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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외전 2. 다른 세상에서 (18/18)

특별외전 2. 다른 세상에서


하루 몇 번이나 누군가와 전화하는 걸 보면 애인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 그러나 물어보면 애인이 없다고 하거나 의뭉스럽게 말을 돌리는 사람. 그런데도 이 선배 저 동기 그 후배 모두를 과하게 걱정해 주는 친절한 사람. 그래서 늘 오해를 사는데도 여전히 만인에게 친절해 바람둥이 소릴 듣는 사람.

아싸나 다름없는 내가 과내 역사탐방 동아리를 들겠다고 했을 때 유일한 동기 친구 한 명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해 준 얘기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무 활동도 안 한 1학년이 아쉬워 2학년 되고 나서도 들 수 있는 동아리를 찾아 그저 기뻤는데. 사실 정작 동아리원들은 별말 없기도 했다. 물론 내가 아싸라서 잘 모를 수도 있고. 어쨌든 그 문제의 동아리장 선배가 나를 비롯해 여러 신입부원을 뽑았다고 다 같이 인사하는 자리를 만든 상황이었다.

그 선배는 과 내에서도, 타과생이 보기에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뭐, 동기들이 얘기해 준 썩 건전하지 못한 이유로 유명한 것도 맞았지만, 그냥 기본적으로 스펙이 좋았다. 얼굴 준수, 주위에서 미팅이나 소개팅 요청 쇄도, 그 와중에 학점은 거의 만점, 조교인 다른 선배들보다도 교수님들의 뜨거운 총애를 받기까지.

“다른 동아리 많은데 역사탐방 동아리에 와 줘서 고마워요. 잘 부탁드려요. 다 후배니까 말은 놓을게요.”

그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황홀해하는 시선이 몇몇, 소문을 떠올리는 듯 의아하다는 듯 살피는 시선이 몇몇. 나는 후자였다.

“시험 있는 달 제외하고는 매주 토요일마다 동아리원 한 사람이 고른 역사적 유적지에 다 같이 가서 구경하고, 얘기 나누고, 밥 먹고 술도 먹고 할 거야.”

동아리도 시간적 여유나 정신적 열정이 남아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내가 어딘가 가자고 해 놓고 그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 안 되니까. 선배들이 먼저 정할 테고 내가 유적지를 고르는 순간이 그렇게 빨리 오지는 않겠지만, 내 차례가 되면 어찌할까 걱정스러워졌다.

“당연히 너무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모르겠으면 모르겠다고, 알려 달라고 선배들한테 말하면 돼. 동아리장 뒀다 어디에 쓸 거야.”

내가 고민된다는 걸 알아챈 눈치로 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선배는 선배인가. 어색하게 눈이 마주쳐 웃자 그가 나를 향해 누가 보아도 황홀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바로 다른 새 동아리원들을 바라보며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미 내 옆의 애는 얼굴이 빨개진 채 몸 둘 바 모르며 발끝을 이상하게 붙이고 있었다.

……저래서 바람둥이라는 얘길 듣는 건가.

[바 선배 어때? 진짜 그래 보여?]

과방에서의 짧은 인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동기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바 선배는 바람둥이 선배로, 동아리장을 말하는 거였다.

[이제 인사했는데 뭘 알겠어. 사람 좋아 보여.]

솔직한 마음을 전했지만, 그녀는 길길이 뛰는 답장을 해 줬다.

[그놈의 오지랖. 네가 왜 아싸에 모솔인지 알겠다. 사람 속을 몰라요, 얘가. 똥을 꼭 먹어 봐야 똥인지 아냐?]

냉정한 질책에 입을 삐죽였다. 모솔은 할 말 없지만, 나나 자기나 똑같이 아싸면서. 물론 나는 진짜 변명의 여지가 더 필요없는 아싸고, 그녀는 인기가 많지만 본인이 선택한 자발적 아싸였다. 나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 입장에서 보면 역시 썩 좋지 않다 이건가.

사실 그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너무 훌륭해 보여서 찍어 먹었을 때 똥이라 해도 감수할 만한 사람처럼 보였다. 심지어는 약간 동정심과 호기심도 들었다.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면 본인이 본인에 대한 소문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런 추문을 달고 다녀도 괜찮나? 본인도 속이 타지 않을까?

내가 별말을 하지 않자 다시 친구가 메시지를 보냈다.

[괜히 잘못 얽혀서 과 생활 동아리 생활 다 망치지 말고 진짜 조심해. 혹시 이상한 일 있거나 억울한 일 생기면 단과대 학생회 익명게시판에라도 찔러.]

맞아, 정말 똥이라면 그런 방법을 써도 된다. 실제로 학교 생활에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그런 기구의 힘을 빌리면, 생각보다 잘 해결되기도 한다.

동아리 활동이 하고 싶어 들어왔는데 동아리장에 대한 소문 때문에 내가 몸을 사리고 있기엔 아깝지 않나. 어차피 난 모솔이라 그냥 다 경험치 쌓는 셈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두드리는 순간, 과방 문이 열리고 그 동아리장 선배가 나왔다.

“아,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는 근사하게 미소 지으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동아리 활동은 별로 안 해도 동아리장 얼굴 보러 나오는 애들이 제법 있다던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단지 인사만 했는데도 조금 전 모호하던 느낌이 날아가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뒤로 도는데,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밥 먹었어?”

점심 먹기엔 한참 지난 시간이었고, 저녁 먹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뭘 물어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아, 아뇨.”

“밥 먹을래?”

*

“우리 학교는 근처에 밥 먹을 만한 데가 많아서 좋은 것 같아.”

그렇긴 했다. 쌀국수집부터 시작해서 덮밥집, 부대찌개집, 닭볶음탕집 등 수많은 식당과 지금 내가 와 있는 파스타집까지.

여기는 주변 식당들 중 가장 깔끔하고 분위기 좋으면서 대학가치고 가격대가 있는 곳이라, 흔히 말해 썸 타는 사람과 오기 좋다고 소문난 곳이었다.

“다들 여기 사 주면 맛있다고 하던데. 괜찮아?”

‘다들’에는 얼마나 많은 여학우들이 포함돼 있을까. 그리고 저 선배와 온다면 사실 아무 데나 가도 맛있고 괜찮다고 하지 않을까? 보통의 미묘함이 밥 먹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주위에서 얘기했던 걸 떠올리며 설렜던 스스로가 웃겨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맛있어요.”

“다행이다. 내가 보이는데 네가 밥 안 먹은 상태면, 무조건 밥 사 달라고 해.”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밥 사 줄 선배가 있는데 왜 돈을 써.”

“감사합니다…….”

왜요, 라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참아서 다행이었다.

“원래 과 활동 많이 안 하는 편이었지?”

“아, 네.”

선배로서 처음 보는 얼굴이기는 할 거다. 입학했을 때 단체 과별 율동제나 답사에 참여한 게 고작이었으니까. 

이후로는 전공 수업도 나중에 듣겠다고 많이 안 들었고 교양 수업만 들었다.

아, 혹시 왜 갑자기 과 활동을 시작했냐고 의아해서 묻는 건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기에, 급기야는 ‘넌 아싸인데 웬일로 동아리를 들었니?’ 하고 묻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애써 눈을 굴리며 말을 이었다.

“음, 제가 초반에 동기들이랑 수업이 많이 겹치지는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러다 보니…….”

“맞아, 그럴 수 있지. 나도 처음에 수업 거의 따로 들었어.”

그는 나를 정말로 이해해 주는 것처럼 진지하게 말을 잇다가 작게 웃었다.

“많이 들어서 알지? 나 우리 과에 마지막으로 합격 전화 받고 입학한 거. 그래서 미리 친해진 사람도 없었거든.”

아무렴, 당연히 알았다. 문 닫고 꼴찌로 들어왔는데 알고 보니 인기를 비롯해 모든 면에서 1등이라는 걸 본인이 증명했으니까.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지만, 그가 자조적으로 말해 준 덕인지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파스타를 돌돌 말아 먹다가 약간은 솔직한 말도 해 버렸다.

“그래도 선배는 인기 엄청 많으시잖아요. 저는 사실 지금도 여러 동기들이랑 막 친한 편은 아니기도 해요.”

“내가 뭐가 인기가 많아. 나 인기 없어.”

“에이…….”

“진짠데. 그리고 넌 항상 같이 다니는 친구 한 명 있지 않나?”

컥. 파스타를 잘못 넘기다 사레가 들렸다. 기껏해야 ‘너도 금방 다 친해질 거야’ 같은 말이나 해 줄 줄 알았는데 콕 짚어 저런 말을 하다니. 볼썽사납게 기침을 하고 가슴을 팡팡 치자 곧장 선배가 물컵을 내밀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힌 것도 생생히 느껴졌다. 아싸 인증을 너무 제대로 한 거 같아 쪽팔렸다.

“괜찮아? 미안. 내가 괜히 말 걸어서.”

“아니에요, 제가 기침이 나와서…….”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선배의 시선이 민망해 나는 큼큼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진정된 뒤 곧바로 말을 이었다.

“어, 혹시 보신 적 있는지 모르겠는데. 저랑 같은 학번인 동기 중에, 머리 이 정도까지 오고, 눈 좀 크고…….”

“아아.”

“그 친구랑 제일 친해요.”

“본 적 있는 것 같다.”

내가 대충만 묘사했는데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자발적 아싸라 이건가. 말이 애매하게 끊길 것 같아 나는 또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친구가 확실히 예뻐서 눈에 잘 띄죠?”

“하하, 그래. 예쁘더라. 근데 너도 예뻐.”

뭐라는 거야. 후배한테 이 정도 립서비스가 흔한 건가? 자주 볼 거니까? 

흔들리는 눈이 그와 마주쳤을 때,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한 말이 아니라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온 그의 말에 나는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안 믿는다는 얼굴이네. 근데 진짜 너도 예뻐.”

“…….”

“아니, 내가 보기엔 네가 더 예쁜데.”

“그, 감사합니다. 근데 그만하셔도 돼요.”

“어어, 계속 안 믿는구나.”

“……그렇죠, 뭐.”

결국 솔직하게 말하자 그가 조금 전보다 더 크게 웃었다. 그 미소는 또 필요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너랑 항상 같이 다녀서 그 친구를 기억한 거야.”

“…….”

“너 때문에 기억한 거라고. 이러면 좀 믿겨?”

그와 여기서 파스타를 먹은 수많은 여학우들도 이런 얘길 듣고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을까. 아싸에 경험도 없는 나는 하루 두근거림 허용치를 완전히 넘겨 버렸다.

예쁘다는 말 믿기냐고요. 나 때문에 기억했다는 말이 믿기냐고요. 아니요. 둘 다 안 믿겨요. 근데 그냥 너무 기분 좋고 황송한 말이라, 그냥 믿어 볼래요. 어차피 선배도 별생각 없이 하는 말일 거잖아요.

*

한 달 약간 넘는 기간 동안 역사탐방 동아리 활동은 지극히 일반적인 동아리 활동처럼 흘러갔다. 초반 답사 때는 기존 동아리원, 새로 들어온 동아리원 할 것 없이 모두 참가했고, 두 번째 답사 때는 기존 동아리원 몇몇이 빠졌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뭐 과제 때문에, 영어 자격증 때문에, 조모임 때문에…….

하여간 답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늦어서 죄송해요.”

“아냐, 뭘 늦어. 제시간에 왔잖아. 내가 너무 일찍 와 있던 거지. 너랑 둘이 본다고 긴장했나 보다.”

동아리장 선배와 나, 단둘이 프랑스 근대 회화전을 답사로 오게 되었다.

구성원 한 명씩 답사를 갈 장소나 주제를 정하는 차례가 드디어 나에게 돌아왔고, 나는 나름대로 뻔하지 않은 장소를 고른답시고 전시를 선택했다. 내심 동아리원들도 색다른 걸 하면 궁금해서라도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전시를 보러 갈 거라고 정한 뒤 단체 메신저 방에서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뭐 어디 강가랑 가까우니 다 같이 끝나고 한강 산책을 하자는 둥 좋은 의견이 많이 나왔다. 그러나 답사 날짜가 가까워 오자 하나둘씩 예의 이유를 대고 다 빠졌고, 결국 선배와 나만 남은 거였다.

말로는 다들 아쉽다, 가고 싶다, 가는 사람들만이라도 잘 놀고 와라 했다. 가는 사람들이 동아리장과 들어온 지 한 달 된 애 한 명뿐이라고는 생각 못 했겠지.

그냥 이미 다들 동아리 활동에 금세 흥미를 잃은 듯했다. 잘생기고 근사한 동아리장 선배가 있다고 무조건 다들 활동하는 건 아니구나.

‘선배, 남는 건 저밖에 없는 거 같은데, 답사 다음 주에 가도 돼요.’

별 영양가 없는 나만 남아서 나름대로 늘 고군분투하는 선배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둘이서는 뭘 하기도 애매할 것 같고, 솔직히는 너무 민망할 것 같았다. 동아리 들어온 이후로 선배는 정말 자기가 말한 대로 날 볼 때마다 밥을 사 줬는데, 그럴 때마다 자꾸 설레는 말이나 얼굴 빨개지는 말을 해서 부끄러웠다. 바람둥이에게 자꾸만 말려서 이미 수렁에 빠진 기분이었다.

‘너 진짜 귀엽다니까. 또 안 믿지.’

‘어디 갈 때 항상 말하고 다녀. 걱정되니까.’

밥 먹을 때 고작 몇 마디 하는 것도 그랬는데 단둘이 답사? 나한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너 열심히 준비한 거 뻔히 아는데 왜 미뤄. 난 과제도 없고 시험도 없어. 둘이 보면 더 좋지. 토요일에 보자.’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지금 이렇게 우리는 만났다. 아니, 사실 정말 책임감 때문일 수 있잖아? 발제를 맡은 내가 안타까워 동아리장 된 입장에서 빠질 수 없으니 그도 온 것일 터였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들어가요, 선배.”

*

“……이건 당시 시대적 분위기를 제일 잘 반영한 작품으로 꼽힌대요.”

“확실히 네가 다른 그림에서 얘기한 특징들이 여기 다 있는 거 같네. 여기 이 부분도 그렇고.”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정말 준비했던 대로 좋은 역사탐방이 될 수 있도록 충실히 설명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선배는 진지하게 내 말을 들으며 즐거워했다.

어느덧 마지막 작품까지 함께 보고 나오니, 상품 관련 물건을 파는 가게가 나왔다.

“이렇게 준비했으면서 다음 주로 미룰 생각을 한 거야?”

“하하…… 첫 발제인데 괜찮아서 다행…….”

“아, 사람 많아서 조심해야겠다.”

그는 내 양어깨를 손으로 약하게 잡은 채로 가게 안을 구경했다. 사람 많으면 따로 각각 보는 게 오히려 낫지 않을까. 이렇게 어깨에 손을 올리고, 내 뒤에 선 채로 다니면 오히려……. 

어깨와 목덜미에서 열이 나는 기분인데 싫지도 않아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여러 상품들로 눈을 돌렸다. 전시 볼 때만 해도 좋아하는 특정 작품이 들어간 굿즈를 사야지, 하고 마음먹었는데, 이런 상황이 되니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거, 좋아하는 작품 아니야?”

그런데 선배가 그걸 먼저 찾아 주었다.

“어, 맞아요. 어, 어떻게…….”

“이 작품 얘기해 줄 때 네가 제일 신나 있었던 거 같아서. 그리고 다른 것보다 오래 봤잖아.”

“…….”

“다 기억하고 있었지. 사실 나도 이 그림이 제일 좋았어.”

열기가 얼굴까지 오르는 느낌이었다. 내가 뒤돌아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애써 그 그림이 들어간 에코백이나 컵 등을 눈에 담다가 아무 말이나 시작했다.

“이, 이 그림 같은 시대에 선배는 뭘 하셨을 거 같으세요?”

문화가 꽃피던 평화로운 시대에, 기사로 보이는 남자와 귀족 영애로 보이는 여자가 정원에 앉아 차 한 잔씩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림이었다. 남자라면 그냥 귀족이거나 기사이거나 귀족 기사이거나 그 정도가 고작일 수 있는, 그러니까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선배는 제법 오래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기사면 좋을 것 같네. 딱딱 자기 일 하고, 칼 휘두르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저렇게 가끔 차도 마시고. 건강할 거 같아. 너는?”

아무 말이나 했는데 내가 그 시대에 하고 싶은 일 따위 생각했을 리가 없었다.

그냥 얼버무릴 줄 알았는데 선배는 내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겨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으음, 그냥, 뭐…… 이 귀족 영애처럼 혼자 차 마시는 거 좋아하고, 카페 같은 데 가고 그랬을 것 같아요. 놀고먹는 거 좋아하니까…….”

망한 대답이었다. 이 정도면 아무리 동아리 후배를 따뜻하게 품는 선배라 해도 멸시할 수 있는 수준 아닐까. 다정하고 설레는 말을 해 주는 건 고사하고 한심하다고 생각하지나 말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는 너무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서 크게 웃었다.

“아, 너 진짜 재미있는 거 같아. 나도 놀고먹는 거 좋아해. 누가 그걸 싫어하겠어.”

“그, 그렇죠.”

“저런 시대에 우리가 살았으면, 저 그림처럼 정원에서 같이 차 마셨을 수도 있겠다.”

그러면 나는 또 선배와 밥 먹을 때처럼 설렜으려나. 그가 하는 이런저런 말을 곱씹으며 두근댔으려나.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근데 너는 내가 같이 밥 먹고 커피 먹자고 하면 엄청 불편해하니까 저 그림처럼은 못 있으려나.”

내가 어색해하고 민망해하는 걸 다 알면서 하는 말을 듣는데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아, 그가 이 정도로 나를 이해하고 알고 있었네?’ 하는 쾌감이 더 컸다.

“너랑 얘기하려면 너 어색하지 않게 너랑 항상 같이 있는 그 동기라도 불러야겠다.”

그런데, 그 순간 무언가 서늘한 감정이 머리를 스쳤다.

혹시, 내 친구랑 잘되고 싶다고 어필하는 건데 내가 멍청해서 못 알아듣고 있는 건가? 처음 봤을 때부터 친구 얘길 하지 않았나. ‘나 때문에 내 친구를 기억했다’고 했던 그의 말은 이미 흐려진 지 오래였다. 그가 말해 주던 수많은 달콤한 말들도 그제야 제맛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괜히 바람둥이가 아닌데. 그냥 여럿한테 자기 방식대로 접근하고 얘기하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러는 것일 텐데.

그는 빠르게 뭔가를 하나 산 뒤, 멍하게 있는 내 어깨를 다시 잡은 채 가게를 나와 야외 장식물 있는 쪽으로 갔다.

“이거, 네가 아까…….”

그가 산 물건을 내게 건네며 말하려던 차 그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이거 네 거니까 보고 있어. 잠깐만.”

순식간에 빠른 걸음으로 그가 사라졌다. 나는 손에 들린 봉투를 열어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 그려진 텀블러였다. 이런 건 언제 또. 묘하게 감동적이라 텀블러를 끌어안고 싶은 마음과, 이건 또 뭔가 싶어 이걸 집어 던지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나는 홀린 듯이 그가 간 방향으로 걸어갔다.

통화를 하는 그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엄하게 무언가 얘기하는 듯했지만 기본적으로 다정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나는 조금 더 가까이 갔다.

“……얘기해야 해. 걱정되니까.”

‘……걱정되니까.’

그가 애인과 통화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저걸 보고 다들 한 말인가. 그가 나에게 했던 말이 그대로 덧씌워져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동안 나는 그가 그냥 만인에게 베푸는 친절을 과하게 해석하며 헛된 상상을 했던 거구나.

나는 터덜터덜 다시 장식물 쪽으로 갔다. 그는 한 5분 정도 더 있다가 내 쪽으로 왔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이거 확인해 봤어?”

나는 그를 바라보지 않고 땅을 보며 고개만 끄덕였다. 아, 그래도 선물까지 사 줬는데 인사는 똑바로 해야 사람 아닌가. 나 혼자 착각하고 설렌 것뿐인데.

슬그머니 머리를 드는데, 곧바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고개를 기울여 내 코앞까지 와 있었다. 그러고는 ‘잠깐만’ 하고 중얼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은 없는 거 같은데…….”

순식간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터질 것 같은 기분인데 열이 없는 것 같다니, 나로선 다행이었다. 그가 손을 내림과 동시에 나는 또 갈 곳 잃은 시선을 돌렸다.

“괜찮아? 갑자기 아까보다 좀 안 좋아 보여서. 어디 아파?”

지금껏 건네왔던 많은 말들과 다르지 않은 말투와 목소리였다. 내가 침울해졌다는 것을 바로 알아챌 만큼 다정하기도 했다. 동아리 후배로 생각하든, 그냥 한번 건드려 보는 상대로 생각하든 나는 그가 계속 다정할 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거기 기대어 입을 열었다.

“선배, 혹시…… 제 친구한테 관심 있으세요? 소개해 드려요?”

“……뭐?”

그의 표정이 아까 전화받던 순간보다도 더 굳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저한테…… 너무 잘해 주셔서요. 왜 그러시나 생각했는데, 그 이유가…….”

“네 친구한테 관심이 있어서다?”

저런 웃음도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나. 평소 보던 사람 좋은 미소와는 차원이 다른 냉랭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나도 이미 말을 꺼낸 이상 멈추고 싶진 않았다. 오히려 약간 의아함에 화도 났다. 애초에 명확하게 행동해 오지 않은 건 본인이 아닌가.

“네. 그런 것도 아니면, 누구한테나 다 이렇게 친절하세요?”

싸늘했던 그의 표정은 다시 얼빠진 모양새가 되었다. 잠시 가만히 있던 그가 고운 입술을 움직였다.

“그럴 리가.”

“…….”

“나 아무한테나 밥 안 사. 같이 밥 먹은 적 있는 건 정말 아끼는 남자 후배들뿐이야.”

생각해 보니 여후배에게 밥 사 줬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동아리에 미쳐 있다고 해도, 답사 최소 인원 충족도 안 되는데 가지는 않아.”

두 명뿐인데 강행된 답사. 진심으로 즐거워하던 그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 혹시 내가 전화하는 거 들었나.”

“…….”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여동생이 있어. 애기가 나를 아빠처럼 따라서 항상 연락해야 해.”

“……네?”

내 입에선 더없이 바보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그는 뭔가 전부 짐작된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당연히 밝아 보이는 웃음이 아니었기에, 내 입이 저절로 다시 열렸다.

“왜, 왜 얘기를 안 했어요?”

“어떤 얘기? 항상 애인처럼 전화하는 상대가 여동생이라는 얘기? 그래서 사실은 소문처럼 내가 나쁜 놈은 아니라는 얘기?”

예상은 했지만 자기에 대한 얘기, 전부 알고 있었구나.

“여동생을 잃어버릴 뻔한 적이 있어.”

놀이공원 같은 곳에 갔다가 사고가 날 뻔했다고 했다. 자꾸만 어긋나 아침에 잃어버리고 밤에 찾았다고 했다. 그 뒤부터 책임감을 뼈저리게 느끼고 여동생에 대해서 무조건 일순위로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했다.

“여동생 데리러 가거나, 다른 가족들이 늦어 여동생이랑 저녁 먹어야 할 때는 무조건 선약도 깼어. 구구절절 설명하자니 시스콤 같기도 해서 입 다물었는데.”

“…….”

“어느 순간 보니까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더라.”

“…….”

“어차피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보다가 거기 안 맞으면 실망하는 거고, 마음대로 판단하는 거니까. 뭐, 여동생이랑 통화하는 걸 듣고 멋대로 상상했을 수도 있지.”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익숙하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어차피 그런 사람들은 동아리도 다 나갔고, 마음대로 소문을 내 봤자 학교는 졸업하면 끝이잖아. 그래서 그냥 아무 얘기 안 했어.”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해도 속은 말이 아니겠지. 그의 얼굴이 너무 아파 보여 나도 모르게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너한테는 이렇게 꾸역꾸역 변명이든 진심이든 말하고 싶더라.”

*

“사랑해.”

동아리 선배가 풋풋하게 하는 얘기치고 단어가 좀 진하네…… 하고 생각이 든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혀 기분 좋게 눈이 뜨였다. 뿌연 시야로 화려한 천장이 보였다.

아, 꿈이었구나. 세상에.

이전에 살던 세상의 꿈을 꾼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내가 겪었던 일도 아니고 그냥 정말 완전 꿈 같은 꿈. 별 재미없던 대학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가 반영된 꿈인가.

그리고 분명, 나와 귀여운 로맨스를 막 시작하려던 상대는 어딘가 묘하게 에스티안과 닮았었다. 한번 깨면 꿈 내용은 금방 흐릿해져 잘 기억나진 않지만, 분명 에스티안의 느낌이었다.

“델?”

몽롱해서 느리게 눈을 깜박이자 잔키스가 얼굴에 쏟아졌다. 아, 꿈이고 뭐고 이게 지금 내 행복한 현실이지.

“더 자야 하는데 내가 깨웠나 봐. 미안해. 그대랑 엘리 자는 얼굴이 너무 똑같아서, 사랑스러워서 보다가…….”

그 이유가 더 사랑스러워 나는 큭큭 웃었다. 다시 다가오는 입술을 받아들이며 나도 물었다.

“엘리가 어젯밤에 안 자고 놀 거라고 버티는 바람에 나도 같이 깨어 있다가 잠들었던 거 같은데. 에스티안이 옮겨 줬어요?”

“응. 엘리는 아직 자기 방에서 잘 자고 있어.”

“다행이다……. 그럼 우리도 좀 더 잘까요?”

긍정하듯 에스티안이 내 눈꺼풀 위를 입술로 부드럽게 눌렀다. 제법 귀여운 꿈이었고 만약 그를 이전 세상에서 만났다면 정말 그랬을 법한 사실적인 꿈이었지만 역시 지금 있는 현실의 황홀한 행복에 비할 게 아니었다. 나를 끌어안는 단단하고 따뜻한 몸에 기대어 나는 다시 달달한 현실에 취했다.

<귀족 영애의 방구석 라이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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