수치다.

하지만 검사는 높은 검거율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196건의 미제에 가슴 아파해야 한다.

열 살 아이가 공포에 질려 울었을 그 끔찍한 밤.

살인을 저지른 짐승은 지금도 세상을 활보하고 있다.

그렇게 놔둘 수 없다.

놈에게도 끔찍한 지옥을 맛보여줘야 한다.

서진은 관련 기록물을 모두 꺼내 바닥에 펼쳤다.

이 사건은 곧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 전에 모든 내용을 기억하고 싶어서 단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세세하게 읽었다.

물론 읽는 중에 흑백의 세상이 나타나서 과거를 보면 좋겠다는 기대도 조금은 있었지만 세상은 그대로였다.

“...뭐해?”

은은한 향수 냄새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소희가 서 있었다.

그녀가 서진을 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유아성? 갑자기 이건 왜?”

***

“서진이는 동남군에 남나요?”

그 시각, 서울중앙지검 김영준 검사장의 앞에는 김윤환이 앉아 있었다.

김윤환의 질문에 김영준 검사장이 소파에 등을 파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상진이 깨지면서 JTJ의 자존심에도 스크래치가 났지. 그 앙갚음을 한 것 같아. 수습 검사의 발령지를 건드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

김영준 검사장은 JTJ에서 서진의 인사를 건드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른척했다.

“내가 왜 모른 척했는지 알아?”

김윤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해봤지만 딱히 답이 없었다.

“...모르겠어요.”

김영준 검사장이 픽 웃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뿌연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이제 네 큰아버지에게 전화가 올 거야. ‘서진이를 서울로 올려줘. 부탁 좀 할 게.’라고 말하겠지. 난 그 부탁을 들어줄 거야.”

“...왜요?”

“빚이니까.”

김윤환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김영준 검사장이 담뱃재를 툭툭 털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야. 난 네 밑으로 김서진을 넣을 거야.”

“제 밑이요?”

김윤환은 아직 평검사다.

누구를 밑에 두고 할 레벨이 아니다.

그런 김윤환을 보며 김영준 검사장이 말했다.

“네 부장 검사가 김서진을 데리고 와서 말할 거야. 이제 막 수습 딱지 떼고 왔으니까 윤환이 네가 좀 데리고 있으라고.”

“......”

“자연스레 네 지시를 받고 자연스레 너를 따르고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도록 길들여.”

이것이 김영준 검사장의 진짜 계획이다.

서진이 김윤환의 손바닥 위에서 놀기를 바란다.

김영준 검사장은 지금 아들의 미래를 세팅하고 있었다.

그가 담배꽁초를 꾹 비벼 끄며 말했다.

“내가 더 설명해야 하나?”

“아뇨.”

김윤환이 빙긋이 웃었다.

며칠 전, 서진의 집에서 망신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걸 톡톡히 갚아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지이이잉. 김영준 검사장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 번호는 ‘형님’이다.

그가 휴대폰을 귀에 대자 서진의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진이가 그냥 동남군에 있겠대. 힘 써줄 테니까 서울로 오라고 했는데, 벌써부터 작은 아버지 힘 빌리고 싶지 않다고 하네.

서진의 아버지 목소리에는 아들의 대견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나도 서진이가 서울에 있으면 좋지.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설득하겠어? 그래서 더 안 말렸어. 그렇잖아? 젊은 나이에 험지에서 고생하는 것은 인생의 보약이야, 보약. 하하하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김영준 검사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시선에 앞에 앉은 자신의 아들 김윤환이 담겨졌다.

‘서진이가 남겠다는 말을 했다고? 그런데, 이놈은...’

군대 가기 싫다고 징징거렸고 수습 검사로 경상도에 가는 것도 싫다고 발발 거렸었다.

그런데, 서진은 유배지에서 구상진 변호사를 부수며 또 한 차례 성장했다.

갑자기 김윤환이 얄밉게 보였다.

-뭐, 어쨌든 신경 써줘서 고맙다.

“그래, 나중에 봐.”

김영준 검사장이 굳은 표정으로 휴대폰을 내려뒀다.

앞에서 김윤환이 낄낄 거리고 있다.

“오면 고분고분해질 때 까지 사이버 모욕죄 전담으로 쓸까요? 이놈들이 닉네임부터 특이해서...”

말을 이어가던 김윤환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김영준 검사장의 눈썹이 휘어있어서다.

저것은 김영준 검사장이 상당히 기분 나쁠 때의 특징이다.

그리고 김영준 검사장의 목소리가 조용히 흘렀다.

“나가.”

“네.”

김윤환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검사장실을 떠났다.

김영준 검사장은 턱을 괴고 한참이나 생각에 빠졌다.

‘남겠다고?’

혼자 힘으로 서겠다고 선언한 것은 장한 일이며 박수 받을만 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배울 게 있을까?’

이제 수습이라는 명칭을 떼고 닥치는 대로 배워야 할 때다.

하지만 동남군에서 배울 것은 없다.

‘미친놈.’

서진은 구상진 변호사를 박살내며 언론에 이름이 실렸다.

그 바람을 타고 조금 더 중심에 들어왔어야 한다.

하지만 이제 중심에 들어올 기회는 없다.

동남군 출신의 검사를 좋아하는 윗선은 없으며 외곽이나 돌다가 적당한 시기에 옷을 벗고 변호사나 개업해야 한다.

김영준 검사장의 시선이 창밖으로 틀어졌다.

‘김서진, 네가 그곳에서 할 일은 없어. 잘 못된 선택을 한 거야. 감히, 내 뜻을 거부해? 넌 묻힐 거야. 영원히...’

***

“유아성 사건을 다시 확인할 생각이야.”

점심시간을 이용해 서진은 이소희와 함께 작은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이소희는 꽤 예쁘게 생겼다.

어깨를 살짝 덮는 까만 생머리와 투명할 정도로 느껴지는 흰 피부는 매력적이다.

옆을 스치는 남자들은 물론 여자들조차 한 번씩 뒤를 돌아 볼 정도다.

그런 이소희가 서진의 말에 가뜩이나 큰 눈을 깜빡였다.

“유아성을?”

“어.”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소희와 이렇게 단 둘이 마주 앉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어색한 것은 없었다.

그녀를 힐끔 거리며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뿐이다.

“갑자기 왜?”

10년 동안 수면 아래에 숨어 있던 사건이다.

그걸 굳이 끄집어내려는 이유가 궁금해 보였다.

“남게 됐으니까. 여기서 뭐라도 해보고 싶으니까. 그런 짐승이 돌아다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마지막으로 검사가 범죄자 얼굴 보고 싶다는데, 이유가 있나?”

“수습 마치고 헤어질 때가 되어서 이런 모습을 본 게 아쉽네. 이런 성격인 줄 알았다면 친하게 지냈을 텐데.”

“넌 본청이잖아? 가끔 보겠지.”

서진의 말에 이소희가 스트로에서 입을 떼며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서진이 손뼉을 짝 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난 먼저 일어난다.”

“어디 가려고? 들어가는 것 아니야?”

“유아성 수사했던 형사 분을 만나보려고. ”

이소희가 다급히 말했다.

“나도, 나도 같이 가도 될까?”

“어?”

“알잖아? 지청 들어가도 할 일 없는 거. 네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고도 싶고.”

이소희는 서진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보고 싶었고 배우고 싶었다.

그 열망이 눈빛에서 드러났다.

물끄러미 이소희를 보던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

“이 미인은 누구냐?”

동남군 경찰서 앞, 기다리고 있던 이정우가 호들갑을 떨며 속삭였다.

“누구냐고! 개...”

“개 뭐?”

“개 예쁘네.”

예쁘면 예쁜 거지 개는 왜 붙이는지 몰라도 이정우는 서진의 옆에 선 이소희를 힐끗 거리며 실실 웃었다.

서진이 슬쩍 웃으며 그녀를 소개했다.

“동기야. 지청에서 함께 수습 밟고 있어.”

“동기? 그럼, 검사야? 검사 중에 여배우 아우라가 있을 수 있어? 공부도 잘하면서 저렇게 예쁘면 반칙이잖아!”

서진의 귀에 대고 다급히 속삭이는 이정우를 향해 이소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동남지청 이소희 검사입니다.”

“아이고... 이정우입니다. 여기 강력반에 있고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전화주세요. 하하하!”

서진과 이소희는 이정우의 안내를 받아 경찰서 안의 휴게실로 향했다.

캔 커피를 마시고 있던 40대 중 후반의 남성이 서진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두터운 손으로 악수를 권한다.

“정민구 형사입니다.”

이 남자가 마지막까지 유아성 사건을 놓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리고 서진은 정민구 형사의 기록을 이어 받아 유아성 사건을 해결하려 한다.

“김서진입니다.”

서진이 정민구 형사가 내민 손을 예의 있게 맞잡았다.

그런데, 그 순간 서진의 시야가 회색으로 물들었다.

*

“반성하며 살고 있었어. 그런데, 왜 들쑤시고 다녀?”

주택가의 골목이었다.

가로등이 흔들리는 어두운 밤에 상대는 회칼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 앞에 정민구 형사가 보였다.

정민구 형사가 굳은 얼굴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도 않았냐? 이 뻔뻔한 새끼야!”

“뻔뻔? 난 착하게 살았어! 기도도 했다고! 신은 용서 해 준다고 했는데, 넌 왜 지랄이야!”

상대가 회칼을 쥔 채 달려들었다.

*

이번 흑백의 세상은 10초도 안 되는 짧은 영상, 그게 끝이었다.

눈앞에는 다시 멀쩡한 정민구 형사가 보였다.

서진이 그를 보며 톤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형사님, 아직도 유아성 사건을 조사하고 계셨나요?”

정민구 형사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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