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외전 1. 후일담
“비 올 때 티타임 갖는 건 사실 상상 못 했는데. 너무 좋다!”
“마음에 들어 해서 다행이야.”
완전히 허물없는 사이가 된 엘과 나는 실내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근사하게 조각된 통유리창 위로 빗물이 흘러내리고, 그 창 바깥으로 꽃이 핀 촉촉한 정원이 보였다. 실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이런 생각을 다른 사람도 아닌 언니가 했다는 게 더 신기해.”
“그 정도야?”
“옛날엔 저택 밖으로 나오는 것도 안 좋아했잖아. 정원도 방에 딸려 있는 곳만 이용하고.”
“그건 그랬네.”
“그런데 비 오는 날도 이렇게 바깥과 가깝게 나와 있다니. 비 오는 날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인 건 진짜 엄청난 발전 아냐?”
숄로 머리를 감싸 굴에 들어가는 시늉을 하는 엘이 귀여워 나는 작게 웃었다. 실제로 나는 최근 바깥으로 자주 나오고 있었다. 이런 티타임뿐 아니라 마차 타고 제법 멀리까지 나가는 빈도도 잦았다.
“저택에서 일하는 게 답답해서 그런가? 언니, 밖으로 나오지 않을 땐 보통 일만 하잖아.”
“으음, 그렇게 답답한 건 아니야.”
“그러고 보니 언니, 요새 일도 더 무리해서 하지 않았어? 살도 좀 빠진 거 같아.”
“입맛이 별로 없어서 안 먹긴 했는데. 그러고 계속 일해서 그런가?”
“……혹시 오라버니랑 잘 못 붙어 있어서 그런 거 아냐?”
“에이.”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일만 하게 되고, 겨우 쉴 때 밖으로 나가긴 하는데 밥 생각도 안 나 챙겨 먹지도 않게 되고.”
“에이. 에이…… 그런 건 아냐.”
아니라고는 했지만, 머리는 저절로 에스티안과의 마지막 나들이가 언제였는지를 계산하게 되었다. 사실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엘이 이렇게 얘기할 정도인데 부인인 내가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여전히 그는 황실기사단장이었다. 오히려 어딘가 현장에 나가는 일보다 사무 업무를 보는 일이 잦아져, 이제는 황제가 된 유리엘이 부르면 당연히 얼굴을 비치고 추가 업무를 하게 되는 거다.
거기다 가문 안의 일을 내가 어느 정도 한다고는 해도, 영지 관리 같은 일을 비롯해 에스티안이 공작으로서 직접 돌아다녀야 하는 일이 많이 있었다. 지금만 해도 그는 꽤 먼 영지에 일이 있어 내려가 있었다.
그러니까, 원래도 에스티안은 바쁜 게 당연했고, 최근 들어 더 바빠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해할 만한 일이다.
“아니긴. 언니 지금 약간 서운한 얼굴 한 거 다 보이거든?”
물론 완전히 이해하는 건 아니었지만.
“……티 나니?”
맹한 내 물음에 엘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제 신혼 시기는 다 지나갔다 이건가? 아니, 사실 신혼 시기 때도 이랬잖아?”
“으음, 그렇지.”
“지금도 남쪽 영지 내려가 있지. 사랑을 나눌 시간은 있어?”
엘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묘하게 야릇한 손짓을 했다. 원래도 많은 걸 알고 있는 애였는데. 이제는 완전히 이런 쪽에 빠삭한, 어엿한 영애가 되었음을 이렇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건 다 괜찮아. 오히려 일 많고 바빠서 오래 못 보다 만나면 좀 더…….”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엘은 다행이라는 투로 대답했다.
“그래? 난 또. 그러면 뭐 문제없지 않나? 아, 아니면 혹시 막 너무 미친듯이……?”
“뭐. 미친듯이……가 맞긴 한데.”
“설마, 서로 원하는 신호나 시점이 좀 어긋나?”
“아냐, 아냐. 그런 건 정말 아냐. 에스티안은 한결같이 잘해 줘. 내 기분 어떤지부터 살피기도 하고. 다만, 그냥…….”
“그냥?”
“……내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거야. 나야말로 둔한 구석이 있었으니 좀 예민한 때도 있는 거 아니겠어? 이참에 일도 더 하고 산책도 더 하고 뭐 그러는 거지.”
“흐응.”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상한 표정을 지어?”
“아냐. 일단은…… 그래. 이제야 속내를 좀 얘기하네. 언니도 언닌데, 오라버니도 생각보다 둔한 데가 있단 말이지.”
항상 나를 먼저 생각하는 에스티안이었기에 그가 둔하다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혹시 내가 미처 못 떠올리는 게 있나 생각하는데 엘이 말을 이었다.
“둘 사이, 밤에는 이상 없는 거랬지? 아기는…….”
그녀의 말에 나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준비도 되지 않은 내가 덜컥 엄마가 되면 어쩌나 걱정하기만 했지, 아이를 쉽게 만날 수 없다는 쪽으로는 고민도 하지 않았었다.
“둘 다 원하니까 노력하고는 있는데 생각보다 너무 어렵더라.”
“자주 못 보는 것도 한몫하고?”
역시 그게 영향이 큰가. 그래도…….
아까보다 더 큰 한숨을 흘리고 나도 모르게 단정 짓듯 말했다.
“그래, 그래서 더 침울해지나 싶어.”
“이런 얘기, 오라버니한테는 해 봤어?”
“하긴 했지. 근데 사실 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하다 지쳐서 돌아온 사람 붙잡고 계속 내 한탄을 할 수는 없잖아.”
“음…….”
“금방 또 일이 바빠서 나가야 될지도 모르는데. 짧게라도 보고 있을 땐 그냥 문제없이 있고 싶어. 내가 별말 안 하면 되는 거잖아.”
엘의 물음에 천천히 하나씩 얘기를 꺼내다 보니 내가 갖고 있던 고민이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남편과 매일같이 붙어 있는 게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너무 떨어져 있어도 좀 그렇다.
남편에게 모든 얘길 다 한다고 좋은 건 아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래 부부라는 게 그런 거고, 깊게 생각해 보면 너희만의 방법은 너희가 제일 잘 알 거라 생각한다.
어머니에게 나름대로 물어도, 겨우 친해진 다른 부인들에게 물어도 답은 그런 식이었다.
그렇다고 이전의 삶에서 이런 쪽으로 내게 조언해 주는 사람이 있던 것도 아니고, 부모님과 이런 얘기를 해 본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이런 얘기 나눌 친구가 있던 것도 아니고.
혼자 지내던 게 가장 익숙했던 나인데, 아무리 결혼하고 시간이 흘렀다 해도 모르는 게 여전히 많았다. 그나마 엘과 이런 얘기라도 자주 하게 된 게 다행이었다.
“……자, 일단.”
이후에도 한숨처럼 줄줄 나오던 내 말을 가만히 다 들은 엘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한테 언니 마음을 어느 정도 말해야 할 것 같아. 지금 이렇게 고민 많고, 여러 생각이 들고 한다는 거.”
“근데, 그건…….”
“아, 신혼 때부터 많이 안 붙어 있어서 이런 말 하는 게 어색한 거야?”
“그, 그건 아닌데. 그래도 역시 한탄…….”
“한탄, 절대 아니야. 둘이 같이 생각해야 할 문제인걸.”
“그렇지…….”
“물론 언니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참 따뜻하긴 한데, 이런 부분에선 분명 얘기해 줘야 할 거 같아.”
“……아, 진짜 내 기분이 문제인 게, 이렇게 너랑 얘기하고 나면 또 별문제 아닌 것 같다니까. 좀 멀리까지 혼자 마차 타고 나들이 갔다 오기도 하면 굳이…….”
머리를 하도 쥐어뜯어서인지 잔머리가 몇 가닥 손에서 흩어졌다. 엘은 아무렇지 않게 입으로 바람을 후 불어 그걸 날린 뒤 나를 바라보았다. 가벼운 미소를 띤 얼굴이었지만, 충고를 주는 강한 눈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오라버니, 오늘 영지에서 돌아오는 날 아냐? 오자마자 말하면 되겠다.”
“오, 오자마자?”
“당연하지. 얘기 안 하면 또 혼자 이 생각 저 생각 할 거잖아.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 같아.”
맞는 말이었다. 얘기를 하면서 나 나름대로도 결심이 섰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 하나가 있는데.”
말하는 거보다 중요한 게 또 있나?
놀라서 엘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녀답지 않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가락으로 턱을 두드렸다.
“이건 내가 함부로 얘기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어떨지 모르겠는데…….”
“뭔데 그래?”
“혹시 뭐 몸이 좀 안 좋거나, 너무 기분도 안 좋고…… 그러면, 치료사 불러서 진찰받아 봐. 뭐, 상담도 좋고. 하여간 치료사를 만나 봐.”
“진찰? 최근 막 그렇게 아픈 적은…….”
치료사를 부르면 당연히 에스티안에게도 그 얘기가 전달된다. 이전에 내가 지내던 세상에서처럼 별생각 없이 감기 걸리면 병원 가듯, 콧물이 좀 나서 치료사에게 약을 요청했을 때도 그 사항이 그에게 바로 통보되었다. 보통 그렇게 되면, ‘공작 부인께서 몸에 불편한 곳이 있어 약을 요청했다’는 식으로 무시무시하게 전달된다.
그럴 때마다 일하다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달려오는 그에게 부끄러울 정도로 미안한 느낌이 드는 거다. 물론 그는 오롯이 내 컨디션이 좋아지는 것에만 신경 쓰지만, 그래도. 심지어 이렇게 나조차 잘 모르는 기분으로 치료사를 부르면…….
곰곰이 여러 상황을 떠올리는데, 갑자기 순간적으로 욱하는 생각이 들었다.
“엘, 설마 내가 정신적으로 좀 불안하니까 치료사를 만나 보라는 거야?”
“뭐어?”
“아니, 기분 안 좋을 때 치료사를 불러서 상담을 한다는 게 그렇잖아. 그건……!”
내가 지내던 곳에서는 그런 걸 심리상담 치료라고 했으니까. 그게 나쁜 것도, 이상한 것도 절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괜한 반발심이 들었다. 이런 걸 말해 봤자 엘은 알지도 못하는데.
말을 멈추자 얼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엘이 눈에 들어왔다. 순식간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나 심심하지 말라고 달려와 조언해 주는 착한 동생한테 더 고마워하진 못할망정 이게 뭐야.
나는 스스로에게 화가 나는 마음에 머리를 휙 쓸어 넘겼다.
“미안해. 진짜 내가 몸이 안 좋긴 한가 봐. 너는 좋은 뜻에서 얘기해 주는 건데. 정말 미안해. 치료사 꼭 만나 볼게.”
엘은 나를 가만히 보다가 끌어안았다.
“몸이 안 좋을 수도 있고, 기분이 오락가락할 수도 있는 거지. 괜찮아. 그리고 정말, 안 좋게는 생각하지 말고 치료사랑 얘기해 봐.”
“응, 그럴게.”
*
“설마, 그, 치료사와 신관 측에서 다시 확인했는데 막…….”
나는 바로 앞의 호수 안에 손가락을 살짝 담갔다. 이젠 함께한 지 오래된 안나가 익숙하게 나를 나무라는 얼굴로 고개를 세게 저었다. 그녀로부터 ‘마님’ 소리를 듣게 된 후부터 나는 겨우 말을 편하게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손등 위로 물을 가볍게 튕겼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런 걱정은 절대 안 하셔도 돼요. 치료사님이 먼저 그렇게 말씀하신 이상, 신관과 확실한지 파악한다는 건 형식적인 절차니까요.”
그렇겠지. 나는 안도의 숨을 쉬고 물 안으로 손을 아예 풍덩 넣었다.
엘의 말대로 나는 바로 다음 날 치료사를 불러 나의 오락가락하고 저조한 기분이나 몸 상태 등에 대해 얘기했다. 심각한 얼굴로 내 말을 듣던 치료사는 신관도 잠시 불렀다. 둘이 따로 몇 마디 더 나눈 뒤 내게 들려준 건, 기대했지만 설마 싶어 상상하지는 못했던 얘기였다.
‘정말 경축드립니다. 아기님이 안에 계세요.’
다만 그렇게 높게 추정하고 있고, 좀 더 정확한 건 조금 더 있어야 어느 정도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거였다. 안나의 말처럼 첫 판단이 바뀌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으니 그냥 좀 더 마음을 편히 갖고 아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면 된다고 했다. 이전의 삶에서처럼 빠르게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구나. 오히려 그래서 더 두근거림이 컸다.
“요새 계속 바깥에 돌아다니고 싶고 자연 속을 거닐고 싶고, 활동적으로 변한 것 같은 것도 다 아기 덕분인 것 같지?”
“그럼요, 그럴 수 있죠.”
신난 마음에 뭐든 끼워 맞추기 마련이지만, 확실히 무언가 달랐다. 이전 삶의 모습을 떠올리는 빈도가 늘었나 싶었지만, 지금의 삶에 대만족하는 빈도는 더 늘어났다. 오늘만 해도 의욕에 불타 공작가 내부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을 모두 해결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해 안에 남아 있는 잔업무까지 전부 다 끝냈다. 그리고 일을 하느라 쌓인 피로도 풀 겸, 바깥공기도 쐴 겸 저택에서 거리가 조금 있는 호수로 나들이를 온 상태였다.
“오늘처럼 집중해서 일하시는 건 처음 본 것 같아요.”
“너무 그러지 마. 그동안 너무 논 것 같잖아.”
“에이, 그렇지도 않잖아요. 그냥 오늘 평소보다 잔뜩 힘이 들어가신 느낌이라.”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봐. 그리고 일부러 일을 몰아서 끝낸 것도 있어. 당분간은 아이에게 집중할 수 있어야 할 테니까.”
“그렇죠. 공작님이랑 같이 아이 생각만 하시면 되죠.”
“그렇지. 이제 올 테니까…….”
에스티안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저절로 하던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원래대로면 며칠 전에 저택으로 돌아왔어야 하는 에스티안은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아직 오지 못했다. 우리는 그의 종자 기사를 통해 잘 해결하고 와라, 건강하게 기다려 달라 같은 말만 주고받은 상태였다.
“근데, 생각해 보면 에스티안이 늦게 오게 된 게 다행인 것 같아.”
아이를 갖게 되면 내가 요새 그랬던 것처럼 감정이 휙휙 바뀌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했는데, 정말 그 말이 사실인지 나는 순식간에 밝은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런 경사는 미리 아는 것보다 직접 들려주는 게 좋잖아.”
에스티안에게 말을 전달할 때, 나는 임신 소식은 알리지 않았다. 이 모든 게 처음인 나로선 나름대로의 로망이 있었다. 내 입으로 직접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당신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는 것. 이런 말은 당연히 직접 보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확실히, 공작님께서 아시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궁금해요. 평소에 표현을 잘 안 하시긴 해도, 마님 일이라면 워낙 극적으로 변하시니까요.”
안나도 작게 웃었다. 약간의 걱정 때문에 미리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에스티안이라면 이럴 때 하던 일을 집어던지고 나에게 바로 미친 듯이 달려올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이런 일이라면 확실히……. 어쩌면 아이 얘기를 하면서 언니의 생각을 다 얘기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으니까.’
사실 그 와중에도 마음이 갈팡질팡해 엘에게 또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 무엇보다 기쁜 소식인 만큼 괜히 숨기다가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인 거였다.
“근데 이럴 땐 보통 뭐라고 얘기하면서 놀라게 하지? 선물이 있다? 행복이 있다? 축복이 있다?”
“다 맞는 말이네요. 공작님께선 사실 마님이 어떻게 말해도 세상에서 제일 기뻐하실 거예요.”
“그렇겠지?”
임신이 맞는지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머릿속은 이미 태어날 아이의 방을 꾸미는 거나 옷을 사는 것으로 가득했다. 이러이러한 게 필요하다고 말만 하면 거의 곧바로 주어지는 정도의 재력이 있다는 게, 내 물건을 사려고 생각할 때보다 더 기쁘게 느껴졌다. 다른 일을 마무리한 뒤 살펴봤던 것도 실은 제국 안에 있는 여러 장난감 가게를 정리한 표였다. 문득 그걸 다시 보고 싶어져 나는 드레스를 가볍게 털며 일어날 채비를 했다.
“저택으로 돌아갈까?”
“네, 저도 찬 바람 너무 쐬는 건 안 좋을 것 같아 이만 돌아가자고 할 참이었어요. 조심해서 일어나세요.”
“아, 진짜 이제는 나 혼자가 아니…….”
그런데 몸을 일으키려 할 때, 땅이 꺼지는 느낌이 들며 현기증이 났다. 오래 앉아 있다 일어나서 그런가? 급하게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마님? 왜 그러세요?! 괜찮으세요?”
안나가 급하게 다른 시녀와 기사를 부르는 소리가 웅웅 귓가에 울렸다. 어지러운 머리를 손으로 붙잡는데, 그 순간 내가 신경 써야 할 곳이 다른 데임을 깨달았다. 나는 곧장 양손으로 배를 방어하듯 감쌌다. 아직 확실한 얘기를 들은 게 아니라 해도, 거의 맞는 거나 다름없고 나 스스로도 결정을 내린 게 아닌가. 그러니까…….
생각이 끝나기 전 눈앞이 먼저 어두워졌다.
*
이전의 삶에서 아이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막연하게 아이가 있다면 내가 많이 느끼지 못한 부모님의 사랑을 한가득 받게 할 거라고 늘 생각했다. 아이도, 내가 엄마가 된 것도 모두 처음이니 시행착오도 있을 수 있고 지치는 때도 올 수 있겠지만 그조차도 벅찬 마음이 아닐까.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생명이라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고 따뜻하지 않나.
아, 그 생명이 내 안에 있는데 내가 아까…….
“마님?”
“마님, 정신이 드세요?”
앞이 뿌옇게 흐려 눈을 몇 번 깜박이는 동안 주위가 분주하게 돌아갔다.
“체온이…….”
“맥은 정상…….”
시야가 확 밝아졌다가 눈앞에 치료사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굴리자 안나의 얼굴도 얼핏 보였다.
아, 호숫가에서 얘기하다가 갑자기 어지러워서…….
기억이 없는 걸 보니 쓰러졌었나. 설마, 넘어지면서 어딘가에 부딪친 건……. 거기까지 떠올린 뒤 나는 반사적으로 힘이 잘 안 들어가는 팔을 움직여 배 쪽을 더듬거렸다.
“마님, 아기님은 아무 이상 없이 잘 계시니 걱정 마세요. 편안한 마음을 가지시는 게 좋기도 하고요.”
치료사의 따뜻한 음성으로 내가 임신이 정말 맞다는 것, 아이에게도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긴장이 풀렸다. 조심스럽게 상체를 세우자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 머리가 좀…….”
숨을 몰아쉬어서인지 어지러워 손으로 눈가를 가리자, 안나가 바로 내게 붙어 몸을 편히 침대 등받이에 기대게 했다.
“아기님이 생긴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혈압이 낮아져 이렇게 정신을 잃을 수가 있어요. 빈혈도 있으시고.”
“마님께서 갑자기 일을 좀 많이 하셨는데, 그것도 영향이 있나요?”
“그럴 수도 있지요. 기본적으로 많이 피곤할 수도 있고 잠이 올 수도 있는데, 그럴 땐 쉬셔야 합니다. 쉬라는 신호니까요.”
안나와 치료사가 심각하게 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진짜, 엄마의 범주에 내가 들어왔구나. 미련한 엄마라 오늘 고생했겠다는 생각에 손이 다시 저절로 배 위로 향했다. 납작한 배지만 가만가만 문지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는데, 안나와 치료사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불현듯 묘한 느낌이 들어 입을 열었다.
“아직 에스티안은 이 사실을 모르는 게 맞죠?”
“……지금은 아세요. 방 바깥에서 마님이 깨시기를 기다리고 계셨어요.”
그를 놀라게 해 주려던 계획이 너무 커지다 못해 틀어졌구나.
내가 할 말을 애써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동안 금세 안나와 치료사가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에스티안.”
여태까지 본 모습 중 가장 안 좋은 상태의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살이 조금 빠졌고, 숨이 막혔다가 이제 호흡하는 사람처럼 얼굴이 질려 있었다. 그는 방으로 뛰어 들어오다시피 했지만 침대 옆에 앉지도 않고 그저 서 있었다.
“옆으로 안 올 거예요? 선물, 행복, 축복……이 있는데.”
내가 몸을 더 일으키려고 하자 그가 곧바로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붙잡았다. 나는 그를 끌어안았다. 익숙한 향기와 약간의 바깥바람 냄새 같은 게 났다. 나는 그의 손을 내 배로 가져다 댔다.
“뭔가 느껴지죠?”
“…….”
“안 느껴져요?”
“……느껴져.”
“아, 정말요? 난 아직 못 느끼겠던데.”
에스티안은 몸을 힘없이 떼고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많이 놀랐죠. 이런 거로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닌데. 원래는 우리 아이가 생겼대요, 하고 놀라게 하려고 했는데 말이에요.”
“…….”
“아직 아이랑 같이 있는 게 실감도 안 나고 잘 느끼지도 못하는 초보 엄마라서, 몸이 안 좋은지 몰랐나 봐요.”
“미안해.”
이번에는 그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내가 옆에 있지 못해서 그런 거야. 미안해.”
그는 양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쥐고 눈을 마주한 채 말을 이었다.
“외부 업무를 다 처리하고 왔어. 그러느라고 늦었어.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해서,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어. 미안해. 그래도 이젠 정말 저택을 떠날 일 없을 거야.”
“아, 그래서…….”
사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다짐했던 대로 그에게 그간 서운한 점이 있었다는 것부터 말하려 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가 저택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이유가 나와 더 오래 있기 위해서였다니. 나를 위해서였다니.
내가 애틋함과 먹먹해져 오는 마음에 말을 꺼내지 못하는 동안 그는 그동안 자기가 어떤 일을 했는지 얘기했다. 평소와 다르게 자신이 말을 쏟아 내듯 얘기한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쪽 문제도 다 해결했고, 영지 쪽은 다른 기사가 관리할 거야. 남은 일이라곤 기껏해야 황실에서 명이 오는 정도인데, 그것도 내가 굳이 가지 않아도 돼.”
“에스티안, 천천히 얘기해도 돼요.”
“내가 그대와 오랫동안 함께하지 못해서, 그래서 그대가 아픈데도…….”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이미 치료사나 신관에게 들었잖아요. 절대 아니에요.”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 난 방문 뒤에서 그대만 괜찮으면 다 괜찮다고도 생각했어. 그리고 앞으로는 정말 내가 계속 옆에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나도 아이도 아무 이상 없으니 얼마나 기뻐요. 그렇죠?”
말을 다 끝마치지 못한 그는 거친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나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그냥 서로를 너무 사랑해 하루빨리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의 숨결이나 행동에서 같은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져 나도 떨리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가지면 초반엔 이런 일도 원래 종종 있대요.”
“…….”
“으음, 사실 최근에 기분도 좀 이상해서, 내게 좀 더 시간을 쏟아 달라고 에스티안에게 얘기하려고도 생각했거든요.”
“……정말 미안해. 그런 얘기조차 할 시간도 못 낸 내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어.”
“그렇게 일 다 해치우느라 바빴잖아요. 그렇게 말하지 마요.”
“……그래도.”
“그리고 그런 게 다 아이를 갖게 되면 생기는 감정 변화래요.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다 신기했어요.”
그는 내 손을 잡고 입술을 가볍게 묻었다. 그 온기를 느끼며 말을 이었다.
“사실, 나도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고 나서, 에스티안과 아이와 계속 붙어 있고 싶으니까, 저택 내 업무를 좀 몰아서 다 처리하고 왔거든요. 무리를 한 거죠, 뭐.”
“……델.”
질책하는 듯한 그의 푸른 눈을 피해 나는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다시 말했다.
“나는 우리가 되게 닮았구나 새삼 깨달아서 그냥 좋은데요. 서로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
“아, 아이가 우리를 닮게 한 건가? 당분간은 서로한테, 아이한테 더 시간을 쏟을 수 있게 됐으니 또 이것만큼 좋은 게 없네요. 얘기도 더 많이 할 수 있을 거고요.”
“당분간이 아니야. 나는 이제 계속…….”
그는 천천히 내게 입을 맞췄다. 마치 처음 둘이 키스했을 때처럼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사랑해. 고마워. 아이를 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 그래서 더…….”
가볍게 입술을 맞댄 뒤 그는 무의식중에 배 쪽에 올라가 있던 내 손을 자신의 손으로 덮었다.
“그대가 편하게 있을 수 있게 옆에 붙어 있을 거야. 그대가 좋아하는 대로 정원에서 쉴 수 있게.”
“근데 너무 신기하죠. 아이랑 함께여서 그런지 나 요새 되게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게 좋거든요. 이렇게 갑자기 다른 취미가 생길 수도 있대요.”
“이젠 모든 걸 셋이 같이 하자. 그대를 닮은 아이가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걸 상상하면 마음이 들뜨다 못해 너무 벅차.”
“나도 딱 그래요. 너무 벅차요.”
조금 전보다 진정한 그를 보자 장난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런데 지금이야 내가 엄마 된 지 얼마 안 돼서 버벅대지만, 익숙해지고 나면…… 에스티안을 닮은 아이가 나를 엄마라고 부르고, 넷이나 다섯이 다 같이 놀 수도…….”
슬그머니 꺼낸 말은 부딪쳐 오는 그의 입술에 막혔다. 더없이 행복한 현실과 따뜻한 상상이 우리를 에워쌌다.