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 김서진-4화 (4/250)

<환생 검사. -(2)>

*

“...부탁할 게.”

흑백의 세상에서 나타난 것은 자동차 안이었다.

앞 유리 너머로 해가 지고 있을 때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탁할 사람이 너 밖에 없어.”

남자의 헛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껄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탁은 무슨... 비즈니스지.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2억을 준다는 거지?”

“어.”

“2억은 좀 약하고. 변호사 선임 비까지 3억 가자. 그럼, 도와줄 게.”

잠시 생각하던 여성이 어렵게 대답했다.

“...그래.”

“좋아. 노가다를 해도 10만 원 정도 받는데, 3억이면 땡큐지.”

*

세상이 다시 색을 찾았다.

서진은 손에 쥔 유리 조각을 바라봤다.

흑백의 세상은 물건의 기억을 읽어낸다는 점에서 사이코메트리와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영상이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일 수도 있다는 것.

서진은 유리 조각을 바라보며 방금 봤던 영상을 되새겼다.

그것은 미래일까 과거일까.

지금 맡은 사건과 연관이 있을까 없을까.

얼굴을 봤다면 확실했겠지만 아쉽게도 영상은 창밖만 보여줬다.

하지만 미심쩍은 대화는 분명히 있었다.

‘부탁? 3억?’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단순 교통사고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다.

‘다른 것.’

서진은 다른 유리 조각을 찾아 손에 쥐어봤다.

흑백의 세상이 또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하지만 나타나지 않는다.

멀리 개 짖는 소리만 컹컹 들려왔다.

서진은 포기하지 않고 사고의 흔적을 찾아 손에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SUV가 들이 박은 전봇대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흑백의 세상이 아니라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하냐?”

중형차에서 뺀질거리게 생긴 남자와 꽤 예쁘게 생긴 여자가 보였다.

서진은 두 사람을 알고 있었다.

‘신종승, 이소희.’

함께 수습을 밟고 있는 동기다.

이소희는 얼굴과 이름 빼고 아는 게 없지만 신종승은 조금 알고 있다.

그는 김영준 검사장의 아들 김윤환과 대학 친구다.

부모 잘 만난 금수저.

김윤환처럼 재수 없는 성격이다. 라고... 동생 진영에게 들었다.

신종승이 검은 패딩에 주머니를 꽂은 채 건들건들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어디가 아팠던 거야? 윤환이도 모른다고 하던데.”

“뭐, 여기 저기.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야?”

“왜겠어? 네가 현장 나갔다고 하니까 우리도 쫓겨난 거지. 알잖아? 이 지청 사람들이 우리를 싫어하는 거. 젠장, 남의 데뷔전 현장에 우리가 왜 와야 하는 거냐?”

신종승이 담배를 입에 물며 툴툴거렸다.

그의 말대로 지청 사람들은 서진과 신종승을 싫어했다.

두 사람은 금수저였고 수습이 끝나면 곧바로 서울에 입성할 것이란 소문마저 깔린 상황이다.

이곳은 유배지.

기득권과 싸우던 검사들에게 두 사람은 눈엣가시였다.

신종승이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기록 보니까 그냥 교통사고라며? 대충 하고 가자. 혹한기 훈련도 아니고. 너 이런데 있는 거 싫어하잖아.”

“추우면 근처 커피숍에 있어. 들어갈 때 전화 줄 테니까.”

“가자.”

“확인할 게 있어.”

“그냥 가자고.”

뜬금없이 들려온 시비조 목소리에 서진은 고개를 틀어 신종승을 바라봤다.

신종승은 분기어린 표정으로 서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서진은 신종승의 고압적인 눈빛과 꽉 다문 입술에서 몇 가지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하나는 과거의 서진이 그의 말을 순순히 따랐던 것 같다.

토 달지 않고 뜻대로 움직이던 서진이 지시를 거스르고 있으니 기분이 나쁜 모양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 이놈은 이소희를 신경 쓰고 있다.

이소희 앞에서 수컷으로서의 서열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요놈 봐라...’

별 거지 같은 이유로 시비를 걸다니, 앞으로 남은 지청 생활을 자유롭게 하려면 이놈부터 손을 봐야 할 것 같다.

이런 타입은 한 번 맞춰주면 계속해서 머리채를 잡고 흔들려 한다.

과거의 서진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같이 놀아줄 마음은 없었다.

“내 사건이야. 난 여기 있어야 하고. 그쪽은 여기에 관심이 없잖아? 먼저 들어가. 내가 틀린 말 했나?”

“그, 그쪽?”

“어. 그쪽.”

신종승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이마에 손을 댔다.

“미쳐버리겠네. 너 데뷔 전 망치고 싶어? 네 상대 변호사가 우리 아버지 친구야. 몰라? 잘 봐달라고 살살 거릴 때는 언제고. 왜 이래?”

그 말에 서진은 자신도 모르게 끌끌끌 웃었다.

비웃는 것 같은 그 미소에 신종승의 입술이 뒤틀렸다.

“웃어?”

“아, 미치겠네... 서른 넘은 사람이 그것도 검사라는 사람이, 아버지도 아니고 아버지 친구를 들먹이며 협박을 해? 이 이야기를 누가 믿겠어? 보고 있는 나도 못 믿겠는데.”

“이, 이익...”

“가라. 그리고 집에 가서 아버지 친구 분께 꼭 말씀드려. 우리 회사에 서진이라는 놈이 있는데 반드시 혼내 달라고.”

“야!”

“내 데뷔 망친다며. 능력 있으면 망쳐봐. 말로 떠들지 말고.”

분위기가 서늘해질 때였다.

두 사람의 사이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어. 저 앞에 커피숍에 있을 게. 들어갈 때 전화 줘.”

지금껏 말없이 있던 이소희였다.

그녀는 더 시끄러워지는 게 싫었다.

그녀가 험악한 분위기를 틀었고 서진은 그녀를 향해 살짝 손을 들었다.

“어, 전화 줄 게.”

서진은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 후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계속해서 바닥에 떨어진 현장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이소희도 마찬가지, 차를 향해 걸어갔다.

그 자리에는 신종승만 남았다.

그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다가 서진을 한 번 째려보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는 이소희의 뒤를 쫓았다.

“소, 소희야. 같이 가.”

이소희는 어느새 자동차 앞에 서 있었다.

차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이소희가 시선을 틀어 서진을 바라봤다.

그녀는 지금껏 서진의 손을 보고 있었다.

유리를 줍고 찬바람을 쐬며 잠깐 사이에 터 버린 손.

그리고 계속해서 현장을 살피는 모습.

평소의 서진이 아니었다.

이소희의 큰 눈이 가늘어졌다.

‘왜 저렇게 열심히 하지?’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금껏 이소희가 본 서진은 부모 잘 만나 으스대는 못난 놈이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오늘만 이상한 거다.

차에 오른 이소희가 안전벨트를 매며 입을 열었다.

“그럼, 출발하죠.”

“잠깐만.”

신종승은 씩씩대면서 누군가의 연락처를 찾은 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신호음이 이어지고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자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야, 윤환아. 나야. 김서진 저 새끼 머리를 다쳤냐? 왜 저래?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

신종승의 통화 상대는 김윤환이었다.

있었던 일을 쪼르르 보고하고 있다.

어쩌고저쩌고.

김윤환과 통화를 종료한 신종승이 이소희를 보며 말했다.

“김윤환이라고 중앙지검 검사장님 아들이야. 하하.”

“네.”

이소희는 관심 없다는 표정과 함께 창밖으로 고개를 틀었다.

***

두 사람이 떠났다.

서진은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신종승과의 관계가 궁금해서 진영에게 전화를 한 거다.

그동안 서진은 과거의 서진을 건조한 감성을 지녔고 사리 분별을 하는 인물로 판단했다.

그런데, 오늘 신종승을 만나보니 뭔가 이상했다.

“...말을 잘 따랐고 잘 어울렸던 것 같아서. 말도 안 되지?”

제발 자신의 눈이 틀렸기를 바랐다.

하지만 진영은 단호했다.

-아니, 신종승하고 잘 지냈어. 김윤환이랑도 잘 지냈고.

“정말? 잘 지냈다고?”

-어.

“정말?”

-그렇다니까.

서진의 입에서 한숨이 뱉어졌다.

“내가 왜?”

-그건 나도 이상했어. 형이랑 절대 안 맞을 사람들이거든. 그런데, 또 잘 지내더라고. 가끔 망나니짓도 하면서. 어떤 망나니짓을 했는지 말해 줄까? 그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가 우리 장남도 남자가 됐다면서...

“됐다. 과거의 내가 싫다.”

수화기 너머에서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생각이 있었겠지. 형은 생각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어.

“알았어. 어서 일 해.”

-어, 나중에 통화해.

서진은 통화를 종료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방금 들은 진영의 목소리에는 신뢰가 뚝뚝 떨어졌고 언제나 서진의 편이라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젠장, 또 미안해지네.’

원해서 이 몸에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괜히 그들의 아들과 형제를 빼앗은 것 같아 미안했다.

그들에게 할 수 있는 보답은 정말 열심히 사는 것.

그 사랑을 가족에게 돌려주는 것.

그것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쓰게 웃으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을 때였다.

“뭐하세요?”

검은 봉지를 들고 지나가던 할머니가 서진을 보고 있었다.

서진이 빙긋이 웃으며 인사했다.

“경찰입니다.”

“경찰? 여기 사고 난 거 확인하러 왔어요? 에잉, 죽은 사람만 억울한 거지...”

할머니가 현장을 보며 혀를 쯧쯧 찼고 서진은 할머니가 옆에 서서 물었다.

“고인을 잘 아시나 봐요?”

“알지, 여기서 가방 메고 학교 다녔는데 당연히 잘 알지. 애가 참 예뻤어요.”

“그런데, 뭐가 억울한가요?”

“그 보험금인지 뭔지 많이 나왔나 봐요.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던 남편이 나타나서 돈 달라고 지랄하고. 갑자기 애들 키운다고 난리치고. 이게 죽은 사람만 억울한 거지. 저승에서도 가슴을 치고 있을 거야. 답답해서.”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진은 턱을 매만졌다.

흑백의 세상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2억은 좀 약하고. 변호사 선임 비까지 3억 가자. 그럼, 도와줄 게.

서진의 눈이 일그러졌다.

어쩌면 더러운 거래였을지도 모른다.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보험금을 타는 최악의 거래.

서진의 시선이 천천히 할머니를 향해 틀어졌다.

그리고 느릿하게 물었다.

“할머니, 혹시 그 자동차를 운전했던 사람하고 유가족하고 원래 아는 사이였나요?”

“아, 수경이 언니가 고놈하고 국민학교 동창이었을 거예요.”

서진은 지금까지의 내용을 빠르게 정리했다.

-수경이는 피해자의 이름이다.

-피해자의 언니와 가해자는 초등학교 동창.

-보험금을 많이 받았다. 또는 예정이다.

-그 돈 때문에 남편이 돌아왔다.

-흑백의 세상에서 3억에 대한 거래가 있었다.

-흑백의 세상에서 들었던 것은 남, 녀의 목소리다.

-보험금을 노린 청부 살해?

어지럽게 어질러졌던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서진은 할머니에게 인사를 한 후 차로 이동하며 휴대폰을 귀에 댔다.

“실무관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유가족과 가해자의 재산 사항을 조사해 주세요. 특히 피해자 친 언니의 부채 부분과 통화 내역 그리고...”

서진은 원하는 자료를 빠르게 전했다.

그의 눈이 시퍼렇게 빛난다.

단순 교통사고가 청부 살인 사건으로 바뀌는 중이다.

사건이 뒤집히면 지청도 뒤집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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